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노트] 고향불고기집 노부부의 백년해로 이야기
‘아가씨와 건달’ 눈다리 하재억·홍진희 부부
<아가씨와 건달들>이라는 뮤지컬이 있다. 1950년 브로드웨이에서 처음 상영된 이후 전 세계 25개국에서 매년 3천 회 이상 공연된다고 하니, 탄탄한 원작 소설 덕에 세기를 관통하는 연속 퍼레이드 같다.
그건 소설이지만, 눈다리에는 건달과 아가씨 이야기 실화가 있다. 광석면 신당3리 자연마을 이름은 눈다리다. 눈다리 인근에서 하재억 어르신에 대해 물으면 ‘팔자 좋은 아저씨’로 통한다. 차마 건달이나 주먹으로 부를 수 없어선지 모르겠다. 하재억 옹 면전에서 “평생 그렇게 아주머니 고생만 시키고 돈 같은 거 안 벌면서 어떻게 사셨어요?” 기자의 당돌한 질문에 침묵을 미덕으로 여기시던 홍진희 여사가 손사래를 젓는다. “저 양반 없었으면 내가 장사를 못했지. 언제나 내 바람막이에요.”
▲ 고향불고기집을 43년 운영해온 눈다리 지킴이 하재억, 홍진희 부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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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자 좋은 하재억 옹은 요즘도 헬스장에 다닌다. 광석면 율리에 사는 친구와 함께 버스를 타고 논산시국민체육센터에서 내린다. 운동도 하고 수다도 떨다가 점심시간이 되면 거기 2천원 식당을 이용한다. 값은 싸지만 푸짐한 식단으로 유명한 이곳은 하루 2백명으로 제한된다. 오후는 귀가하여 동네에서 이곳저곳 한유로이 지낸다. 올해 85세, 팔십 평생 팔자 늘어져 보인다. 그러나 하옹의 일생이 평탄대로이기만 했을까?
돈가방 들고 가출했다가 군대로
하재억 씨는 5대독자다. 부모님 슬하가 3남 1녀였는데 두 형이 전사하였다. 큰형 하주석 씨는 경비대대 특무상사로 남원육군본부에서 근무했었다. 하재억 씨와 대여섯 살 차이가 나는 작은형 하재영 씨 역시 사망통보를 받았지만, 화장한 재는 받지 않았다. 두 형제가 서울 흑석동 국립묘지에 묻혔고, 어머니가 살아 계신 동안은 연금을 받았다.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어머니와 단 둘이 살게 되었지만 그래도 유복한 집안이었다. 어머니는 네 마지기 땅만으로는 살기가 어렵다 느꼈는지 동네에서 밥장사를 시작하였다. 식당을 따로 차린 게 아니라, 눈다리장이 설 때만 밥 배달을 한 것이다. 때 되어 밥 찾는 이들에게 들밥처럼 갖다 주고서 밥값을 받는 형태의 장사였다.
초등학교를 졸업한 하재억 씨는 호강만 하고 커서 철이 없었다고 술회한다. 10대 후반 어느날 엄마 몰래 두둑한 돈 가방을 챙겨갖고서 집을 나선다. 대전역에 내리니 택시가 두 대만 있던 시절이다. 피가 한창 끓던 시절, 여자를 태우고 돌아다니며 원 없이 돈을 썼다. 이윽고 돈이 떨어지자 미안하여 집에 돌아갈 수 없는 탕자가 되었다. 해서 선택한 곳이 군대다.
6·25 종전 후 3년 되던 해 자원 입대하였다. 열아홉살이던 1956년 입대하고 다음해인 2월 19일 군번 10135544을 받고 육군포병으로 최전선 26사단에 배치를 받는다. 연천 대광리에서 2년여 근무하다가 제대는 1059년 11월 1일 포천 일동에서, 총 33개월의 군생활을 무사고로 마쳤다.
▲ 혼례를 새벽에 올려 결혼사진이 없지만, 훗날 춘향와 이몽룡이 되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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꼭두새벽에 올린 혼례식과, 주변 사기극
집에 돌아와 어머니와 단 둘이 살면서 농사 거들고 하다 보니 장가들 때가 되었다. 신부감은 예산에서 살다가 19살에 눈다리로 이사온 세 살 어린 처녀였다. 시어머니감은 이사온 처자를 눈여겨 보았다. 두 청춘남녀가 눈이 맞기는 했지만 중매라기보다 연애형식으로 사랑을 시작했고, 드디어 식을 올릴 때가 되었다.
음력으로 설날을 코앞에 둔 12월 25일로 잡은 것까지는 좋았는데, 혼례 시간이 새벽 4시! “시(時) 맞추어서 올려야 백년해로한다”고 해서 결혼식을 꼭두새벽에 올리게 됐다. 친척들과 가까운 이웃들은 밤새 놀거나 이바구 나누면서 날 새기를 기다렸고, 4시가 되자 예정대로 혼례식이 거행되었다.
기자가 당시의 결혼사진을 보여 달라고 청하니, 하나도 없단다. 사연은 간단했다. 식 올릴 때가 한참 새벽인데다가 눈도 오는 날씨여서 사진기사를 출장 오라 할 수가 없어서였단다. ‘낮에라도 부르자’는 의견이 나왔지만, “그러면 결혼을 두 번 하게 되는 거니 안 된다”는 반대에 부딪혀 결국 결혼식 사진을 찍지 못하게 되었다는 것.
결혼 후 신혼부부의 밀월은 오래 가지 못했다. 21살에 시집온 홍진희 새댁 역시 춘궁기에도 보리밥을 먹지 않을 정도로 유복하게 자란 귀공녀였다. 결혼 후 남편이 뭘 해보겠다고 바깥 사람들 만나고 다니더니만, 풀이 죽어서 들어오는 날이 많아졌다. 나중에서야 알고 보니 그 동안 세 사람에게나 속아서 연짱 돈을 다 떼였다는 것이다. 큰 딸이 서너살 됐을 때다. 이럴 때일수록 남편이 정신을 차려줘야 하는데 자포자기를 선언했다. 특별히 배운 기술이 없고 그 동안 노동도 거의 안 해봤으니 할 게 없다면서 방탕생활로 치달은 것이다.
설상가상, 시누이문제가 불거졌다. 시누이는 혼기가 찼을 때 “나이 많은 남자가 좋다”는 매파의 권유도 있고 하여, 당시 구애하던 노총각에게로 시집을 보냈다. 매형이라는 사람은 경찰 사칭도 하면서 수완 좋게 처갓집으로 쌀도 지고 오더니, 어느 날은 평택에 사두면 좋은 땅이 있다며 장모님을 꼬드겨 눈다리 땅들을 매각하여 갔다. 한동안 방탕생활하다가 돌아온 하재억 씨는 이 사실을 알고 억장이 무너지면서 연락도 끊고, 혈연마저 끊었다.
▲ 예전 광석양조장 자리가 세월따라 고향불고기~보리식당/눈다리다방으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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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집 처마에서 술빵장사~고향불고기집
당시 눈다리에는 광석양조장이 있었다. 현재 눈다리다방과 보리식당이 한 건물인데, 본래는 광석양조장 있던 자리이다. 광석양조장은 내부에 맑은 샘물이 있었고, 맛 좋은 약주로 소문나서 서울까지 팔려나가던 명품막걸리였다. 300여 평의 건물에 7명 정도가 일하는 중소기업이었고 6·25 이후에도 잘 나갔지만, 50여 년 전 눈다리오일장 폐장과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문을 닫게 된다.
양조장 시절, 무언가를 하여서라도 살아야 했던 홍진희 새댁은 양조장에서 나오는 누룩이 생각났다. “그래, 그걸 가지고 술빵을 만들어보자.” 제빵기술 가르쳐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지만 어찌어찌 하다보니 빵이 되어서 장날에 내다 팔았다. 처음에는 남의 집 처마 밑에서 시작하였다. 지금 기준으로는 별 맛 없었을 빵이었겠지만, 배고팠던 시절 오가는 사람들은 맛있게 먹어주었다. 돈이 좀 모이자 길쭉한 그 집 처마에서 이제는 안채로 들어갔다. 빵장사에서 식당으로 자연스레 이어지는 문지방 연결고리다. <고향불고기집>이란 간판을 내걸고 장날과 관계 없이 매일 밥 파는 일이 시작되었다.
식당문을 열면서 백반은 물론 불고기 등등 푸짐한 먹거리를 내놓자 인근 각처에서 손님들이 몰려들었다. 특히 모내기 철에는 점심밥은 물론, 하루 일 끝난 저녁때도 집에 안 가고 이곳으로 모여서 영농회의를 하는 동네사랑방이 되었다. “내일 장사해야 하니까 이제 그만 집으로들 가봐유~” 해봤자 우이독경이다. “아줌마, 문은 우리가 닫고 갈 거니 들어가 주무셔요.” 이 정도는 약과다. 모내기때 먹은 밥값은 베 비고 바심을 해도 감감무소식이다.
▲ 돌이 누워져서 된 눈다리에 있던 원래 세 돌 중의 하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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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 빚은 마냥 무섭고, 우리집 외상값은 호구
그렇게 밥장사를 43년 했고 장사 그만둔 지 10여년 넘었건만 아직껏 외상인 사람들도 있다. “아줌니, 건강하세요!” 반세기 외상값을 갈음하는 덕담이다. “그래도 따지고 보면 그 양반들 덕에 우리가 살았고 새끼들 다 키웠지.” 고마워라 한다면서 홍여사는 ‘세상에서 어떤 일이 제일 대간하냐?’고 물어보란다. “벌어서 먹고 살면서 애들 가르치고 먹고 살기가, 그 일이 제일 어려워. 빚 안 지려고 하면서 말여유~” 홍여사의 자문자답이다.
두 부부에게 가장 무서운 것은 빚이었다. 5남매 키우면서, 식당하면서 건물을 새로 짓고 다방까지 겸업하는 동안 빚을 아니 질 수가 없었다. 신용은 좋아서 돈 빌리는 데는 어려움 없었지만, 당시 일수돈은 쎄었다. 천만원이면 매일 4만원을 내는 4부이자 고금리였다. 이 대목에서 하 옹은 할 말이 많다. “돈 없을 때는 꾸어주지 않으면서 사람 취급도 안 해요. 한참 없을 때는 쌀도 얻어먹고 하던 피눈물 나는 시절이 있었지, 10여 년쯤.” 두 부부는 빚 눌리면 잠 못 이룰 정도로 예민했단다. 사우리 400평은 선산인데도 빚 빨리 갚아버리기 위해 부모님 계신 20여 평만 남겨둔 채 처분하였다. 조상에 대한 미안함에서였는지 하재억 씨는 눈다리의 마지막 돌다리를 선산 산소 앞쪽에 안치한다.
사월리에서 발원하는 덕포천이 합류하는 이곳에는 나무다리가 놓이기 전 돌다리가 있었다. “눈다리는 옛날에는 긴 돌을 눕혀서 다리를 놓아 <누운다리>라고 부르게 되었으며 <돌다리> 또는 <설교(雪橋)>라고 하며....” 현재 이렇게 써있는 신당3리 안내글은 오류라고 하재억 씨는 지적한다. “처음에는 침대만한 크기의 돌로 세 개를 세웠지. 선돌처럼 입석으로 세웠어. 그런데 어느 해 장마가 심해서 그 돌들이 몽땅 눕혀진 거야. 그러니까 처음부터 눕혀 놓은 게 아니라 센 물살 못 이기자 선돌 스스로가 자빠진 거지.” 이 사실은 당시 상황을 목격한 자신밖에 모를 거라면서 돌 이야기를 이어간다. “나무다리가 놓이니까 그 아래 돌들이 소용 없어졌잖아? 근데 두 개는 누가 가져가 버렸고, 나도 하나 가져왔어. 어머니 산소에다가 갖다 놨지. 포클레인이 처음 나왔던 때인데, 그거 옮기느라 돈도 꽤 들었지만, 돌이 귀티가 날 정도로 참 멋져! ”
▲ 눈다리는 보리식당에서 20미터만 더 가면 나온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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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방 아가씨들에게 속으면서도 잘해줘
돈은 엉뚱한 데로 많이 샜다. 부인이 식당에 전념하는 동안 하재억 씨는 여러 가지를 했다. 40여년 전, 지금 설교이발소 있는 자리까지 해서 집을 길게 지었다. 그 동안 유리집이나 신문보급소 일 같은 것도 잠시 하였지만 식당 옆으로는 다방도 나란히 내서 꽤 오래 했다. 그러나 다방벌이는 별무신통이었다. “내가 돈 버는 데는 쑥맥여 쑥맥! 아가씨들이 사다달라는 재료는 많은데 나중에 보면 남는 돈이 없더라구.” 질세랴, 홍여사가 역성을 든다. “아가씨들 사이에 우리 다방은 인기가 많았다우. 쉬는 시간이면 식당으로 넘어와서 ‘엄마, 엄마’ 애교 부리고, 때 되면 밥 공짜로 먹으며 놀다 가구. 주변 노성 다방 같은 데서는 이런 대접 어림도 없었다구들 해.” 이토록 잘 해주었지만 월급 정도 액수를 삥땅 쳐갔으니 다방금고통에는 쌓이는 돈이 없었단다.
이처럼 43년 장사를 하는 동안 속기도 하고 외상값도 많이 떼었지만, 그래도 빚 없이 오남매 모두다 고등학교까지는 가르칠 수 있었단다. 성장한 자식들이 일산 파주쪽에서 미용실, 간판공장 등을 하며 다들 60평 아파트에 산다며 뿌듯해하는 노부부!
두 부부는 이제 식당과 다방을 팔고서 바로 그 옆 작은집에서 단촐하게 산다. 식당 시절, 오남매가 생활했던 별채다. 원래 버스길은 별채 바로 앞이었는데 지금은 위쪽으로 새로이 났다. 거기에 400평 정도의 대지가 하나 있기는 하지만 두 부부는 딱히 물려줄 유산이나 저금도 없이, 단촐한 삶이다. “우리 5남매가 부모님 재산이잖아요! 우린 아버지 안 닮고 엄마 생활력 닮았으니까요.” 이구동성인 5남매 중 셋째딸이 부여에 사는데 가까이 사니까 제일 큰 효자처럼 보이지만.....
홍여사는 뭐니뭐니해도 아들이다. 아들을 얻은 것도 주는 걸 좋아한 덕에 얻은 기적의 선물로 여기는 모양이다. 홍진희 씨가 시집 온 진주 하씨 시댁은 결과적으로 5대독자 집이었다. 낳을 때마다 연속 딸이니, 시어머니가 뭐라 해도, 남편이 속을 썩여도 기를 펼 수가 없었다. 장사로 하루하루가 고달퍼도, 남편이나 자식들이 속을 썩혀도 할말없는 죄인이었다. 그러다가 지성이면 감천, 드디어 하늘이 점지해둔 아들이 하나 태어난다. 시어머니가 풍이 와가지고 돌아가시기 직전, 며느리 만삭 배를 만지면서 하는 말, “이번에는 아들 낳아야 할텐데...” 죽기 전 시어머니가 소원하고 발복한 대로 한달 후 득남을 하였다. 그 아들이 지금은 나이 50이 되었고, 손자를 하나만 낳아 7대 독자째이다. “아들 딸이 용돈을 똑같이 주는데, 같은 액수라도 아들이 주는 돈은 달라요.” 남아선호사상은 오히려 여자쪽에서 더 강한 곳이 대한민국 현주소다.
▲ 집안일에 손하나 까딱 안 하던 하재억 옹이, 이제는 가사도 분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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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다리(설교)~신당리 동네한바퀴
눈다리는 한때 다방 손님도 바글바글했다는데, 지금은 여느 시골다방처럼 한유롭다. 아니, 여태껏 다방이 남아 있는 것 자체가 신기하다. 눈다리에서 면사무소쪽으로 가다 보면 농협이 나온다. 한때 노래자랑 같은 걸 하던 공유공간 농협창고에서 똥개말랭이로 조금 더 올라가면 우체국 옆으로 현대식 카페 ‘라온’이 나온다. 어감은 영어인데 ‘즐거운’이라는 우리말이란다. 인근 노성면, 상월면에도 모던한 카페 열풍이다. 이런 트렌드 속에서 눈다리 시골다방은 ‘계란동동 쌍화차’ 향수 불러일으키기 딱일 성싶다.
가게가 몇 안 되는 동네에 떡방아간, 정미소, 옻닭집, 모터집은 물론 벼락대신 등의 간판이 과객들의 눈길을 사로잡는다. 특히 눈마루 초입의 ‘광석루’는 숨겨진 맛집이다. 짜장면이 감칠 맛이기도 하지만, 영업집 분위기라기보다 마실 온 이웃집 느낌이랄까....
식후 걸으면서 길거리에서 만난 한 분은 눈다리가 고향인 출향인이었다. 6·25때 살기 어려워 피난민 따라 춘천으로 올라갔다가 거기서 기반 닦은 다음, 제사때마다 내려오는 귀향인이란다. 홍여사가 주로 놀러가 소일도 하고 얘기꽃을 피우는 곳은 그 친척집이다. 홍진희 여사의 총기는 장사를 오래 해서인지, 숫자를 정확히 기억하는 데서 빛난다. 하옹 역시 93으로 시작하는 작은 형님의 군번까지 기억하는 수리력이다. 그러고 보면 ‘혼례를 새벽에 올려야 백년해로 한다’는 말이 참말이었나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