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석 광물전시관 최병남 靑藜館관장]
청려장으로 사랑을 전하다
“40년 넘게 목회자로 살았고, 은퇴한 지 7년이 되어가지만 ‘나를 따르라, 나를 본받아라’는 감히 할 수 있는 말이 아니다. 다만 내가 자신하는 것은 열심히 일했다는 거다. 내 육신을 아끼지 않고 일했기 때문에 후회는 없다.”
‘목사’란 이력보다 돌박물관 관장과 청려장(靑藜杖, 명아주 지팡이)을 만들었다는 사실이 관심을 끌었다. 2시간 대화를 통해 모든 직함을 뛰어넘어 인생 선배로서의 담담한 이야기가 남는다.
돌박물관의 시작은 교회 정원에서부터
광석치안센터 옆에 위치한 돌박물관의 정식 명칭, ‘광물전시관’은 2012년에 개관했다. 자연을 좋아해서 교회 정원을 가꿨다. 은퇴하기 전, 교회 마당에 나무 심기, 전지를 비롯한 축대 쌓는 일을 직접 했다. 이런 일을 하다 우연히 발견한 돌에 흥미가 생겼고, 하나둘 모았다. 어쩌다 운석처럼 보이는 돌을 발견해서 국립운석감정원에 의뢰했는데 철질운석이란 판정을 받았다. 전시관은 운석을 포함해서 수석, 수정, 화석 등이 1000여 점 정도 있다.
침향목이라는 사진이 눈에 띈다. 실제 높이는 2m 정도라고 한다. 불교의 전통으로 고려 말에서 조선 초기에 갯벌에 향나무를 묻는 침향목 묻기가 있었다. 흙이 묻은 채 구매해서 직접 다듬었다. 한남대 교수의 감정에 의하면 향나무 수령만 1300~1500년 정도라고 한다. 종교를 초월서 일한다는 것에 성취를 느낀다. 탁자로 쓰고 있는 것도 은진 대나무밭에서 발견한 먹감나무 뿌리를 가져다 깎고 다듬어 뭔가를 만드는 것이 뿌듯하다.
최 관장은 인터넷과 여러 정보를 통해서 소장품과 일반적인 돌들에 대해 조사해서 책으로 엮었다. 전시관의 별칭은 청려관(靑藜館)인데 명아주 지팡이, 청려장에서 따왔다.
전국으로 시집보낸 청려장 49,600개
『본초강목』에는 ‘청려장을 짚고 다니면 중풍이 걸리지 않는다’는 기록이 있다. 정부는 ‘노인의 날’(매년 10월 2일)에 100세가 되는 노인에게 청려장을 지급하고 있다.
1995년부터 17년간 청려장 4만9천6백 개를 만들었다. 교회 앞 묵은 밭에 있는 키 큰 명아주를 보고 지팡이를 만들었다. 지금은 누구보다 잘 만들 수 있지만 무수한 시행착오가 있었다. 명아주를 찾아 전국을 돌아다니기도 했다. 청려장을 만들기는 쉽지 않다. 일손을 사서 하는 일이라 인건비는 차치하더라도 명아주를 캐고, 사포로 문지르는 일은 힘이 많이 들고, 최종 색이 나오려면 아홉 번을 칠해야 한다. 400개만 더 만들면 5만 개가 되지만 힘에 부치기도 하고 일을 하려는 사람이 없어서 2년 전에 지팡이 만드는 것을 그만뒀다.
명아주를 캐는 것부터 만드는 전 과정을 비디오로 촬영했다. 지금이라도 필요한 사람이 있다면 기꺼이 정보를 제공하고 자문할 의향을 전했다.
‘6시내고향’과 몇몇 방송을 탄 후에 전국에서 지팡이를 문의하는 전화가 빗발쳤다. 몇 년간 논산시청에 1만2천 원에 지급하기도 했지만 대부분 택배비만 부담하면 전국 어디든 지팡이를 무료로 배송했다. “내가 일을 좋아서 했지 봉사라는 개념으로 하지 않았다. 봉사라는 마음이 전혀 없었다. 필요하다면 드렸을 뿐이다.”라는 겸손의 말속에서 진심이 느꼈다.
눈다리 양조장에 세운 재건학교
“입으로만 해서는 신앙이 아니다. 삶이 뒤따라야 한다. 성경에 나온 말은 아니지만 ‘진인사대천명’이 있다.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최선을 다한 후에 하나님께 도와달라고 하는 것이 진정한 기도라고 생각한다. 입으로 하는 믿음이 아니라 행동으로 해야 한다. 특정 장소에서만이 아니라 생활에서 실천하는 것이 진정한 믿음이라고 생각한다.”
어쩌면 재건학교가 최 관장의 신념을 가장 잘 드러나는 것이 아닐까 한다. 70년대 후반의 농촌은 여전히 가난했고 초등학교만 졸업한 아이들이 많았다. 이런 아이들을 위해 1976년 그 당시 눈다리에 있는 양조장 건물에 ‘재건학교’를 세웠다. 중학교 1·2·3학년 과정으로 150명 정도의 학생들을 3년간 가르쳤다. 모심기 등을 통해 번 돈으로 교복과 체육복을 구매했다. 많은 사람과 이웃 교회 목사님들의 도움을 받았다.
극성을 부려 아이들이 검정고시를 보게 했다. 서대전여고 고사장에 아이들을 들여보내고 플라타너스 아래 앉아 한 명이라도 합격하기를 기도하며 앉아 있었다. 그 순간 밀려온 고독은 전력을 다한 후에 하늘의 기다림이 아니었을까.
성탄절날 사찰 화분이 교회에
“나와 생각이 다른 목회자들이 있을 수 있지만, 나는 현직에 있을 때도 10시에 예배 시작해서 11시에 끝내고 집에 가서 점심 먹으라고 했다. 교회가 친목도 좋지만 안 믿는 가족과 함께 시간을 보내는 것 역시 중요하다. 또한 타 종교에 열리고 닫히는 것이 아니라 종교는 인간관계라고 생각한다. 주님의 뜻인 사랑을 따르면 반목, 갈등은 어울리지 않는다.”
지금껏 내가 만난 어느 종교인보다 타종교에 대한 이해 폭이 깊고 넓었다. 벌곡면 영주사 풍운 스님과 지장암 스님과의 교류는 뜻밖이었다. 성탄절과 초파일에 스님과 목사님은 화분을 주고받았다. 절에서 보낸 화분이 교회에 있는 것을 보고 처음에는 신도들이 거부감을 느꼈지만 나중에는 좋아했다. 한때는 절에서 보내온 화분이 5개 정도가 되기도 했다.
광석중앙교회 목사로 있을 때, 풍운 스님은 성탄제 때 와서 예배드리고, 예배 끝나고 함께 떡국도 먹었다. 풍운 스님이 지금은 눈이 불편해서 바깥 생활을 잘 안 하지만 일 년에 몇 번 찾아간다.
이야기를 마친 후 목사님의 손길이 닿았던 교회에 갔다. 교회를 신축할 때 직접 설계한 예배당은 정갈하고, 손수 심고 전지했던 나무들은 여전히 누군가의 손에서 잘 정돈돼 있다.
무엇보다 광물전시관이 많이 알려지지 않아 많은 사람이 볼 수 없는 것이 유감이다. 전시실이 협소해서 빼곡하게 놓인 돌은 온전히 제 가치를 드러내지 못하고 있다. “논산시의 자산이죠.” 그런 자산이 음지에 있는 것이 아쉬울 따름이다. 미리 전화하면 전시관을 둘러볼 수 있다. 빛나는 돌, ‘광석’면에 광물전시관에 있는 돌들 역시 하루 빨리 빛을 보기를 희망한다.
- 박용신 시민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