‘효’는 유교 사상의 대표적인 덕목으로, 부모님의 사랑을 받은 것을 자녀들이 효로써 보답한다는 부자자효(父慈子孝)라고 할 수 있다. 부모와 자녀는 사랑과 효로 이루어진 쌍방향적 관계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런데 요새는 많은 사람이 효가 ‘사라졌다’라고 이야기한다. 실제로도 전통사회에서 현대사회로 넘어오면서 공동체보다는 개인을 우선시하는 시대가 왔기 때문에 자신을 희생하여 부모를 봉양하는 과거의 효행이 사라졌다고 느낄 수 있다. 사회가 변하고 생활방식이 변화해온 만큼 효를 실천하는 방식도 조금씩 변화했기 때문이다.
과거로부터 이어진 ‘효자계’가 효자마을 함적리에서 지속되고 있다는 것을 아는가? 조선 초기 명망이 높았던 선비 ‘강응정’과 그의 효행 이야기를 따라 걸으며 시대를 관통하는 효의 가치를 찾아보고자 한다.
황산유람길 제3구간 ‘을문이효길’은 약 11km, 소요시간 3시간 정도의 코스로 ‘양촌장터-강응정선생묘-효자마을 함적리-효암서원-병암유원지’ 구간이다.
효자고기 을문이 전설의 시작 ‘양촌장터’
‘을문이효길’은 양촌장터로부터 시작한다. 2024년 방영된 <정숙한 세일즈>의 촬영지가 바로 이곳 양촌장터이다. 1992년 시골마을에서 방문판매를 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는 드라마이다. 드라마 속 사람들이 누볐던 장터가 아주 오래전 효자 강응정이 어머니께 드리기 위한 고깃국을 구하기 위해 다녔던 곳이다.
강응정은 본관이 진주(晉州), 자는 공직(公直)이며 호는 중화재(中和齎)로, 첨지중추부사에 오른 강의의 아들이다. 선조가 대대로 벼슬길에 올라 이름을 알렸고, 강응정도 경서를 잘 외우고 의술과 점술, 지리를 두루 섭렵한 인재였다. 비록 집안은 가난했지만, 부모님을 지극정성으로 보양하여 1470년(성종 1)에 효행으로 천거되었다는 기록이 『중화재실기』에 남아있다. 또한 그의 효행에 대해서는 여러 일화가 전해지는데, 그중 대표적인 것이 효자고기 ‘을문이’에 관한 것이다.
유난히 추웠던 어느 겨울 어머니께서 고깃국이 드시고 싶다고 했다. 강응정은 매서운 겨울바람을 뚫고 20리 길을 걸어 바로 이곳 양촌장을 찾았다. 양촌장에서 산 고깃국이 식지 않게 품에 꼭 감싸 안고 집으로 돌아가다 그만 냇물의 징검다리에서 미끄러져 고깃국을 엎고 말았다. 추운 날씨 탓에 징검다리가 얼어 있었던 것이다. 강응정은 어머니께 드릴 고깃국을 모두 쏟아버리고 어찌할 바를 몰라 걱정만 하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그의 앞에 작은 물고기들이 떼를 지어 모여들었고, 강응정은 엎어 버린 고깃국 대신 그 물고기를 잡아 어머니께 드렸다.
위의 이야기에 나오는 물고기가 바로 ‘을문이’인데, 강응정의 일화로 인해 효자고기로 불리고 있다.
후대로 이어진 효의 기록 ‘효자산천’
효자마을 함적리는 조선시대부터 500여 년간 이어진 효자마을이다. 유서 깊은 효의 고장답게 지금도 이곳 마을 어르신들은 ‘효자계’의 정신을 살려 마을 출신 젊은이들의 효행을 포상하고 있다.
원래 함적리는 충청남도 은진군 갈마면에 속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가야곡면에 편입되었다. 즉 강응정이 태어나고 살았던 은진마을이 바로 지금의 함적리인 것이다. 강응정의 효행을 장려하여 임금이 갈마산과 인천 일대의 땅을 하사했는데, 그곳에 효암서원을 비롯한 효행 유적과 강응정의 묘소가 남아 전해지고 있다.
강응정의 효행은 마을 안의 이야기로만 전해지는 것이 아니다. 『조선왕조실록』에도 강응정에 대한 언급이 10번이나 기록되어 있다. 이는 그가 조선 초기 명망이 높았던 선비라는 것을 추측할 수 있게 한다. 또, 강응정의 후손이 마을에 남아 그 터를 지켜오고 있어 후세 사람들은 이곳을 ‘효자산천’이라고 불렀다.
효자를 중심으로 모신 ‘효암서원’과 강응정 정려
‘효암서원’은 조선전기 논산시 가야곡면 두월리에 ‘갈산사’라는 이름으로 세워졌으나 임진왜란 당시 모두 불에 타 없어졌다. 이후 17세기 후반 우암 송시열은 “중화재 강응정은 대현이므로 잊혀져서는 안된다. 중건하여 영령을 편안히 모시는 것이 마땅하다”라며 중건을 앞장서 주장하였으나 당시에는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송시열이 세상을 떠난 후 1713년(숙종 39) 이 지역의 유림들이 그 뜻을 이어받아 지금의 위치인 가야곡면 산노리에 효암서원을 다시 세웠다.
효암서원에는 효자인 강응정을 중심으로 서익, 양응춘, 김문기, 김성휘, 김필태, 남준의 위패를 순차적으로 모셨다. 이후 1867년(고종 4)에는 서익의 위패를 행림서원으로 옮겨 모셨다. 1867년 흥선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에 의해 훼철되었다가 1925년 복원되었다.
강응정의 또 다른 효행 이야기로는 호랑이와 시묘살이 이야기가 있다.
모친이 병으로 눕게 되자 3년 동안 정성껏 간호하였고, 모친이 돌아가신 후에도 5년이나 시묘살이를 하였다. 시묘살이를 하는 동안 호랑이 한 마리가 매일 찾아와 그의 움막 옆에 머물며 그를 보호해 줬다.
호랑이도 감동하게 한 강응정의 효성은 조정에까지 전해졌다. 나라에서는 강응정의 효행을 기리는 정려를 지어주고, 현판을 내려주었다. 효암서원 입구 오른쪽에는 강응정 정려가 있는데, ‘효자성균생원강응정지려(孝子成均生員姜應貞之閭)’라고 적혀 있다. 현재의 정려는 임진왜란 당시 서원과 함께 불에 타 없어졌고 지금 남아있는 정려는 1744년 다시 만든 것이다.
강응정 18세손, 강원희 선생과 짬짬 인터뷰
효암서원에서 ‘알묘(謁廟)’를 진행하기에 앞서, 본향을 지키고 있는 효자 강응정 선생의 18세손 강원희 선생을 만났다. 강 선생은 우리 일상에서 실천해야 할 가장 큰 덕목이자 인본(人本)의 근간으로 ‘효’를 꼽으며, “효는 만 가지 덕의 근원이며, 모든 행실의 시작점”이라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효경』에서 공자는 효의 출발을 ‘신체발부 수지부모(身體髮膚 受之父母)’라 했다”며, “효란 곧 부모로부터 받은 몸과 마음을 소중히 여기고, 부모를 공경하는 데서 시작해, 나라에 대한 충성과 후세에 이름을 남겨 어버이를 드러나게 함이 효의 끝"이라고 설명했다.
“효(孝)는 자연스럽게 충(忠)으로 이어지고, 결국 입신양명(立身揚名)으로 완성되는 것”이라며, “이 모든 과정을 통틀어 ‘군자의 길’이다"라고 정의했다.
강원희 선생은 오늘날 글로벌화와 서구 문화의 급속한 유입으로 점점 퇴색해가는 ‘효’ 사상의 가치를 다시금 되새기게 하는 ‘을문이효길 걷기 행사’의 의미를 높이 평가했다.
인터뷰 말미에는 효암서원 사당의 보수가 시급하다는 점도 강조했다. “사당이 세워진 지 오래되어 기둥이 내려앉고, 내부 바닥은 심각하게 손상된 상태”라며, “조속한 복원이 필요하다”고 호소했다.
을문이효길의 종착지 ‘병암유원지’
병암유원지는 논산천이 탑정호로 유입되는 지역에 자리 잡고 있는데, 을문이 이야기 광장, 수변쉼터, 수변유원지, 연꽃 자생지로 조성되어 있다. 병암유원지에는 강응정의 이야기가 집약되어 있다. ‘을문이효길’을 걸으며 하나씩 하나씩 모았던 이야기 조각이 모두 맞춰져 거대한 그림책으로 펼쳐진다.
아픈 어머니를 위해 고깃국을 사러 양촌장으로 향하는 모습부터 겨울날 얼어붙은 징검다리에서 미끄러지는 모습, 국을 쏟고 우는 강응정을 위해 모여드는 물고기 떼, 그리고 강응정이 잡아온 을문이로 만든 고깃국을 맛있게 드시는 모습까지 머릿속으로 상상했던 모습들이 실제 그림으로 펼쳐져 있어 깊은 울림을 전달하고 있다.
병암유원지에는 바로 그 효자고기 을문이가 살고 있다. 올챙이처럼 작은 물고기가 빠르게 헤엄쳐 다니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이 고기가 바로 을문이다.
『중화재실기』에 인천수에는 은문어(銀文魚)가 있는데, 세상에서 이 물고기는 선생이 부모님을 봉양할 수 있게 하려고 생겨난 것이라고 한다. 크기는 올챙이처럼 작고 비단 무늬에 은빛을 띠었으며, 돌 사이를 다니면서 무리를 짓는다. 지금 사람은 통발을 이용해 남김없이 이를 잡는데, 내장을 끓여 먹으면 대단히 맛이 좋다. 이 물고기가 사는 곳은 오직 이 물의 위아래 6-7리 뿐이다.
현재도 효자마을 함적리의 주민들은 집집마다 다른 레시피를 가지고, 고추장・된장・배추 등을 넣어 끓여 먹는데 매운탕에서 강응정의 어머니가 드시고 싶어했던 고깃국 맛이 난다고 한다.
초여름의 입구에서 효와 선비정신을 되새긴 ‘을문이효길 걷기대회’
한국유교문화진흥원(원장 정재근, 이하 한유진)에서는 선비정신 함양을 위해 기획하고 개발한 황산유람길 중 제3구간인‘을문이효길’ 걷기대회를 6월 9일 100여 명의 참여자와 함께 성황리에 개최하였다.
‘을문이효길’ 걷기대회는 오전 9시에 한유진 제2주차장에 집결하고, 버스로 양촌장터로 이동하면서 시작되었다. 양촌장터에서는 황산유람길 기획 의도와 코스 해설을 진행하였고, 중간 휴식 지점에서 논산천과 효자고기 을문이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다음으로 방문한 ‘강응정선생묘와 효자마을 함적리’에서는 중화재 강응정 선생에 대한 역사적 사실과 효행이야기를 들으며 효에 대한 의미를 되새기는 시간을 가지고 참가자들 간 교류의 시간을 가졌다.
걷기대회 코스 중 효자를 중심으로 모셔진 서원인 효암서원에서 이영서 효암서원장과 강응정 선생의 후손인 강원희, 헌관으로 한유진 선비교사인 김춘성 건양대학교 교수 및 걷기대회 참여자들이 함께 알묘를 진행하였다. 알묘를 마친 후 마지막 구간인 병암유원지까지 걷고, 참여자들 대상 경품 추첨으로 행사를 마무리하였다.
양촌장터부터 시작하여 병암유원지까지 이어지는 ‘을문이효길’은 강응정의 효행을 따라 걷는 길로, 그의 발자취와 논산천을 헤엄치는 효자고기 을문이는 효의 의미와 가치를 다시금 느끼게 해주었다.
수백 년간 이 길에 남겨진 이야기는 시대를 관통하여 ‘효’라는 가치로 연결되며 현재에 숨 쉬고 있다. 효는 과거부터 현재까지 모든 사람이 가지고 있는 정신적인 가치라고 할 수 있다.
시대에 따라 변하는 효행이 아닌 정신적 가치로서 효심(孝心)을 본받자는 것이다. 효심은 어느 시대나 하나이지만 드러난 효행은 시대마다 다르다. 각자의 효심을 가지고 본인만의 효행을 하는 것, 그것이 바로 오늘날의 효라고 할 수 있다.
앞으로 황산유람길 걷기 프로그램을 한유진의 특별 프로그램으로 운영하여 우리 유교문화의 가치를 확산하고 대중과 향유 할 수 있도록 노력해 나가고자 한다.
한편 한유진에서는 오는 9월에 진행되는 ‘한국유교문화축전’의 행사 중 일부로 ‘황산유람길’의 3・4・5구간을 좋은 사회를 만들어 가는 데 동참하고 있는 선비회원과 일반 참가자를 대상으로 걷기 행사를 진행할 예정이다.
선비회원 양성의 활성화와 ‘수기치인’의 삶 등 선비정신을 전 국민에게 홍보하고 공감대를 형성하며 유교문화의 의미를 되새겨 보고자 하는 취지다.
- 전영주 편집장, 이병주 한유진 연구교육부 책임연구원
이 기획기사는 2025년도 충청남도 지역미디어지원사업으로 시행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