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의눈] 논산시 추석현수막 촌평
뻔할뻔 진부함을 참신·진정성으로
해마다 명절이 되면 한가위 현수막이 넘실댄다. “아범아! 추석에 오지 말고 용돈만 보내라” “내려올 생각 말고 영상 통화로 만나자” 코로나 이전에도 재밌었다. “에미야~ 어서 와라. 올해 설거지는 시아버지가 다 해주마!”
입가에 미소를 번지게 하는 사이다 발언들이다. 유머와 위트, 그러면서도 뼈아픈 세태가 응축되어 있는 듯도 싶다. 요즘 논산 곳곳에서 펄럭이는 현수막 세레모니를 보면서 때가 됨을 느낀다. 어느덧 가을, 추석 한가위구나, 정치의 계절 개봉박두인가 보다....
우리 민족 최대의 명절, 추석이다. 간만에 만나 반가워하고 덕담도 나눈다. 코로나 이후 분위기는 급변했지만, 그런다고 해서 명절 분위기까지 사라질손가? 다만 온택트보다는 언택트로 바뀐 지 오래다. 선물도 포대기나 유명백화점 선물권 대신 카톡 같은 데서 ‘선물보내기’ 버튼이 불난다. 안부메시지도 텍스트 일색에서 이제는 그림, 동영상, 메타버스다. 마음만 먹으면, 마음전하기가 참 편리해진 세상, 고맙기만 한 문명의 이기들이다.
그런데 이런 기쁨들도 마냥 이어지지 않는 듯싶다. 어느 때부터인가 반가움이 반감되어 가더니만, 급기야 공해(公害)라는 느낌까지 스멀스멀이다. 중첩되어 날아오는 복제판에서 무성의가 읽혀져서다. 한창 건설중인 논산대교 손잡이 위·아래로 두 장의 현수막이 병렬 연결이다. “안전하고 편안한 한가위 되세요” 게재한 사람은 다른데 문장은 똑같다. 시쳇말로, 추석문장도 어디서 ‘사주’한 게 아닐까 싶은 장면이다.
참신성과 진정성
이런 선입관으로 시내와 외곽의 현수막들을 보니 거기서 거기, 도긴개긴이다. 내 눈에 제일 먼저 들어오는 것은 인물 사진들이다. 그 다음 본인 직함과 대문짝만한 대문자들을 보면서 드는 생각은, 대동소이다. “어쩜 저리도 판박이 천편일률일까? 머리나 가슴에서 나오는 발상이 저런 거밖에 없으려나? 영혼 담는 데까지는 그렇다손치고, 진성성이나 인간적 감성 같은 건 어디에 숨었지?...”
‘추석 다가오니 명절 분위기 속에서 잘 지내자’는 메시지인가 보다 하면서 단순 생각하면, 좋은 게 좋아 보인다. 메뚜기도 한철, 일과성(一過性)으로 흘려보냄직도 하다. 그러나 이런 류의 사고방식이 정치나 행정의 발상~결정에 적용될지도 모르겠다 싶으니, 그건 좀 그렇다. 차제에 현수막의 인사말 허와 실을 나름 짚어본다.
첫째, 진정성의 문제다. 어떤 말이나 글을 보면 그 사람이 이 대목에서 얼마나 고심했는지 그 마음씀씀이를 엿볼 수 있다. 진부한 표현, 식상한 문장, 어디서나 보고 들을 수 있는 그저그런 말들은 참으로 무성의해 보인다. 돈이 얼마나 많기에 저렇게 도배질인가도 싶다. 아침마다 배달료 없이 도착하는 뻔할뻔 메시지는 그렇다손치고, 돈 들어가는 현수막에는 자기목소리, 애정 같은 게 묻어들어가면 좀 좋으랴 싶다.
둘째, 고자세 눈높이다. 현수막 문장 대부분은 <~되세요> <~하세요>다. 덕담이니 그러려니 하지만, 달리 보면 문제의 소지가 다분하다. 정치인을 정치지도자라고 통칭한다. 지도자라는 자부심에서인지 “나는 주는 사람, 너는 받는 사람”이라는 설정이 자동으로 깔려 있는 듯한 문법이다. 덕담을 명령문으로 받아들일 사람은 별로 없겠지만, 문법은 은연중 우리의 사고방식까지 지배한다. 청유형 권유문, 기원문마저 명령문의 범주에 들 수 있다. 나는 너보다 좀더 아는 사람, 뭔가 베풀 수 있는 지위라는 등등의 상·하 프레임이 덧씌워질 수도 있다.
‘섬김경영’은 안팎이 한얼굴
이런 프레임에 익숙해진 사회에서 “부자 되세요” “복 많이 받아라” 등등의 발언은 축복이자 격려로 들린다. 그러나 모름지기 앞서가는 지도자라면 틀을 깨는 선구자가 되어야 한다. “취직·결혼 제가 알아서 할께요- 이번 추석엔 쉿~” 5년 전 평택시장이 내건 현수막이다. 세상은 휙휙 변하고 있다. “부잣집 맏며느리감이네~” “떡두꺼비 같은 자식 낳고 행복하게 살아야지?” 얼마나 정겨운 덕담인가... 그런데 요즘 이런 말을 마이크 잡고서 하면 곧바로 인민재판대에 올라가야 한다. ‘자기결정권’을 정면 침해하는 발언이자 발상이기 때문이다.
현대인들이 제일 싫어하는 것은 ‘설교체’라는 기사를 본 적이 있다. 본인이 자청한 설교, 멘토는 얼마든지 OK이고 배우려는 자세가 되어 있다. 그렇지만 본인이 선택하지 않은 충고, 조언, 덕담, 배려, 후의 등은 당장 No다. 이런 트렌드에서 명령문의 화법은, 잠재적으로 거부감마저 불러일으킬 소지가 다문하다.
이런 깨알 지적이 기자의 지나친 민감성으로 치부돼도 좋다. 여기서 드러내고자 하는 실체는, 경영관(經營觀)이다. 군림하고 시혜하는 카리스마 리더가 아니라 민(民)을 받들고 섬기는 소위 ‘섬김경영’이 아쉬워 보여서다.
우리 나라 사람처럼 IQ가 높은 민족이 없고 자존심 강한 민족도 드물다. 세계에서 대통령 해먹기 제일 힘든 나라가 대한민국이다. 그만큼 똑똑들 하고 주관이 강해져서다. 찍어누르면 통하리라는 고릿적 상의하달은 물 건너간 지 오래다. 이런 시대에는 선의의 명령문이나 권유문마저도 불편하다.
모름지기 지도자로 나서려면 기본 자질 몇 가지를 점검해보는 게 순서겠다는 생각이다. “내가 사람을 좋아해서 이웃에게 무엇 하나라도 챙겨주려는 마음바탕이 되어 있는가?” “내 속이 세상을 선하게 변화시킬 의지와 학습태도, 인간애와 호기심 같은 걸로 넘쳐나는가?” 이런 동기의 순수성을 웬만큼 회복한 연후, 그런 마음을 정화수처럼 오롯이 담아내는 현수막이 뜨면 참 좋겠다. 글자 하나 단어 하나의 정성이 보는 이의 심금 울림판을 울리고 논산찬가로 펄럭인다면, 이 멋진 풍경·소리는 전국 방송을 탈 것도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