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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술과 인연이 깊은 논산 연무(鍊武), 마한에서부터 육군훈련소까지
기사입력  2024/06/11 [18:19]   놀뫼신문

충청남도 지역미디어 육성 지원사업-스포츠 태권도의 발원지를 찾아서(2)

 

무술과 인연이 깊은 논산 연무(鍊武), 마한에서부터 육군훈련소까지

 

 

논산은 사람의 몸으로 치면 단전(배꼽)의 위치에 있다. 이는 한반도의 중앙을 의미하는 것으로 과거부터 군사적 요충지로 역사적으로 의미있는 전투가 많이 치러졌다.

현재는 대한민국 육군의 양병과 용병의 요람으로 육군훈련소, 국방대학교, 육군항공학교가 있으며 인근 계룡시에는 3군본부가 위치해 있다. 또한 논산 연무에는 국방국가산업단지가 조성되고 있어 2029년 산업단지가 완성되면 방위산업의 메카로 자리매김할 것이다.

기원전 부여족에 의해 건립된 백제는 678년 동안 경기‧충청‧전라도 일대를 다스리다 660년 계백장군이 황산벌 전투에서 패하면서 멸망했다.

그 후 견훤은 후백제를 건립하고 백제의 부흥을 도모하였으나, 아들 신겸에게 쫓겨나 왕건에게 투항한 후, 지금의 연산 천호산 일대에서 아들 신겸과 숙명의 일전을 벌였다. 본인이 건립했던 후백제를 본인의 손으로 멸망시킨 견훤은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그의 유언에 따라 연무 금곡리에 안장되었다. 

6.25전쟁 당시, 연무에 육군훈련소가 창설되었다. 또한 연무 안심리에는 북한군 포로수용소가 있어 약 1만여 명의 포로가 수용돼 있었다. 당시 유엔군과 북한군의 휴전 협정에 반발한 이승만 대통령은 방첩대를 시켜 반공포로를 탈출시키는 작전을 실행해 연무 포로수용소에서 약 8천여 명의 반공포로가 도망쳐서 민가에 숨어 지내다가 많은 이들이 논산에 머물며 거주를 하게 되었다.

이와 같이 “스포츠태권도가 우연하게 연무에서 탄생된 것이 아니다”라는 역사적 줄거리를 맞이하게 된다. 이에 본지는 기원전 마한에서부터 육군훈련소까지 역사적 실체를 찾아보며 스포츠태권도의 발원지를 조명해 본다.

 

▲ 육군훈련소 정문_연무대     ©

 

■ ‘작지마을’의 현주소인 연무 안심리의 역사

 

1530년 편찬된 「신증동국여지승람」 전라도편 34권을 보면 “충청도와 전라도 백성들이 매년 백중날 양도의 경계인 ‘작지마을’에 모여 ‘수박희’로 승부를 겨렸다.”고 소개한다.

여기서 이야기하는 ‘작지마을’은 한때는 백제였고, 또 한때는 신라였었다. 백제 때에는 여산군으로 불렸고, 신라 때는 덕은군이라 불렀다. 이는 고려시대 중엽까지 그렇게 불리다가 고려 말 행정 개편에 따라 시율현, 피제현으로 나뉘기도 하였다. 조선시대에 이르러 은진현에 속하게 되었다.

그러다 일제강점기인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구상리, 삼거리, 신리, 죽산리, 사천리, 신기리, 신화리의 각 일부를 병합하여 안심리라 하고 전라북도 익산군 황화면에 편입되었다. 그 후 1963년 1월 1일 이 지역이 연무읍으로 승격됨에 따라 논산군 연무읍에 편입되었다. 

이렇듯 연무는 무수히 경계가 바뀌고 합쳐지며 그때마다 이름 또한 변했다. 하지만 변하지 않는 것이 있었으니 바로 ‘무예’의 정신이다. 각기 다른 세력과 정권의 접경지역이며 격전지였던 만큼 ‘스스로 자신과 가족과 마을을 지켜야 한다’는 정신과 함께 이는 곧 무예를 익히고 계승하는 것으로 발전했다.

그래서 ‘무예를 갈고 닦는다’는 뜻의 ‘연무(鍊武)’란 지명이 그간의 역사적 실체를 잘 나타내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다.

 

[‘작지마을’ 지명의 유래]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나오는 ‘작지마을(작지골)’은 현재 연무읍 안심리의 일명 ‘까치마을’이다. 원래 작지마을은 까치마루에 위치한 마을로 후백제 때 생긴 지명이다.

후백제의 견훤이 마지막 전투에 임하며 지금의 까치마루에 진을 쳤는데, 까치가 견훤의 깃발에 내려앉자 깃발이 넘어지며 부러졌다. 이에 견훤은 불길함을 예감하고 “내가 죽으면 금산사 모악산이 보이는 곳에서 장사지내라”고 하였다.

그의 말대로 장사를 지냈고, 견훤묘 역시 모악산을 바라보고 있다. 지금의 견훤묘가 있는 풍계촌은 ‘작지마을’에서 약 4리 떨어진 거리에 위치한다.

이와 같이 ‘작지마을’이라는 지명이 후백제의 견훤과 관련하여 생긴 오래된 지명임을 알 수 있다.

 

▲ 1950년대 육군훈련소 모습     ©

 

▲ 1951년 창설 당시 막사     ©

 

▲ 육군 제2훈련소 정문     ©

 

■ 국방의 요람, 육군훈련소 연무대  

 

1951년 11월 1일을 기해 충남 논산군 구자곡면 일대의 부지에 육군 제2훈련소를 창설하라는 명령이 하달되었고 부대의 이름은 연무대(練武臺)로 정해졌다. 이와 동시에 21교육연대와 교관단이 창설되었으며, 11월 5일에는 김종갑 준장이 초대 소장으로 취임했다. 곧이어 22교육연대와 23교육연대도 창설됨으로써 본격적인 훈련소로서의 면모를 갖추기 시작했다. 44만여 평의 부지에 병영시설 100여 동을 건설하는 대공사에는 1202건설공병단과 203건설공병대대, 그리고 미군의 26야전공병대대가 투입되었다. 

- 이내용은 육군훈련소 창설 60주년 기념 ‘이보다 아름다운 젊음은 없다’ 책자에서 발췌한 내용이다.

 

[6.25전쟁과 연무대 창설]

6.25전쟁이 절정에 달했던 1951년 가을, 빈약한 무기도 문제였지만, 압도적인 수로 육박해 내려오는 북한군과 중공군을 막아내기 위해서는 우리 군의 병력 보충이 시급한 과제였다.

당시 우리 군의 신병교육을 담당하던 제1훈련소는 제주도에 위치해 있었다. 비교적 전선과 멀리 떨어진 곳에서 안정적으로 신병교육을 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었지만, 병력 손실이 끊임없이 되풀이되는 전투 상황을 감당하기에는 제주도는 너무 좁고 너무 멀었다.

이에 “제2훈련소를 내륙에 건설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었고, 김종갑 준장이 제2훈련소 건설의 책임을 맡고 초대 소장으로 내정되었다.

김종갑 장군은 전략적 기지로 전북 군산항을 염두에 두고 그 일원을 답사했다. 전주 부근을 시작으로 전북 일대와 충남의 남부 일대를 두루 둘러본 뒤, 현재의 연무대에 터를 잡았다.

많은 병사들이 동시에 훈련받을 수 있을 정도로 넓은 교육장을 확보할 수 있을뿐더러 옛 백제군이 나당 연합군과 최후의 항전을 벌였던 ‘황산벌’이라는 역사성도 띠고 있는 곳이다.

“닭이 알을 품고 있는 형상이라는 금계포란형(金鷄抱卵形)의 지세(地勢) 역시 정예 강병 육성이라는 훈련소의 창설 목적과 부합한다”고 판단했다. 게다가 이 일대는 군대와 군인을 의미하는 무(武)자를 쓴 무동(武洞)으로 불리고 있었다. 

 

[싸우며 건설하고 건설하며 싸운다]

1952년 2월 2일, 각 교장에서 최초의 신병교육훈련이 일제히 시작되었다. 당시 막사도 지어지지 않아 교관이든 훈련병이든 임시 천막에서 생활하며 군사 훈련과 훈련소 건설 임무를 동시에 수행했다.

“싸우며 건설하고 건설하며 싸운다”는 구호가 창설기 연무대에서는 문자 그대로 압축적으로 시행되었다. 

1952년 5월 1일, 25교육연대가 창설되었고, 이어 5월 3일 정식으로 훈련소 개소식이 열렸다. 이어서 26, 28, 29, 27, 30교육연대가 차례로 창설되어 1953년에 이르자 총 9개 교육연대에서 연간 14만여 명의 신병을 양성할 수 있는 규모를 갖추게 되었다.

마침내 1953년 5월 3일, 이승만 대통령이 참석한 가운데 훈련소 개소 1주년 기념행사를 성대하게 치렀다.

입영열차와 야간호송열차는 사라졌지만 육군훈련소는 지난 70여 년 동안 변화에 변화를 거듭해왔다. 

하지만 여전히 바뀌지 않는 것도 있다. 신병교육이라는 근본적인 목표가 바뀌지 않았고, 1년 365일 쉬는 날 없이 훈련병들의 함성과 군가가 우렁차게 부대 곳곳에서 울려 퍼진다는 점도 달라지지 않았다.

 

▲ 이승만추모비     ©

 

▲ 이승만대통령추모     ©

 

■ 논산포로수용소 반공포로 탈출

 

6.25휴전협정(1953.7.27.)이 있기 한 달여 전인 1953년 6월 18일 이승만 대통령은 전국 포로수용소에 수용된 반공포로 2만 7천여 명을 미국과 사전 협의 없이 전격 석방(탈출)시켜 국제사회를 놀라게 하였다.

당시 이승만 대통령은 반공 포로들을 이북으로 보낼 수 없었고, 휴전 회담이 한국정부 의사와 관계없이 마무리 단계에 접어들자 극단적인 행동을 취한 것이다.

지금은 상전벽해 한 연무 행복마을아파트 일원에는 1952년부터 1953년까지 ‘논산 제6포로수용소’가 위치해 있었다. 그 후 116육군병원으로 잠시 사용되다가 군인아파트가 들어섰다.

 

[논산 제6포로수용소 반공포로 탈출, 다큐 3일]

육군본부의 「한국전쟁과 반공포로」 내용에 의하면 ‘논산 제6포로수용소’는 3개의 수용소로 구분되어 총 11,038명의 반공포로가 수용되어 있었다. 이들 중 8,024명이 탈출에 성공하였고, 나머지는 탈출 중 부상 2명, 사망 2명, 체포 336명, 미탈출 2,674명으로 집계되어 있다.

 

#첫날, 1953년 6월 16일

6월 16일 서울에서 급파된 황동준 소령은 논산지구 헌병대장 정수남 소령, 제5경비연대 제3대대장 홍순정 중령, 제55헌병중대장 박준남 대위와 비밀리에 회합을 갖는다. 이들은 야간 정찰 결과 수용소 주변에는 미군 초소가 없고 정문에만 한‧미군 보초가 합동 근무하고 있음을 확인하고, 그 밖의 수용소 내부의 사정과 지형을 관찰한 후 다음 행동계획을 숙의하였다.

 

#둘째 날, 1953년 6월 17일

홍순정 중령은 순찰로 가장하고 수용소 정문을 통과했다.

수용소 막사 안으로 들어간 그는 간부급 포로 6명을 소집하여 ‘포로 석방 계획과 탈출에 필요한 내용’을 알려주었다. 그런데 이날 3개의 수용소 막사 중 제1수용소는 미군의 경비가 심해 연락을 취하지 못한 결과 2천6백여 명의 포로가 탈출하지 못하는 결과가 발생했다.

 

#셋째 날, 1953년 6월 18일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있는 가운데 새벽 2시가 되었고, 드디어 플래쉬 신호가 3번 깜박였다. 이와 동시에 외곽 전등은 일제히 꺼지고 탈출을 대기하고 있던 포로들은 물밀듯이 밀려 나와 잘라진 철조망을 통과했다.

이렇게 해서 제2, 제3 수용소 막사의 포로들이 거의 빠져나갈 무렵에야 제1수용소 막사에 탈출 개시 지령이 도달했다. 그래서 제1수용소 막사에서는 내의 바람으로 빠져나온 포로들이 대부분이고 그나마 3분의 2는 탈출을 시도하지도 못했다. 일단 수용소를 빠져나온 포로들은 경찰과 민간인의 안내로 옷을 바꿔 입고 재빨리 민가에 잠입했다. 

당시 포로수용소장인 에이크 미군 대령은 “탈출한 포로들이 불과 30분내에 논산읍으로 사라져 버렸다”며, “수용소에서 8㎞나 떨어진 논산읍까지 순식간에 가버린 것에 대해 미군 경비병들이 놀라움을 금치 못하고 있다”고 상부에 보고했다.

그러나 실제로 탈출 포로들은 논산읍으로 가지 않고 경찰의 안내로 인근 민가에 은신하고 있었다.

 

[관촉사 이승만 대통령 추모비]

1953년 논산은 지금과는 확연히 다른 농경사회였다. 석방된 8천여 명의 포로가 거리를 활보한다면 이건 또 하나의 커다란 사회적 문제일 것이다. 그리하여 경찰과 지역사회의 협조를 통해 일손이 부족하고 여유가 있는 집에 한 명씩 배치하여 농사일을 돕게 하였다. 일종의 현대판 머슴이었다. 

그때 그들에게 지급되었던 새경은 “1년에 쌀 4~5가마였다”고 한다. 구자곡면 삼전리 한 농가에서는 반공포로를 데릴사위로 맞아드린 집도 있었다.

당시 석방되었던 반공 포로들이 이승만 대통령의 추모비를 충령탑 인근 현 관촉사 경내에 설치하였다. 그 후 충령탑은 지금의 등화동으로 이전하였고 추모비만 썰렁하게 관촉사 경내 화장실 뒤편에 남아 있다.

 

■ 국보 제141호, 제146호가 제시하는 연무의 역사적 의미

 

1960년대 논산 육군훈련소에서 참호를 파던 병사들이 의문의 물체들을 발견했다. 흙과 녹이 잔뜩 묻은 고색창연한 ‘청동기 세트’ 드디어 세상에 나오는 순간이었다. “싸우며 건설하고 건설하며 싸운다”는 당시의 구호에서 보듯이 훈련병들의 작업은 일상이었다.

이 청동기 세트는 기원전 3~2세기(청동기와 초기 철기시대)에 제작되어 제정일치의 지도자가 사용한 것으로 여겨지는 귀중한 보물이었다. 군인들은 이 청동기 세트를 중간상인에게 팔아넘겼다.

중간상인은 청동기 세트를 2개로 나눠 한 개는 숭실대 박물관에 나머지 세트는 수집가 김모씨를 거쳐 호암(리움)미술관으로 넘어갔다. 이 과정에서 청동기 세트는 막연하게 강원도에서 출토된 것으로 알려졌다.

이후 숭실대 박물관에 소장된 ‘정문경’은 1971년 국보 141호, 호암미술관에 소장된 ‘청동방울 일괄유물’은 1973년 국보 146호로 지정되었다.

이 두 개의 보물이 같은 출토지(육군훈련소) 출신이라는 사실을 모르다가, 이 청동기 세트를 사고팔았던 중간상인이 故 한병삼 국립중앙박물관장에게 “국보 141호와 146호는 논산 육군훈련소 군인들이 수습한 세트 유물”이라는 고해성사로 여러 가지 의문점이 풀리게 된다.

 

▲ 국보 제141호 정문경(다뉴세문경)는 현재 숭실대학교 기독교박물관에 있다     ©

 

▲ 국보 제146호 청동방울 일괄은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

 

[한국의 7대 불가사의, ‘정문경’]

국보 제141호 ‘정문경’은 ‘다뉴세문경’으로 알려진 청동거울이다. 즉, 고리가 많은 가는 무늬 거울이라는 의미이다. ‘다뉴세문경’이라는 용어는 일본에서 붙인 이름으로 왜색풍이라 할 수 있어, 국보 141호의 정식 명칭은 ‘정문경’이다.

국보 141호 정문경은 처음부터 국보경(국보거울)으로 일컬어질 만큼 국보 중 국보로 통했다. 

그 첫 번째 이유는 정문경의 반복된 동심원의 무늬가 0.3㎜로 ‘청동기시대의 나노기술’이라 할 수 있다. 현대 기술에서도 새기기 힘든 극초정밀의 1만3천개가 넘는 선과 원을 새겨넣은 그 시대의 장인은 도대체 어떤 사람이었을까?

두 번째 이유는 “0.3㎜의 극초정밀 예술품을 어떻게 주조했느냐?”는 의문점이다. 이것이 바로 정문경을 두고 첨단과학으로도 풀 수 없는 불가사의라고 혀를 내둘렀던 이유이다.

국립중앙박물관 유혜선 보존과학부장은 “국보 141호 정문경은 고대 청동거울 제작을 위한 황금비율을 그대로 반영했다”면서, “청동기 기술이 최고 정점에 달할 때 제작된 유일무이한 작품이다”라고 극찬했다.

기원전 3~2세기 국보 141호 청동거울을 만든 장인은 쉽게 깨지는 약점에도 불구하고 황금비율로 알려진 구리와 주석 비율을 67:33에 맞추려고 분투했다. 덕분에 색상과 반사율 면에서 최상의 조건을 갖춘 극초정밀의 예술품이 탄생한 것이다. 

여기에 0.3㎜ ~ 0.55㎜ 간격으로 그은 1만3천여 개의 선과 동심원을 천신만고 끝에 그려놓은 것은 그 장인의 집중력과 인내력이 가히 신의 경지였음을 알려주는 것이다. 그 장인도 알고 있었을 것이다. 아차! 하는 순간 깨질 수 있었다는 것을.

그런데 이 정문경이 과거에 “실제로 사용했을까?”하는 의문점이 생긴다. 이전까지는 미사용품, 즉 부장용일 가능성에 무게를 두었다.

그러나 국립중앙박물관 보존과학팀이 현미경으로 관찰한 결과 끈을 매달아 사용한 마찰 흔적이 두 고리에서 확인되었다. 이는 한 사람이 정문경을 하나의 끈으로 두 개의 고리에 관통해서 매달아 사용했음을 암시해 주는 것이다.

2,300여 년 전 제정일치 시대, 하늘과 땅과 인간의 소통을 독점하는 강력한 지도자가 은백색 정문경을 가슴에 달고 양손에는 팔두령과 간두령, 쌍두령 같은 청동방울을 흔들며 지도자의 위엄을 마음껏 펼쳤을 것이다. 그리고 그 지도자는 연무 육군훈련소 어딘가에서 “아직도 잠들어 있다”는 역사적 가설을 그냥 웃어넘길 이야기만은 아니다

이와 같이 연무(鍊武)는 기원전 3~2세기 마한시대, 하늘과 땅 그리고 인간과 신을 연결하는 의례가 치러진 장소로 추정된다. 이는 1960년대 육군훈련소에서 ‘국보 제141호 정문경’과 ‘국보 제146호 청동방울 일괄’이 출토되었기 때문이다.

제정일치 시대, 최고 지도자의 죽음과 함께 그의 유물을 매납한 것으로 추정되는 연무(鍊武)는 당시 제사나 행사를 치르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모였던 중요한 지역임을 시사하고 있다.

또한 연무는 “태권도의 기원이라고 할 수 있는 수박희 겨루기를 매년 같은 날(음력 7월 보름), 같은 장소(작지마을)에서 했다”는 고증이 유일한 지역이다. 그것도 관제행사가 아닌 경계를 달리하는 전라도와 충청도의 일반 백성들이 모여 축제의 한마당을 펼쳤다는 것에 더 큰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

작지마을에서 수박희로 명맥을 이어오던 태권도가 세계 곳곳을 누비며 200여 개국에서 8천만 명 이상이 수련하는 원조 한류의 첨병이 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연무대 ‘육군훈련소의 신병 태권도 교육에서부터 보급되어 시작되었다’는 사실은 어느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역사적 실체이다.

이렇게 연무는 우리 역사의 변천에 따라 주요한 역할을 마다하지 않았다. ‘무술을 닦는 곳, 연무(鍊武)’라는 뜻이 우연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많은 역사적 실체가 존재하고 있다.

 

 

- 전영주 편집장

 

이 기획기사는 2024년 충청남도 지역미디어 육성 지원을 받아서 취재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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