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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지붕없는 박물관’ 서울 성북동 길상사
민족의 어두운 시절의 아련한 사연이 묻힌 향기로운 사찰
기사입력  2023/07/15 [14:52]   놀뫼신문

  

 

한양도성의 북쪽 마을이라 성북동(城北洞)’이라 불리는 이 특별한 동네는 옛부터 수많은 작가들이 창작의 고향으로 뿌리를 내렸고, 수도(首都)를 지키는 북악산과 어울려 경관이 수려했다. 성북동은 아직도 그 기품과 호젓함이 여전해 한 번쯤은 살아보고픈 동네로 손꼽히고 있다.

성북동은 끊어질 듯 이어지는 한양도성에서부터 민족 문화의 정수를 보여주는 간송미술관, 이태준 가옥이었던 수연산방, 만해 한용운의 심우장, 이종석 별장, 방우산장, 선잠단지 그리고 가슴 아린 사연을 간직한 길상사 등 서울 도성 밖에서 문화재가 가장 많은 지역이다. 그래서 성북동을 지붕없는 박물관이라고도 한다.

장마로 비가 한창인 7월 어느 날 조선왕조 600년의 유구한 역사를 품은 한양도성을 지나 성북동 대사관로에 위치한 호젓한 사찰 길상사를 찾아본다. 사찰 끝에 자리한 진영각 툇마루에 앉아 법정 스님이 깨우쳐 주신 무소유의 진정한 의미를 되새겨본다.

 

 

 

 

길상사, 문학이 숨 쉬는 맑고 향기로운 사찰

 

본래 길상사는 우리나라 3대 요정 중 하나인 대원각이었다.

1955년 김영한 여사(1916 ~1999)는 당시 650만 원이라는 거액을 주고 일제강점기 백인기의 별장이었던 성북동 골짜기 7천여 평의 땅을 매입한다. 그리고 이곳에서 대원각이라는 고급 요정을 운영하며 청운각, 삼청각과 함께 1960~70년대 최고의 전성기를 맞는다.

김영한 여사는 어느덧 세월이 흘러 고희를 넘겼다. 그러던 중 법정 스님이 지은 무소유를 읽고 감명을 받아 스님을 찾아가, 평생을 함께 한 대원각 건물 40여 동과 토지 7천여 평을 시주하겠으니 절로 만들어달라고 부탁한다.

그러나 법정 스님은 거절한다. 무소유를 지향하던 법정 스님이 그 큰 재산을 받을 수 없었다.

김영한도 이에 굴하지 않고 10여 년을 계속 법정 스님을 따라 다니며 법문을 듣고 끈질기게 간청한다. 마침내 법정 스님은 여인의 진심을 받아들였다.

199712, 대원각은 요정에서 길상사라는 사찰로 다시 태어난다. 그리고 그날 김영한은 법정 스님으로부터 염주 한 벌과 길상화라는 법명을 받는다.

2년 후, 19991114일 길상화는 오매불망(寤寐不忘) 그리워하던 백석을 찾아 저 먼 곳으로 떠난다. 향년 83세의 나이였다. 그녀의 유언대로 길상화의 유골은 49재를 지내고 흰 눈이 쌓인 길상사 언덕 위에 뿌려졌다. 한편 백석은 3년 전 1996년 저세상으로 먼저 떠났다.

길상사 경내에는 길상화를 기리는 공덕비와 시인 백석이 여인을 그리며 쓴 시비가 세워져 있다. 그 시비 옆에는 젊은 시절 시인 백석과 나타샤 자야(길상화)의 사진과 함께 그대를 사랑합니다. 잊지 않겠습니다라고 쓰여있다.

 

 

 

 

나와 나타샤와 흰당나귀

 

김영한은 16세의 꽃다운 나이에 권번에 들어가 3년간의 교육과정을 거친다. 권번은 기생을 양성관리하는 기관으로 노래와 춤은 물론 한문과 일본어를 배우고 사군자를 비롯한 산수화, 인물화, 시화를 배우는데, 당시의 기생은 지금의 기생과는 격이 달랐다.

시조와 가곡, 노래, 검무, 가야금, 거문고 등 악기를 배우고 예절교육도 받았다. 이 과정을 못 따라가거나 행실이 불량하면 퇴학을 당했다. 그리고 졸업시험을 통과해야 비로소 기예증을 받을 수 있었다.

김영한은 문학에도 소질을 보여 조선어학회 신현모 선생의 추천으로 일본으로 유학을 간다. 일본 유학 중 신현모 선생이 함흥경찰서에 구치되었다는 소식을 접하고, 유학을 포기하고 함흥으로 달려간다.

김영한은 면회도 안되는 신현모 선생을 뵙기 위해 함흥 권번에 들어가 다시 기생 진향이 된다. 그리고 그곳에서 시인 백석을 만나 첫눈에 사랑에 빠진다. 백석 26, 김영한 22세 궁합도 안 보는 4살 터울의 꽃다운 나이였다.

평안북도 정주가 고향인 백석은 오산고보를 나와 일본 유학을 마친 당시 최고 엘리트였다. 그는 조선일보에서 근무하다 그만두고 영흥고보에서 영어선생으로 재직하고 있었다.

백석은 김영한에게 자야라는 호를 지어주며, 그녀에게 청혼한다. 그러나 백석의 부모는 기생과의 결혼을 반대하며, 다른 여인과 결혼을 시킨다. 백석은 신부를 보지도 않고 자야(김영한)를 찾아 서울로 떠난다. 서울에서 자야를 다시 만난 백석은 만주로 가서 같이 살자고 간청하지만, 자야는 서울에 남겠다고 거절한다. 백석은 홀로 만주로 떠난다.

이때 백석은 자야를 그리워하며 지은 나와 나타샤와 흰당나귀라는 시를 건넨다.

 

가난한 내가/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 오늘밤은 푹푹 눈이 날린다/ 나타샤를 사랑은 하고/ 눈은 푹푹 날리고/ 나는 혼자 쓸쓸히 앉아 소주를 마신다 (이하 생략)

- 1937년 백석 씀

 

일제강점기 여창가곡과 궁중무희의 뛰어난 재능으로 이름을 떨친 김영한은 해방 후 중앙대학교에서 영문학도 전공하였다. 한편 백석은 해방이 되면서 만주에서 고향 정주로 돌아간다. 그렇게 둘은 영영 만날 수 없는 처지가 되었다. 여인은 언제 만날지 모를 백석을 하염없이 기다리며 <백석 내 가슴속에 지워지지 않는 이름>이란 수필집을 낸다.

그녀는 생전에 71일에는 음식을 먹지 않았다고 한다. 그날이 백석의 생일이었다.

199712월 요정 삼청각이 길상사로 다시 태어나는 날, 기자들이 길상화(김영한)에게 당시 시세로 천억 원이 넘는 큰 재산이 아깝지 않으냐?”고 묻자, 그녀는 백석의 시 한 줄만도 못하다고 대답하였다고 전해진다.

 

 

여재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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