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필 수기]
‘송산 전일갑의 반쪽’ 아내의 삶을 돌아보며...
나 현춘자는 11세 때 친정아버님께서 돌아가셨다. 친정아버지께선 1년이 넘게 병석에 누워계시다 돌아가셨기 때문에 집안형편이 어려웠다. 그때부터 나는 “딸 다섯 중에 셋째딸이 똑똑하다”고 하여 할머니와 함께 집에서 콩나물을 키워 팔기도 하고, 나물을 뜯어 팔기도 했다.
국민학교 5~6학년때 100m달리기 선수로 부창, 동성, 반월학교 달리기에서 1등 하고, 과외공부도 못하였지만 논산여중에 합격을 하였다. 그렇지만 집안형편상 돈이 없어 입학도 못하고 장학금을 주는 기민중학교에 들어가게 되었다. 수학을 너무 잘해서 학교에서 ‘수학박사’ 소리를 들었지만, 학교를 다니면서 장사를 하는 어려움이 있었다. 선생님께서는 역경을 이겨내서 김활란 여사처럼 되라고 격려를 해주셨다. 서울야간동성여고에 입학하였지만 서울생활이 춥고 너무 고생스러워 졸업을 하지 못했다. 동대문 왕자고무 특약점에 있다가 9년 만에 집에 와서 19일 만에 전일갑 씨와 결혼~
“전일갑 씨 집이 부자”라고 하여 시집을 와보니 등잔불에 종중 빚과 쌀계 2번 빚이 있었다. 재산은 과수원뿐~ 식구는 시할머니, 시부모, 시누 둘, 국민학교 6학년인 시동생. 과수가 떨어지면 그 때부터 종중 빚으로 생활을 하였다. 그리하여 종중 빚에 마살미 밭까지 내놓았다. 그때부터 아버님께 사정하여 쌀계 30가마 시작하였다. 그때 어머님께 너무 많이 혼났으나 나는 친정동기간과 쌀계를 시작하였고, 그때부터 살림을 아버님께서 나한테 맡기셨다.
죽기 아니면 살기로 일을 밤낮으로 하였다. 밤 1시 안에 방에 들어가지도 못하였고, 딸 넷을 낳고 아들 낳을 때 친정어머님이 오셔서 일하는 것 보고 집에 가시지 못하고 4년 동안 집안일을 도와주셨다. 어머님께서 집안일을 돌봐주셔서 조금 여유가 되어 종중 논이며 선자 논을 짓기 시작하였다. 인부 품삯 아껴보려고 남자일꾼 몫까지 논두덕 풀깎기, 벼베기, 지게질, 통일벼 도구통에 넣고 두들기기 등 일만 정신없이 하다가 시어머님 생신 잊어버려 쫓겨날 뻔도 하였다.
남편이 벼 탈곡기 들여와서 품삯 줄이기 위해 말질을 하다가 쇠날에 머리를 다쳐 피가 많이 흘러도 일하느라 모르고 땀인 줄만 알고 계속일 하다 담배, 쑥으로 막고 머리를 동여매고도 그날 일을 끝내려고 또 말질을 계속.......
과수원 소독을 점심도 못 먹고 하다가 약해를 입기도 하였다. 남자일꾼들과 거름 주며 일을 많이 하기 위해 삽질 시합도 해가며 일을 닥치는 대로 쉬지 않고 했다. 과수원 일이라는 게 겨울에도 끝이 없어 나무치기, 전지를 섣달 그믐까지 밥 광우리를 이고 나가면 동네사람들은 길가에 앉아서 “억대 거지가 일만 한다”고 말하여 부끄럽기도 하였다.
시어머님께 일만 한다고 꾸중도 많이 듣고, 그때 그시절 냉장고가 없어 익은 김치 안 드셔서 학독에다 등잔 불 켜고 고추 갈아 매일 김치 담가야 했다. 작두샘에 쌀겨로 만든 빨래비누로 과수원에서 일하고 와서는 밤1시까지 빨래를 해야 했고, 그 이튿날 먹을 음식하고 너무 고달파 성에 맛도 모르고.... 임신은 언제 하는지도 모르게 아이는 들어섰고, 일에 치여 입덧 할 새도 없이 고추장 퍼먹으며 빚에서 벗어가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그토록 힘들게 살았는데 55세 잊혀지지도 않는 6월 13일이 닥쳐왔다. 배봉지 싸는데, 남들이 높은 곳 못 싸서 내가 싸다 떨어졌다. 척추를 주전자에 다쳐 119로 병원으로 옮겨졌고, 그때부터 병원생활을 계속되어 젊어서 모질게 부린 몸 고장이 나서 다리, 목, 허리디스크 온몸에 장애가 와서 3급 장애자가 되었다. 몸이 성치 않으니 운전이 절실히 필요했고 65세에 운전면허를 땄다.
딸 4명 아들 2명, 6남매 가르치고 결혼시키고, 참 빚은 벗어나기가 힘들었다. 쌀계 100가마 시작할 때마다 2개를 하고 보니 쌀계 3번을 하여 논도 사고 집도 짓고, 농가목돈 빚을 이어가면서도 방을 11개 세놨다. 한 때는 하숙도 하였다. 그렇게 힘들게 생활을 하였는데 내 삶에 서광이 비취기 시작했다. 2006년 12월에 과수원이 택지개발에 들어가게 되어 2007년 1월 돈이 나왔다. 억대 재산 가진 시골 갑부라는 말을 들었지만 “농촌 갑부 일구데기 속”이라고, 평생 과수원 일속에서 빚 속에서 헤어날 줄 모르고 힘들게 살았는데 그 땅이 팔리니 비로소 억대 재산가가 되었고 일 속에서도 벗어날 수 있었다.
내가 남편과 결혼한 지가 올해로 42년째다. 남편이 칠순이라 책을 만든다고 해서 부부는 일심동체니 한 편을 써야 한다기에, 남편처럼 시를 지을 줄도 모르고 지나온 삶을 생각해 보는 계기가 될 것 같고 하늘보다 높으신 남편 뜻 거역할 수 없어 한편 보태 본다. 남편 책에 누가 되지는 않을까 걱정이 되고, 남편이 자랑스럽기도 하다.
장애 3급 부모지만 자식한테는 장한 어머니라 생각하며 6남매를 바라보며 살 수 있다는 것이 행복하다. 6남매 성실하고 앞으로 남은 생, 지금보다 값지고 재밌게 살아야지! 그래야 자식들이 좋아하겠지. 엄마 재밌게 건강하게 잘 살 거고. 우리 6남매 파이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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