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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광정 교장선생님의 삶과 꿈(2) " 하늘나라 배웅하는 웰 다잉 봉사자"
기사입력  2022/08/31 [18:04]   놀뫼신문

전광정 교장선생님의 삶과 꿈(2)

하늘나라 배웅하는 웰 다잉 봉사자

 

우리는 누구나 죽는다. 그 죽음의 길을 누구도 피할 수 없다. 그 외로운 길을 함께 해주는 사람들이 있다. 호스피스, 장례지도봉사자(위령봉사자)들이다. 전광정 교장 선생님은 천주교 위령회 회장을 오래도록 하면서 많은 망자들이 가는 마지막 길을 함께 하며 지켜주고, 또 그 유족들의 슬픔을 함께해주었다. 지난 호 섬마을 선생님에 이어 오늘은 그의 하늘나라 배웅 이야기를 들어본다.

 

 

▲ 2016년9월 평생학습대상 대상 수상     ©

 

은퇴 후 시작된 장례 봉사활동

 

그는 1961년 3월부터 2004년 8월까지 43년 5개월의 긴 교직 생활을 끝내고 은퇴하였다. 그때 그의 나이 62세였다. 그는 앞으로 펼쳐질 그의 인생 2막은 자신의 주변과 이웃에 대한 봉사활동이라고 진즉부터 마음먹었다. 대부분 사람들은 정년퇴직을 하면 제2의 자기 사업을 시작하든가 아니면 여행이나 취미활동을 하기 마련인데 전광정 선생님은 봉사활동을 하기 위해 퇴직하자마자 한국디지털대학교 사회복지학과를 편입학하고 수학하여 사회복지사 자격증을 취득하고 원예치료사 교육(한국원예치료협회), 요양보호사 교육(대전시) 등을 받았다. 

원예치료사 자격증과 요양보호사 자격증, 그리고 노인복지상담사자격증(한국노인상담연구소), 노인교육지도사 자격증(사)대한노인회)을 차례로 획득하고, 요양보호사 치매전문인력과정 교육(보건복지부. 충남대학교병원)을 수료한 후 그는 대전노인전문병원과 동대전정신요양원, 그리고 공주치료감호소 등을 다니며 수년간 봉사활동을 하였다.

그는 천주교 계룡성당 위령봉사회 회장을 역임하면서 가톨릭상장례지도사 자격증을 획득하였고, 나아가 내친김에 장례지도사 국가자격증까지 획득한 그는 본격적으로 ‘장례지도사’라는 흔하지 않은 봉사활동을 하였다. 

 

“당연히 집에서는 좋아할 리 없지요. 아내는 나보고 왜 그런일을 하느냐고 처음에는 불평도 많았답니다. 지금이야 저를 이해하고 많이 도와주지요.”  

 

장례라는 것은 예약된 일이 아니다. 항상 불시에 찾아오기 마련이다. 그것이 휴일이라고 해서, 또는 밤중이라고 해서 미뤄지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그는 가족들과 식사 모임 자리에서, 또는 한밤중에 잠자리에서 교우들의 부음 소식을 들으면 자리를 박차고 달려가야 했다. 그가 그렇게 하늘나라로 떠나는 길을 배웅한 고인만 2백 명이 훌쩍 넘는다고 한다. 

 

“일일이 다 세어보지는 않았지만 그 이상 되겠네요.”라고 말하는 그는 그 많은 장례 중에서도 기억에 남는 사람이 있다고 말한다. “어느 죽음이 슬프지 않고 안타깝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안타깝고 가슴 아픈 것은 어린 학생들의 죽음이지요. 그렇다고 망연자실한 유족들 앞에서 감정을 드러낼 수도 없고 복받치는 슬픔을 누르며 장례를 도와야 할 때가 힘들었습니다.” 

 

한 번은 어린 학생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는데, 그 부모의 애통해하는 모습을 보고 그는 속으로 많이 울었다고 한다. 그래서 장례를 치른 후 그 가족들을 ‘자살 가족을 위한 종교 행사’에 참여할 수 있도록 명동성당에 안내하고 또 동행했다고 한다.

 

 

 

끝도 없이 이어지는 다양한 봉사활동

 

전광정 선생님의 봉사활동은 끝도 없이 이어진다. 호스피스자원봉사자, 웰라이프지도사 등의 자격증을 획득하며 그 분야에서 지속적으로 공부하며 지평을 넓히더니 호스피스 완화의료 전문인력 표준과정과 전문과정을 충남대학교병원과 서울 가톨릭대학교 호스피스연구소에서 각각 수개월에 걸쳐 수료하였으며, 대전지역암센터장 충남대학교병원장으로부터 공로상을 수상하기도 하였다. 

이뿐만이 아니다. 그는 (사)충청남도교육삼락회 계룡시지회장에 선임되어 계룡시 충효 교실을 운영하고, 부부가 직장에 나가는 자녀들을 모아 마을 학숙을 운영하였으며, 계룡시 평생교육 지역 특성화 사업으로 웰다잉전문강사 60여명을 양성 배출하였다. (사)대한노인회 계룡시지회 노인대학장과 (사)충·효·예 실천운동본부 계룡시지회장에 선임되어 지역 어르신들과 어린 학생에 이르기까지 교육자로서의 마지막 소임을 다하였다. 

특히 계룡시 평생학습동아리 연합회장을 역임하며 20여개의 학습동아리를 시범적으로 연합운영지원하여 충청남도 도지사로부터 평생학습동아리 운영대상을 수상하기도 하였다. 

그의 활동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사)기호문화유산활용진흥원의 이사를 맡으며 사계고택과 돈암서원, 그리고 계룡시 5개 초등학생들에게 전통예절을 가르쳤다. 또한 생태환경지도사 자격증을 획득하여 우리 지역의 생태환경 지킴이 역할도 하고 있다. 

다문화가정 상담사로 논산시 논산동성초등학교와 강경중앙초등학교, 이화초등학교에서 3년간 다문화 학생들의 학습지도를 돌보았고, 논산농협 다문화여성대학에서 한글을 지도하였다. 웰다잉심리 상담사, 생애말돌봄상담사, 사전연명의료의향서 전문상담사 등의 자격증을 획득하여 활동하였을 뿐만 아니라, 노인인권강사 및 노인인권상담사 자격증까지 획득하여 충청남도도민 인권지킴이 활동, 국가인권위원회 노인인권 길라잡이로서의 활동을 하기도 하였다. 

전광정 선생님은 한국대표로 대만과 자원봉사자 자매결연을 맺고 일주일간 대만의 자원봉사 현장을 살피고 왔다고 한다. 또한 늘 관심을 가지고 한국노인복지학회, 한국죽음학회, 세계평생학습포럼, 한국호스피스 완화의료학회 등에도 꾸준히 참가하고 있다. 지난해에는 아시아 국제 교류기구에서 주관한 노인(고령자)케어 PACT(Play, Art, Care, Toy) 지도자과정을 수료하고 노인치매예방 지도자 2급 자격증을 획득하였다.

현재는 ‘(사)기호문화유산활용진흥원 이사’, ‘한국노년인권협회 충남지부장’을 역임하고 있으며 (사)한국자유총연맹 계룡시지회 고문, 자유시민연합 고문, 한국노년인권신문 인권기자, 그리고 지역신문사의 편집위원 등을 두루 맡으며, ‘계룡시평생학습동아리연합회장’으로 계룡시 평생교육 활성화와 평생학습도시로의 도약을 위해 활발한 활동을 펼치고 있다. 

또한 천주교회 활동으로 ‘한국연도보전연구회 기획위원’, ‘대전연도를 사랑하는 사람들 회장’이며, 연도전문강사 자격증을 가지고 대전갈마동성당에서 연중 매월 둘째줄 일요일 오후에 회원들과 함께 천주교상장예식을 연수지도하고 있다. 요즈음 삼복중에도 서울을 오가며 ‘(사)충효예문화운동본부’에서 ‘충효예교육지도사’ ‘충효예힐링지도사’ 과정을 연수하고 있다. 

이런 사회활동을 계속할 수 있었던 것은 충남평생교육진흥원이 주관하고 상명대학교 성인교육센터에서 실시한 ‘충청남도 비영리 단체 재직자 교육기획 홍보역량 강화 실전과정’과 ‘사회적 경제 창업 코칭과정’을 수개월에 걸쳐 수료한 것에 많은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

금년에 특별한 활동을 빼놓을 수 없다고 한다. 그것은 대통령선거와 지방선거(도지사, 도의원, 시장, 시의원)에서 그야말로 불철주야 누구보다 앞장서서 활동하여 정권을 교체한 일이라고 한다. 

 

 

 

 

 

 

어릴 적 꿈 이룬 것 같아 뿌듯

 

그의 고향을 물으면 그는 잠시 대답을 망설인다. 그는 1942년 3월 10일 서울에서 출생하였다. 1945년 대전으로 이사왔고, 대전선화초등학교 3학년 때에 6.25전쟁을 맞아 방동저수지 윗마을 성북동으로 이사와 그곳에서 2년 반 동안 10리가 넘는 험한 고갯길을 걸어서 진잠국민학교를 졸업했다. 국립대전사범학교병설중학교를 거쳐 국립대전사범학교를 졸업했다. 교직 재직 중 대학과 대학원(한국교원대학 교대학원)을 졸업하고 교육학 석사학위를 가지고 있다.

그는 1920년 황해도 안악에서 신도안으로 피난 오셔서 동학의 한 갈래인 상제교의 지도자이셨던 할아버지께서 사시고(당시 논산군 두마면 부남리 95번지) 아버지(두마공립보통학교 졸업, 대전공립상업보습학교 졸업)와 작은 아버지(공립강경상업중학교 졸업)가 소년시절을 지내며 자라신 이곳 계룡시를 고향으로 정하기로 했다고 한다. 

그는 진잠국민학교 5,6학년 연 2년간 담임선생님이셨던 송옥영 선생님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말한다. 

 

“매우 인자하신 선생님으로 혼신을 다해 어린 저희들을 가르치셨습니다. 저의 롤모델 이셨지요. 옛 한국청년회관 건물의 작은 강당을 빌려서 칠판 양쪽에 호롱불을 켜 달아놓고 늦은 밤까지 우리들을 가르치셨습니다. 학교 인근에 사는 학생의 학부모들을 일일이 찾아가 집이 먼 제자들의 숙식을 부탁하셨고, 선생님께서는 작은 옆방에서 자취를 하시며 제자들의 교수-학습지도를 열정적으로 해주신 참으로 고마우신 선생님이셨지요.”

 

당시를 회고하는 전광정 선생님은 그런 교사를 이제는 찾을 수가 없다고 말한다. 당시 공부 좀 한다는 학생들 중 남학생들은 선생님, 의사, 여학생들은 간호사가 꿈이었던 시절이었다. 그도 담임선생님과 같은 훌륭한 선생님이 되겠다는 꿈을 키우며 열심히 공부했다고 한다.

전광정 선생님이 살아오며 큰 힘이 되어주고 또 그가 의지해온 것은 종교일 것이다. 그가 처음 성당을 찾은 것은 서울에서 피난 온 후 대전에서 어렵게 생활하던 당숙모를 따라서였다. 국립대전사범학교 2학년 때라고 기억한다. 처음 목동성당에 들어섰을 때 그는 그 엄숙하고 신비스러운 분위기에 압도당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는 바로 성당에 나가 신앙생활을 하지는 않았다. 

그러다 병역 의무를 마치고 교사로 복직한 후 임지에서 하숙 생활을 했는데, 그 집이 마침 목사님 댁이었단다. 하루는 그 목사님 사모님과 같은 학교 여선생님의 권유로 그분들을 따라 교회에서 열리는 부흥회에 참석했는데, 그 열광적인 신도들의 모습을 보고 자신과는 맞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고등학교 때 당숙모를 따라갔었던 성당의 그 종교적 분위기와 대비되었다고 한다. 

그러다가 당진초등학교 교사 생활을 할 때 다시 성당을 찾게 되었고, 그곳 신부님과 가깝게 지내다가 ‘디도’라는 세례명을 받고 신앙생활을 시작하게 되었다고 한다. 

 

“아마 내가 교사이다 보니 신부님께서 가르치는 분이셨던 ‘디도’ 성인의 세례명을 주신 것 같습니다. 그때가 29살 때입니다. 늦게 시작하였다가 오랫동안 쉬고 다시 시작한 신앙생활이지만 제가 살아오며 그 신앙을 통해 많은 위로와 힘을 받았습니다.”

 

 

 

 

우리들의 영원한 선생님!

 

그는 여든을 넘겼지만 아직 여러 분야에서 쉼 없이 열성적으로 활동 중이다. 인생 후배들에게 해주실 좋은 말씀 한마디를 부탁드리자, 그는 평생 선생님답게 자녀교육에 대한 이야기를 해주신다. 

 

“교육이 가장 중요하지요. 부모님이 가정에서 하는 가정교육과 선생님이 학교에서 하는 학교교육 모두 중요하지만, 그 중 가정교육이 훨씬 더 중요합니다. 특히 어렸을 때 맘껏 뛰놀며 마음과 몸으로 자연과 함께하는 자연체험교육은 우리 아이들의 인성을 좌우하지요. 그래서 가정에서 이루어지는 부모교육이 더 중요합니다. 1시간 공부 더 시키려 하지 마시고 아이들 손잡고 밖으로 나가서 들을 함께 걸으세요!”

 

전광정 선생님은 1978년 대전신흥초등학교 교사 때 한경진 사모님과 결혼하여 슬하에 1남1녀를 두고 있으며, 현재 계룡시 두마면 사계로 101, 115동 802호(계룡더샵A)에 거주하고 계신다.

 

​- 여재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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