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불어민주당 논산 지역위원회가 분열되며 4년 전 논산시의회 의장 선거가 데자뷔되는 하루였다. 민심과 당심의 괴리를 전혀 느끼지 못하고, 당내 레드팀이나 비주류의 의견이 간과되더니 마침내 의장 선거에서 마그마가 분출됐다.
더불어민주당 조용훈 의원이 같은 당 조배식 의원을 1표차로 따돌리고 민선8기 후반기 논산시의장에 당선됐다. 그때 그 1표가 부메랑이 되어 다시 돌아와 본인의 발등을 찍는 데 꼭 4년이 걸렸다.
이번 분열을 자초한 ‘위기의 본질은 위선’이다.
의회민주주의가 기능부전 상태로 대의 기능을 잃어버리면서 보수와 진보, 여와 야가 아닌 기득권과 비기득권의 논쟁이 오랫동안 고착화되면서 정치 바깥에서 정치를 찾는 엔드게임의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정치인에게 도덕성은 필요조건, 충분조건을 넘어 ‘필요충분조건’이다. 아무리 작금의 정치지형이 ‘CEO형 정치가를 선호한다’할 지라도 능력과 도덕이 별개가 되어서는 안된다.
도덕적이지 못한 정치인의 권력 행위를 누가 납득하겠는가? 오히려 정치를 거부하고 사회 분열이 야기될 가능성이 높다. 즉, 도덕 흠결의 정치인으로부터는 확실한 능력의 보장도 어떠한 능력의 발휘도 기대하기 어렵다. 따라서 이번 사태의 본질은 위선이다.
그릇이 사람의 됨됨이나 능력, 인품 등을 은유한다면 의자는 사람의 신분과 지위를 상징한다. 그 이유는 의자가 권력을 상징하는 도구로 출발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고대 이집트의 파라오는 다른 이들이 모두 서 있거나 엎드려 있을 때 의자에 앉았다. 의자에 앉아 있는다는 것 자체가 최고의 권력을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는 말이 있듯이, 권좌의 상징이 된 의자는 똑같은 의원 신분의 의자임에도 의장과 일반 의원과의 의자는 너무나도 확연한 차이가 있다. 그래서 서로가 의장의 권좌에 앉으려고 애를 쓰지만, 이 역시 한시적인 기간제에 불과한 것을 영원할 것 같은 권좌로 착각한다.
디지털 시대의 정치는 산업사회의 유산인 보수‧진보, 좌파‧우파라는 용어를 ‘낡아서 쓸모없는 것’으로 만들고 있다. 특히 코로나19 팬데믹 이후 세상은 변했고, 당연히 유권자도 변했다. 그러니 혁신을 통해 변화에 적응하지 못하면 지배력을 잃는 건 한 순간이다.
정치 집단이 세상을 어떻게 보느냐보다 세상이 정치 집단을 어떻게 보느냐가 더 중요한 시대다. 정치적으로 세상을 지배하려면 두 가지 방법이 있다. 생각대로 현실을 바꿀 힘을 갖거나, 현실에 맞춰 생각을 바꾸는 적응력이 있어야 한다.
초선의 황명선 국회의원이 첫 번째 난관을 맞이했다. 지난 국회의원 선거의 승리가 축복이 아니라 재앙으로 다가서고 있다. 오만해진 권력이 과거와 분열의 길로 들어서면서 가장 열심히 뛰었던 세 명의 장수를 한꺼번에 잃었다. 물이 넘치는 건 마지막 한 방울이고, 바위가 굴러내리는 건 떠받치는 작은 돌맹이 하나가 빠질 때다.
앞으로 황명선 지역위원장의 가장 중요한 과제는 당심과 민심의 괴리를 어떻게 통합시켜 가느냐일 것이다.
정치는 ‘유토피아’가 아니다.
2,500여년 전 노자는 도덕경에서 평화롭고 풍요로운 세상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지만 마지막 남은 것은 회한뿐이라고 설파했다. 또한, 맹자는 중년 시절 “천하를 태평하게 다스리고자 한다면 나 말고 그 누구이겠는가”라며 호기를 부렸지만, 마지막 한 말은 “평생 헛살았고 아무 공헌도 못했다”며, “무유호이(無有乎爾), 무유호이(無有乎爾)” 두 번의 탄식으로 끝을 맺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