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내가 이럴 줄 몰랐어요
“선생님. 제가 이럴 줄 몰랐어요.” “누구나 자기가 그렇게 될 줄은 모릅니다. 자기는 예외일 줄 알지요.” 어느 날 아침에 내가 출근길에서 나눈 대화이다. 상대는 나와 함께 시를 공부했던 70대 중반의 여성. 그분은 아주 독실한 기독교 신자이다. 아주 모범적인 초등학교 교원으로 근무하다가 정년 퇴임하고 나서, 공무원에서 정년퇴직한 남편을 극진히 수발하는 알뜰한 주부였다. 그런데 병이 생겨 병원을 오가던 중에 부군이 타계하셨다. 건강하지 못한 몸으로 남편을 수발하는 일도 어려웠지만, 그보다 남편이 없이 혼자서 지내는 고독감이 더 힘들다고 했다. 가까운 곳에 아들이 살고 있지만, 아들, 며느리가 채울 수 있는 공백은 그리 크지 않다. 여러 날을 눈물로 보냈다. 눈물이 잦아들 즈음, 그동안 느끼지 못했던 고통이 몸 구석구석에서 신호를 보내왔다. 특히 무릎이 문제였다. 수술하여야 하는데 체중이 너무 적어 회복이 어렵다고 의사는 망설였다. 이판사판, 수술을 받았다. 수술은 원만히 진행되었으나 체력이 약해 회복이 느렸다. 재활 치료로 6개월을 보냈으나 진전이 없고, 병원 생활이 지루하여 퇴원하였다. 집에서 요양 중이나 체력은 크게 좋아지지 않고, 자유롭게 걷지도 못한다. 그래서 바깥출입을 억제하며 산다. “교회에 지팡이를 짚고 오는 분이 있어서, ‘지팡이를 짚고 오셨네’ 했는데, 지팡이를 짚고 갈 수 있을 때 교회에 가 볼 걸 그랬어요.”라고 했다. 이제 지팡이를 짚고서도 교회에 갈 수 없다는 생각. 안타까운 일이다. 나는 그날 통화 후에 자주 만나는 분들에게 말하였다. <병 들어 후회 말고, 건강할 때 잘 지키자>. 그렇다. 우리는 ‘나는 아닐 것이라는 생각’을 자주 한다. 그러나 예외는 특별한 사람에게만 주어지는 로또다. 어디 로또가 그리 쉽게 맞아 주던가.
역사에서 배워야 한다
중국 진(秦)나라 때에 상앙이라는 정치가가 있었다. 그는 본디 공손앙이라는 이름을 가진 위나라 사람이었다. 위나라에 있을 때, 공숙좌라는 재상 밑에 있었다. 공숙좌가 늙어 병이 들었을 때 병문안을 온 임금에게 공손앙을 자신의 후임으로 추천했다. 그러나 임금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러던 차에 진나라에 21세의 젊은 임금 효공이 등극하였다. 이때 진나라는 이웃의 위나라와 초나라의 위세에 눌려 숨죽여 살아야 했다. 젊은 임금은 야심이 있는 사람이었다. 나라를 크게 부흥시켜 보고자 훌륭한 인재를 모집한다는 구현령(求賢令)을 내렸다. 능력을 인정받지 못하던 공손앙에게 좋은 기회가 찾아온 것이다. 공손앙은 진효공에게 불려가 ‘왕도(王道)’에 대해 자신의 의견을 역설했다. 그런데 진효공은 꾸벅꾸벅 졸기만 했다. 다음 날은 ‘패도의 기술’에 대해 이야기했는데, 효공이 자세를 고쳐 앉았다. 그다음 날은 ‘부국강병책’에 대해 이야기했는데, 효공은 기뻐하며 며칠 밤낮을 토론했다고 한다. 그렇게 공손앙은 효공에게 채용되었다. 공손앙은 ‘변법(變法)’이라 불리는 개혁을 통하여 진나라의 제도를 혁신시켰다. 농업 생산을 장려하여 국가 재정을 늘리고, 강한 군대를 양성하였다. 국가의 모든 힘을 군사력을 기르는 데 집중하였다. 이 과정에서 엄격한 법 집행을 통하여 기강을 확립했다. 귀족에게도 평민과 마찬가지로 엄격하고 공평하게 법을 집행했다. 그래서 진나라가 천하를 통일하는 기반을 닦았다. 공손앙의 변법은 정전제를 폐지하고 토지 사유제 실시, 군현제 실시, 도량형 통일 등 획기적인 정책들이었다. 효공이 상(商)이라는 곳을 봉지로 내렸다. 그래서 그의 이름은 상앙이 되었다. 그의 공로가 얼마나 컸는지 임종이 임박한 효공이 상앙에게 군주의 자리를 물려 주려 했다고도 한다. 효공이 죽자, 상앙의 개혁으로 인하여 손해를 당했던 귀족들이 그를 역모죄로 옭아 죽였다. 상앙이 창안해 낸 것 중의 하나가 거열형인데, 그도 이 형벌을 받았다. 역사는 우리에게 많은 교훈을 준다. 정의와 불의의 결말을 분명하게 보여 준다. 그런데도 ‘나는 아닐 거’라는 생각으로 이를 외면하는 어리석음을 되풀이한다.
<저작권자 ⓒ 놀뫼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