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경 덕유정 접장잔치|
백중일에 접장주관으로 선생안 제례 마쳐
- 이행구 시동을 접장 추서, 선생안에 모셔 -
강경 덕유정은 음력 7월 15일(양력 9월 2일) 백중일을 맞아 전례로 이어져 내려오는 제례방식에 따라 덕유정 선진 선생안에 대한 제례(일명 접장잔치)를 사원이 참례한 가운데 엄숙하게 진행하였다.
선생안 제례는 덕유정의 3대 행사 중 가장 큰 규모로 치러졌다. 올해는 코로나19 창궐로 인해 2일간의 행사를 최대한 축소하여 진행하였다. 전염병 방역을 우선으로 하는 방법으로 외부 인사 참석금지, 참석자 체온측정 등의 예방수칙 준수와 실외행사로 거리두기와 활쏘기 금지 등 제례를 중심으로 당일 행사로 마쳤다.
[덕유정 3대 행사]
#공원잔치(음력 1월 14일, 과녁제, 공원주관)
#권무잔치(양력 5월 1일, 사정 건축기념일, 권무주관)
#접장잔치(음력 7월 15일, 선생안제례, 접장주관)
한편 이날 제례는 다른 해 보다 뜻 깊은 의미가 있었다. 다름 아닌 덕유정 230여년 역사 실록인 사계좌목을 한국동란 중 보자기에 싸서 본정 뒤뜰에 묻어 보존하여 동란 후 선진들로 부터 그 공적을 인정받아 선행장을 받은 故 이행구씨의 접장 추서와 함께 접장 신위를 등재하여 선생안에 모셔 매년 제례를 모실 수 있게 하였다.
덕유정 사계좌목의 보존과 계승에 절대적 역할을 한 이행구( ~ 1985) 씨는 덕유정의 시동(矢童)으로 활터에서 생활하였다. 중년을 지나서는 활터를 떠났다. 1985년 한영국 고문이 권무로 활동 당시에는 세상을 떠났다. 당시 문상을 계기로 이행구 씨의 삶의 행적에 대한 사연을 자세하게 접하였다. 덕유정에서는 “그분의 공로에 비해 베풀어준 게 없다며 전사원이 아쉬움을 토로했는데, 늦었지만 이번 선생안 제례에 접장 추서와 신위 등재로 조금이나마 보답하게 되었다”고 한다.
선생안제례(先生案祭禮)는 덕유정 사서(史書)인 ‘사계좌목 경신년 계례편’에 “선생안(先生案)의 봉행(奉行)하는 절차(節次)는 세일제(歲一祭, 회/년)로 하고 정미년(1907년) 이전 사례에 의해서 응행하라”고 적혀 있다.
이행구 공적기는 6·25 전란의 와중에도 지혜로운 행동으로 덕유사계좌목이 오늘날까지 지켜져 오도록 한 공로에 감격하여 훗날 덕유정 사우들이 만들어 준 것이다. 공적기를 언제 작성하여 주었는지에 대한 기록이 없어 아쉽지만, 구전으로 전해지는 이야기를 종합해 보면 6·25 전란이 끝난 연후로 추측된다.
[이행구공적기념]
【해의】이 정자는 오래된 유적지라 또한 현판이 많이 있도다 / 한해의 운수가 흉신(凶神) 놓여 있어 대란(6·25 전쟁)이 천지에 넘쳐났도다 / 거의 불타 없어질 위기에 처하였는데 그대의 노력에 힘입어 면하게 되었네 / 명판을 만들어 게양하여 어찌 그 어짐을 표창하지 않으랴(해의: 이동재, 2004)
- 한영국(덕유정, 국궁신문 운영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