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이야기 하나]
옛날 노인 혼자 사는 어느 집에 누런 개 한 마리가 들어왔다. 주인 찾아가라고 쫓아내도 가지 않고 계속 집 안으로 들어오는 것이다. 어쩔 수 없어 밥을 주게 되고 누렁이라 이름 짖고 3년을 함께 살았다. 그러던 어느 날 홀연히 누렁이가 없어진 것이다. 동네를 한 바퀴 둘러 봐도 없어서 “주인 찾아 갔나보다” 하고 잊고 지냈다.
그리고 얼마가 지났는데 잘 생긴 청년 한 사람이 노인을 찾아와 큰절을 올리는 것이다. 노인은 전혀 모르는 청년이라 “나는 뉘신지 모르겠는데...” 하며 청년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청년이 말하기를 “어른께서 길러주시던 누렁이가 바로 저입니다” 하며 말을 이어갔다. “저는 바다 속 용궁나라의 태자인데 용왕의 명을 거역한 죄 값을 치르느라 육지에 와서 3년 동안 지내게 됐었습니다. 그 때 어르신께서 잘 돌봐주셔서 무사히 3년을 마치고 다시 용궁으로 돌아갈 수 있었습니다. 용궁에 가서 아버지 되시는 용왕님께 육지에서 돌봐주신 어르신에 대한 말씀을 드렸더니 고마운 어르신께 후한 대접을 하시겠다며 용궁으로 모시고 오라 해서 이렇게 왔습니다.”
그래서 노인은 청년을 따라나섰는데 바닷가에 이르러 청년이 뭐라뭐라 주문을 외우니 바다가 갈라지고 큰 길이 나타났다. 길을 따라 들어가니 기화요초가 만발하고 으리으리한 용궁이 나타났으며 큰 환영 잔치를 베풀어 주었다. 용궁에서 몇 달에 걸쳐 후한 대접을 받고 지내던 중 집 생각이 나서 “이제 그만 집에 가 보겠다” 하니 청년이 말을 하였다. “아버지께 하직 인사를 드리면 아버지께서 한 가지 소원을 말씀하시라고 할 것인데 그 때 꼭 『해인』을 달라고 하십시오.” 노인이 “해인이 뭐냐?” 물으니 “해인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다 할 수 있는 영험한 것이니 꼭 해인을 달라고 하세요”라고 답하는 것이다.
용왕에게 하직 인사를 하니 “내 꼭 들어줄 테니 한 가지 소원을 말 하라”고 해서, 해인을 달라고 했다. 그랬더니 용왕의 얼굴빛이 변하면서 쉽게 대답을 하지 않았다. 한참을 기다리고 있으니 “내 약속을 했으니 드리겠다”며 “인간 세상에 유용하게 잘 쓰라”면서 빨간 보자기에 싸인 작은 상자 하나를 주었다.
집으로 돌아와 벽장 깊숙한 곳에 잘 두고 지내던 어느 날, 책을 읽고 있다가 문득 해인 생각이 나서 이 해인을 꺼내다 놓고 이를 한번 시험해 보고 싶어졌다. 보자기를 풀고 상자를 여니 큰 도장처럼 생긴 물건이 나왔다. 그런데 도대체 이걸 어떻게 해야 원하는 것이 이루어지는지 그 사용법을 몰라 이리저리 뒤적여 보기만 하였다. 읽고 있던 책 위에 해인을 올려놨더니 갑자기 산해진미로 차려진 커다란 잔치상이 나타났다. 해인을 들어보니 바로 그 밑 책장에 밥식(食)자가 있었다. “아하~” 하고 이제는 집 가(家)자를 쓰고 그 위에 해인을 찍으니 대궐 같은 집이 생겼다. 가구(家具)를 쓰고 해인을 찍으니 장롱이 생기고 하여..... 부자로 좋은 일 하면서 잘 살았다는 이야기다.
[해설]
이 이야기는 필자가 들었던 이야기에 『한국의 보물 해인』김탁/북코리아의 해인 관련 설화를 함께 섞어 재구성한 것이다.
해인(海印)은 원래 불교용어로 바다가 잔잔할 때 주변의 모든 사물이 그대로 바다에 비치듯이 부처님이 화엄경을 설법하기 전에 삼매에 드는 경지를 이르는 말로 해인삼매(海印三昧)라 한다.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것이 마음에 비쳐지는 경지라고 한다.
일반사회에서는 해인은? 용궁에서 용왕이 조화를 부리는 영험한 것인데 인간세계로 전해졌으며, 해인에 정성으로 기도하면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들어주는 신비한 존재로 인식되고 있다. 그래서 해인에 관한 많은 설화들이 전국적으로 퍼져 있다.
[실화 : 개태사 해인 사건]
저렇게 옛날이야기로 세상에 널리 알려진 해인 이야기가 논산에서는 실화로 존재하는데, 전하는 말로 이리저리 퍼져나가면서 많은 부분이 부풀려지고 왜곡되어 있다. 10여년 전 필자가 개태사 해인사건에 대한 법원의 판결문을 입수하게 되어 그 내용을 소개하고자 한다.
일제강점기인 1941년 대전지방법원 강경지청(현 논산지원, 당시는 지청이라 함)에서는 이색적인 판결이 있었다. 김병소, 김광영, 정용근 3인에 대한 보안법 위반사건에 대한 판결이다. 여기에 해인이 등장하며 해인으로 인해 수사를 받게 되고 재판에 이르게 된다.
판결문에 의하면, 1920년경 본적이 논산군 벌곡면 덕목리이며 주거는 일정하지 않고 한문선생을 하던 김병소라는 사람이 있었다. 이 김병소가 서울 천연동에 있는 석가, 공자, 노자 삼성(三聖)을 제사하는 도관묘(道觀廟)를 찾아가 거기 살고 있는 유학수라는 사람과 알게 되었다. 그리고 거기서 해인(증거물 3호로 법정에 제시됨)을 받아오게 된다. 유학수는 해인을 건네주면서 내력을 설명해 주었다.
“이 해인은 원래 중국의 황원도사(黃元道師)가 가지고 있던 것인데 팔만대장경과 함께 경남 합천군의 해인사에 전해져 보관하던 중 정만인이라는 사람이 이를 훔쳐 행방을 감추었었다. 그 후 조선 고종 때 대원군의 명령에 의하여 이 해인을 다시 찾아냈다. 이 해인은 영묘 불가사의한 조화를 부리는 물건으로 세계를 통치하는 자가 소지하도록 되어 있는 것인데 그 주인은 이미 결정되어 있으나 다만 아직 나서지 않고 있는 것이다. 이 해인의 주인이 나타나는 날 초능력을 발휘하여 일본을 물리치고 조선의 왕으로 등극할 것이니 해인에게 열심히 기도하라.”
해인을 받아온 김병소는 그 때부터 1930년까지 10여 년 동안 개태사를 맡아 있던 김광영 보살, 정용근 등과 논산군 연산면 천호리에 있는 개태사와 전북 운주면 완창리(논산시 양촌면과 인접지역) 등을 오가며 해인에게 밥, 술, 과일 등을 차려놓고 해인의 주인이 빨리 나타나 일본을 물리치고 조선을 독립시켜 달라고 기도했다.
이것은 ‘정치에 관한 불온한 언동이며 치안을 방해하는 행위로 보안법에 위반되어 수사를 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행위들이 위법사항이지만 1941년 당시 이미 공소시효가 완료되어 면소(免訴)한다는 내용이다.
판결문 중 일부
- 류제협(논산문화원 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