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에서 Oriental Cherry-blossom이라고 부르는 벚꽃은 ‘순결’ 또는 ‘아름다운 영혼’이라는 꽃말을 갖고 있다. 꽃말처럼 순수해서인지 벚꽃이 만개한 요즘 유난히도 생각나는 사람이 있다. 바로 권선옥 논산문화원장이다.
논산에서 권선옥 문화원장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시인, 국어선생님, 교장 선생님, 문인협회장, 지속가능발전협의회장, 문화원장 등을 거치며 그의 생각과 느낌을 가장 많은 글로 만들어 낸 사람이고, 여기에 못지않게 반듯하게 살아온 그의 이력 때문일 것이다.
이에 이번 [표지초대석]에서는 물리적 거리를 지키며 사회적 공간에서 바라보는 권선옥 문화원장이 아니라, 심리적 친밀 공간에서 순수하면서도 열정적인 인간 권선옥의 내면의 세계를 탐구해 본다.
[시인, 교사 권선옥]
연무 소룡리에서 4남매 중 막내로 태어난 권선옥 문화원장은 누구보다도 성실한 아버지와 알뜰한 어머니의 영향이 지금의 권선옥에 이르게 된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특히 모두가 어려웠던 그 시절, 특별한 식재료는 없었지만 권선옥 원장의 어머니께서는 음식 솜씨가 좋으셨다고 한다. 이는 식구들에게 맛있는 음식을 내놓고 싶었던 어머님의 절실한 마음의 결과인데, 매사에 정직하게 열심히 살고자 노력하는 권선옥 원장의 삶과 일맥상통한다.
구김살 없이 자란 문학청년 권선옥은 나태주 시인을 만나 시를 배우고 시인이 되었다. 지금 이만큼의 시를 쓸 수 있는 것이 나태주 선생님의 덕이라며 스승에 대한 예를 놓지 않는다.
젊은 시인 권선옥의 초상을 그의 수필에서 찾아볼 수 있다.
“불의와 억압에 대한 분노가 끓어오를 때가 있었다. 그러나 나에게는 그런 것들에 대항할 힘이 없었다. 그래서 날이 서 있는 시를 썼다. 그러나 정작 시는 칼이 되지 못했다. 그래도 달리 방도가 없어 들지 않는 칼을 오래 버리지 못했다. 나의 젊음은 그렇게 무력감 속에서 소진되고 말았다. (중략) 마침내 나는 들지 않아서 아무것도 자르지 못했던 칼을 칼집에 넣었다. 그러자 내 마음에 감사와 사랑이 고이기 시작했다.”
또한, 「밥풀 하나」 시집에서는 “나는 겉과 달리 욕망이 강한 사람이었다. 그것들은 나의 동력이기도 했지만, 굴레이기도 했다. 나는 시가 아니었으면 더 많은 굴레를 쓰고 살았을 것이다. 시는 아주 민감하게 작동하는 브레이크였다.”고 이야기한다.
이렇게 젊은 시절 그의 목표는 늘 좋은 시를 쓰는 것이었지만, 학생들을 가르치는 것에 대해서는 남다른 확고한 그만의 철학을 가지고 있다. “선생은 남들보다 다르게 더 정직하고 열심히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학생들을 가르친다는 것은 지식으로만 되는 것이 아니라, ‘실천’이 더 중요한 문제이기 때문”이라고 지적한다.
[문화원장 권선옥]
권선옥 문화원장은 “문화를 통해서 시민들을 행복하게 해드리고 싶다”며, 그래서 “논산문화원은 그 행복을 담아내는 그릇”이라고 설명한다. 그러면서 “오래 잊고 살았던 세상의 아름다움과 이웃들의 체온을 담은 그릇, 모양새는 볼품없어도 그 속에 담아 두면 썩지 않는 구수하게 발효하는 그릇을 빚고 싶다”고 이야기한다.
권선옥 문화원장은 젊은 시절 문화의 불모지였던 논산에 놀뫼문학회와 논산문인협회 등을 결성하면서 문화 부흥에 선구자 역할을 담당했다. 그가 지역에서 그런 역할을 하지 않고 중앙무대에서 시만 썼다면 더 큰 작가로 활동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는 그것을 그의 책무로 받아들였다. 그래서 ‘오늘날 그의 헌신이 논산 문화의 마중물이 되었다’는 사실은 아무도 부인할 수 없는 논산 문화의 역사이다.
1976년 등단해 1985년 「풀꽃사랑」부터 2022년 「밥풀 하나」까지 총 8편의 시집을 발간한 권선옥 문화원장은 정적인 문화원보다 역동적인 문화원을 만들고자 노력한다. 그래서 시민들이 능동적으로 참여해서 ‘문화를 직접 만드는 문화원’으로 탈바꿈시키고 있다. 그런 연유에서 <가까운 문화원, 친밀한 문화원장>이 그가 지향하는 목적지이다.
권선옥 문화원장은 “공자가 종심소욕불유구(從心所欲不踰矩)를 이야기한 70세를 넘으니 입맛만이 아니라 내가 좋아하는 모든 것이 달라졌다”며, “그 가운데 가장 두드러지게 변한 것은 사람에 대한 것”이라고 말한다. 졸랑거리며 앞장을 서는 사람보다 있는 티가 나지 않게 중간이나 그 뒤에 서는 사람이 좋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내가 동원할 수 있는 모든 수단과 방법을~’이라고 말하는 것처럼 순리를 따르지 않고 지나치게 악착스러운 것이 왠지 싫다”며, “그런 사람이 싫기만 한 게 아니라 무서운 생각이 든다”고 이야기한다.
그는 오늘도 프란치스코의 기도문을 자신에게 읊어준다.
“주여, 제가 할 수 있는 것은 최선을 다하게 해 주시고 / 제가 할 수 없는 것은 체념할 줄 아는 용기를 주시며 / 이들을 구분할 수 있는 지혜를 주소서”
- 전영주 편집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