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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노트] 성동면 우곤리 황금자 님 “주어진 삶 받아들이며 길게 살다보면...”
기사입력  2019/05/29 [16:22]   놀뫼신문

 

  황금자  

    • 1952 성동면 우곤리 출생(주민등록상 1954년생)
    • 1962 초등 3학년때 식모 생활 
    • 1983 아들 이혁 출산
    • 2002 남편 이영노 씨와 재혼
    • 2014 고향 성동면 우곤리로 귀향
    • 2019 평생교육 초등과정 졸업

 

▲ 인터뷰 후 부부사진     © 놀뫼신문

 

 

여섯째 딸로 태어나 3학년 중퇴까지

 

나는 논산시 성동면 우곤리에서 아버지 황순길과 어머니 장춘자 사이의 8남매 중 여섯째로 태어났다. 가난한 집안의 어려운 살림으로 매일 먹을 것마저도 부족하여 제대로 먹지 못하다 보니 몸은 약해졌고 집안에서만 지내는 편이었다. 

매일 강냉이 옥수수 죽을 먹고 지냈던 어린 시절, 성동국민학교까지는 10리길이었다. 도시락도 싸갈 수 없는 처지이다 보니, 학교에서 주는 급식이 고작이었다. 학교 마치고 집으로 오는 도중 몸도 약한 데에다 배까지 고파서 마을 산소 주변의 잔디에 누워서 쉬어야만 겨우 집에까지 왔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그렇게 초등학교를 다니다 보니, 육성회비조차도 낼 형편이 못되었고, 학교친구들에게 가난한 집안 형편이 너무나 창피했다. 학교에 필요한 문방구나 준비물을 사갈 형편이 안 되는 것은 말할 나위도 없었다. 나에게 가난은 나의 성격마저 내성적으로 변하게 했고 친구들과 어울리지도 못하였고, 자신감마저도 앗아갔다. 3학년 무렵부터는 부모님도 학교 가라 소리 안 하고....이후부터 자연스럽게 학교를 가지 않게 되었다. 

아버지가 얼마 되지 않는 농사를 지면서 8남매의 가족을 키워야 했고 호랑이 할머니까지 계셨으니, 살람살이를 하는 어머니는 오죽하였으랴~~생활력 부족한 농사꾼 아버지는 부족한 살림으로 인해 어머니와 자주 다투셨지만, 자식에게는 애정이 많으셨던 기억이다. 아버지는 깽멕(꽹과리)을 잘 치셨다. 동네 풍물놀이를 할 때면 아버지는 하루종일 풍물놀이패 앞에서 신명나게 깽메기를  치셨다. 특히 아버지는 상모돌리기를 잘하셨다. 긴 흰색 끈을 달고 상모를 돌리는 기술은 최고였다. 가난해도 그때는 즐거웠다.

 

논산시내 군인가족 식모살이로

 

국민학교 3학년을 다니던 그해, 가족들과 이별하는 순간을 잊을 수가 없다. 그 당시 큰오빠는 군 복무 중이었다. 논산에서 군복무를 하였는데, 어머니는 큰오빠 생각만 했는지, 큰오빠가 근무하는 부대의 군인가족에게 식모로 보낸다 하셨다. 어린 마음에 안 간다고, 못 먹어도 힘들어도 같이 살고 싶다고 했지만, 야속하게도 어머니는 나를 논산으로 억지로 끌고 가셨다. 펑펑 울었다. “꼭 가야만 하냐?”며 소리소리 내어서 울었다. 지금도 그 당시를 회상하면 어머니가 야속하기만 하다. 

어머니는 먼저 내 몸을 보면서 말을 꺼내셨다. “니 몸이 약해진 것도 못 먹어서 그런 것이니 군인가족 집에 가면 우리 집보다 먹고 사는 게 휠씬 좋아. 그러니 니 몸도 건강해질 수 있을 거다”면서 달래셨다. 주저앉은 채 울고불고 하는 나를 달래던 어머니도 지쳐가고 결국 큰소리로 역정을 내셨다. “지금 우리 집보다 백배, 천배 낫다! 네가 떠나야 우리 집도 편하게 된다!”고 박정하게 정이라도 끊듯 잘라냈다. 

아무 것도 모르는 어린아이인 내가 남의 집에서 살림살이를 맡아서 일을 하는 게 쉬울 리 있겠는가? 그래도 주인아줌마가 시키는 대로는 했던 것 같다. 어머니가 얘기해준 대로 군인가족이라 함께 지내면서 먹는 것은 잘 먹었던 기억이 있지만, 군인가족 식모생활을 했다는 기억 외에 남아 있는 기억은 거의 없다.

그렇게 3년이라는 시간을 버티듯 지내고 있었다. 그러던 차에 우연히 서울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누구의 소개로 떠났는지도 기억나지 않지만, 서울 노량진으로 도망치듯 떠나게 되었다. 내가 중학교 입학할 나이쯤이었다.

건축업을 하는 주인아저씨와 집안일을 하는 주인아줌마, 그리고 남자들만 셋이었는데, 범생이 스타일의 오빠뻘 되는 고등학생, 내 나이 또래의 남자아이와 나이어린 남자아이로 기억된다. 서울 노량진에서는 집안일을 내가 맡아서 하기 시작했다. 바쁜 주인아줌마를 대신해서 내가 이 집의 어머니 역할을 하게 된 셈이다. 아침에 일어나면 주인식구를 위해 밥을 했다. 방마다 청소를 하고 빨래를 하면서 하루하루를 그렇게 지냈다.

갑작스러운 서울행으로 창원의 둘째언니가 나를 찾아왔다. 내가 갑자기 서울로 떠나가니 집안에서 적지 않게 걱정을 했던 모양이다. 둘째 언니와의 재회도 잠시였을 뿐, 나의 일상은 바뀌지 않았다. 이 집에서는 음식하는 것을 배웠는데, 특히 아침마다 배추된장국을 배워서 끓였던 기억은 지금도 생생하다. 배추와 소고기와 된장이 어울러 맛을 낸 그냥 우리의 일상의 된장국말이다.

 

▲ 왼쪽부터 막내여동생, 황금자, 큰오빠     © 놀뫼신문

 

 

▲ 어머니, 황금자, 막내여동생     © 놀뫼신문

 

 

▲ 황금자(왼쪽)와 여동생     © 놀뫼신문

 

식모에서 명동 가봉기술자로

 

노량진에서 명동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 집은 큰 도로변에서 양복점을 하는 집이었다. 집안일을 하는 식모로 집안 일하는 것이 어느 정도 익숙해질 무렵, 그 주인집 양복점의 일도 겸해서 하기 시작하다가 차츰 기술을 익혀 가봉과 마도메(끝마무리)를 하였다. 양복집은 명동에서 제법 이름난 집이었다. 일하는 사람도 많아서 나랑 다른 한명이 가봉을 하였고, 마도메하는 사람 4명, 미싱하는 사람도 여럿 있고, 남자도 있었다. 양복점에서의 생활은 나로 하여금 다른 세계를 경험하게 해주었다.

10살 때부터 시작해서 20살이 넘어서까지 근 10년을 논산과 서울에서 식모생활했지만 나를 위해서 옷 한 벌 제대로 사입어 보지도 못했고, 내가 먹고 싶은 것을 마음껏 먹어 보지도 못했다. 서울이라고 하지만 서울 구경조차도 해본 일이 없다. 그나마 내가 식모생활을 하면서 번 돈은 가족들의 생활을 위해 부모님께 보내지고, 나머지는 나의 결혼자금으로 큰언니에게 보내졌다. 나중에 받지 못하게 되었지만 말이다. 이런 일들은 내가 배우지 못해서 겪어야 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배우지 못하니까 남과 함께 있는 것이 부끄럽고 창피했고, 남 앞에 나서는 것이 무섭기까지 했다. 그만큼 못 배운 것은 나에게 또 하나의 서러움이고 아픔이었다 . 

 

인정에 끌려 했던 결혼, 그러나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내가 스무 살 무렵이었다. 막내 여동생이 초등학교를 마친 상태였고, 동생은 중학교를 가고 싶어했다. 나는 어머니와 막내 동생을 논산에서 데려오기로 했다. 지금까지 해온 식모생활을 접고, 새로운 생활을 할 결심으로 어머니와 동생과 함께 살 곳을 물색하다가 지인의 도움으로 춘천 시내 약사동 인근에 보금자리 하나를 마련했다. 고향 논산을 떠난 온 지 10년 넘어서 가족들과 함께 살게 된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생활도 그렇게 녹록한 형편은 아니었다. 춘천 봉의초등학교에서 조금 떨어진 육림극장 동네에서 구멍가게를 시작했다. 말이 구멍가게지, 방 하나 있는 집의 작은 공간에서 집안 자판을 두고 하는 장사였다. 나중에 구멍가게는 어머니에게 맡기고 나는 인삼가게에서 ‘인삼우유차’를 만들어서 판매하는 주방일을 다녔다. 그 당시 남자들이 ‘쌍화차’를 먹기도 했지만, 건강을 위해서 매일 수시로 찾아와서 ‘인삼우유차’를 사먹었다. 인삼가게에는 인삼세트가 다양하게 포장 진열되어 있었고, 가게 안쪽으로는 ‘쌍화차’를 끓이는 기계들이 있었다. 나는 인삼덩어리에 우유와 꿀을 섞어서 믹서기에 넣고 갈아서 만든 ‘인삼우유차’를 판매하였다. 그러나 인삼가게 생활은 먹고 사는 정도이지, 돈을 모을 정도의 수입은 아니었다. 

춘천에서 가족이 함께 지낸다 좋아했던 것도 잠시였다. 날마다 반복되는 일상으로 인해 지쳐갔고 모든 불평은 어머님에게 돌아갔다. 직장 일을 마치고 집에 와서는 어머니에게 불평을 쏟아냈다. “이렇게 고생하며 살게 할 거면 왜 자식을 많이 나아서 나까지 고생시키냐?”고. 그 말이 아직도 가슴에 남아서 마음을 아프게 한다. 이제와 돌이켜서 어머니의 마음을 헤아려 보니 어머니 가슴은 피멍이 들었을 것이다.

그렇게 반복되는 일상 속에서 남자를 알 수 있는 여유도 없었지만, 남자에 대한 관심도 없었다. 그러나 나이가 먹어가서 노처녀라는 소리를 듣게 되던 30살 때에 중매가 들어왔다. 지금도 중매쟁이 아줌마의 말이 생생하다. “젊은 사람이 착하고 외롭지만 잘 살고 있으니 한번 만나라도 보라”고 권유하였다. 결혼은 인정으로 하는 게 절대 아니다. 남들이 뭐라고 해도 서로 겪어보고 지내봐야 아는 것이 사람이다. 

그 당시는 인정에 끌려서, 주위 이목이 걸려 식도 올리지 못한 채 신혼을 지내고 아들을 낳게 되었다. 결혼도 하고 막내 동생이 고등학업을 마쳤다. 춘천에서 어머님과 함께 동생을 중·고등학교 마치게 할 수 있어서 그것이 지금 생각해도 가장 잘한 일이고 보람 있는 일이다. 나는 비록 학교를 제대로 다니지 못했지만, 동생만이라도 학업을 이어가서 나의 공부한을 조금이라도 채워준 것 같아 너무 기쁘고 보람 있는 일이었다. 동생은 서울에서 취업도 했다. 문래동에 있는 남양나일론이라는 회사였던 것으로 기억이 난다.

 

서울에서 풀빵·오뎅 리어카 노점상

 

나는 춘천생활을 접고 둘째오빠가 야채가게하던 서울 화곡동으로 삶의 터전을 옮겨왔다. 화곡동의 생활은 별로 기억하고 싶지 않다. 가정생활은 작은 폭력이 점점 커지면서 커다란 폭력이 되고, 맞고 사는 시간이 점점 많아지고 길어지면서 참을 수 없는 상태에 이르게 되었다. 어머니나 오빠들은 “자식을 위해서라도 참고 살아야 한다”고 했지만, 자식생각을 하면 더욱더 살지 못하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의처증이 심한 남편은 갑자기 폭력을 행사했고, 마침내 나는 자식마저 집에 두고 나오게 되었다. 

지금 금정역 인근은 산이었는데, 한참 개발붐이 있어서 함바식당에서 일할 수 있었다. 아들을 보고 싶어서 데려오려 했지만, 남편이 강력하게 반대했다. 아예 만나게 해주지 않았다. 그래서 ‘멀리 떠나면 잊어지겠지’ 하는 단순한 생각으로 다시 강원도 황해식당으로 가서 일을 해보기도 했다. ‘사람의 마음은 멀어지면 더 보고 싶은 것’을 알게 되었다. 아버지라고 하지만 제대로 챙겨 먹이지 못하고, 거친 성격에 폭력까지 행사하니 어린 자식이 버텨낼 수 없는데 하는 생각에 가슴이 찢어졌다. 

그러다가 2년쯤 지나 아들이 초등학교 4학년 되어서 함께 살 수 있었다. 그때부터 아들을 위해서라면 열심히 살아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는 곳을 홍대 근처로 옮기고 노점상을 시작했다. 혼자 사는 여자로서 할 수 있는 일이 많지 않았다. 아들과 함께 살려면 돈을 벌어야 했다. 가난하게 살다보니 공부도 못하고 이렇게 마흔이 넘은 나이까지 고생하고 산다 생각하니 아들만큼은 이러한 고생을 시키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이 간절했다. 발산동에서 거리 노점을 해보기로 했다. 풀빵과 오뎅을 파는 리어카 노점이었다. 건물 앞에서 하려 해도 자리를 차지한 사람들의 텃세로 접근하기조차 어려웠다. 

한번은 건물 앞에 좋은 자리가 있어서 장사를 하고 있는데, 옷판매 노점상이 자기 자리라며 “다른 곳으로 가라” 하여서 밀려 건물 벗어난 계단 옆에서 노점을 하게 되었다. 나는 계단으로 사람이 지나다니고 도저히 장사가 되지 않는 상황이지만, 옷판매노점상은 넓게 자리를 차지하고서 장사를 하였다. 그때 건물 사진관 주인이 나와서 옷판매 노점상 아저씨에게 면박을 주며 자리를 나누라고 해주었다. 그리고 필요한 전기도 연결해주었다. 난생 처음 이웃에게 도움을 받았다. 정말 고마운 일이다. 그런 것이 없었으면 도무지 어떻게 살아갈 수 있었을까 생각이 들기도 했다. 

 

 

▲ 과거의 부부 사진     © 놀뫼신문

 

고마운 이웃, 고마운 반려자

 

아들이 진학을 하고 공부를 위해서 홍대쪽으로 이사를 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때 고정적으로 할 수 있는 일자리를 생각해보게 되었다. 홍대인근에는 노점상들이 많이 있다. 그중에서 빈자리를 찾다가 지금 LG빌딩자리 빈터에 노점상을 할 수 있는 자리가 나왔다. 인수를 하려 하니 6백만 원의 권리금이 필요했다. 급하게 전셋집을 내놓고 노점을 인수했다 전세금 1천 2백만 원에 친구에게 빌린 돈 3백만 원을 갚고 나니 9백만 원이 남았다. 그걸로 권리금 6백만 원을 주고 남은 돈으로 단칸방 판자집 월세를 들어갔다. 보증금 2백만 원에 월세 20만 원이었다. 

이렇게 아들과 함께 노점을 하면서 열심히 살았다. 아침 8시에 일어나서 등교 시켜주고, 12시에 노점장사 준비하고 집 나서서 1시부터 장사를 하게 된다. 그렇게 저녁을 지나서 새벽 2~3시까지 장사 마치고 집에 오면 4시가 되어서야 겨우 잠을 청할 수가 있었다. 아들과 함께 살면서 가난으로 못 배운 설움을 대물림을 하고 싶지 않았다. 몸을 혹사하면서 일하다 보니 나이가 먹으면서 서서히 아픈 곳이 생기기 시작했다. 허리는 늘상 아픈 곳이고, 어깨가 짓눌려서 통증은 좀처럼 가시지 않았다. 

그러다가 지금의 남편을 다시 만나게 되었다. 너무 좋은 사람이다. 나에게는 더없는 반려자이다. 나이 오십에 결혼을 다시하게 되었다. 그리고 새로운 인생을 살게 되었다. 지금 남편이 아니었으면 어떻게 되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이다.

그렇게 노점상을 하고 남편을 만나고, 아들도 잘 성장해주었다. 숨가쁘게 살아온 지난 60년, 남들보다 잘 살지는 못한 채 상처도 많았지만, 열심히 살아왔다고 자부한다. 나는 비록 못 배우고 고생은 했지만, 아들 하나만은 잘되기 바라는 마음은 한결같다. 그러다가 이제 나이 먹고 아픈 몸으로 더 이상 노점을 하기도 힘들어졌다. 

 

 

▲     © 놀뫼신문

 

 

▲     © 놀뫼신문

 

 

▲     © 놀뫼신문

 

내 18번 애창곡 ‘여고시절’

 

남편과 함께 의논을 했고, 남편을 설득해서 내가 태어나고 자란 곳, 우곤리로 내려왔다. 고향에는 고종 6촌 오빠(조중호)가 계셨다. 고향에 다시 내려와 살 수 있도록 많은 도움을 주었다. 지금 집도 고종오빠의 도움이 컸다. 우리는 이곳 우곤리에 자그마한 드림하우스를 지었다. 작지만 우리가 살기에는 충분하다.

이제는 모두 하늘나라에 가신 부모님 산소가 있는 나의 고향이다. 10살 때 이곳을 떠날 수밖에 없었던 그 시절을 생각하면 너무 가슴 아픈 일이지만, 그때 안가겠다는 나를 향해 ‘그 집에 가면 배불리 먹을 수는 있을 거라고’ 떠밀쳐 보냈던 어머니의 마음을 지금은 이해할 거 같다. 다시 이곳에 오니 너무 좋았다. 그런데 막상 살려고 하니까 마음을 잡을 수가 없었다. 나의 고향이기는 하지만, 다시 만나서 지내려 하니 쉽지 않았다. 어울리지 못하고 집에서 강아지도 키우면서 마음을 달래면서 지내기를 1년 여~ 

나는 지금까지 60년 살아오면서 해보고 싶은 것이 있다. 배우지 못한 한을 풀어보고 싶은 것이다. 나는 교복을 입고 학교에 다니는 여학생이 너무 부러웠다. 비록 학교를 다니지도 못하고 교복도 입어보지 못했지만, 내가 제일 좋아하는 노래는 ‘여고시절’이다. 노래만 불러도 너무 좋다. 그런데 교복을 입기까지 한다면 그 즐거움은 말할 것도 없을 것이다. 나에게는 배워야 한다는 꿈이 있었다. 공부를 하려고 남모르게 알아보고 다니고 싶었지만, 마음뿐이었다. 

그러다가 2016년, 논산에 내려온 지 2년이 되어가는 시점에서 동네 면장님, 이장님이 한글대학이 있다고 다닐 사람을 모집한다고 하였다. 지금 알게 된 얘기이지만, 논산시에서 한글대학을 설립하여 적극적으로 문해인을 지원하고 있었다. 그렇게 처음으로 개설되는 한글대학에 입학하게 되었다. 

아마 내가 아들과 살면서 인생의 결이 바뀌어서 이제는 순풍으로 이어지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한다. 아들을 다시 만나고, 이후 노점상을 갖게 되고, 지금의 남편을 만나서 고향에서 살고 있으니까. 

나는 2017년도 한글대학 기초과정에 입학을 했다. 우곤리 마을회관에서 1년 동안 열심히 배웠다. 선생님도 열심히 하는 나에게 많은 도움을 주셨다. 조금 더 남아서 공부하는 나에게 격려도 해주시고 나는 조금이라도 더 알고 싶은 마음에 수시로 찾아가 질문을 하며 배움을 이어갔다. 1년이 지나 ‘논산 어르신 한글 백일장’이 열린다고 해서 출전한 대회에서는 나는 최우수상을 수상했다. 나의 가슴 아픈 얘기가 다른 사람에게 커다란 공감을 주었다고 한다. 

다시 초등과정에 입학을 했다. 2017년 초등과정 시험에 합격하여 3학년을 다니고 2018년에 초등학교 인증, 초등과정을 졸업했다. 초등학교 3학년을 마치지도 못하고 남의 집에서 살다가 지금까지 배우지 못한 한을 풀게 된 것이다. 나에게는 너무도 벅찬 감격의 날이지만, 나는 그것만으로 만족할 수 없었다. 올해 2019년 중등과정 1학년으로 입학했다. 그리고 중등과정을 마치는 날, 그 졸업식에는 내가 원했던 학창시절의 교복을 입고서 내가 좋아하고 늘 불렀던 노래 ‘여고시절’을 부르면서 평생의 한을 풀어보려고 한다. 이제 그 이상의 욕심이 생긴다. 못다한 꿈을 이제 이루고 싶고, 그런 나의 모습을 보면 하늘에 계신 어머니도 행복해하실 것이라 믿는다.

 

▲ 성동면 우곤리 집     © 놀뫼신문

 

아, 어머니 그리고 아들

 

나의 마음속 깊이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는 두 명의 사람이 있다. 바로 어머니와 아들이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가장 마음이 아픈 것은 어머니가 내가 잘 살고 있는 지금의 모습을 못보고 돌아가신 것이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순탄하지 못한 인생이다 보니 무슨 일이 생길 때마다 내 얘기를 잘 들어 주고 공감해준 사람은 어머니였다. 언제나 어느 곳에서나 내 곁 함께 해준 분도 어머니였다. 그런 어머니에게 내가 너무 가슴 아픈 얘기를 많이 퍼부었다. “나를 이렇게 고생시키려면 낳지는 말든가....” 그런 말까지 하였다. 이제 나는 이렇게 잘 살고 있는데, 이렇게 행복한데 말이다. 어머님이 지금 나의 행복하게 살고 있는 모습을 본다면, 얼마나 행복해하실까 생각한다. 

모든 어머니들은 다 똑같은 마음이 있겠지만, 나에게는 더없이 소중한 사람이 있다면 아들이다. 아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은 짧게 줄여야겠다.  먹고 사는 게 중요하고 먹고 살기 바쁘다보니 자식 하나 있지만 제대로 공부시키지 못하고 못 가르쳐서 결혼할 나이가 되었는데도 결혼도 못하고 혼자 사는 모습을 보니 마음이 아프다. 직장도 남들처럼 좋은 곳을 다니지도 못하고 고생하는 모습을 보니 먹고 사는 게 뭐가 중요하다고 밤낮으로 일하다는 핑계로 자식공부를 제대로 못시켜서 그런 거 같아서 너무 미안하고 안쓰럽다.

그렇다고 아무리 그래도 결혼하라고 하지는 않는다. 지금 능력도 안 되면서 결혼만 한다면 누구를 고생시키겠는가? 그러면 안된다고 생각한다. 지금 직장에 다니면서 일하는데 힘들어 하는 모습을 보면 마음이 아프다. 그렇다고 능력도 안 되는데 무조건 좋은 직장에 가라고 하지도 않는다. 

“그냥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을 찾아서 평생 열심히 했으면 좋겠다.” 지금 당장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인생은 길게 사는 것인데 그렇게 열심히 살아가다 보면 좋은 날도 오게 된다. 행복을 느끼게 되는 날이 온다고 생각한다. 내 인생도 그런 인생이었다고 생각한다. 평생토록 배우지도 못해 글도 제대로 몰라서 남의 집 식모로 시작해서 양복점 시다일, 인삼가게 주방일, 식당일 그리고 노점상까지 밑바닥 일을 하며 고생하며 살아왔지만 그렇게 살면서 창피하기도 하고 부끄럽기도 해서 누구 앞에 나서지도 못하고 내게 손해인 것을 뻔히 알면서도 숨죽여 살아왔다.

그래도 살다보니 왕후장상도 부럽지 않는 때가 온다. 배우지도 못하고 잘 살지도 못해도 내가 좋아하는 사람도 있고 나를 좋아하는 사람이 있으며 내가 하고 싶은 일이 있고 그 일을 하니 너무 기쁨이 넘치고 행복하다. 그러니까 이렇게 사는 것을 자식에게도 얘기해주고 싶다. 

 

 -성수용 시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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