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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룡산 600년, 계룡삶 60년, 계룡시 16년
[김기중 문화해설사가 들려주는 계룡이야기]
기사입력  2019/09/18 [11:42]   놀뫼신문

[김기중 문화해설사가 들려주는 계룡이야기]

계룡산 600년, 계룡삶 60년, 계룡시 16년

 

계룡시가 개청 16년을 맞았다. 600여년 전 새로운 나라 조선의 도성으로 확정되어서, 왕궁 공사를 착수하였다. 그래서 신도시(新都市) ‘신도안’이다. 천하길지로서 십승지지(十勝之地)로 꼽히는 이곳은, 그러나 한강수가 흐르는 한양 서울에 밀렸다. 그러다가  1983년 6월 20일 소위 “6·20” 결재가 이루어지면서 경천동지할 공사가 시작되었다. 대한민국 3군본부 이동을 위한 계룡대공사가 6년 후 완결되면서 1989년 육군본부가 제일 먼저 이전하였다. 지금부터 30년 전, 계룡국방특별시 탄생의 신호탄이었다. 

계룡 신도안이 군사수도로 등극하는 역사를 지켜본 원주민들의 숫자가 점차 줄어들고 있다. 현재 계룡시 향토인은 7.3%인데 계룡살이 73년째인 계룡시 문화해설사가 있다. 사계고택에 가면 언제나 반겨주는 김기중 씨! 얼마전 유네스코에 등재된 돈암서원의 광산김씨 문원공 사계 김장생의 13세손이다. 직장 관계로 향한리 고향을 떠나 대전에서 산 적이 있지만, 그래도 줄잡아 60년은 계룡에서 살아왔다. 지난 9월 2일 최홍묵 시장은 김기중 문화해설사에게 “문화재 보전 유공 시장상”을 수여하였다. 문화재의 보전에서 그치는 게 아니라 활용, 부활에까지 주력하는 김기중 해설사의 입담은 언제나 구수하고, 계룡산 등줄기처럼 길기만 하다. 계룡산 600년 이야기가 끝이 없어, 이번에는 광산김씨 위주로 하여 살펴본다. 

 

▲ 김기중 문화해설사     © 놀뫼신문


 

 

조선 태조 이성계와 계룡산 신도안 천도 이야기부터 시작하죠. 조선의 새 도읍으로서 계룡산의 장점과 현실적 한계는 뭐라고 보시는지?

 

☞ 이성계는 개국을 하자 무학과 정도전의 건의를 받아드려 왕성을 옮길 계획을 세운다. 개성은 이미 땅의 기운이 다했을 뿐 아니라 고려 왕손과 추종 군신을 피해 조선을 새롭게 건국되기에 민심을 일신하기 위해서는 도읍을 옮겨야 한다는 것이다. 

조정은 권중화를 시켜 도읍지를 물색하게 하고 일차적으로 개성에서 먼 계룡산을 안전한 도읍지로 정하고 왕성을 건립하기 시작하였다. 1393년 2월 8일 일이다. 여름 농번기때에는 귀향하여 농사를 짓다가 원대복귀 공사 12월 11일까지 하였다. 

그러나 당시 경기도 관찰사였던 하륜이 나서서 “계룡산은 지역이 협소하고 수운이 부족하며 물이 건하고 국가 중심지가 아니어서 왕도로서 적합하지 않다”고 상언, 한양으로 변경한다. 물이 부족하다, 수로로 연결되지 않는다는 것은 왜구의 침입경로를 차단하는 장점이 있는데, 개성의 기득권층은 그 장점을 단점으로 둔갑시켰다고도 볼 수 있겠다.  

 

예나 지금이나 신도안이 대한민국의 핫 플레이스인데, 여기서 우리 계룡사람들이 눈여겨 볼 유적지들을 꼽아 주시죠.

 

☞ 계룡시에는 신도안 면내에 조선 왕성의 도읍지 신도내 주초석과 독립운동의 요람 삼신당이 있다. 삼신당은 천지인 3칸 집 사당인데, 은둔지로서 독립운동을 하던 곳이다. 

암용추 부근 대리석 같은 너럭바위가 있는데, 태조 이성계가 기도한 곳으로 알려져 있다. 석간수(石間水)가 생명수인 그 근방에 빨간벽돌 고아원이 세워졌다. 인근에는 계룡호텔이 있었는데, 랑데뷰식당으로 바뀌었다. 계룡대공사가 시작된 때가 1983년 6월 20일인데, 그때 일이다. 

6·20이란 계룡산 행정부이전사업 암호명으로 전두환대통령이 결재한 날짜이다. 계룡대공사는 그날부터 육본이전일자인 1989년 6월 27일까지 6년간 했다. 1차 입주는 육본이 그 해 6월 24일했으며, 계룡대 개소식은 7월 5일 이종구 육군참모총장과 신말업 참모차장때 하였다. 이어서 같은 7월 2차 공군 이전이 됐고, 3차 해군 이전은 1993년으로 해서 3군 본부의 이전이 완료되었다. 

조선시대 유적지도 많다. 두마면 소재 모원재(좌의정 서석 김국광 제각), 사계고택(문원공 사계 김장생), 염선재(사계 정부인 순천김씨 절재공 7대손녀 제각), 신원재(사계의 구九자 제각), 금암동에 이심원 현판(효령대군의 증손)이 있다. 일제 강점기시대 국가가 독립이 안 되고 민심이 흉흉할 때 정감록 사상을 신봉한 사람들이 계룡에 이주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 태조 이성계의 왕성 도읍지 신도내 주초석     © 놀뫼신문

 

▲ 독립운동의 본거지 계룡산 삼신당 주변, 나중에는 고아원 건물로 쓰임     © 놀뫼신문

 

계룡시 이전의 두마면은 신도안을 포함하여 너른 면적의 산촌이었는데, 여기에 어떤 집성촌들이 있었는지, 아울러 광산김씨가 이곳과 연을 맺게 된 계기는 무엇이었는지 궁금합니다.

 

☞ 전주이씨는, 태조 이성계의 3남 익안대군과 태종 2남 효령대군의 후손들이 엄사면 일대와 금암동 일부에 집성촌을 이루고 있었다. 여말선초 양강도 시절 조선개국공신들이 안성 평택 등의 땅을 하사받을 때, 광산김씨는 연산땅을 하사받은 것으로 안다. 파평윤씨가 노성윤씨, 은진송씨가 회덕송씨로 불리는 것처럼 광산김씨는 연산김씨로도 불린다. 예전에 계룡 두마면 일대도 연산현이었기 때문이다.  

광산(光山)은 광주 송정리역 광산구가 있어서 그 지명으로 알고 있지만, 백제시대에 무진주라고 하였던 전남 담양이 본이다. 기호학파의 거장인 청주한씨 한원진 호가 남당이었는데, 그가 홍성 모처에 거주하자 거기가 남당리된 것과 엇비슷한 거 같다. 

연산과 계룡 일대는 광산김씨 의정공파(김국광)와 문원공파 사계 김장생 후손들 세거지였다. 좌의정 서석 김국광과 문원공 사계의 묘역 치산 및 제사를 모시는 가운데 현재까지 대대로 살아오고 있는 곳이 계룡이다.

 

왕대리백중놀이와 관련, 좌의정 김국광 할아버지 이야기를 거론하지 않을 수 없는데, 두마와 이웃하고 있는 연산 이야기도 함께 들려주시지요.  

 

☞ 왕대리 백중놀이는 성종 24년(1494) 좌의정을 지낸 서석 김국광 업적을 기리기 위해 생긴 민속놀이이다. 수양대군을 도운 공신으로 세조의 장남인 덕종을 보필한 데 이어 차남인 9대 성종 재위때(1469~1494) 좌의정을 지냈다. 김국광 출생지는 연산현 고정리이다. 음력 7월 15일 백중일을 기하여 김국광 묘에서 참배한 후 백년대길 세화연풍(歲和年豊)을 기원하였다.

왕대리를 총좌장으로 두계, 입암, 농소 등 27개 지역이 모여 각종 제례 의식을 한다. 효자 효부에 대한 표창 불효자에 대한 벌을 주고 그 해 농사 잘 지은 머슴을 선발하여 푸짐한 상을 줌으로써 협동과 근면 정신을 일깨워주고 국민태안을 기원하는 농민 머슴들의 한마당 잔치이다. 

내가 어렸을 때 꽹매기 치는 소리를 들었다. 행사가 끝나고 나면 용기(龍旗)와 깃대와 새끼줄 같은 것들을 광산김씨 모원재에 보관하였다. 왕대리에서는 백중놀이가 동네에서 한동안 중단되었다. 그러다가 1989년 당시 한국국악협회 충남지부장인 김용근 씨의 노력으로 발굴, 시연되었다. 1990년 제주도에서 열린 제31회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에 충남대표로 출전하여 국무총리상을 받았다. 지금도 장관급 이상의 상을 받으면 무형문화재 신청이 용이해지는데, 연산백중놀이는 다음해 1991년 통과가 되어 충남무형문화재 14호가 되었다. 광산김씨인 김용근 씨가 기능보유자인 인간문화재가 되었다.(생존) 전수관도 자연스럽게 지어졌다. 

 백중놀이 전수관이 건립됨으로써 잊혀져가는 백중놀이가 명맥을 이었을 뿐 아니라 안정적으로 계승되어 활성화 일로이다. 왕대리가 조선 시대 공주목 연산현 소속이었으므로 전수관은 왕대리 아닌, 연산현 관아 있던 곳에 세웠다. 김용근 문화재는 92세로 대전에 거주하고 있으며 그 이수자 과정과 조교를 거쳐 전수자(보유자)가 되었던 김정수 씨는 타계하였다. 올 백중제를 치룬 후에는 3인 보유자 중 하나인 정태윤 인삼약초건강원 대표가 연산백중놀이보존회장으로 취임하였다. 20여년간 회장을 맡아왔던 강대혁 씨는 충남무형문화재협회의 고문이기도 하다. 현재 생존해 있는 조교는 3인인데, 그 중 1인인 김용욱 홍익건강원 대표가 총무를 맡고 있다. 

 

연산면 임리에 사시던 사계선생이 언제 이리로 이사 와서 사셨고, 여기 고택에서는 주로 어떤 일을 하셨는지요?

 

☞ 사계는 서울에서 태어났다. 11세때 모친을 여의자 시묘살이를 연산에서 했다. 13세에 파주에 올라가 송익필 선생에게 예학을 배웠고 21세부터는 밤나무골 율곡 선생에게 들어갔다. 수제자로서 10년을 공부하면서 율곡학풍을 이어받은 종장이 되었다. 결혼은 19세에 했으며 과거는 보지 않았다.

사계선생이 연산과 두계에 사신 때는 55세부터 84세까지 약 30년이다. 처음에는 연산 임리에서 양성당을 건립, 학문과 유생들을 가르치다 간간 지방관으로 공직에 나가기도 했지만 오래 하지를 않았다.  관직은 45세때 정산현감, 60세때 철원목 철원부사를 지내긴 했지만 관직에 오래 머무르지는 않았다. 1602년 벼슬을 완전 해임하고 연산현에 돌아와서 계상(개울가)에 집을 짓다. 사계고택 상량문에 <상량지후 부귀다자손 임인년 9월>이라고 써 있는데 자손복은 많았다. 정경부인이었던 창녕조씨와는 사별하였는데, 3남 3녀를 남겨주었다(창녕조씨가 36세에 별세할 당시 차남 신독재는 13세). 

사계는 3년상을 치룬 후 41세에 방년 17세이던 정부인 순천김씨를 맞아들였는데, 그 사이에는 6남 2녀를 두었다. 집은 연산 임리에도 있었지만 두계에도 집을 짓고 오갔다. 학문을 정진하면서도 후학 양성에 힘을 썼다. 강학은 연산 양성당과 강경 죽림서원에서 하였다. 사후 처음에는 성북동(대전 방동)에 모셨으나 10년 후에는 연산 고정산으로 이장했다. 1990년 문화재 지정하는 과정에서 현재 사계고택의 상랑채 대들보에 “임이년(1602년) 9월”이라는 기록을 보고 400년 넘은 집이 인정되어 문화재로 지정되고 보존중이다. 

 

▲ 신동안 한가위 풍물놀이     © 놀뫼신문


 

사계고택은 그 존재만으로도 계룡시의 종가집 같은데, 요즘은 고택다방 등으로 시민의 사랑방이 되고 있습니다. 마음의 고향으로 느끼는 시민들이 늘면서 발걸음이 잦아지는데....

 

☞ 사계고택은 문화재청에서 시행하는 생생문화재사업에서 2015~2017년 3년연속 우수사업으로 문화재청장상을 받고 “명예의전당”에 헌정되었다. 그동안에는 원형 보존에 힘을 썼으나 계룡시청과 계룡시민의 품으로 돌려드리려 합니다. 예절교육, 숙박체험, 전통혼례, 음식체험, 사상대회, 인문학 강의와 음악회 등으로 연중 시민의 쉼터로 개방 소통하며 이웃사촌이 되게 만들 계획입니다.

 

사계고택 외에 염선재 등 광산김씨 유적이 많은데, 아울러서 사계 선생 이후 영향을 크게 미친 후손 중 한 분만 소개해준다면?

☞ 염선재는 사계 김장생 선생의 정부인 순천김씨의 사당과 제각이다. 계룡시 유적 중에 사계고택과 염선재가 탐방객이 가장 많고 잘 정비되어 봄에는 철쭉이 장관이다. 정부인 순천김씨는 절재공 김종서 장군의 7대 손녀로서 17세때 사계와 만나 효와 열을 다하며 삼종지의(三從之義)를 실천한 열녀로서, 효열 칙명을 받아 열려각이 인근에 세워졌다.

후손 이야기를 한다면, 문원공 사계 선생의 아들 신독재 김집이 부친의 가업인 예(禮)학문을 계승 발전시켰다. 성균관 생원으로 있던 손자 충정공 김익겸이 22세때 인조의 남한산성 굴욕이 있었다. 인조의 세자인 소현세자 봉림대군이 강화도로 피신갈 때 끝까지 세자를 수호하였다. 그러나 결국 청태종에게 항복하자 좌의정 김상용과 함께 화약고로 들어가 꺼내온 화약으로 자폭하고 말았다. 

당시 김익겸은 해평윤씨(정혜옹주는 선조의 딸의 손녀)와 결혼하여 아들 하나가 있었고 또 임신중이었다. 하나는 김만기요, 유복자는 서포 김만중이다. 이 둘을 키워낸 해평윤씨의 교육열은 신사임당과 비견될 만하다. 

김만기, 김만중을 ‘형제대제학’으로 키움은 물론 ‘김만기 3대대제학’을 길러낸 것이다. 3대대제학이란 아들, 손자까지 나란히 대제학을 하게 되는 경우인데, 우리나라에는 3가문만 있다. 달성 서씨, 연안이씨 그리고 광산김씨 이 셋뿐이다. 정승 셋보다 종신인 대제학이 낫고, 대제학보다는 동국18현처럼 문묘에 배향되는 게 제일 낫다는데, 그 대제학을 형제는 물론 손자까지 하도록 교육시킨 것이다. 

아울러 손녀도 왕비자리까지 오르게 하는 초석을 마련했는데, 숙종의 인경왕후가 해평윤씨의 손녀이다. 그러나 인경왕비는 20세에 죽고 두 딸도 생명을 이어가지 못했다. 후궁이었던 장희빈의 아들이 세자(나중에 경종)로 책봉되자 당시 이조판서였던 서포 김만중은 좌의정이던 우암 송시열과 함께 세자 책봉을 미루어달라고 상언하다가 귀양을 가게 된다. 

남해 노도에 귀양온 서포 김만중은 어머니 해평윤씨에 대한 그리움을 애절한 효심으로 써내려간다. 이것이 한글로 쓴 소설 『구운몽』이다. 임금님에 대한 충심을 구구절절 표현한 것은 『사씨 남정기』인데, 이는 어찌 보면 장희빈을 끼고 돌았던 숙종임금의 방탕기라고 할 만하다. 이처럼 광산김씨 서포 김만중은 조선시대 역사의 한복판에서 출중한 문인으로 필명을 남겼다. 

 

일제 강점기때 두마만세운동도 있었고 한훈 선생도 여기 와서 암약하는 격랑기였을텐데, 계룡시의 독립운동가 중에서 광산김씨도 있는지요?

 

☞ 옛 두마면인 계룡시에 일제 강점기 독립유공자 8인이 계신다. 한훈, 양기하, 오문진, 김지수, 배영직, 이순화, 진응수, 배영진 선생이 8인이다.

김지수 선생은 광산김씨 집안 어르신이라 집에서 들은 말이 있다. 1845년 문원공 사계 김장생의 11대손으로 두계리에서 태어났다. 학문과 예법에 밝은 가정에서 태어나 부나 영화에 가까이 하지 않았으며 독립 및 자주권이 일제에 의해 박탈당하자 괴로워하고 어둠 속에서 살아갔다. 1910년 8월 일제는 한일합방후 그를 회유코자 은사금을 내려 주자 “원수의 나라 일왕이 주는 불의의 돈을 받을 수 없다”고 돌려보냈다.

수차례 은사금을 거절하자 왜경들이 체포하려 하자 “원수들한테 끌려가느니 차리리 죽겠다” 하며 망국의 한을 품은 채 칼로 자결 순국하니 1911년 4월 17일 67세로 떠나갔다. 그 집터가 두계 구장터 철도 옆이었는데, 1965년 호남선 철도 복선공사때 헐렸다. 

 

 

▲ 숫용추에서 본 신도안전경     © 놀뫼신문

 

▲ 군부대가 들어서기 전 5천여 주민들이 함께 살던 신도안 전경     © 놀뫼신문

 

▲ 신도안 시장(부남리)     © 놀뫼신문

 

고향 향한리 어린 시절 이야기와 최근 개발붐인 향적산 주변  상황도 알려주시지요.

 

어린 시절에 향적산 국사봉 천지창운비에 올라 노래 부르며 놀았다. 왕도 건립 위해 태조가 공주목을 거쳐 징천(경천) -> 용칭이고개(신원사 뒤고개)-> 국사봉에 올랐을 것이다. 국사봉에서 신도안을 내려다보면 2km떨어진 천황봉보다 더 잘 보인다. 바둑판처럼 보이는 곳이다. 거기에서 제를 지내고 국사를 논했을 것이다. 

그 위에 있는 봉우리를 천왕봉이냐, 천황봉이냐 말이 많은데, 82년 이렇게 이상한 이름으로 개명되기 전에는 상봉 또는 상제봉이라 부르던 곳이다. 옥황상제(玉皇上帝)의 상제로서, 동학과 도교 등이 합쳐진 천진교가 있다. 그 글이 여기에 한울님을 부르며 기도하던 천단이 있다. 천지창운비 비문을 보면 “전계황지”라고 쓰여 있다. 계룡산의 계(鷄)는 봉황으로서 왕, 대통령을 의미한다.  황지(黃地)는 황금땅이다. 계룡시 신도안면 부남리 산6번지 상제봉은 천당, 극락, 선계, 상계이다. 625때 인민군이 들어오지 않았고 최근 링링도 건들지 못하는 곳, 인재 천재에서 자유로운 꿈의 땅이다. 신원사 뒤고개인 용칭이고개는 숫용추 인근으로 노무현 대통령 별장이 있는 곳이다. 독재의 상징인 청남대는 전 국민에게 개방하고 대신 이곳 계룡대 육군본부에 마련한 동일한 이름의 이 별장은 오리 배를 띄우는 연못도 있는 별천지이다. 

향적산 치유숲 조성 계획이 진행되는 가운데, 내 고향 향한리 자연부락은 변신중이다. 향한리 일대 행정구역명은 식한면이었다. 향적산의 향(香)과 식한면의 한(汗)자가 합쳐진 향한리는 12(열두) 향한리로 불렸다. 내가 자란 곳은 괸돌(고인돌)였고, 나머지는 용계말, 빛가리, 종평리, 동촌, 모시밭골, 만안골, 운전리(雲田), 상전(上田).... 면적도 넓고 옛날에는 부촌이었다. 향적산 향내음의 성스런 노적(쌓을 적積)가지가 쌓이는 동네이다. 

이 향한리 일대가 개발 붐이다. 무상사 가는 길 쪽을 위시하여 전원주택 단지 6곳이 공사를 시행중이다. 지가도 평당 100만원을 호가하고 35억짜리 집도 있다는 소리도 들린다. 천하길지 복받은 땅으로 소문이 나서 예비역 장성이나 교수층이 들어오는 모양인데, 원주민과의 소통이 걱정이다. 전원 고급 카페도 6군데가 성업중이다. 

전원마을이 들어서는 성스런 동네 시골촌에 빌라건물이 들어서고 전원 주택지가 6곳이 개발중에 있다. 자연부락 중 빠른 속도로 인구 유입이 많은 곳이며 계룡 시민들 휴식처 치유숲 공원이 들어서는 계룡에 가장 살기 좋은 천혜의 복 받은 땅이다.

 

계룡시에서 옛 논산군 두마면의 원형이 가장 많이 남아 있는 곳은 어디어디이며, 어떤 점에서 그러한지요?

 

☞ 두마면에는 3실이 있었다. 면보다 작고 리보다 큰 곳을 ‘실’이라 했는데, 구레실, 소라실, 대실이다. 대실은 농소리의 일부인데, 그래서 대실지구라고 부른다. 그 컸던 소라실, 즉 유동2리는  현재 30세대 안팎인 낙후지역이다. 합판길이라는 도로명이 있는 광석리(합판이) 역시 마찬가지이다. 합판이란 도곡리, 향한리, 유동리 이렇게 세 물머리가 합쳐져서 흐르는 곳이라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배나무밭이 있어서 배울골이라 부르는 도곡2리도 원형이 잘 보존되어 있는 동네다. 현대판 낙후지역인 이곳 3개리는 몇 십 노후된 스레트집, 교통 문화 교육 쇼핑과는 별개인 듯한 지역이다. 원형 보전 가치가 높은 지역이긴 하지만 현지민들이 잘 살아갈 수 있도록 계룡시에서 어떤 식으로든 관심을 기울여주어야 할 곳이다. 

 

계룡시 이야기의 압권은 계룡산입니다만, 암, 수 용추와 두계천 등 계룡의 산수(山水) 이야기 곁들여서 들려주시지요. 

 

☞ 계룡시에는 때 묻지 않은 천혜의 장관을 자랑하는 계룡산이 감추어 놓은 신비의 수용추와 암용추가 있다. 옛날에 땅속에 암용과 숫용 두 마리가 사이좋게 살고 있었다.

영산의 정기를 받아 참으로 깨끗한 용들이 하늘에 올라갈 것을 생각하고 하늘의 부름을 기다렸다. 비가 올 때마다 천둥이 칠 때마다 하늘에서 부르지 않을까 눈을 내놓고 하늘만 바라봤다. 비가  오는데 하늘에서 “너희들은 땅에서만 살려하느냐?” 하는 호령이 떨어졌다.

“너희들은 정이 두터워 따로따로 정해 다시는 만나지 마라” 하며 아쉬웠지만 하늘에서 만나기로 약속하고 제각기 장소를 정해 땅을 파고 따로 살았다.

어느 날 갑자기 천둥 번개와 함께 비가 퍼부었다. 하늘에서 “때가 되었으니 올라오너라”하여 그 후 두 마리의 용이 하늘로 올라가는 것을 본 사람들이 암용이 올라간 자리는 암용추, 숫용이 올라간 자리는 숫용추라 하였다. 둘 사이는 십여리 떨어져 있으며 암용추는 삼신당 밑이다. 그 용동리에 작산저수지가 있어서 동네 식수원이었는데, 대청댐 수도가 들어온 이후 허드렛물로 쓰이고 있다. 용동리, 용남 등에서 보다시피 용(龍)은 암용과 숫용, 계룡의 그 용이다. 숫용추 주변은 장군숙소공관으로 2층 단독주택이다. 이 두 용의 눈물, 오줌이 두계천으로 흘러간다. 

지금은 두계천으로 굳어졌지만 용의 물이 흐르므로 “용계천(龍溪川)”으로 불렸으며, 수원지가 용추이므로 용계천이라는 이름이 더 어울릴 거 같다. 사계선생이 기거하던 연산 임리 옆을 지금은 연산천이라 부르지만, 예전에는 사계천으로 불렸다. 

어쨌든 약수였던 두 용의 물은 두계천(용계천)으로 흘러내리면서 비단 같은 계룡 논밭들을 적시며 대전 갑천과 합류 후 신탄진쪽에 가서는 대청호를 통과한 금강에 통합되어서 세종~공주~부여(백마강)~강경을 거쳐 군산앞바다에 이르른다.

 

계룡산의 종교 이야기는 무수할텐데, 그 중 대표적인 것 하나만 소개해주세요. 

 

☞ 계룡(신도안)은 신흥종교를 말하면 정역(正易)이다. 내 고향 향적산방에서 일부(一夫) 김항(金恒) 선생이 한국의 신흥종교의 모태는 정역사상에서 비롯됐다. 정역사상과 더불어 동학 단군사상 풍수 도참사상도 함께 했다. 신흥종교에서 가장 많은 영향을 준 사상은 단연 정역이 으뜸이다.

정역 사상은 19세기말 계룡산을 중심으로 열화같이 퍼졌다. 정역은 조선후기 역易의 대가였던 일부 감항 선생이 저술한 사상이다.

일부는 논산(양촌)에서 태어났고 광산김씨 사계 김장생 선생의 방계 후손이다. 일부는 이운규 선생의 제자로서 수양 방법은 서전의 정독과 다독 그리고 (중얼중얼하는) 영가, (몸을 움직이는) 무도를 통한 정신개발이었다. 수양 도중 정역 팔쾌도와 대역서를 얻은 후 1885년 정역을 완성했다. 一夫는 계룡산 국사봉 아래 향적산방에서 ‘무극대도’라는 교명으로 제자들을 모아 정역을 가르쳤으며, 마지막 제자로 송철화 선생이 학맥을 이어오다 40년쯤 전에 생을 마쳤다. 일설에 의하면 송철화 선생은 일류깡패였는데 나의 아버지 김용갑(金容甲) 선친과도 가까운 듯하였다. 어렸을 때 보면 지프차도 들어오고 꽤 성했는데, 지금은 건강이 안 좋은 사람들이 질병치유차 머무는 거 같다. 

향적산 힐링숲 조성을 위하여 토지 대금을 46억 치루었는데, 그 돈은 124명이 계원으로 되어 있는 송계(松契)에 3천만원씩 분배되었다. 향적산방의 경우 일부 선생의 후계자 송철화 선생의 막내딸이 소유자로 되어 있는데 4동 4필지이다.  

엄사(음절이란)? 엄사리에 음절이라는 절이 있었는데, 폐사지에 주춧돌 같은 유적이 발견되지 않아서 정확한 위치를 못 찾고 있다.

현재 엄사면 인구는 19,000명으로 두마면이나 금암동이 8천인 것에 비하면 두배 가량이고, 2만을 넘으면 읍승격이나 분면(分面)을 해야 하는 상황이다. 향적산면으로 분리가 될 경우 향한리, 유동리, 광석리, 도곡리와 파라디아까지 향적산면이 될 확률이 높다. 

 

계룡대가 들어오기 전 굿당천지였다는데, 당시 농협 직원으로서 신도안의 상황, 철거 상황을 어떻게 기억하는지요?

 

☞ 신도안은 일제시대 정감록설이 유포 왜정이 물러가고 미일전쟁이 일어나며 그 후 한국독립이 이어질 때 그때의 도읍지가 신도안이라고 믿는 사람이 급증하였다. 3·1운동 후 정씨가 유서깊은 신도안에서 왕국을 건설한다는 정감록상의 예언대로 3·1운동 전 후로 믿는 사람들이 급격히 증가 1924년 동학계 김연국이 교인 천여 명을 데리고 신도안 용동리에 자리잡기 시작하였다. 그 해 신도안의 호수 및 인구가 총 892가구에 4,565명이 살았다. 해방 후 정감록 사상으로 열차와 트럭으로 유입 신종 유사 종교가 점차 늘어 1950년대 신흥종교 전성기를 누렸다. 1955년 8월 당시 1086세대 5700명이 살았으며 그 당시 신흥종교 및 무속인들이 계룡산에 무단 점유 130여개 종교가 번성하였다. 

1975년 시작된 계룡산정화사업은 1979년까지 지속되었는데, 박대통령 서거로 중지되었다.  특히 1975년 8~12월은 국립공원 계룡산 자연정화 사업 초창기이자 절정기로 이 일대가 대거 철거되었다. 당시에 나는 두마농협 신도지소장이었다. 4명의 직원과 함께 금융 업무를 하였는데, 부남리, 석계리, 용동리가 내 영업처였다. 산아래 동네에는 계룡호텔도 있었고, 금강여관도 있던 곳이다.

 산 위에는 암자나 기도원, 철학관, 굿당 등 유사종교단체가 130여 곳에 달했다. 각자 모두 교주였다. 천황봉 같은 데 제단을 쌓고도 하였지만 나무에 동아줄을 묶어놓고 신으로 모시고 주변 자연이 그들 각자의 신이 되기도 하였다.

 산속에 있었기 때문에 직접 내려오기보다는 “돈 받으러 오라” 전갈이 오면 농협직원들이 산중턱 자전거나 오토바이가 갈 수 있는 데까지 갔다. 나머지는 걸어올라가 돈을 받고 수기로 적어주고, 하산하여서는 통장을 덜컥 거리는 기계에 넣어 입력하였다. 인쇄된 통장은 나중에 갖다 주었는데, 아예 통장을 맡겨두는 곳도 있었다. 

1975년 유신시절 8월 여름에 시작된 철거는 국토대 같은 용역이 새마을 모자를 쓰고 철거기구로 무장한 채로 동네에 들어섰다. 망치를 쓰는 힘센 무속인들 반항도 만만찮았지만, 결국 12월까지 모두 철거되고 말았다. 정장리, 용동리, 남선리, 석계리, 부남리 등으로 구성된 신도안면은 6·25때도 인민군이 못 들어온 은신처이지만 철거반의 철퇴에는 당해내지 못하였다. 

(6·25때 내가 살던 향한리 우리집은 인민군주전소로 쓰였다. 집이 커서 사랑방도 있고 하니까, 인민군에 협조하던 머슴들 집합소였다. 인민군 본소는 두마면에 있었으며 몇 십명이 모이는 큰 장소였다. 나는 그때 철거반이 미쳐 챙겨가지 못한 빠루나 망치 같은 걸 몇 개 가져와 아직도 쓰고 있다.)

철거당한 130여곳 교주가 이주해 간 곳은 신원사쪽이 많고, 흑석리, 장태산 등 인근였고, 지리산까지 간 사람도 있다고 들었다. 거북암의 경우 향한리로 이사하였으나 40여 년이 지나는 동안 동네에서 집 넓히고 하는 와중에 고소도 당하고 현재는 와병중이라고 하니, 그들에게는 경천동지, 천지개벽인 셈이다. 

그 후 나는 1984년 대전으로 발령이 나서 향한리를 떠났다. 그리고 2003년 정년 퇴직한 후 귀향을 했는데, 새로운 터는 향한리가 아닌 광석리로 잡았다. 20여년 떠나 있는 동안 계룡시가 개청되고 하는 사항은 정확히 모른다. 다만 고향에 부모님이 계셨으므로, 주말에는 농사일을 도우려 들리곤 하여 계룡시의 변화상을 못 느낀 것은 아니다. 여기서 태어나 여기에 다시 뼈를 묻을 것이므로 내 고향과 지역의 역사를 더 공부하고자 문화해설사도 되었다. 계룡시 명예시장으로도 위촉되었기 때문에 타지 사람들에게 계룡의 진면목을 더 알려주고자 한다. 그런데 이 일은 나 혼자만의 힘으로 되는 게 아니다. 퍼즐 맞추는 것처럼 여러 사람이 증언하고 기록하여서 계룡의 역사가 온전히 복원되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마지막으로 “계룡시?” 하면 딱 떠오를 랜드마크나 정신적 유산으로 어떤 걸 내세우고 싶은지?

 

☞ 이 질문에 대해서는 묵묵부답 끝에 “기자가 알아서 쓰라”고 백지수표다. 난감 상황에서..... 이 지면에 남기기 어려웠던 대화 한 토막이 찝힌다. 오늘 길고긴 인터뷰의 시종일관 졸가리는 광산 김씨, 소위 “광김”였다. 역으로 기자가 광산 김씨라면, ‘이런 인터뷰가 가문의 영광까지는 아니더라도 우리 집안을 알릴 호기(好機)로 여겨지지 않을까?’ 지레짐작하였다. 그러나 반응은 갸우뚱이었다. 광김이 명문집안이라고 하지만, 조선시대 이래 수백년 동안 백성들에게 나름 잘해준다고 하였겠지만, 아무리 그랬어도 양반 아닌 민초 입장에서는 불만족스러운 때가 많았을 것이다. 경향 방방곡곡에서 요직은 양반들이 독차지해왔으니 신분상승의 기회가 차단된 상황에서 머리가 좀 있는 사람들은 면종복배(面從腹背) 일쑤였을지도 모른다. 바로 이런, 양반 계급이나 광김에 대하여 우호적이지만은 않았을 사회적 분위기를 터놓은 것이다. 

이런 분위기는 지금도 여전히 팽배하다. 신도시에서 어쩌다 감지되는 원주민과 이주민 사이의 난기류, 교육기회의 불균형, 부의 분배 구조 악순환 등등.... 예전, 신도안에 들어왔던 이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처방전을 내놓았고 나름의 이상향들을 제시하였다. 이제는, 현재 계룡땅에서 살고 있는 시민들이 그 청사진을 내놓아야 할 때이다. 그것이 소확행이냐 거대담론이냐 따질 계제는 아닌 거 같다. 각자 자리에서, 각자 연출하는 일상에서 본인이 희구하는 파라다이스를 일구어 가면 그걸로 OK일 거 같다. 행복(幸福)은 교집합이 넓기 때문에, 각자의 행복이 흘러흘러 공동체의 행복으로 응축될 거 같다. 숫용추와 암용추가 용계천에서는 합수되어.... 식수원이 되고, 수영장 놀이터가 되고, 한 바다가 되듯이~~~

 

대담 : 이진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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