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노트]연무읍 봉동5리 고분순(高粉順)여사
양반동네서 연하와 연애, 아직도 내 곁 있으매~
나는 낭랑 18세에 부모 슬하를 떠나 친척의 수양딸로 들어갔다. 지금 살고 있는 상봉의 이웃 마을이었다. 거기서 열일곱 서영석을 만날 줄이야. 인연이란 끈은, 금산의 나를 연무의 하봉 마을로 데려와 천생연분을 만나게 했다. 나를 곱게 보아주는 동네 어른들의 눈을 피해 사랑이 여물어 갔다. 열아홉 살에 시할머니와 시부모 그리고 아홉 형제인 집에서 고생이 시작된 것이다. 그리고 세월이 흘러 남편은 78, 나는 79 살이 되었다.
세월은 바위덩이 같은 고생도 부슬어
시작부터 고생이었다. 그 지겹던 고생도 뒤돌아보니 젊은 날의 추억이 되었다. 물론 나는 “그 시절로 되돌아가라” 한다면 백만금을 준다 해도 사양할 것이다. 그러나 좁디좁은 한 마을에서 몰래 연애하던 그때가 눈에 어릴라치면 그 시절이 그리워진다. 그 어린 것들이 신랑신부가 되다니.... 엄하던 시골에서 그야말로 연애결혼을 한 것이다. 고생을 밥 먹듯 하면서, 뭐가 그리 좋았는지 모를 일이다.
나는 지금이 제일 살 만하다. 자식들은 우리 슬하를 떠나 잘 살고 있다. 우리 내외도 비로소 오순도순 부족함 없이 서로 기대며 잘 살고 있다.
배움에 주렸던 나는 황혼의 나이에 꿈에도 그리던 한글을 배우며 글자에 눈을 뜨게 된 것이다. 1주일에 두 번인 공부 시간을 빼먹은 일이 없다. 그 덕에 우리 내외가 나란히 노랫말을 읽으며 노래교실에서 노래를 부른다. 몇 차례 합창대회에도 참여했다.
스마트 폰도 배워 문자를 주고받을 실력이 되었다. 물론 받침이 시원치 않지만 자식들은 내가 개떡 같이 써 보내도 찰떡처럼 읽어 준다. 정말 살 만한 내 인생의 최고봉에 와 있다.
‘철들자 망령’이라고, 이 호시절에 두 무릎이 아파서 보행이 불편한 점이다. 허나 분명 그것은, 열심히 일한 내 인생의 훈장임엔 틀림없다.
고생도 좋아
나는 금산에서 오빠 다음, 둘째로 태어났다. 6·25전쟁과 학교에 갈 나이가 겹쳐 오빠만 학교를 다니고 나는 동생들을 부모님 대신 보살폈다. 남동생 셋에 여동생 하나를 도맡아 기른 것이다. 부모님이 인삼 농사를 지었지만 전쟁 때는 먹을 것이 없어 총탄 퍼붓는 속에서 뚝새풀 손질해서 볶아 먹은 기억도 있다.
부모님은 인삼농사를 지었지만 6남매를 먹여 공부시키기가 역부족이었다. 식구 하나라도 덜 겸 열여덟 살에 나를 친척댁 수양딸로 보냈다. 친척의 살림을 도와드리라 했더니 열일곱의 이웃 총각과 눈이 맞아서, 열아홉에 멋도 모른 채 시집에 들어간 것이다.
내가 첫 아들을 낳고 그해 한 집에서 시어머니는 막내를 낳았다. 시어머니의 산파 역할은 내가 했고 해산바라지도 내가 했다. 나는 젖이 남고 어머니는 젖이 모자라 그 막내 시누이는 내 젖을 같이 먹고 자랐다.
시어머니는 언제나 내 편을 들어주셨다. 이웃에는 작은 시댁이 둘이나 있어 그 작은 시어머니들이 오히려 내게 시집살이를 시켰다. 시누이 시동생 여덟의 치다꺼리가 만만치 않았지만 내가 내 발로 들어간 시집살이였다.
아들 낳고 그해 남편은 충주에서 군대 생활을 했다. 23살 때, 월남과 월맹의 전쟁이 치열할 때, 남편은 월남으로 떠났다. 남편이 전쟁터에 나갔으니 내가 나무도 해 와야 밥을 지을 수 있었다. 타작시기가 되면 그것도 거두어 들여야 했다. 소 먹을 꼴도 베어와야 했다. 제사는 큰며느리도 아닌 내가 35년을 맡아 지냈다. 남편이 곁에 없으니 그 모든 고생이 더욱 힘에 겨웠다. 그럼에도 아이를 업고 머리에 인삼 보따리를 이고 금산에서 친정 인삼을 받아와 사방팔방으로 팔러 다녔다.
남편의 저녁밥, 아이들에게
남편은 월남에서 받는 봉급을 내 앞으로 안 보내고, 전주에 사시는 형님께 보냈다. 그러니 가용은 내가 인삼을 팔아 충당했다. 당시 시아버님은 동장이셨다. 아들이 부친 돈을 찾아와 여기저기 대접하시다 보니 남편이 귀국했을 때는 여전히 빈손이 되었다.
남편과 나는 남의 일을 해가며 시동생들과 우리 아이 넷의 학비를 대었다. 남편은 미장일을 잘 했으므로 건물을 지으러 나가면 한두 달 만에 돌아오기도 했다. 때론 ‘달치기’라고도 하는 머슴일을 해서 다달이 돈을 받기도 했다.
제금을 난 후 매일 도시락 4개를 싸는데, 큰 아들 밥은 쌀이 많이 들어가고 아래로 갈수록 보리밥이 되었다. 보리밥을 먹고 살던 어느 때, 남편은 내게 말했다. “이따 저녁 때 일하는 곳으로 와!” 자기가 먹어야 할 저녁밥을 내주며 “아이들 나누어 주라”고 했다. 하얀 이밥이었기 때문이다.
남편은 백마부대 파병시 얻은 고엽제 피해로 평생 고통이 심했다. 6급 피해 등급으로 월남 파병 유공자가 되어 보훈처에서 연금을 받지만, 얻은 병은 나을 줄을 모른다. 잘 못 한 수술로 힘들었고 항암제 치료를 받느라 큰 고생을 했다. 지금 약 덕으로 살지 싶다. 그러나 한편 그 당시 80여 명이 전투에 참여하면 8명 정도 살아 돌아올 정도였다니, 살아왔다는 건, 그 얼마나 대단한 천운인가! 그 생각하면 고엽제 피해도 참을 만하다.
남편은 집 짓는 기술자라 우리 내외 둘이서 지금 살고 있는 집을 지을 때 힘은 들어도 행복했다. 몇 년 전 어쩌다 불이 나서 큰 보수를 했지만 여러 분들의 도움으로 무난히 다 해결할 수 있었다.
어느 때부터 남의 일을 안 해도 살림이 넉넉해져서 이젠 베풀고 산다. 남편은 노름을 한 일도 없고 술을 과하게 하지도 않고 딴 눈을 판 일도 없다. 너무나 착실했다. 흠이 있다면 성질이 급해 싸우면서 반백 년 넘게 산 셈이다.
칭찬받는 맛에 버텨온 삶
고생하던 시절 시아버님의 친구 분이 집에 오신 일이 있다. 그 어르신은 관상을 잘 보는 분이신데 시아버님께 “자네는 둘째 며느리 덕 볼 상이야” 했다. 늘 칭찬 받는 맛에 더 힘을 냈던 것 같다. 봄철 이웃에 사시는 시 작은댁에서 모를 심는 날은 쉰 명 분의 밥을 해댔다. 그런 저런 일도 칭찬 받는 맛에 그 힘든 일을 잘도 해 낸 것 같다.
우리 내외는 몸으로 때우며 아이들을 길렀지만 힘든 줄 몰랐다. 시동생과 시누이들 챙기면서 큰아들은 대전에서 고등학교를 나와 잘 살고 있다. 딸도 논산여상, 아들 둘은 강상고, 대건고를 나왔다. 다들 제 몫을 다하며 산다.
딸아이가 고등학교 졸업하고 서울 삼풍백화점에서 근무한 일이 있다. 그 백화점이 붕괴되던 날 우리 딸은 회사를 못 나갔다. 그 무렵 다리를 다쳐 그날 회사를 못 나가 화를 면한 것이다.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다니, 그 일 하나만으로도 나는 옛날 고생은 다 보상받은 느낌이다.
예순 무렵, 시어머니 수발을 들다 미끄러져 머리가 깨지는 일이 있었다. 큰 아들이 내려와 서울 성심병원에서 11시간 머리 수술을 받고 두 달 만에 살아 돌아왔다. 죽었다 다시 살아왔으니, 그 감사함이란 역시 내 인생의 감격이었다.
일만 하다 보니, 여행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살다가 환갑일 때 중국으로 캄보디아로 해서 베트남 다녀 온 것을 생각하면 그렇게 좋을 수가 없다. 비행기도 배도 타고 맛있는 것도 먹고, 내 인생에 이런 날이 있다니, 그 역시 감격이었다. 거기다 아직 남편이 내 곁에 있으니, 무얼 더 바라겠는가?
- 안정혜 시민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