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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노트] 성동면 화정리 박노희(朴魯姬) 님 "동구나무와 함께 키워온 삶의 동심원"
기사입력  2019/05/22 [12:49]   놀뫼신문

[성동면 화정리 박노희(朴魯姬) 님의 인생노트]

 

동구나무와 함께 키워온 삶의 동심원

 

“선상 오신다고 해서 서둘러 오는디 회관 앞에서 오랜 만에 인척을 만났어. 몸이 많이 아픈 것 같아 ‘워째 그러냐?’고 물었더니, ‘설을 많이 세서 그렇다’고 혀. ‘음력 설만 셌어야 했는디 양력까지 세느라 나이를 많이 먹었다’고 혀잖어. 나도 그런 거 같여. 나이를 너무 많이 먹어 챙피혀. 그분 별호가 대포여, 별똥별을 받아먹었다고 혀서. 근디 그 빠르게 떨어지는 별똥을 어찌 받아먹겄수? 웃자는 야기지”

첫 이야기부터 재미있다. 허리도 곧고 빠른 걸음걸이는 90을 바라보는 연세라고 하기엔 무색할 만큼 건강하셨다. 음성조차 카랑카랑해 기가 느껴졌다. 박노희 어르신이 들려주실 인생 이야기가 궁금해진다. 


 

 

▲ 논산시 성동면 화정리 박노희 어르신     © 놀뫼신문

 

박노희 (朴魯姬)

  • 1932년 : 성동면 화정리에서 2남 3녀 중 첫째딸로 태어남
  • 1940년 : 국민학교 입학(1947년 졸업)  
  • 1949년 :  19살 김종현 님과 결혼
  • 2남 3녀의 자녀를 둠.

 

▲ 친구들과 나들이(20대)     © 놀뫼신문


신사에  손바닥치며 절했던 일제시대

 

아버지가 이장이었고 동네에서 제일 부자로 어릴 때는 먹을 거, 입을 거 부족하지 않게 살았다. 8살 때 성동보통학교에 입학했다. 단발머리에 운동화 신고, 카라 있는 교복을 입고 갔다. 조선 애들 중에 교복을 입고 운동화를 신은 아이는 나 하나뿐이었다. 성동면에 보통학교가 두 곳이 있었는데 성동학교가 큰 학교였다. 근동 아이들이 다 왔다. 한 반에 85명이 넘었는데 오전반과 오후반이 있었다. 공부 잘하는 아이들은 오전반에, 못하는 아이들은 오후반에서  배웠는데, 나는 공부를 잘해 오전에 학교에 갔다. 

학교에 가면 조그만 신사 앞에서 ‘천왕폐하 만세’를 외치고 손바닥을 두 번 치며 절을 했다. 그래야 교실에 들어가 공부할 수 있었다. 교실에서 자리를 앉을 때, 잘하는 아이들이 오른쪽 줄에 앉아서 왼쪽 줄에 앉은 못하는 아이들의 공부를 봐줬다. 각 줄에 줄반장이 있었는데 나도 줄반장을 했다. 우리 줄에 새 동네 사는 ‘기노시다 쇼쇼’가 자주 배가 아파 쓰러져서 업고 집에까지 데려다주고는 하였다. 5학년 때 광복이 됐지만, 일본말로 공부하고 학교에서는 창씨개명을 한 이름을 불러 그 친구 한국 이름이 기억나지 않는다. 지금도 숫자나 이름은 일본어가 먼저 나온다. 어릴 때 배운 것이 평생 가는 것 같다.

공출 다니던 순사들은 참 무서웠다. 조선 순사들이 더 무서웠다. 대창으로 사방을 찌르면서 다녔는데 어디에 무엇을 숨겼는지 용케 알고 양식은 물론 목화, 놋그릇 눈에 보이는 건 다 가져갔다. 동네 사람 중에 입을 게 없어 굴을 파고 그 안에서 무명베를 짰는데 그것을 찾아내서는 목화까지 다 빼앗아갔다. 바디집을 다 부숴놓고 말이다. 참 힘든 시절이었다. 학교 안 다니는 귀밑머리 한 여자애들을 잡아갔다. 그러니 학교에 못 가면 열한두 살만 돼도 민며느리로 보내야 했다. 동네에 만호 고모가 있었는데 그 고모가 잡혀갔다가 산송장이 되어 돌아왔다. 소문이 흉흉했었다. 일본 놈들 때문에 밑을 못 쓰게 돼 앉지도 못한다, 먹지도 못한다고 하더니 얼마 못 가 죽고 말았다. 그 아까운 젊은 나이에 몹쓸 고생을 하고 말이다. 

먹고 살기도 힘든데 순사들이 집집마다 다니며 청소검사도 했다. 초가집 마루 밑에 닭이며 강아지를 키우고 살았으니 지저분한 집이 많았다. 우리집은 장사꾼들이 자주 왔는데 봇짐을 올려놓지 못할 만큼 마루가 반들반들했다. 부지런하고 깔끔한 어머니는 청소 일등상을 탔다.  

 

17살에 몰락한 양반집으로 시집가다

 

학교 졸업하고 17살에 바로 옆집으로 시집을 갔다. 광산 김씨 양반 집이라고 아버지가 사돈을 맺은 것이었다. 신랑은 8남매에 둘째로 나보다 두 살이 많았다. 그때는 이불을 해오면 여자 집에서 결혼식을 했다. 친정집에서 결혼하고 시댁으로 건너왔다. 첫날 밥상을 받고는 “아줌마, 진지 잡수세요.”라고 해 구경 온 동네 아줌마들이 다 웃었다. 

석성에서 부잣집 첫째 딸이었던 시어머니는 논 80마지기를 혼수로 가져왔다고 했다. 노름을 좋아하는 시아버지가 그 재산을 다 없애, ‘양반’ 말고는 있는 게 없었다. 시할머니에 큰동서까지 한집에 살아 식구가 12식구였다. 날마다 확독에 보리를 찧어 밥을 해야 했는데  양식이 늘 부족했다. 새신랑이 쌀 7가마를 새경으로 받고 남의집살이를 가야 했다. 

시할머니가 돌아가시고 삼년상을 지냈다. 초하루 보름에 곡하며 제를 지내고 아침저녁으로 밥을 올려야 하는데 산 어른 모시는 것보다 힘들었다. 나무하러 다니고 모 심으러 다니며 많은 식구 건사하는 일이 힘들어, 못 살겠다고 친정에 갔다가 엄니한테 쫓겨왔다. “죽어도 시집 귀신 되라”며 얼씬도 못 하게 하셨다. 

막내 여동생은 어릴 때 다쳐 다리를 절었다. 그래도 잘 따라다녀 나물을 캐러 가도 같이 다녔다. 우렁이를 잡으러 간다고 샛강(논산천)을 건너갔다. 동네 친구들 여럿이 갔는데 자운영도 많이 캤다. 돌아오면서 다른 아이 짐이 무겁다고 동생이 더 들었다. 강을 건너는데 다리가 불편했던 동생이 물길에 휩쓸려가서는 잠겨 보이지 않았다. 울고불고하니까 대둑에서 쉬던 삼호리 남자 어른들이 쫓아왔다. 한 분이 강으로 들어가 한참 만에 동생을 건져 올렸다. 내가 시집온 다음 해였다. 동생을 그렇게 보내고 친정 부모님께 죄인이 되어 살았다.  

 

▲ 남편 김종현의 군대시절     © 놀뫼신문

 

단칼에 마작 끊은 대쪽 남편

 

21살에 배가 불러 오는데 신랑이 전쟁 중에 군대에 갔다. 신랑 없이 큰 애를 낳았는데 이목구비가 잘난 아들이었다. 남편은 아들 소식을 듣고 한 달 월급을 털어 아들 턱을 냈다고 했다. 백일 무렵 애기가 갑자기 열이 나 밤새 경기를 했다. 삼신할머니가 삐틀어져 그렇다고  정성을 들어야 한다고 해 병원에도 못 갔다. 층층시하에 줄방귀 참는 새댁이 되어 가슴에 아이를 묻어야 했다.

남편은 전쟁 중이라 부산으로 제주도로 옮겨 다녔다. ‘남편이 위중하다’고 제주도에서 전보가 왔다. 아무것도 모르는 시골 사람이 생전 처음 기차 타고 배 타고 겨우겨우 입원한 병원을 찾아갔다.

부대원들과 산에 갔다가 공산당들의 기습공격에 쓰러졌다고 했다. 다행히 총알이 비켜나가 살았는데 총검으로 확인 사살할 때 오른쪽 어깨며 허벅지를 크게 다쳤다. 치료를 받고 집 가까이 훈련소로 올 수 있었다. 그때 살아남은 사람은 남편뿐이었다. 초기에 포병 생활을 하면서 고막이 터졌는데 모르고 제대를 하였다. 귀가 잘 안 들려 병원에서 가서 오른쪽 고막이 없다는 걸 알았다. 상이군인 연금이라도 받아야 했는데 기간이 너무 늦어 신청할 수 없었다. 

훈련소에 있을 때 남편이 휴가를 나오면서 군인 셋을 데리고 집에 왔었다. 시아버지가 쓰시는 사랑방에서 하룻밤을 자고 아침밥을 먹고는 간다고 나섰다. 시어머니가 “네 처도 안 보고 그냥 가냐”고 한 말씀 하셨다. “엄니 아버지 뵈었으면 됐지요. 애긴 안 보이면 없는 거구” 하며 그냥 가는데 가슴이 무너졌다. 아이를 낳는 것도, 묻는 것도 못 본 남편이 나를 못 보고 가는 것 같았다.

남편은 성질이 대쪽이고 불이었다. 훈련소에 있을 때 취사반장으로 중사였다. 가까이 살면 도움이 될 거라며 윗사람이 이사를 오라고 했는데 부모님 모셔야 한다고 말도 못 꺼내게 했다. 집에도 그 흔한 건빵 한 개 들고 오지 않았다. 나이가 들어도 똑같았다. 손녀딸이 짧은 치마를 입고 왔는데 “그 치마 꼴이 뭐냐?” 며 가위로 치마를 잘라버렸다. 텔레비전에서 가수들이 옷을 벗고 나오면 “세상이 잘못돼도 한참 잘못됐다”고 바로 껐다.

나온 김에 흉을 봐야겠다. 마작을 좋아해 시간만 나면 주막이나 다른 집 사랑에 갔다. 일이 없을 땐 밤까지 샜다. 아버지가 노름으로 재산을 탕진해 온 식구가 고생하는데도 마작을 하면 끝을 보았다. 애들 운동회 날, 밤새 안 들어온 남편과 한판을 해야 할 것 같아 애들만 점심을 먹이고 신랑을 찾아 나섰다. 헛간에서 들고나온 농약을 품고 있었다. 노름은 손을 끊으면 발로 한다는 고질병이다. 단판을 지려면 이수밖에는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동네를 한 바퀴 돌았지만 못 찾고 집에 갔더니 논에 다녀오는지 삽을 들고 들어왔다. 너무 고맙고 감사해 사실을 말하고 잘못을 빌었다. 남편하고 운동장에 가서 늦은 점심을 먹고 애들 운동하는 것을 보았다. 그 뒤 마작은 손도 대지 않았다. 아이들 학비 걱정에 담배도 술도 끊었다. 안 하다면 절대 다시 하는 일이 없었다. 오죽하면 동네에서 별호를 ‘대쪽’이라 했겠나.  

남편은 하늘이고 여자는 땅이다. 부모님이 팥으로 메주 쑤라면 쑤는 시늉이라도 해야지 팥으로 메주를 어찌하느냐고 묻는 것도 불효다. 바른말이 말대답이라고 배워 그 말대로 살아왔다. 남편에게 ‘왜’ 소리 한번 안하고 살았다. 시아버지는 2년, 시어머님이 8년이 넘도록 치매를 앓으셨어도 제때 밥 챙기는 일을 소홀히 하지 않았다. 남의 집에 모를 심으러 가서도 집에 와 점심을 챙겨드렸다. 변을 보고 앉아계시면 씻겨드리고, 밖에 나가 안 계실 땐 찾아 모셔와 식사를 챙겨 드려야 했다. 그렇게 하려니 번번이 점심을 굶고 일을 했다. 돌아가실 때 어머님이 내 손을 꼭 잡아주셨는데 “고맙다”는 말을 대신하신 것 같았다. 시아버지 시어머니 병간호는 당연한 일인데도 동네에선 효부라고 칭찬이 자자했었다.

 

보따리장수와 집밖 교회 외출

 

남편이 군에 가고 없을 때 공주에 사는 시누가 술 먹고 매질을 하는 남편하고 못 살겠다고 조카를 데리고 집에 와 있었다. 시누가 보따리 장사를 했다. 그 일을 배워 논산시장에서 메리야스를 사 보따리에 이고 다녔다. 노성, 은진 걸어서 하루에 오갈 수 있는 거리면 다 갔다. 그러다 동네 과수원에서 복숭아를 받아 파는데, 한 관을 달라면서 “복숭아가 작으니 삼십 개는 줘야 관이 될 것 아니냐?”며 시비를 걸었다. 속이 상해 “씨를 달아도 삼십 개는 안 올라간다” 하고는 도로 이고 와 식구들을 먹게 했다. 그 후 화장품 장사를 했다. 저녁 늦게까지 돌아다니다보니 시부모님이 걸렸다. 아버님은 집에 동서가 둘이나 있는데도 저녁도 안 드시고 동구 밖까지 나와 기다리셨다가 내가 오는 것을 보고서야 저녁 진지를 드셨다. 노름으로 재산을 없앤 당신 탓에 며느리가 고생한다고 마음 아파하셨다. 

한번은 남편이 군대에 가 혼자 있는 아낙 집에서 이것저것 물건을 팔다 ‘행주치마 입에 물고’라는 노래까지 한 자락했다. 지금도 노래하기를 좋아하지만 예전엔 청이 좋았다. “저녁이 다 됐으니 밥 먹고 하룻밤 자고 가라”고 붙드는데 뿌리치고 왔다. 아녀자가 밖의 잠을 자는 것도 안 되지만 기다리고 계실 아버님 생각에 애를 업고 밤길을 걸어왔었다.

시아버님께서 참 잘해주셨다. 큰동서가 교회를 다녔는데 동서가 교회 가면 혼자서 보리를 찧거나 빨래를 하는 게 맘이 쓰이셨는지 하루는 성경책을 사 오셔서는 “너도 큰애 따라 교회 다니거라.”고 하셨다. 교회에 간다고 집 밖으로 나가는 것만 해도 세상 살 것 같았다. 

길이 미끄러워 ‘아이를 낳으면 발가락 꾸부리는 것부터 가르친다’는 삼호리 길을 겨울에도 고무신을 신고 나는 듯 다녔다. 크리스마스 날 새벽에 찬송을 부르며 다닐 때 발이 쑥쑥 빠져도 고무신 신은 발이 시린 줄 몰랐다. 

 

▲ 남편과 나들이     © 놀뫼신문

 

▲ 남편과 나들이     © 놀뫼신문

 

7년만에 귀한 딸 얻고서 농사일

 

큰동서가 애를 낳고 얼마 되지 않아 시숙이 돌아가셨다. 동서친정 어머니가 와서 동서를 데려가 애도 없는 내가 조카를 맡아 키웠다. 5년 만기 제대를 하고 남편이 왔는데도 정작 우리 애는 생기지 않았다. 시어머니는 “아기를 묻을 때 묵은 무덤을 넘어가면 애가 생기지 않는다는데 혹 그런 게 아닌지?” 걱정을 하셨다.

애를 보내고 7년 만에 딸을 낳았다. 그 밑으로 바로 남동생까지 봐 어른들 귀염을 많이 받았다. 화장품 장사는 그만두고 아이들을 키우며 농사일을 했다. 남편이 일을 열심히 해도 살림은 늘 팍팍해 봄이 되기 전부터 고지 쌀을 먹었다. 고지 쌀은 품값을 미리 받아 오는 쌀이다. 한 말이 삼사일 품값이니 지금 쌀값으로 생각하면 엄청 비싼 쌀이었다. 그 쌀도 아무나 주지 않아 일을 꼼꼼히 잘 하는 일꾼만 받아 쓸 수 있었다.

쌀 계를 시작했다. 계주는 일 번을 주고 한 몫을 그냥 탈 수 있으니 큰 도움이 되었다. 그렇게 모은 쌀하고, 빚을 내 논을 사고 감자 심던 밭을 논으로 만들었다. 살림을 늘려가며 아이들 키우기가 어려워도 담 너머 친정집에는 손을 벌릴 수가 없었다. 2년 3년 터울로 7남매를 낳았다. 둘을 더 잃고 다섯을 키웠다. 일 다니는 엄마 때문에 큰딸이 학교에 다니면서 동생들을 봐야 했다. 초등학교 졸업시키고 동생들 때문에 중학교에 못 보내 마음이 아프다. 아들은 운동을 잘해 장학생으로 대학을 졸업하고 서울에 있는 고등학교 체육선생이다. 농구 총감독이다. 막내딸은 살림이 나아지면서 대학공부를 시켰다.

 

▲     © 놀뫼신문

 

▲     © 놀뫼신문

 

자그만 내 소망 하나

 

아버님 덕분에 교회를 나가기 시작할 때는 형님을 따라 몸치장하고 사람들 만나는 것이 좋아 다녔다. 벌써 60년이 넘게 예수님을 믿었다. 어렵고 힘들 때마다 큰 힘이 되었고 교회에서도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많았다. 여성부 회장도 오래 했고 교회를 옮길 때마다 교회 건축에 관한 일들을 맡아 열심히 했다. 덕분에 그동안 다녀가신 목사님들이 지금도 연락해주시고 기도를 해주신다. 90이 낼모레인데 귀가 좀 어둔 것 말고는 건강하다. 남편도 같이 해로해 이년 전에 돌아가셨다. 이 모두가 예수님의 은혜라고 믿어 지금도 새벽 기도를 빠지지 않는다.

자식들이 무탈하게 지내고 내가 먼저 하느님 나라에 가는 것이, 요새 매일 하는 기도다.

 


 

 

인터뷰를 마치며 ‘남아25세’, ‘행주치마 씻은 손’ 두 곡을 가사도 놓치지 않고 부르셨다. 세월 저편에서 서성이는 눈은 스무서너 살 그 언저리쯤으로 어르신을 모셔간 듯했다.

이 마을에서 태어나 결혼하고 아이들 낳아 기르고 또 그 아이들을 결혼시켜 손주들이 세상에 왔다. 그렇게 세월이 흐르는 동안 동구나무 아랫집을 지키고 살아오셨다. 동구나무랑 같이 나이를 더하며 사셨다. 나이테를 만들어 나이테에 기대어 사는 나무처럼, 삶도 만나는 인연과 상처들을 기대어 산다. 희미하거나 뚜렷하거나 지난 시간 속에 있는 기억들을 소환하는 것은 어려웠다. 아린 아픔은 여전히 아파야 했고 잠든 안타까움은 기지개를 켜며 점령군이 되는 듯했다. 눈물을 몇 번 삼키면서 꺼낸 이야기로 지난 일들이 거풍되어 가벼워지시기를, 다시는 지난 아픔으로 눈물짓지 않으시길 빌며 어르신 손을 꼭 잡아드렸다. 

 

- 유환숙 시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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