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의수의 스케치-10] 보령읍성 해산루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는 또 하나의 학교 정문
▲ 보령읍성 해산루/ 종이에 펜/ 30×41c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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읍성이란 군이나 현의 백성들을 보호하면서, 군사와 행정의 기능을 함께하는 평지성을 말합니다. 그러니 제목에서 보듯이, 과거 고려·조선시대에는 이곳 읍성이 있는 보령시 주포면이 바로, 보령의 행정 중심지였다는 이야기가 됩니다. 오늘날에는 보령시 중심가(대천)에 모든 것을 다 내주었지만 말입니다.
보령읍성의 해산루는 보령 관아의 정문인 남쪽 문루(성문과 누각을 겸한 건물)입니다. 주포초등학교와 보령중학교 앞에 있으니 이 학교의 정문도 겸한 샘이지요. 읍성 안에 학교가 있기에 이처럼 멋진 정문을 가진 학교도 드물 것입니다. 학교 안에는 뒷산의 진당산 폐사지에 묻혀 있던 오층석탑도 발견하여 옮겨놓아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는 모습이 꽤 인상적입니다.
하지만 문화재 보호구역 안에 학교를 지은 관계로 여러 법령에 저촉되다 보니 낡은 건물의 외형적인 보수에 그치게 되어, 학교의 증축이나 개축 등 열악한 교육환경을 극복하는 것 역시 시급하다 하겠습니다. ‘과거 이 땅에 살아왔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전해주는 문화재를 보존하면서도 우리 학생들이 불편함 없는 교육환경을 만들어주어 공존하는 일 또한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의 몫이 아닌가’ 하여 이들을 아우르는 지혜를 모아야 할 것입니다.
해산루는 아래 위로 긴 주초석 위에 기둥을 세우고, 그 위에 멋진 누각을 올렸습니다. 기둥 양쪽으로 성벽의 돌담이 운치 있고, 작품의 오른쪽에 보이는 것처럼 성벽 앞에는 이곳으로 부임한 관리들의 송덕비들이 도열하며 인사하듯 늘어서서 사람들을 반깁니다.
서해안은 삼국시대부터 왜구의 침략이 끊이지 않아 늘 불안한 곳이었습니다. 고려시대인 11세기 무렵 계속되는 거란의 침략이 있자, 이를 방비하기 위해 처음 토성으로 쌓은 것으로 전합니다. 후에 왜구의 침략으로 황폐해지자 고려 말엽에 석성으로 고쳐 쌓게 됩니다. 방비를 위한 수영도 곳곳에 세워지면서 각 고을의 읍성도 석축으로 견고하게 쌓은 곳이 많은데 보령읍성도 그 중 한 곳입니다. 기록에 의하면 조선 초기 1430년, 성을 정비할 당시에는 둘레가 630m 높이 3.5m로 그리 크지 않은 읍성이었습니다. 그러나 임진왜란 때 완전히 파괴되어 제대로 복원되지 못하고 오늘에 이르게 됩니다.
이처럼 조선시대에 석성으로 고친 것으로 보아 조선시대 중반까지 이 읍성은 군사요충지로, 행정 중심지로 그 역할을 다했기에 이제는 조용히 쉬고 있는 느낌이 듭니다. 누각 위에 쓰인 현판 ‘해산루’(海山樓)의 글씨는 물 흐르듯 호방한 기운이 넘쳐납니다. 조선 중종 때 영의정을 지낸 이산해 선생의 글씨라고 합니다.
이산해는 고려말 충신인 서천 한산 이씨 세거지의 목은 ‘이색’ 선생의 6대손입니다. 어려서는 집안의 작은아버지인 토정 이지함 선생으로부터 학문을 배웠고, 조선 선조 때 여러 요직을 거친 신하였습니다. 그의 집안은 정여립 모반사건이 되는 기축옥사(1545)에 연루되어 화를 입게 되자, 한양에서 고향인 이곳 보령으로 이주하여 어린 시절을 보내게 됩니다. 그는 어려서부터 총명함과 함께 글씨에 능해 신동으로 불렸다고 합니다. 현판을 보노라면 군더더기 없는 활달한 필치가 잡생각에 찌든 마음마저 시원하게 달래주는 듯합니다.
옛 모습대로 그리려 했지만, 전봇대와 전깃줄을 보이는 그대로 표현하는 것이 낫겠다 싶어 화폭에 담았습니다. 때로는 사실의 묘사가 훨씬 현장감을 주기 때문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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