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전3리 여성노인회장 윤석을 님 인생노트]
내 인생의 황혼 - 인고(忍苦) 뒤에 피어나는 고목
어느덧 황혼에 다다랐다. 이정표도 네비게이터도 없는 인생길에서 인연이 길이었으며 또한 내 마음이 길이 었다. 출발점을 몰랐듯이 도착도 언제 닥칠지 모른다. 저녁 해가 저만치 먼 산에서 나를 바라보고 있다. 노을이 비추기 시작했다. 분명한 건 노을이 있어 ‘내 인생의 황혼’이 아름답다는 점이다. 이 년 전 나는 어르신 백일장에서 ‘내 인생의 황혼’ 이라는 제목으로 수필을 써서 최우수상을 받은 바 있으므로 나의 ‘인생 노트’ 제목도 똑같이 정했다.
어려서는 가난 속에서 아무 것도 모른 채 그냥 행복했고, 결혼 후에는 비바람 속에서도 남편과 아이들이 있어 행복했다. 그러나 지금 내 곁에는 아무도 없다. 남편은 돌아 올 수 없는 먼 길 떠났고 아이들은 저희들 삶을 찾아 모두 떠났다. 그러나 웬일인지 지금이 제일 좋다. 알 수 없는 일이다. 맑은 하늘에 낮달이 비추고 저녁노을이 곱다.
▲ 윤석을 마전3리 여성노인회장 © 논산계룡신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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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석을
- 1944년 12월 24일 황화3리에서 출생
- 1957년 황화 초등학교 졸업
- 1967년(24세) 김경용(29세)와 중매로 결혼
- 1968~1978년 2남 1녀 출산
- 2008년 남편 별세(70세)
- 2017년 마전3리 노인회장 취임
- 2017년 어르신 한글백일장 수필 최우수상(내 인생의 황혼)
먹을 복은 타고나게 마련
나는 해방 직전인 1944년 섣달 말에 지금의 황화정(황화3리)에서 아버지 윤의중 씨와 어머니 최병환 씨의 1남 5녀 중 막내딸로 태어났다. 어머니 나이 마흔 둘이었다. 위에 언니가 넷이라 나의 탄생이 모두 섭섭하셨을 테지만 아무도 내색은 안 하셨단다. 다만 오빠만이 서럽게 운 것은 남자 형제가 없게 되었기 때문이라 했다. 아버지는 내가 태어나기 전에 이미 가산을 다 없애고 단지 논 다섯 마지기가 전부였다. 마침 그때 할아버지의 재취댁이 들어오실 때 가져오신 논 열 마지기와 밭 다섯 마지기를 가지고 막내아들인 우리 아버지 밑으로 들어오셨다. 그것은 성실하고 근면한 내 오빠, 즉 할머니의 손주를 남다르게 보셨기 때문이셨다. 그러거나 말거나 모두 내가 먹을 복을 타고 낳기 때문이라 말했다. 그 할머니는 유식해서 『옥루몽(玉樓夢)』을 읽으셨고 내게 공부도 가르쳐 주셨다. 나는 그런 분위기를 좋아했다. 당시에 어느 누가 손주에게 공부를 가르쳐 줄 수 있는 할머니가 있었겠는가.
마부 부리던 진사댁 친정집
진사 댁 오형제 중 막내인 친정아버지 윤의중은 열일곱 살에 어머니를 여의었다. 한창 반항하고 방황하던 시절이었다. 재취 새어머니가 들어오시어 서둘러 장가를 보내셨다. 내 어머니 최병환은 유성에서 참판을 지낸 바 있는 가문의 막내딸이었다. 혼인할 때 어머니는 친정에서 논 스무 마지기를 가져 왔다. 거기다 아홉 살짜리 몸종과 함께 그 시절 최고의 혼수품인 미싱도 가져왔다. 평생 입을 옷을 해 왔고 가구를 비롯한 집기들도 고급이었다.
그게 다 무슨 소용이었던가. 장가는 잘 들었지만 아버지는 손수 농사를 못 지었으므로 병작을 주었다. 아버지는 지독한 술꾼이 되어 갔다. 때마침 농지 개혁이 있어 농토가 소작농들에게 돌아갔다. 삼 년에 걸쳐 그 대금을 나누어 받았지만 그 대금은 야금야금 술과 방탕으로 다 날리시고 어머니 손에까지 들어오지 않았다.
어머니는 하는 수 없어 바느질을 시작했다. 어머니의 혼수품 재봉틀이야말로 큰살림 밑천이 되었다. 아버지는 비록 술이 취하면 폭군처럼 보였지만 평소엔 전혀 달랐다. 말 그대로 한학을 배운 양반이셨다. 교육열도 남달라 먹고 살기 힘들던 한국전쟁 시절 여덟 살 나를 업어서 지금의 황화초등학교에 입학시켜 주셨다. 나는 6학년 때 진학을 위한 과외반이었다. 강경여중 입학원서까지 넣어 놓고, 갑작스런 오빠의 군대내 사고 문제로 재복무가 길어지는 가운데 집안 분위기에 휘말려 나는 진학을 포기했다.
마부(馬夫)를 부리고 살던 몰락한 양반, 아버지는 손재주 덕에 이발소 없던 황화정 마을에서 어른을 비롯한 아이들의 이발사가 되어 가용(家用)을 벌고, 어머니는 명절 때면 바느질거리가 산더미처럼 밀렸다. 어머니는 교양이 남다르고 솜씨까지 좋아 근동에서 소문이 자자했다. 내가 혼인하고 삼 년 뒤 돌아가시고, 아버지는 당시로서는 장수하시어 여든 셋에 돌아가셨다.
혼수치레 말고 팔자치레하라
진학을 포기한 후 본격적으로 집안일을 거들었다. 조카를 업어 길러 주었고 등잔불 밑에서 뜨개질을 하고 수를 놓았다. 학력보다는 조신하고 얌전한 몸가짐과 실제의 살림 수업이 결혼의 큰 덕목이던 시절이었다. 이웃의 친구들은 대처로 식모살이나 공장에서 돈을 벌러 고향을 떠나갔지만 나는 집을 벗어나지 못해 논산시내에도 나가보지 못했다.
스물네 살 되던 해 아버지의 결정으로 아랫마을 청년과 결혼 말이 나왔다. 아직 결혼할 마음이 없었다. 허나 아버지는 무작정 사주단자를 받으셨다. 일주일을 울면서 식음을 전폐했다. 아버지가 하는 수 없어 사주단자를 물리려 결심하셨다. 맏아들이라는 것도 싫었고 친정 이웃 동네라는 것도 싫었다. 아버지가 약주가 과하여 취한 모습이 시댁 사람 눈에 뜨이면 얼마나 창피할까 걱정스러웠다. 또한 무언가 차이가 난다고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성에 차지 않았다.
언니들은 본인들의 학력이나 집안 경제와 상관없이 양반가문이라는 덕분에 결혼을 잘했다. 큰 형부는 전북대학교에서 법대 학장까지 지내셨으며 다음 언니 형부는 조합장을 몇 차례 지낸 화산 지방 유지였다. 나야, 이제 몰락한 양반 가문에다 이미 그런 시대는 없어진 세상에서 아무 것도 내세울 것도 없었지만 결혼에 대한 기대가 적었다고는 볼 수 없었다.
그러나 연분이란 피할 수 없는 것, 나는 결국 1967년 스물네 살에 그분 스물아홉 살 강릉 김씨 경용 씨와 구식으로 결혼식을 올렸다. 사실 나야 무엇을 내세울 것이 있었던가? 작은 키에 인물하며 학력이 있었던가? 그저 바지런하고 경우 밝고 대가 센 게 전부였다. 남편은 서원(書院)에서 공부했고 초등학교를 마치었다. 가세가 일어나는 집안이라고 아버지가 좋게 본 것이다. 아버지의 생각은 ‘네가 잘난 게 없으니 차이 나는 결혼은 안 시키겠다’는 주장이었을 것이다. 약주 잡수는 아버지에 질렸는데 신랑자리가 술을 못 마신다는 점이 마음에 들었다. 그렇게 농사짓는 집 맏며느리가 되었다.
친정 부모님은 혼수에 크게 신경 쓰지 않으셨다. 어머니의 혼수품이 값어치 없게 없어지는 걸 겪었기 때문이다. ‘혼수 치레 말고 팔자 치레하라’ 했다고, 나의 생존전략의 무기는 절약과 인내였다. 재봉틀은 꼭 해달라고 말했다. 결혼해서 시부모님 모시고 시누이와 시동생 셋과 함께했다. 행복했다.
시어머니 장례후 2달만에 들어온 새어머니
내가 첫 아들을 낳아 첫돌을 치루고 얼마 안 되어 시어머니가 돌아가셨다. 그 석 달 전에 친정어머니가 먼저 돌아가셨다.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시어머니는 나를 아껴주시던 분이었다. 아직 살림살이도 서투른데 의지하던 시어머니가 돌아가셨으니 내 설움에 북받쳐 얼마나 서럽게 울었는지 모른다.
참으로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시어머니가 돌아가시고, 그야말로 무덤 흙이 마르기도 전인 두 달 만에 시아버지는 새어머니를 데리고 들어오셨다. 환갑이 멀지 않은 쉰아홉이셨다. 두 분의 계산은 전혀 달랐다. 아버지는 같이 살면서 새어머니가 아이들이나 돌보아 주고 당신의 외로움을 달래주면서 그렇게 살아 볼 계획이었으나 어머니는 그렇게는 안 하셨다. 그분은 매일이다시피 공을 들여야 한다며 시아버지께 돈을 받아 나가셨다. 집안이 시끄러웠다. 일 년을 같이 살았다.
두 번째 시어머니는 집으로 안 들어오시고 시아버지가 그 집엘 드나드시다 말았다. 우리는 그 때 논 서른 마지기 농사를 짓고 있었다. 나는 홀치기라는 편물을 어깨 너머로 배워 부업을 하던 때였다.
내가 서른 무렵, 세 번째 새어머니가 들어오셨다. 그때 아이들의 나이는 다섯 살, 네 살 연년생이었다. 그분은 딴 살림을 주장했지만 시아버지가 반대하셨다. 집안이 몹시 시끄러웠다. 우리 내외도 살림을 내드리고 싶었다. 그러나 시아버지는 “나가 살다가 만일 이번 결혼도 실패하면 그때 며느리한테로 다시 어떻게 들어오겠냐?”는 걱정이셨다. 시어머니는 술을 마시고 난동을 부렸다. 태풍의 눈이 되었다. 시누이와 시동생이 아버지에게 크게 대들었다. 아버지 입장에서 보면, 자식이 아버지에게 대드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아버지의 노발대발은 상상초월이었다. 이루 말할 수 없는 파란이 일었다. 태풍 사라호와 진배없었다. 딸을 죽일 듯 몰아붙이고 딸은 도망치다 큰 사고를 당하고...... 그 일로 시누이가 식음을 전폐하다 그대로 떠나갔다. 비극의 현장이었다. 나도 모진 마음을 세 번이나 시도한 적이 있었다. 우리 내외는 견디기 힘들어서, 우리가 아이들 데리고 옆집으로 제금을 났다. 일 년을 옆에서 살면서 힘들었다. 그럼에도 시아버지는 내게만은 아무 말씀이 없으셨다. 남편도 아버지에게 예를 범하는 일이 없었다.
서울살이 6개월
때마침, 친정어머니가 시집올 때 몸종으로 데리고 온 언니가 서울에서 다니러 왔다. 내가 살고 있는 꼬락서니를 목격한 한 언니, 그 길로 우리 네 식구를 데리고 서울 자기네 집으로 갔다. 거기서 두 달을 살았나, 마침 가을걷이 때였다. 고향 정미소에서 연락이 왔다. 정미한 쌀을 가져가라고, 그 쌀을 아버지네 잡술 만큼 내놓고 스무 가마 대금으로 이태원에 전세방을 얻어 언니네 집에서 나왔다. 그때 처음으로 오전엔 용산 시장에서 과일 떼어다 팔았다. 오후엔 남대문시장에서 생선을 떼어 팔러 다녔다. 남편은 일용직 일을 하러 다녔다.
6개월을 그렇게 살다가 추석 명절을 지내러 고향집으로 돌아왔다. 그 때 1974년, 내가 서른 한 살이었다. 그해 8월 15일 경축행사에서 영부인 육영수 여사가 문세광이라는 제일동포에게 피살되어 나라가 슬프고 한동안 어수선하던 때였다. 그 사이 새어머니는 자의반 타의반으로 집을 나가셨다. 명절 지내러 왔다가 그대로 눌러 앉게 되었다. 전세금을 빼고 그간 둘이 번 돈을 합쳐 마을 근동에 임야 2700평을 마련했다.
▲ 2017년12월 한글대학수료식 동기생들과함께 © 논산계룡신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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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7년9월 한글대학백일장수필부문 최우수상 © 논산계룡신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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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만하니까 떠난 남편
그러고 나서 시아버지는 위암에 걸리셨다. 수술한 후 의사의 권유로 술을 끊는가 싶더니 죽을 거부하기 시작하셨다. 죽을 차린 밥상이 몇 차례 마당에 던져졌다. 밥을 들겠다고 선언하시면서 술까지 잡수더니 병이 재발했다. 이른 둘에 한 많은 일생을 마감하셨다. 시동생 하나는 군대시절 베트남을 다녀왔고 그 후도 돈 벌러 다녀왔고 회사에서도 그곳에서 근무한 적이 있어 세 번을 드나든 셈이다. 하나는 독일 광부로 나갔다 귀국했고 시동생 하나는 일하다 교통사고를 당해 돌아갔고, 시누이 하나도 결혼 전 돌아갔다. 시동생들은 장가 잘 들어 지금 모두 남부럽지 않게 잘 살고 있다.
맏이의 막중했던 임무도 끝났다. 이제 비로소 주변이 조용하여 살 만한데, 남편이 갑자기 쓰러지더니 말 한마디 못하고 2008년 심근경색으로 내 곁을 떠났다. 겨우 딸 하나를 여위고 나서였다. 너무 마음 고생을 많이 해서였을까? 아니면 무리하게 일 한 탓일지 모른다. 남편은 타계하기 전, 비료도 십 여 년치 넘게 준비해 주었으며 자신이 일찍 갈 것을 알았던 것처럼 집안 일 전부를 꼼꼼히 챙겨놓고 일흔에 떠나갔다.
홈런 한방 못쳤지만 연속안타로 만족
어느덧 큰 아들은 쉰하나, 둘째로 나은 딸이 쉰살, 막내아들이 마흔 셋이 되었다. 큰 아들은 자신이 원해 대학을 안 갔고 딸은 임상병리학과를 택했으며 막내는 건축공학을 전공해서 그 분야에서 일하고 있다. 아버지 생전에 딸은 시집 보냈고 막내는 나 혼자서 혼례를 치루었다.
큰 아들이 아직 미혼이라 늘 마음 한구석이 아리다. 그러나 어쩌겠는가? 제 앞가림은 반듯하게 하면서도 결혼을 선택이라고 생각하니 무슨 말을 더 하겠는가.... 인생에서 내 마음대로 되는 게 무엇 있었던가? 욕심이란 한이 없을 테지만 천석꾼, 만석꾼이 부럽지 않다. 다만 아들에게 짝을 맺어주지 못한 게 항상 책임을 못한 죄로 남는다. 이 모든 게 하늘의 뜻이라면 겸허히 받아드리는 수밖에 없으리라. 옥에도 티가 있다고, 내 황혼의 한 점 아픔이다.
인생에서 홈런 한 번 못 때렸지만 타자로서 별 탈 없이 안타를 쳐댄 셈이다. 그 덕에 무난히 노년에 이르렀다고나 할까. 이제 어느덧 황혼이 “동행하자”며 앞장서려 한다.
지금껏 절약이 몸에 배어 빛나는 옷차림 한 번 해 본일 없다. 늘 수수하게 살았다. 타고난 건강 덕에 시아버지 타계하신 이후 밖에 나가 지금껏 일을 하고 있다. 이제 논농사는 농어촌 공사에 맡겼고 밭농사만 틈틈이 짓고 있다. 현재는 시내 모 아파트에서 청소를 담당하고 있다. 유일한 사치라면, 큰 아들이 네 발 오토바이를 사 주어 편하게 나다니고 있다.
인내하니 고목에 꽃피네요~
아득하기만 했던 길이었다. 허나 세월 따라 비바람도 고통도 젊음도 다 지나갔다.
2017년 논산시의 캐치플레이스, ‘동고동락(同苦同樂)’의 일환으로 한글 대학이 시작되었다. 매주 두 번 하는 한글 공부를 지금껏 계속하고 있다. 못 배운 게 한이라 하나라도 더 배우고 싶어 시작했다. 아직 결석해 본 일이 없다. 그러고 보면 ‘낫 놓고 기억 자’도 모르는 사람은 얼씬 하지 않는다. 2017 년 가을에 어르신 백일장이 있었다. 나는 수필로 최우수상을 받았다. 일기를 써 온 것이 큰 도움이 된 것 같다. 큰아들 중학교 들어간 날의 감격을 잊지 않으려고 쓰기 시작한 일기가, 지금껏 계속 중이다.
2017년은 내게 특별한 해였다. 그해 우리 마을 노인회장으로 선출되었다. 물론 원한 것은 아니지만 쾌히 받기로 했다. 매일 일하러 나가므로 노인정에 제대로 나가지 못해 늘 미안하지만, 마음만은 최선을 다한다.
살다보니 여기저기서 사랑을 받는다. 이 어인 고목에 핀 꽃이 아니련가! 젊어서 못 이룬 꿈이 황혼에 다시 태동하니 이 또한 행복한 일이다. 일터에서도 인정받고 자식들도 알아주니 행복하지 않을 수 없다. 아침에 대문을 열며 감사 드리고, 저녁에 대문을 닫으며 감사를 올린다. 젊어서 부모 복 없어 인간의 고락(苦樂)을 남달리 겪었지만 그 모든 것은 내 인생을 연마하는 담금질이 되었다. 지금 와서 생각하면 홀시아버지의 애환도 다 이해가 간다. 우리 모두의 공동 운명이었다. 내게 있어 인내야말로 나를 키운 명약이 되었다.
아들딸은 말한다. “엄마가 공부만 제대로 했으면 무슨 자리고 한 자리 했을 꺼야.” 그렇게 인정해 주며 이 못난 어미를 자랑스러워해 주는 자식들 덕에 오늘도 나는 열심히 살고 있다.
- 안정혜 시민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