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가족들과 함께 선영에 다녀왔습니다. 해마다 광복절이면 온 가족이 모여 조상들의 묘소를 돌보며 추억을 나누고 가족 간의 화합을 도모하는 자리였습니다. 그런데 그날따라 문득 눈에 띄는 것이 있었습니다. 아주 오랜 세월동안 선영뿐만 아니라 곳곳에서 익숙하게 보아 오던 모습이 갑자기 낯설게 느껴졌습니다.
제 눈에 갑작스레 낯설게 다가온 모습은, 다름 아니라 묘소의 비석이었습니다. 아니 비석이 문제가 아니고, 비석에 새겨진 고인의 이름이었습니다. 우리나라 모든 묘소의 비석에는 돌아가신 분의 이름이 새겨져 있습니다. 대개 관직과 본관 그리고 이름이 새겨지지요. 그런데 부부가 함께 모셔진 곳의 경우에는 부인의 이름이 없습니다. 고인의 부인, 즉 후손들의 어머니나 할머니의 이름은 단지 본관과 성만 기록되어 있을 뿐입니다. 이름이 없는 것이지요...
이름은 개인의 귀중한 자산
세상의 모든 사물은 물론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추상적인 사상이나 관념에도 모두 이름이 있습니다. 사람에게는 더 말할 것도 없지요. 우리가 세상에 태어나면 가장 먼저 부모로부터 받는 선물이 무엇일까요? 바로 이름입니다. 부모들은 갓 태어난 아이에게 거는 기대와 소망을 이름에 담아 가장 좋은 이름을 지어 부르고 싶어하지요. 요즘에는 태명(胎名)이라고 해서, 아직 엄마의 태중에 있는 아이에게도 이름을 지어 부르는 일이 아주 자연스레 되었습니다.
이름은 한 개인을 특정짓고 개인의 인격과 특성을 드러내는 가장 일차적이고 기본적인 장치입니다 우리가 누구를 만나서 처음 하는 일은 무엇일까요? 눈으로 인사를 나눈 뒤에는 바로 이름을 주고받게 됩니다. 누군가와 만나 대화를 할 때 상대의 이름을 정확히 기억하는 일은 모든 사회 생활의 기본이며, 인간 관계 설정의 핵심이 되는 일입니다. 오래 전에 잠깐 만났던 사람이 오랜 시간이 지난 뒤에 다시 만났을 때 내 이름을 정확히 기억하고 있다면, 그 기쁨과 놀라움은 정말 대단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면 그 사람에 대한 신뢰가 더 깊어지겠지요.
사실 100여 년 전까지만 해도 우리네 여인들에게는 변변한 이름이 없었습니다. 양반댁 여인들에게는 간혹 이름이 전해지는 경우가 있지만, 그 이름도 개인의 본명이 아니고 신사임당이나 허난설헌, 임윤지당처럼 당호가 전해질 뿐입니다. 양반댁이 아닌 평민가정의 여인들은 더 말할 것도 없었지요. 그저 끝순이나 언년이, 막동이 따위로 불렸겠지만, 그래도 그분들에게도 분명 이름은 있었을 겁니다.
지금은 시대가 완전히 바뀌어 남녀 누구에게나 이름이 있습니다. 그만큼 개인의 인격을 존중하고 남녀의 차별을 두지 않는 소위 양성평등의 사회가 적어도 이름에서만은 완벽히 실현된 것입니다. 가히 성명평등(姓名平等)의 시대가 만들어진 것이지요.
그런데 한군데에서는 아직도 이런 성명평등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네요. 부부가 함께 영면을 취하고 있는 묘소의 비석에 남편의 이름만이 도드라지고 그와 더불어 평생을 살아온 부인의 이름이 새겨지지 않는 것은, 오래전 전통사회의 가부장적인 관습의 흔적이겠지요.
이제 비석에 부인의 이름을 새기자
이제는 새로운 비석의 모양이 필요해 보입니다. 선영을 둘러 볼 때 함께 간 조카에게 할머니의 이름이 무엇이었는지를 물어 보았습니다. 할머니의 손에 유년시절을 보냈던 아이였는데도, 우물쭈물 대답을 정확히 하지 못하는 것을 보면서, 이제부터라도 우리의 후손들은 아버지와 할아버지의 묘소에 와서 그분들을 추억할 때 함께 누워 계신 어머니나 할머니의 이름이 무엇이었는지를 분명히 알게 해주어야 하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전통의 가치는 세월이 지나도 지켜져야 합니다. 그러나 시대가 바뀌고 사회적 가치관이 변하면 전통 또한 변하는 것이 맞지 않나 생각합니다. 이제부터 부부가 함께 계신 묘소의 비석에 두 분의 이름이 함께 새겨지기를 기대해 봅니다.
▲ 정경일 건양대학교 디지털콘텐츠학과 명예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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