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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노트] 연산면 화악리 이조구(李祚九) 님 “그냥 생각나는 대로 쭉~쭉~ 써내려가요”
기사입력  2019/08/21 [15:04]   놀뫼신문

연산면 화악리 이조구(李祚九) 님의 인생노트

“그냥 생각나는 대로 쭉~쭉~ 써내려가요”

 

▲ 자작시를 낭송하는 촌티문학회 이조구 씨     © 놀뫼신문

 

  이조구(李祚九)  

  • 1951년 화악리에서 출생
  • 1959년 한문서당입학(9세)
  • 1966년 도곡국민학교 졸업(16세)
  • 1977년 결혼(배우자 박규분 사이에 2남1녀)
  • 1982년 마을이장(5년)
  • 1986년 대전이주(안전공업 입사)
  • 2004년 화악리로 귀향

 

내가 태어난 곳은 논산시 연산면 화악리 289번지. 이곳에서 5남매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위로 누님 두 분과 아래로 남동생과 여동생이 있다. 나의 출생은 다른 사람과 좀 다른 게 있다. 우리 부모님(이래복·김재봉)은 딸 둘을 낳고 아들을 낳으려고 좋다는 거 다 해보셨지만 마음과 뜻대로 되질 않았다. 나중에는 백일기도를 하였는데, 그 끝에 임신을 하고, 기다림 끝에 출산을 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광주리 아기를 실겅 위에

 

두 부부는 아기가 태어나자 광주리에 이불을 깔고 아기를 담았다. 그 광주리를 방애랫목 위 실겅(시렁) 위에 얹어 놓고 “우리아기 씨앗해야지” 하면서 아기의 무병장수를 기원하고 축복했다. 그 후로 내 아명(별명)이 광주리였다. 우리 부모님도 ‘광주리 아빠’ ‘광주리 엄마’로 불러져서 어색하지도 않고 공감하면서 생활했다. 

광주리는 무럭무럭 자라 어렸을 때 마을에 있는 한문 서당에 입학하여 천자문 동문선습 계몽편 명심보감 등 한학을 수학하였다. 그러고 나서 초등학교 4학년으로 편입, 3년을 공부한 끝에 초등학교 졸업을 했다. 집안형편이 넉넉지 못해 상급학교 중학교 진학을 포기해야 했다. 엄격한 아버님 밑에서 농사일을 배우고 익혀 농사일을 하였다. 한우도 키워 가족처럼 돌보게 되었다. 논갈이하는 소로 육성하여 논과 밭을 갈고 씨를 뿌려 소와 같이 일하였다. 

 

▲ 중부전선 철원 3사단 백골부대 시절     © 놀뫼신문



사단장 한마디에 포상휴가 일주일

 

아버님 밑에서 농사일도 배우고 하다보니 세월이 흘러 성년이 되고 군입대 영장이 나왔다. 대한민국 남자, 건강한 남자라면 누구나 입대하여 국방의 의무를 수행하는 것! 1972년 10월 논산훈련소에 6주간 기본군사교육을 이수하였다. 추운 겨울날 연무대에서 군용열차에 몸을 실고 달려 의정부 101보충대 도착하였다. 휴식과 대기시간을 거친 후 중부전선 철원 3사단 백골부대 신병교육대에 도착하였다. 

130명의 교육동기생들은 2개 반으로 나뉘어 교육에 필요한 총기 피복 등 필요한 물품을 지급받고, 후반기 주특기 교육을 받기에 앞서 입교식을 하였다. 입교식은 대대강당에서 교육생 130명과 대대 기관병이 참석한 후에 사단장이 참석하여 신병들에게 3년 동안 병영생활에 필요한 소양교육과 함께 격려사 등 훈시를 하였다. 사단장 훈시 격려사는 마음가짐과 각오를 새롭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입교식이 있은 후 며칠 지난 어느 날, 연병장에서 교육을 받고 있는데 행정실 문서 연락병이 찾아와서는 내 이름을 호명하였다. 며칠 전 입교식날 저녁에 내무반장이 입교식때 “사단장님 훈시 소감문을 쓰라”고 해서 써서 냈다. 훈련병 130명 전원의 내용을 검토했는데 내가 쓴 것이 특이하고 잘 썼다는 평가가 나왔다는 것이다. 사단장님이 “어떤 놈인지 얼굴 좀 한번 봤으면 한다”고 하여 부르러 왔다는 것이다.

문서 연락병과 함께 행정실로 오니 기간병 선배들이 사단장 면담에 앞서서 나를 발끝까지 점검했다. 이발병 불러 머리손질하고 세탁소에서 전투복 다림질해서 입히고 군화로 빛이 반짝반짝 파리가 미끄러지게 광을 내서 신겼다. 문서 연락병과 함께 버스를 타고 사단본부가 있는 신수리로 동행했다. 한참 후 사단정문에 도착 외출증을 제시하니 외출증에 ‘사단장 면담’이란 것을 읽어보고는 그렇게 친절할 수가 없었다. 부대 안으로 들어가 사단장실로 들어서서 백골 구호와 함께 경례를 올리니 사단장님이 손을 맞잡고 반갑게 맞아 주셨다.

차 마시며 대화하면서 격려와 칭찬을 듣고 나오는데 사단장님이 부관한테 “이봐 부관! 이 친구 신병교육 끝나면 포상휴가 일주일 보내줘!” 하는 것이었다. 밖에 나오니 동행했던 문서 연락병은 신병교육대로 돌아가고 없었다. 부관이 짚차로 나를 태워 귀대시켰다. 그 후로 나는 3년 동안 군 생활을 아무런 사고 없이 보람되게 보내고 전역을 했다.

내가 3년이라는 군생활을 마음 편히 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밑에 남동생이 부모님 모시고 힘든 농사일하며 가정을 돌보느라 힘이 많이 들었기 때문이다. 고마울 따름이다.

 

결혼식날, 싸이카로 칸보이

 

열심히 살다보니 어느덧 내 나이 스물일곱! 결혼 적령기가 되고 여기저기서 중매가 들어오고 몇 번의 맞선 끝에 지금의 아내를 만나 결혼하기에 이르른다. 맞선을 본 후 만남을 몇 번 거듭한 후에 약혼하고 결혼을 하게 되었다. 1977년 3월 30일 대전광역시 중앙통에 충청남도 여성회관에서 결혼식을 일가친척과 동네사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성대히 거행하였다. 관광버스에 하객들과 동승하여 고향마을로 귀가하는데 충남 경찰청 교통지도과에 근무하는 친척형님이 경찰 싸이카로 하객들을 태운 관광버스를 칸보이(convoy)해 주었다. 

도마동 거쳐 진잠동까지 싸이렌을 울리며 동행해주었으니 신나는 결혼 이벤트 선물이 아닐 수 없었다. 고향마을 회관 앞에 도착한 하객들을 모시고 마당에서, 방에서, 이웃집까지 빌려 국수잔치를 하면서 이야기 꽃을 피웠다. 그 시절에는 예식장에서 손님 접대를 하지 않았다. 하객들을 혼주집으로 모셔 음식 접대하고 기념품을 나누어주기도 하던 시절이다. 

결혼식을 올리고 나서 들뜬 마음도 잠시...... 일상으로 돌아가 부모님 모시고 농사일 열심히 하여 가족 부양하고 세월이 흘러흘러 아들 둘 딸 하나 삼남매를 낳아서 키웠다. 아직 젊은 나이라 지역 안보를 책임지는 예비군 훈련을 하면서 동원훈련도 가고, 마을 향토예비군 소대장을 맡아 동분서주하던 중 1982년 봄 마을총회가 열렸다. 이 자리에서 주민들 호응을 얻어 마을이장으로 추천받았다. 

 

▲ 도곡국민학교 진학반 아이들(가운데 장신)     © 놀뫼신문

 

▲ 이장시절 어린이날 잔치     © 놀뫼신문



마을 이장할 때 공평하게

 

이장을 맡아 하면서 주민들의 민원사항을 될 수 있는 한 빠짐없이 챙겨주었다. 그때만 해도 출생신고, 사망신고 같은 민원은 이장이 모두 대행해 주었다. 봄철 영농철에는 단위농협에서 시행하고 영농자금 대출을 해주었다. 농협에서 영농자금 대출을 연대 보증하여 개인별로 하였던 때, 나는 마을 단위 총액을 공평하게 농가별로 나누어서 추진했다. 봄철에는 면사무소 산업계 직원들이 이장집에 상주하면서 영농지도를 하던 때였다. 가을에도 논갈이 독려사업, 이모작 보리·밀 파종사업,  여름철 마을 공동 퇴비증산 사업 등 쌀 증산을 위한 사업이 한창이었다.

이장이 되어서 좋은 점도 많았다. 사기 진작을 위해 매년 선진지 견학을 겸해서 관광을 시켜 주었다. 면사무소가 주관이 돼서 농협이 후원하였다. 특히 우리 마을은 전통적으로 이장이 마을일에 매진하면서 열심히 하는 것을 독려할 겸 격려하는 차원에서 이장 수고비로 각 농가별 하곡·추곡 각각 1말씩 주어왔다. 면사무소에서도 매달 이장 회의나 긴급회의가 있기 때문에 교통비 차원에서 5만원, 농협에서 3만원 도합 8만원을 지급해왔다. 전에는 교통비 지급이 유명무실했는데 명문화되다 보니깐 주민들이 “이장에게 지급하는 하곡과 추곡을 없애자”는 의견이 분분해졌다. 그래서 내 이장 임기 중에 농가별로 지급하던 이장 수고비(하곡·추곡)는 폐지하였다.

 

도지사가 와서 모심어주던 시절

 

어느 해인가 마을경사가 났다. 충청남도 안응모 도지사께서 우리 마을을 방문하여 도청직원들과 함께 마을 논모내기 일손돕기 사업을 한다고 면사무소에서 통보가 왔다. 마을 주민들과 총회를 열어 모내기할 논 선정과 날짜를 정했다. 며칠 전부터 마을 주변 대청소며 제초 작업을 하였다. 진입로 주변 및 마을회관 주변을 깨끗하게 청소하고 정리 정돈하여서 손님맞이 준비를 끝마쳤다.

모내기하는 당일날 아침 일찍, 나는 회관 방송실 문을 열고  마을 방송을 했다. “안녕하십니까 이장입니다. 주민들께 드릴 말씀은 오늘 도청에서 도지사님과 도청직원들이 우리 마을을 방문하여 모내기 일손돕기 사업을 한다고 하니, 주민여러분 께서는 한 분도 빠짐없이 마을회관으로 오전 8시까지 나오시기 바랍니다. 아울러 부녀회 회원들도 같이 동참해 주시기 바랍니다.”

아침을 서둘러 챙겨먹고 회관으로 나가 마을 주민들을 대동하고 둥구나무가 있는 동네 어귀로 나갔다. 손님들이 오셔서 쉴 수 있는 쉼터와 점심식사를 위하여 가마솥을 걸었다. 밥을 짓고 고깃국도 끓이는 일은 부녀회 회원들이 수고하였다. 도청직원들이 모내기할 모를 모판에서 쪄내는 일(뽑는 일)은 남자들이 하고 정리하여, 모내기할 논에 골고루 모 묶음을 던져 놓았다.

드디어 시간이 되자 도지사 승용차가 선두로 들어오고 국장과 그 외 손님들 승용차가 뒤따라 들어오고 직원들이 탄 대형버스도 들어왔다. 마을 주민들이 환영을 하고 충남 경찰청 교통과에서도 나와 차량 진입과정에서 혼잡한 흐름을 교통정리 해주니 고마울 따름이었다. 손님들 태우고 온 차량들은 마을에 있는 개화초등학교 운동장에 주차해놓고, 오늘 모내기 하러 오신 손님들을 안내하여 모내기할 논으로 이동하였다.

이장인 나를 비롯하여 반장님 몇 분이 모줄을 잡으며 인도하고 몇 분 반장님들은 모내기하는 분들 뒤에서 모쟁이를 했다. 모줄잡은 사람들은 모내기하는 분들 중 자기구역을 늦게 심으니 전체가 늦추어지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빨리 심어!” 재촉하면서 큰소리로 고함 지르고 하니 웃음이 터져나오기도 했다. 모줄 잡은 사람들이 재촉하면서 줄을 빨리 넘기니 진척이 빨랐다. 

그러는 사이 논옆 농로에는 연산상고(현, 인터넷고) 농악대가 나와 풍물을 치면서 흥을 돋았다. 그 해 전국학생농악경연대회에서 대통령상을 받은 농악풍물대 소리를 들으면서 모내기하는 사람들은 흥에 겨워 어깨춤 덩실덩실 하며 모 심으니 힘도 덜 들고 한바탕 잔치마당이 되었다. 

두어 시간 만에 모내기를 모두 마치고 다시 정자나무 아래 공터로 모였다. 부녀회원들은 바닥에 자리를 깔고 준비한 음식들을 펼쳐놓았다. 농주인 막걸리도 서로 권하며 주거니 받거니 먹으니 화악리 동네에 큰 잔치판이 벌어졌다.

이장인 나는 도지사님 군수님 면장님 이렇게 함께 겸상하고 대화도 나누면서 먹으니 흐뭇하고 어깨에 힘도 들어갔다. 도청 직원들과 우리 화악리 주민들이 어우러져서 점심과 막걸리 나누는 화합의 축제는 동네경사가 아닐 수 없었다. 점심을 마치고 도청직원들은 차에 올라타 줄지어 가고 주민들은 손을 흔들며 작별을 했다. 

 

▲ 목조주택 이전의 옛날집에서 어머니와 큰 누님     © 놀뫼신문

 

▲     © 놀뫼신문

 

자식농사 지러 대전으로

 

이런저런 일을 하다 보니 세월이 흘러 5년이라는 세월이 흘러갔다. 1986년 봄 3월, 5년간의 마을 이장직을 사직하는 나와 우리 가족은 대전으로 이주하게 된다. 자식들 중고등학교 진학문제 때문이었다. 

2년 전 대전 도마동에 주택을 한 채 구입해 두었다. 막상 이사를 왔지만 생계가 걱정이었다. 시골은 농사지어 먹고 생활하면 되지만 도시는 하루만 돈을 벌지 않으면 생활을 할 수 없는 곳이다. 이사 온 다음날부터 아는 분이나 친구들에게 연락하여 취직 자리도 부탁을 해놓았다. 언제 취직될지 모르니 우선 고향선배가 대전 역전 중앙시장에서 채소장사 하는 것을 권유받고 바로 다음 날 시장으로 찾아가서 리어카를 빌려서 채소장사를 시작하였다. 

오이를 몇 상자 도매상에서 사서 싣고 나왔다. 팔아야 되는데 말이 떨어지질 않는다. “오이 사시오 오이! 다섯 개에 천원, 다섯 개 천원!” 처음엔 어색했지만 부끄러움과 어색함이 가시니까 좀 나았다. 날이 거듭할수록 익숙해지고 괜찮아졌지만 판매하는 도중에 아는 사람을 만나면 뭐 죄지은 것도 아닌데 어색하고 창피하였다. 

시간이 흐르고 그렁저렁 재미도 붙여가면서 생활해가는데 아는 고향후배에게서 연락이 왔다. 괜찮은 직장 같았다. 다음날 찾아가서 면접도 보고 했는데 면접관이 나를 잘 보았는지 “당장 내일부터 출근하라”는 것이었다. 안전공업주식회사라고,  자동차 부품회사였다.

내가 배운 것도 부족하고 경력이 없어서 회사 경비직으로 취직이 된 것이다. 격일제로 근무하면서 비번날은 과일장사를 하기도 하였다. 주로 수박장사를 하였는데, 꼭지를 따서 확인시켜 주다 보니까 크게 남지를 않았다. 그래도 어쨌거나 열심히 장사하고 회사에서는 십여 년 꾸준히 근무하면서 애들 삼남매 학교 공부를 시켰다. 아들 딸 하는 데까지는 공부시켰고, 졸업과 취업 후에는 결혼도 시키고 분가도 시켜놓으니 세상에 태어나 할 일 그나마 한 거 같아 마음이 가볍고 홀가분하다.

 

내 손으로 지은 까죽나무집

 

이젠 고향집으로 돌아와 노년을 마음 편하게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고향집터에 전원주택을 신축할 것을 결심하였다. 재료는 친환경으로 목조주택을 결심하고 준비해 두었던 나무와 그 외 자재들을 준비해서 공사에 들어갔다. 시공은 서울에 거주하는 동생이 맡아 해주기로 해서 작업은 일사천리로 진행이 되었다. 직접 살게 될 나도 함께 작업에 뛰어들었다. 목조주택 나무가공은 내가 맡고 설계와 시공 및 조립은 동생이 하니까 형제간 아름다운 분업이 되었다.

터파기를 한 후 돌과 주춧돌 놓았다. 기둥과 보는 나무재질이 좋은 참죽나무(까죽나무)로 하였다. 서까래는 낙엽송 나무로 하고, 벽면과 지붕 자재는 나무로 거푸집을 짓고 황토로 시공하니 친환경 주택이 따로 없었다. 하루하루 땀흘리다 보니 2~3개월 만에 완공이 되었다. 이리하여 2004년 가을, 우리 부부는 고향집 떠난 지 18년 만에 귀향을 했다.

집들이 기념으로 큰 돼지도 한 마리 잡고 음식도 장만하여 일가 친척과 동네분들과 함께 집들이 잔치도 했다. 얼마 뒤에는 내친 김에 집옆에 있는 공동우물터에 정자 하나 직접 지었다. 우리 가족도 사용하지만, 동네분이나 지나가시는 분들도 들어와 쉴 수 있는 쉼터정자가 마련됐다. 

고향을 떠나서 타향을 맴돌다 내 고향 내 터전에 정착하니 꿈인가 생시인가 싶다. 숨쉬는 공기도 새롭고 시골 하늘도 더 청명하고 바람도 가볍고 신선하다. 하루하루가 즐겁고 보람되다고 느껴진다. 

 

나는 글쓰고, 집식구는 춤추고 

 

귀향 후에도 직장이 나오는 대로 일을 했다. 그러다가 2년 전 새벽에 뇌경색이 찾아왔다. 내 인생 이렇게 끝나나 보다 싶었다. 119를 부르고 하루 만에 정신을 가다듬었다. 1주일간 병원 신세를 진 후 퇴원하여 약도 잘 먹었지만 긍정적인 마음을 다져잡았다. 마비됐던 손이 다 돌아와서 이제는 동네 공원 풀도 다 깎고 다닌다. 노인일자리 나가서 용돈도 벌어온다. 

이제 내 꿈은 우리 부부 건강하게, 마음 가는대로 사는 것이다. 집식구는 가무를 즐긴다. 우리 둘이 편안하게 취미생활도 하고 복지관이나 마을회관에서 진행하는 프로그램에 참여하여 노래도 부르고 글도 쓰면서 생활한다. 위로 큰누님은 돌아가셨지만 나머지 우리 4남매 서로 연락하고 교감하고 모이는 곳이 여기 화악리 고향집이다. 내 자식 3남매 객지에서 잘 살고 여기 저기 손자들 크는 모습 보면서 뿌듯하다. 

우리집 앞 텃밭 가꾸어 꽃 심고 채소 잘 가꾸는 게 요즘 나의 일과이다. 농작물 나올 때마다 일가 친척 친구들과 나누어 먹고 이웃사촌들과도 사이좋게 지내면서 살아 생전 내 사는 이곳에서 지상낙원 건설하는 게 꿈이라면 꿈이다. 그 꿈을 기록해가는 것 또한 내 꿈의 일부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 했던가! 나는 요즘 글쓰는 재미에 푹 빠져 하루 스물네 시간이 모자랄 지경이다. 지난 6월 초 마을 이장님한테 전화가 걸려왔다. 촌티문학회라는 곳에서 우리 동네에 와서, 농촌 시골마을 할머니 할아버지들의 정서함양을 위해 시나 글쓰는 것을 지도하고 격려하며 공감할 수 있는 프로그램을 해주면 어떻겠느냐는...

속전속결, 6월 11일 마을경로당에서 입학식이 열렸다. 촌티 문학회에서 김정식 선생님과 함께 회원 선생님, 청양 운곡면 신대2리의와  양촌면 채광리 졸업생 등 원근각지 내빈들이 참석하였다. 요즘 일요일 오후 4시만 되면 선생님이 내주신 주제를 가지고 글을 써서 본인이 낭송도 하고 선생님의 격려와 평가를 듣는다. 몇 자씩 더 배우는 것도 고맙지만 잠자던 나 자신을 깨워주니 삶의 활력이 용솟음친다. 배움이 짧았던 내가 이렇게 글을 써내려간다는 것! 고맙고 신기할 따름이다. 어디 나만 그럴까......

 


[정리] 이진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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