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노트〕연무읍 봉동3리 최정분 어르신
딸7 아들1 나홀로 키웠더니만 “부라보 내 인생!”
누구나 한 세상 살다가는 것, 거기서 거기 같지만, 한 날 한시의 쌍둥이 인생도 다르다. 별 할 일 없는 노후의 삶도 제 각각이다. 최정분((崔貞粉, 83세) 여사는 말한다. 인생은 “흐렸다 개이고 다시 먹구름이다가 소나기 쏟아진 후 맑은 하늘이 나타나 쨍쨍하다가 다시 흐리고.” 이런 연속이라며, 힘겨웠다고. 온 힘을 다해 살아냈더니 이제야말로, 부라보! 내 인생! 저기 서쪽 하늘로 장밋빛 노을이 불타오르는데, 어느 사이 여기까지 왔는지 도무지 꿈속 같다.
나는 익산의 낭산에서 태어나 열세 살에 한국전쟁을 겪었다. 그로 인해 학업을 마치지 못한 게 늘 아쉬웠다. 살림살이가 어렵지 않았지만 집안일을 도왔다. 뜨개질이나 소쿠리 만드는 일로 혼수 준비를 하였다. 보지도 않고 데려간다는 셋째 딸로 태어났지만 결혼이 늦어졌다. 삼재가 들었다고 3년, 이것저것 따지다 스물일곱 살에 연무읍 봉동3리 칠등마을 유장수 (28세)와 결혼해서 지금껏 살고 있다.
아들이 무엇이길래
혼인하면서 시어머니와 큰동서와 살다가 다음 해 이웃에 방을 얻어 제금을 나왔다. 시어머니와 동서와의 사이도 편안했다. 그 대신 나는 혹독한 서름을 겪었다. 첫딸을 낳고 내리 딸 여섯을 더 낳았다. 왜 하늘은 내게 유독 가혹했을까? 아들을 못 낳는 여자가 되어 버렸다. 둘째 낳고부터는 겁이 났고 점차 기가 죽어 살았다. 남들은 잘만 낳는 아들을 왜 내게는 주시지 않는 걸까? 가슴을 짓누르는 슬픔 속에서도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낳고 보면 역시나 딸, 또 딸, 줄줄이 딸이었다. 그럼에도 남편은 희망의 끈을 놓지 않고 늘 아들 타령이었다. 술이 과해갔다. 취중에 한마디 던지는 말에 나는 가슴에 못이 박혔다. 그도 시름에 겨워 술에 취해 살다 어느 때부터는 노름에 빠졌다.
나 역시 절망 속에서도 희망의 끈을 놓지 않았다. 드디어 마흔 한 살 늦가을에 아들을 낳은 것! 꿈일까 생시일까. 그때를 돌아보면 지금도 그날의 기쁨이 되살아난다. 아들이 무엇이길래, 내 속을 이리 태우고 이제야 나왔단 말인가? 세상에 부러운 것이 무엇이던가? 그간의 내 설움이 봄눈 녹듯 사라져 버렸다. 이 세상 행복을 나 홀로 다 독차지한 느낌이었다. 더 신이 난 것은 남편이었다. 그는 아기의 젖을 위해 돼지 족발을 사와 손수 고아 주었다. 지난날의 슬픔이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호사다마라고 아들이 여덟 살 되던 해에 남편이 세상을 떴다. 간이 나쁘다고 하더니, 겨우 석 달을 버티고 그는 떠났다. 남편의 투병 중에 나는 까마득히 잊고 살던 하나님 생각이 났다. 결혼하면서 잊고 살던 하나님이었다. 그 길로 마을에 있는 교회에 나가며 예수님 발목이라도 잡으려 안간 힘을 썼다. 그러나 그는 쉰 살에 떠났다. 나는 마흔아홉, 큰 딸이 고등학생이었다. 허나 슬퍼할 겨를이 없었다.
딸기가 대학나무
딸 일곱에 아들 하나, 아홉 식구가 어찌 살 것인가? 나는 큰 결심을 했다. 먹고 살고 아이들 가르치려면 나 혼자라도 돈을 벌어야 했다. 하우스를 짓고 특수작물인 딸기 농사를 시작하기로 한 것이다. 단신으로 석 동을 하자니 허리 펼 날이 없었다. 열 살이던 아들까지 동원되어 수확한 딸기를 집하장까지 리어카에 실어다 주었다. 고등학교, 중학교, 초등학교 다니던 딸들이 거들었고 이웃에서 모두 도와주었다. 막내딸은 결혼하고도 이 년 여를 논산에서 이곳을 드나들며 내가 손을 놓을 때까지 도와주었다.
여자 혼자서 애들 여덟을 먹이고 입히고 공부시킨다는 것, 남편이 살았어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하나님을 굳게 믿으며 의지했다. 큰 딸이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서 취업하여 다달이 나에게 송금을 해 주었다. 그러면서 그 밑으로도 고등학교는 모두 나왔고 다섯째와 여섯째는 대전과 서울에서 대학을 나왔다. 막내아들은 대학을 다니다, 군 제대 후 복학을 안 하고 그대로 직장을 다니며 지금은 화물차 사업을 한다.
내게 답답한 일이 딱 한 가지 있으니 막내가 아직 장가를 들지 않은 점이다. 부모 마음대로 안 되는 일이 있으니 자식 결혼 문제 같다. 큰딸이 쉰다섯 막내는 사십이다.
젊은 날로 돌아가고 싶잖을 만큼
나는 일흔일곱 살에 딸기 농사에서 손을 떼었다. 그 사이 허리가 몹시 굽어갔다. 두 무릎도 연골이 달아 아프고 걷기가 쉽지 않았다. 그나마 이웃에 보건진료소가 있어 약을 지어 먹으며 견뎌왔다.
마을의 보건진료소에서 일흔 중반부터 국선도 수련을 몇 년 한 덕에 허리가 더 이상 굽어지지는 않았다. 우리 마을이 에어로빅으로 논산 노인의날 행사에서 일등을 한 덕분에 연말에도 대회에 출전했다. 마을의 잔칫날이었다. 이장님과 노인회장님은 두 대의 관광버스를 대절했다. 청양 대공연장에서 우리 마을 ‘즐거운 인생팀’은 충남 아홉 시·군 팀 중에서 이등상을 받았다. 이 년 내리 준우승을 했다. 말하자면 우리는 경로당 팀이고 일등 팀은 복지관 팀이라, 실은 우리가 정말 열심히 준비한 셈이었다. 국선도는 주 2회, 에어로빅 1회로 저녁에 운동하랴, 수요 밤 예배 다니랴 바쁘지 않은 날이 없었다.
아이들이 허리수술을 권했지만 나이 있어 그것은 포기하고 두 무릎 관절은 수술을 받았다. 젊을 적 같지는 않지만, 그런대로 덜 아프니 살 만하다. 수술 후 운동은 삼가고 대신 노래 교실을 한 주에 두 번 나간다. 제일 신나는 시간이다. 두 해에 걸쳐 어르신 합창 경연대회에 참여하여 우리 마을 보건소 팀이 이등을 했다. 다음 해엔 강경 젓갈 축제 때도 참가했다. 어디 출전할 때마다 마을의 큰 잔치로 모든 이가 함께했다.
태어나서 언제 이렇게 재미있게 어울려 살았던가! 옛날 젊은 날로 돌아가고 싶지 않다. 딸들 시집 가서 아들딸 낳고 잘살고 있으니 내 걱정거리는 막내 결혼 문제뿐이다.
동고동락, 한글대학이 바꿔준 내 인생
동고동락(同苦同樂), 너무나 멋진 말이다. 괴로움도 같이하고 즐거움도 함께 나눈다는 동고동락, 논산시의 브랜드요 랜드마크가 되었다. 시(市)의 동고동락 사업 일환인 어르신 한글 대학이 마을에 들어왔다. 일주일에 두 시간씩 2년을 이종미 선생님과 공부해 왔다. 다 잃어버렸던 한글을 나이 들어 다시 배우며, 그야말로 어린 시절로 돌아간 느낌이다. 이제 자식들에게 편지 정도는 쓸 실력이 되었다. 아니 수필도 쓰고, 시도 나름 쓸 수 있다. 멋진 내 인생이다.
올해 초부터 코로나 19로 인해 모든 모임이 중단되어 쉬고 있다. 생각해 보면 참으로 소박하게 살았다. 자식하고 발버둥치며 사느라 죽기 살기로 일해 온 것이 전부였다. 그저 아이들 잘 되는 것이 삶의 전부였기 때문이다. 이제 그 애들 결혼시켜 사위 얻고 손주들 얻으며 딸기 농사 끝내고 봉동 교회 권사로 살고 있으니 무엇을 더 바라겠는가? 거기다 나만의 삶이 있으니 행복하지 아니한가!
“부라보!! 내 인생” 뒤늦게 국선도며, 에어로빅과 경연대회, 노래교실과 합창대회 그리고 한글교실에서 글을 배우며 알게 된 또 다른 세상, 참으로 감사하다. 딸들은 말한다. “엄마가 아니었으면 자기들의 지금은 없다”고, “엄마 같은 엄마가 세상에 어디 또 있겠냐?”면서 외친다. “엄마 우리 엄마, 장한 엄마!”
- 안정혜 시민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