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회 모루평화문화상 수상을 축하합니다. 대장간에서 쇠 두드릴 때 온 몸으로 받쳐주는 모루는, 김홍신 작가의 호이기도 합니다. 우리도 모루와 같은 삶을 사는 때가 종종 있는 거 같아요. 조수연 작가 삶 역시 그러했을 거 같은데요....
1960년대생 제 또래는 대부분 그랬을 겁니다. 누군가의 보호보다는 스스로 모루가 되어야 했던 세대죠. 전 재산이 6마지기 천수답뿐인 집안의 장남으로 자라면서, 부모님의 삶이 제 어깨에 달려 있다고 믿으며 살았습니다. 1988년 3월 11일, 전역한 다음 날 어머니로부터 2만원을 받아서 14,000원짜리 바지와 4천원짜리 신발 하나 사 신고 집을 나섰습니다. 그날 이후 중년이 될 때까지의 제 꿈은 단 하나였습니다. ‘내 덕분에 부모님의 삶이 조금이라도 나아지게 하자.’ 93세가 되신 아버지께서는 요즘 이렇게 말씀하세요. “네 덕분에 내가 지금 편안히 산다. 이제 남은 건, 길게 아프지 않고 가는 일뿐이다.” 그 말 들을 때마다, 모루로 살아온 세월이 결코 헛되지 않았음을 느낍니다.
이제는 제 차례라고 생각합니다. 젊은 시절 부모님을 위해 모루였다면, 지금은 누군가의 꿈을 받쳐주는 모루가 되고 싶습니다. 대전·대구·광주에 성우학원을 열어 지방에서도 성우의 꿈을 키우는 아이들에게 버팀목이 되고, 고향 강경에서는 공연단체를 만들어 평범한 사람들의 숨은 예술혼을 일으키는 일에 힘 쏟고 있습니다. 삶이란 결국 서로의 모루가 되어주는 일 아닐까 생각하죠.
이번 상 이름이 ‘평화문화상’입니다. 문학상·문화상은 많지만 평화상은 흔하지 않은 거 같아요. 갈등과 반목의 시대, 우리에게 가장 절실한 것은 평화, 심신의 평온 같습니다. peace maker가 갈급한 상황에서, 조 작가는 어떤 역할을 해가고 있다고 생각하는지요?
별일 없이 안녕(安寧)한 상태를 원합니다. 세상을 구원한다 해도 저의 평화가 깨지는 건 원치 않습니다. 그래서 불합리한 상황에 처해도, 누가 싸움을 걸어와도 피하거나 양보합니다. 큰 소리 낼 일에 관여되고 싶지 않아서. 생각만 그런 것이 아니라 제가 강경에서 실천해 나가는 것들도 그 연장선에 있습니다. 언어와 낭독, 그리고 무대예술은 서로 다른 사람들을 한자리에 앉히는 힘을 갖고 있지요. 작품을 통해 사람들이 ‘다시 대화하게 하는 예술’을 꿈꿉니다. ‘별들의 낭독’도 그랬고 ‘치매노인극’, ‘꼭두각시놀음’ 공연도 같은 맥락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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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갱경 꼭두각시놀음 강경대흥시장 공연(2025년 9월, 옥녀봉예술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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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루평화문화상 첫수상자로서, 그 동안 본인의 활동을 되돌아 보았을텐데요, 그 중 어떤 일이나 어떤 점이 부각되었다고 보시는지요?
김홍신 작가님이 대표작 ‘인간시장’을 통해 말하고자 한 것은 ‘치열한 삶, 삶의 밑바닥에서도 인간의 품격을 잃지 않는 사람’이 되자는 것 아닐까요? 저는 거창한 평화운동가라서가 아니라 일상 속에서 ‘사람을 잇는 평화’를 실천해온 사람이라서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저는 30년 만에 돌아온 고향에서, 생경하지만 무난하고, 쉬워 보이지만 창의적인 재미를 함께하는 사람들과 나누고 싶었습니다. 그 동안 제가 기여한 게 있다면, 그건 누군가의 마음이 평온하고 즐거워지는 일, 우리가 하는 일이 남들과는 좀 더 차별성이 있다고 느껴지고 그로 인해 삶이 평온으로 이어지도록 하는 일이겠는데, 그것들이 상으로 이어졌다면, 그저 고맙고 조용히 감사할 뿐입니다.
고향인 논산 강경에 내려와 옥녀봉예술촌 창단을 한 때가 2020년, 어언 5년이 흘렀습니다. 귀향한 계기 내지 동기가 궁금해지네요.
직접 계기는 연로하신 아버지의 독거와 10년을 맞이한 어머니의 요양원 생활 때문이었습니다. 매일 문안을 드리진 못하더라도 가까이 사는 것만으로도 어른들이 든든해하실 거라는 생각에서였죠. 두 번째 이유는 40살 근처에서부터 고민하던 후반기 인생을 어디서 펼칠까에 대한 결론이었습니다. 방송작가생활 마무리 이후에도 서울에 살고 싶진 않았습니다. 죽을 날만 기다리는 늙은 개가 될 것 같다는 두려움이었죠.
은퇴한 이들이 선호하는 지역이 좀 있더군요. 충무, 양평, 정선, 강릉, 서천, 완주, 안동, 청도 등등... 헌데 그런데 가서 나 혼자 사나요? 안 그래도 잡다한 인간관계 맺는 거 극도로 싫어하던 제가 그 낯선 땅 가서 새로 사람 사귀고, 내 이상을 만들어가기엔 불가능하겠더라구요. 결국 고향으로 가는 게 답이었습니다. 그 기대와 상상은 거의 그대로 맞았습니다. 아니 그 이상 행복합니다.
서울에서 옥녀봉 내려와 준비하고 활동하는 데 있어서, 그 동안 쌓아온 캐리어, 인맥 등이 적잖은 도움 됐을 거 같아요.
돌아보면 살아오면서 굽이굽이에서 ‘모루’들을 만난 것 같습니다. 1988년 군 제대하면서, 그 이전에 10여년 해오던 연극배우를 다시 시작했습니다. 그 시절 대한민국 연극연출의 1세대인 고 임영웅 선생을 만났고, “연기 잘 한다”는 선생님 격려 한 마디에 무서울 것 없이 무대에 올랐었죠. 하지만 가난을 이길 도리는 없었습니다. 한 10여년 흘러 내 인생 중간 정산을 해보니까 가진 게 너무 없는 거예요. ‘이 세상에서 연극만큼 비효율적이고, 내 부모의 기대에 반하는 일이 있을까’ 싶더라구요.
그러던 중 2001년에 ‘그냥 내본’ 단막극 대본이 KBS 드라마 공모에 당선되었고 정식 방송작가 생활을 시작했죠. 24시간 중 20시간 일을 하면서 살았던 것 같습니다. 침대에 눕는 건 일주일에 한번쯤이었죠. 침대에서 자면 길게 잘까봐.... 특히 KBS무대 라디오 드라마 공모 당선을 시작으로 <환경스페셜>, <성공시대>, <역사를 찾아서> 등 KBS와 MBC의 주요 라디오드라마, 시사, 역사, 다큐 프로그램 작가로 활동했습니다. EBS <라디오 역사극장>이나 국방TV의 전쟁 다큐멘터리처럼 역사와 인문학을 깊이 다루는 작업도 병행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만난 서혜정 성우는 당시 그 비싼몸(ㅎ)임에도 불구하고 저의 페르소나 성우가 돼주었습니다. 제가 하는 작품은 서혜정 성우가 웬만하면 함께 해주셨답니다.
그렇게 연극무대와 방송작가 생활에서 맺은 인연으로 만난 이들은, 지금 강경 활동에서도 이어지고 있습니다. 연극무대에서 형처럼 스승처럼 가르침을 주었던 분은 터무니없는 출연료에도 강경 무대에 서 주었죠. 특히 25년째 끈끈한 인연을 이어오는 서혜정 성우는 전설같은 성우 선후배들을 ‘별들의 낭독’으로 끌어들여 주었습니다. 그 삶의 전쟁터에서 만났던 그 인연들은 지금도 저에게 모루가 되어 주고 있답니다. 저의 전우가 되어 주었다고나 할까요.
옥녀봉예술촌에서 가장 주력하는 일과 아울러서, 동인(動因)인 예술철학이 궁금합니다.
옥녀봉예술촌이 가장 주력하는 일은 거창한 구호나 사명감 이전에 ‘공연’ 그 자체에 있습니다. 강경의 역사와 이야기를 담고, 강경이나 논산 지역민이 참여하는 지역 기반의 고유한 공연을 제작하는 것입니다. 한편으로는 문화 접근성을 확대하는 차원에서, 제가 중앙에서 쌓아온 인맥과 역량을 활용하여 ‘별들의 낭독’과 같이 지역에서 접하기 힘든 수준 높은 예술 콘텐츠를 주민들에게 선보이는 일을 병행하고 있습니다.
이 ‘별들의 낭독‘은 어떠한 외부 지원금 없이 저 개인의 능력 범위 내에서 이루어지고 있다는 점이 내심 자랑스럽습니다.
하지만 옥녀봉예술촌의 궁극적인 목표이자 가장 중요한 철학은 ‘우리가 만든 공연을 유료 공연으로 이어지도록 하는 것’입니다. 강경에 귀향한 5년 동안 가장 아쉬웠던 점은, 지자체들이 예산을 써서 좋은 공연을 데려와도 대다수가 공짜거나 5천 원 정도의 소액으로 관객을 모은다는 것입니다. 공짜공연이다 보니 노쇼도 많아서 빈 객석이 적지 않고, 관객으로 하여금 ‘공연은 공짜로 보는 것’이라는 잘못된 관행이 쌓이게 되죠. 이런 현상이 계속된다면, 우리 지역만의 자생적인 예술인은 결코 태어날 수 없습니다. “유명한 ○○○씨도 무료 공연을 하는데, 당신들이 뭐라고 관람료를 받느냐?”는 말이 상식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공연은 마땅히 돈을 받아야 합니다. 옥녀봉예술촌의 목표는 명확합니다. <돈 받는 공연 하자> 그리고 그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관객이 돈을 지불할 가치 느끼도록 ‘돈 값 되는 공연’을 만들어 가는 것이 우리의 사명입니다.
그 뜻, 그 꿈 달성하고자 지난 5년간 어떤 활동을 어떻게 펼쳐왔는지요?
사실 지난 5년은 옥녀봉예술촌 공간으로 활용하고 있는 ‘구 조선식산은행 지점장관사’의 혁신이었습니다. 강경에 내려와 공연단체를 위해선 상징성 있는 공간이 필요하겠다 싶더군요. 그래서 구한 공간이 서울 아파트 대출받아 마련한 이곳입니다. 중개인 소개로 처음 이곳을 보고 5분 만에 결정한 공간이죠. 지난 5년의 시간은 ‘공간 혁신’과 ‘콘텐츠 실험’의 시간이었습니다. 폐허에 가까웠던 관사를 팔뚝 걷어부치고 리모델링하여 전시, 공연, 커뮤니티가 가능한 복합 예술 공간으로 바꾸었습니다.
그리고 매년 옥녀봉문화제를 개최하며 치매 노인 연극, 무성영화 변사 공연 등 차별화된 주제로 지역 주민들의 니즈를 충족시켰습니다. 한국 최고의 성우들을 초대하여 공연하는 ‘별들의 낭독’은 지역 문화 수준을 한 단계 끌어올렸다는 평가를 받았고요. 와중에 <극단 젓갈창고>를 창립하였습니다. 전통 연희극을 제작, 강경의 정체성을 담는 콘텐츠를 개발했는데, 그 덕분에 한국예총 초청으로 서울에서 ‘명동1950‘을 성공적으로 연출하였답니다. 지역 문화의 역량을 중앙 무대에 입증한 보람을 느끼는 쾌거랄까요....
처음 가는 길이다보니 중도에 접고 싶을 때도 적잖았을 거 같아요. 언제였으며, 또 그 고갯마루를 어떻게 넘어갔는지요?
귀향 초기, 특히 예술촌 부지를 매입하고 리모델링을 시작했을 때가 가장 힘든 고갯마루였습니다. 저 혼자 힘으로 수억 원의 자금을 투입해야 했고, 폐가를 문화공간으로 바꾸는 과정에서 ‘지역 정서에 맞지 않는 짓을 한다’, ‘뜬구름 잡는 일’이라는 주변의 차가운 시선을 감당해야 했습니다. 코로나 상황까지 겹쳐 수입을 줄어들었는데 리모델링 작업은 끝이 보이지 않았고... 예산과 체력 모두 고갈되던 2021년 겨울이 가장 접고 싶었던 순간이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어느 정도 안정화된 거 같아요. ‘별들의 낭독’을 보고 눈물 훔치는 모습 보았을 때, 공연 끝난 후 “이런 공연은 처음 본다”며 진심 고마워하는 모습을 보았을 때, ‘나는 이들을 위해 이 일을 해야 한다’는 소명의식이 다시 타올랐습니다. 지금 저에게 모루는, 지역민들의 따뜻한 공감 같아요.
차제에 지역문화의 현실을 맥 짚어볼까요? 조 작가는 논산의 고유한 문화, 좁혀서는 강경문화에 어떻게 일조하고 싶은지요?
논산은 문화자원이 풍족한 지역입니다. ‘논산’ 자신만 그걸 모르는 것 같아요(웃음). 자기들이 어떤 자산을 가지고 있는지를 모르거니와, 심지어는 우습게 여기는 경향도 감지 돼요. 강경은 오래된 상업도시란 인식은 강한데 비해 문화적 전통은 그리 깊지 않습니다. 대신 사람의 이야기가 풍부하고 개발되지 않은 것들이 많아서 할 일도 많아 보입니다. 우리가 가진 것들을 면밀하게 검토하고 분석해서 어떻게 활용해야 할지를 고민해야 할 시점이라고 봐요.
그 일의 일부를 제가 하고 싶은 거죠. 강경의 상인정신, 근대 건물 등 강경의 고유한 자원에 관심이 많습니다. 강경 미내다리는 유명하죠. 하지만 그것을 지금 우리가 어떻게 활용하고 의미 부여할 수 있는지를 고민하는 분은 만나보지 못했어요. 저는 요즘 미내다리 전설을 창극화하는 작업 중입니다. 미내다리 현장에서 공연하는 것까지 염두에 두면서요. 곳곳에 횃불 켜놓고, 조선시대 민중들이 동네 부잣집 마당으로 가서 공연 보듯 그런 풍경을 재연하는 것입니다. 미내다리 앞을 흐르는 강물과 다리 주변에 모여든 관객들과 타오르는 횃불, 미내다리 위에서 혼신을 다해 노래하고 연기하는 배우들을 연상해 보시겠어요? 저는 작은 전율이 느껴집니다.
그건 여러 꿈 중의 하나이겠고요, 그 여러 꿈을 한다발로 묶는다면요?^
“꿈이 뭔가요?” 제가 이런 소리 듣기에는 나이가 좀 있는 편이죠. 그래도 누가 묻는다면 제 꿈은 ‘김민기’입니다. 70년대 민중가수이자 공연연출가이신 김민기 선생을 1996년 지하철1호선 공연 때 뵈었습니다. 리허설 끝나고 한 5분 정도 이야기 나눌 시간이 있었는데 그때 이런 말씀을 하시더군요. “우리 공연에는 유명한 사람이 한 사람도 없어요. 그렇다고 앞으로 유명해지고 싶어하는 배우도 없어요. 그냥들 하는 거죠.” “새로운 거 뭐 없나 찾아보는 걸로 세월 보내요. 나는 우리 배우들이 하고 싶어하는 것들 찾아내고 공연할 무대를 제공하는 게 임무이자 보람이죠.”
그땐 그 말이 무슨 말인지 정확히 와 닿지 않았는데 작년에 돌아가신 뒤 방영된 다큐멘터리에서 나오는 내레이션 핵심 단어가 ‘뒷것’이었습니다. 그때 이해했죠. 그때 선생님 말의 핵심이 ‘뒷것’이었구나. 누가 권하는 것도 아니고, 등 떠미는 거 아니지만, 묵묵히 그냥 뒤에서 스스로의 일을 찾아서, ‘앞것들’ 위해서 살아가는 일... 어쩌면 내가 지금 할 수 있는 일이란 게 그런 것이어야 하지 않을까? 진짜 무대를 경험하지 못한 평범한 사람들 앞세워 재미난 경험의 기회를 주고, 그들이 좀 더 많은 조명을 받게끔 해서, “어라 나도 이게 되네?” 하는 생각과 놀라운 즐거움을 갖게 하는 일! 그런 일에 조용히 매진하고 싶은 것이 제 꿈입니다.
그 꿈을 현실에 대입해 본다면, 지역 문화 허브 역할을 옥녀봉예술촌이 하고자 합니다. 논산 지역 문화인들과의 협업을 강화하고, 논산시 문화 사업에 중앙의 기획력을 접목시키는 ‘프로젝트 코디네이터’ 역할을 맡아 지역 문화의 질적 성장에 일조하고 싶습니다.
중앙문화는 스케일도 크지만, 지방문화가 모루가 되어줄 때 비로소 상생, 대성할 수 있다고 봅니다. 그 역도 성립한다고 보는데, 조 작가의 문화각과 연결시켜서 본인이 우뚝 세우고 싶은 강경옥녀봉 문화탑의 청사진을 보여주시죠.
문화에 중앙, 지방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인구와 자본이 양적으로 압도적으로 우세한 대도시와 그렇지 않은 지방의 차이가 있겠지요. 결국 ‘지역이 곧 중앙’입니다. 굳이 가르자면 중앙문화는 보편성을 가지지만, 지방문화는 ‘고유성과 깊이’를 가집니다. 이 고유성이야말로 중앙문화가 더 깊이 대성할 수 있도록 받쳐주는 모루이겠고요.... 제가 우뚝 세우고 싶은 옥녀봉문화탑의 청사진은 ‘아시아 근대 역사 문화예술의 산실’입니다. ‘강경 옥녀봉’을 단순한 관광지가 아닌, ‘이야기가 살아 숨 쉬는 창작의 성지’로 만들어 전국, 나아가 아시아 창작자들이 영감을 얻기 위해 찾아오는 인문학적 순례지로 만드는 것입니다.
바야흐로 독불장군 시대는 저물고 협업과 윈윈이 대세인 거 같습니다. 주변에 도움 주시는 분도 꽤 될 텐데, 차제에 한두 분 소개를 한다면요~
제가 중앙에서 활동할 때부터 맺어온 인연들이 옥녀봉예술촌의 ‘협업과 윈윈’을 가능하게 했습니다. 가장 큰 도움을 주신 분은 KBS 라디오 드라마 작가 시절부터 인연을 맺어온 성우분들, 저와 함께 전쟁 치르듯 방송을 함께했던 작가인력입니다. 그들도 이젠 저와 같이 나이가 들어 직장에서 최고위직에 있거나 혹은 퇴직하여 현업에서 멀어지고 있습니다. 이젠 그들이 저에게 ‘함께 해볼 만한 일 있으면 불러달라’고 말하죠. 이게 얼마나 큰 자산인가요.
작년에는 저와 오래 함께 일했던 KBS 이제원 국장이 다리를 놓아 ‘6시 내고향’에 출연할 수 있었습니다. 앞에서 말씀드렸던 서혜정 성우는 제가 하는 모든 일에서 어떤 식으로든 관여해주시며 돕고 있습니다. 본인의 고향이 논산이 됐다고 하더군요. 물론 김홍신 문학관 중심으로 활동 해온 것이 가장 큰 이유겠지만, 옥녀봉과도 깊이 관계하고 있습니다. ‘별들의 낭독’을 다시 얘기하자면, 서울 부산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 공연입니다. 강경 같은 소읍에서 굵직한 공연을 한다면 기라성 같은 분들이 쉬 움직여주지 않습니다. 이 큰 일은 서혜정 성우가 다 해주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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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kbs 서혜정 성우가 후배성우들과 열연하는 모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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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전드 같은 분들 모셔와 지역문화에 신선한 충격을 던져줌으로써 도농이 동반 성장해가는 느낌입니다. 한편, 지역 문화인들 발굴과 부각은 어떤 비중인지요?
“중앙 예술가 초청 활동이 지역예술과 무슨 상관 있으냐?”는 지적도 있습니다. 알고 보면 지역 문화인들 소외가 아니라, 지역 문화의 잠재력을 일깨우고 유출을 막기 위한 나름의 전략적 행보입니다. 현재 자치단체가 지역 예술을 지원하는 방식에 대해 저는 회의적인 인식을 갖고 있습니다. 보는 각도에 따라 의견이 다를 수 있지만, 과연 지원금이 지역 예술가들의 실질적인 성장과 창작 활동에 적절히 쓰여지고 있을까요? 논산에는 저 말고도 재능과 상상력과 이상이 넘치는 예술가들이 상당합니다. 그들에게 응분의 혜택이나 공연 기회가 돌아가지 않는다면, 앞으로 논산의 문화는 어떻게 될까요? 그들의 인내심은 머지않아 바닥을 드러낼 것이고, 결국 그들은 지역을 떠날 수밖에 없을 겁니다.
따라서 저희는 병행을 합니다. 중앙의 어려운 분들 모셔올 때, 지역 예술인들을 공연에 참여시키거나 프로젝트 스태프로 동참하여, 중앙의 선진적인 기획력과 제작 환경을 직간접 경험하도록 합니다. 이는 실질적인 능력 향상과 동시에 지역 예술인들에게 자신감과 동기를 부여해준다고 봐섭니다.
논산에 와 보니 무슨 공연을 하든 요란한 식전행사를 하더군요. 그날 공연의 중심테마와 무관한 콘텐츠로 말이죠. 국악공연이 그 공연의 테마인테 색소폰 연주가가 나와서 ‘안동역에서’를 연주하던데, 많이 불편했습니다. 공연 막간 사이사이에 출연하는 게스트도 본 공연과 무관한 ‘지인 중심’의 게스트 출연이 버젓이 행해지더군요. 이건 본 공연의 가치와 메시지를 까먹는 겁니다. 그런 공연 제작의 행태를 교육하는 자치단체의 노력도 부족해 보입니다. 행사테마와 무관한 식전행사와 게스트 공연 줄여주면 참 좋겠어요. ‘오늘 내가 거기 가서 뭘 봤지?“ 집에 와서 되돌아보면, 게스트만 생각날 때도 허다하더라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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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별들의 낭독 리플렛(2025년 10월 24일 공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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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별들의 낭독 공연현장(2025년 10월 24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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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가치 있는 삶의 증명도 중요한 지점인 듯합니다. 가장 중요한 목표는 우리 지역의 재능인들이 지원금 문제를 떠나서, 자신의 재능을 창의적으로 키우며 “이곳에서 값진 삶을 살고 있다”는 생각이 들게끔 환경을 조성하는 거라고 봐요. 앞서 말씀드린 ‘돈 값 하는 유료 공연’을 통해 지역 예술의 가치를 인정받고, 시장을 통해 정당한 대가를 받을 수 있도록 만들어주는 작업과 일맥상통합니다. 결국 지역 문화인 발굴은 ‘떠나지 않고 자부심을 가질 수 있는 자생적 환경’을 만들어주는 데 달려 있다고 봐요!
끝으로 같은 시대, 같은 땅에서 살아가는 분들과 나누고 싶은 이야기가 많을 거 같은데, 이 자리에서 핵심만 들려주시죠. 지역주민, 예술활동가들, 문화리더 어느 분에게라도 좋습니다. 김홍신 작가, 박범신 작가처럼 특정인에게 하고 싶은 말도 좋겠고요....
우선 지역의 예술활동가들과 공명하고 싶은 메시집니다. 무엇보다 자부심을 가졌으면 좋겠어요. 우리가 여기서 창의적으로 활동하는 이유가 단순한 취미나 봉사가 되어서는 안 될 거 같아요. 옥녀봉예술촌은 ‘돈 값 하는 유료 공연’을 통해 우리의 가치와 재능이 정당하게 인정받고 존중받는 자생적인 문화 생태계를 만들고자 합니다. 당장 지원금에 묶여 인내심을 잃고 떠나지 말았으면 합니다.
같은 논산의 품에서 태어나 대한민국 문학의 거대한 봉우리가 되신 김홍신 작가님과 박범신 작가님께 깊은 존경의 말씀을 전합니다. 박범신 선생님 작품을 중학교 때 알게 됐는데 ‘시진읍’이란 소설을 쓰셨죠. 소설에서 강편읍(논산)과 시진읍(강경읍) 대결이 있었는데, 시진읍 입장에서 소설을 읽었던 기억이 새록새록합니다.
김홍신 작가님은 ‘인간시장’ 이전에 인식했던 작가님이시죠. 중학교 2학년 때 국어선생님이 전근해 오셨는데 김홍영 선생이셨어요. 첫 국어 시간에 본인 소개 하시는데, “소설 쓰는 김홍신 씨가 내 (사촌?)형님” 이라 하시더군요. 문제는 그 다음이었죠. 영화 ‘벤허’를 두 시간에 걸쳐서 이야기해 주시는데 영화를 실제로 보는 것처럼 실감나게 말씀해주셨어요. 얼마나 감동적이고 인상적이었던지.... 전 지금도 그 국어 시간의 교실풍경과 그 선생님이 쓰고 계셨던 검은색이 살짝 들어간 뿔테 썬그라스가 흑백사진처럼 남아 있습니다.
김홍신 작가님 호인 ‘모루’의 의미처럼, 저는 고향 강경에서 가장 단단하고 묵묵한 ‘지역 문화의 모루’가 되면 좋겠습니다. 중앙이 두드려야 할 쇠는 이제 지역의 뿌리 깊은 이야기들입니다. 제가 그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 논산과 강경의 이야기가 대한민국 문화의 대들보가 될 수 있도록 끝까지 버티고 치열하게 두드리겠습니다.
김홍신 선생님께서 주신 이 상은 현업을 떠나 사회생활 하면서 처음 받게 된 과분한 상입니다. 정말 ‘끕’도 안 되는 사람이 받아도 되는지 모르겠습니다. 다만 선생님께서 상 주신 깊은 마음 헤아려 열심히 살겠습니다!
[대담] 이진영 편집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