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노트] 연산면 장전리 오재양 어르신
독립운동 애국지사 오철식의 자손
논산시 연산면 장전리 697번 지방도로 변에 ‘독립운동(애국지사) 오철식 선생 묘’라는 표지석이 있다. 그 표지석이 가리키는 곳을 따라 백여m 남짓 올라가면 잘 정돈된 오철식(吳喆植) 애국지사의 묘가 보인다. 그의 손자인 오재양(吳在陽, 83세) 할아버지를 그곳에서 만나 독립운동가의 후손으로 살아온 이야기를 들어본다.
독립운동가 자손의 어린 시절
일제 말기와 해방 후, 그리고 한국전쟁 전후로 이 땅 어디에도, 또 누구에게도 가난은 일상이었다. 독립투사의 자손이었던 오재양 할아버지의 어린 시절은 더욱 그러했다. 본래 그 집안은 큰 재산가는 아니어도 넉넉한 살림의 집이었다. 그러나 할아버지(오철식)께서 일제 강점기에 독립운동을 하시면서 그 재산은 전부 그 독립운동 자금으로 들어갔다. 직접 이야기를 들어본다.
“할아버지는 일제 때 독립운동 자금조달을 하셨어요. 고창, 부안, 전주 등을 다니시면서 자금을 조달하여 독립운동 단체에 전달하는 책임자로 활동하셨습니다. 그러니 논산의 집안 재산도 독립운동 자금으로 거의 다 들어갔지요. 그러던 중 새벽에 집에 들이닥친 순사에 의해 체포되어 전주 교도소에서 2년 간 옥고를 치르셨고, 결국 해방 후 바로 돌아가셨습니다.”
그때부터 그의 집안은 큰 어려움을 겪어야만 했다. 당시 그의 가족은 일본에 살고 있었는데, 여덟 살 되던 해에 해방이 되고 귀국하여 아홉 살에 한국 학교에 들어갔으나 4학년까지 다니고 결국 학업을 포기해야만 했다. 갑자기 아버지가 돌아가셨고, 집안의 장손으로서 그리고 한 가정의 장남으로서 그는 일을 해야만 했다. 그래서 그는 서울 상경을 하게 된다.
“서울역에서 노숙도 했습니다. 혹시 꿀꿀이죽이라고 아세요? 당시 미군 부대에서 먹고 남은 잔반을 한데 모아 희멀겋게 죽을 끓여 팔았는데, 그걸 꿀꿀이죽이라고 했어요. 그걸 사먹기 위해 깡통 하나씩 들고 그 앞에 줄을 섰지요. 그렇게 버텼습니다.”
그러다 그는 미군부대에서 겨우 자리를 얻어 일을 하게 된다. 그러고부터 조금씩 형편이 나아지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렇게 객지생활을 하다 군에 입대하게 되고, 그는 거기서 사무행정병으로 군생활을 하게 되었고, 만기 제대 후에는 다시 고향으로 돌아오게 된다.
결혼하여 가정을 꾸리다
스물여덟 살에 그는 다시 고향인 논산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서른 살에 중매로 결혼했다. 좋고 싫고를 따질 계제가 아니었다고, 당시는 다 그렇게 결혼했다고 한다. 그리고 둘 사이에 1남 4녀를 두었다. 그의 아내인 이병수 할머니(81세)는 할아버지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자상한 사람이에요. 한마디로 흠이 없는 사람이지요. 그 흠이 없는 게 흠이지요. 사람이 너무 좋아서 남에게 자꾸 퍼주어요.”
고향에 돌아온 그는 우연한 기회에 군생활의 사무행정을 보던 경험을 살려 농협에 취업을 하게 된다. 그곳에서 그는 13년 간 근무를 하고 퇴직을 했다. 그리고 인삼농사를 시작했다. 수입은 괜찮았으나 일할 사람을 구하는 것이 항상 문제였다. 한때는 벼농사와 표고버섯 농사도 지어보았다. 그러다 시작한 것이 배나무 과수원이다. 그는 지금까지 28년째 배나무 과수원을 하고 있다.
“제가 생산하는 배는 미국의 로스앤젤레스까지 수출하고 있습니다. 벌써 21년째에요. 그곳에서 배의 품질을 인정받았습니다. 아주 인기가 좋아요. 저도 이렇게 외화획득에 일조하고 있습니다.”
이 배나무 과수원도 손이 많이 가는 농사인데, 요즘에는 일할 사람을 구하기가 너무 힘들다고 말한다. 대부분 외국인 노동자들이 와서 일하는데 그나마도 요새는 코로나19 때문에 더 힘들어졌단다.
도둑 맞았던 할아버지 공적 밝혀내다
그의 아버지는 그가 13살의 어린 나이일 때 일찍 돌아가셨다. 그리고 작은 아버지들께서 할아버지의 독립운동 행적을 찾으려고 애썼지만 결국 찾아내지 못하였다. 그러나 그는 포기하지 않았고 드디어 그 행적을 찾아내게 되었다.
“저는 지난 2001년 할아버지의 독립운동 행적을 다시 찾기 시작했습니다. 전국을 헤매고 다녔지요. 할아버지가 복역했던 전주교도소, 또 자금을 모으기 위해 활약하셨던 부안, 고창 등 여러 지역을 다니며 알아보던 중 할아버지께서 공주재판소에서 재판을 받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공주재판소를 방문하였는데 모든 관련서류가 정부종합청사로 이관되었다는 이야기를 듣게 되었습니다. 거기서 할아버지의 재판기록 서류를 찾을 수 있었습니다. 영구 보관 서류로 분리되어 있던 재판기록 서류는 종이 문서였지만 다행히도 모든 문서가 전자문서화되어 있어서 빨리 찾을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찾은 할아버지의 재판기록을 우리말로 번역 작업(일본어로 되어 있음)을 거쳐 대전 보훈청에 제출했으나 한참 후 예상 외의 답변이 돌아왔다. 심사 결과 할아버지는 독립운동을 한 공적이 없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런 결정이 나중에 알고 보니 보훈청의 누군가가 할아버지의 공적을 다른 이에게 팔아 엉뚱한 사람이 유공자 노릇을 하고 있다는 것이 감사 결과 밝혀지게 되었다.
이런 우여곡절 끝에 드디어 2010년 할아버지는 애국지사로 건국포장을 받게 되었고, 그 후 이곳 마을에 산소 재정비, 기념비 설립, 연금 논의 등 구체적인 보훈 결정이 오고가게 되었다.
여한 없는 노년의 편안한 삶
“젊어서는 고생 참 많이 했지요. 먹을 게 없어서 독새풀을 훑어 볶아 먹으며 연명했으니까요. 그런 거 생각하면 지금 이만하게 사는 것도 잘 사는 거지요. 더 이상 바라는 것도 없어요. 그저 자식들 고생 안 시키게 집에서 편안하게 살다가, 갈 때는 부지런히 가야지요.”
할아버지는 15년 전 뇌경색으로 한 번 쓰러진 경험이 있으나 지금은 회복되었고, 건강은 아직까지 별 탈이 없으시단다. 다만 2년 전 허리수술 후유증으로 보행에 다소 불편을 겪고 있지만 일상생활에 별 지장을 주지는 않는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이 마을 노인회장을 맡고 있는 등 무척 활기찬 활동을 하고 계신다. 그리고 할아버지의 운전 솜씨는 아직도 젊은이 못지않으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