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운동100주년기념 기획시리즈(10)]
논산은 왜 서재필을 푸대접하는가?
“혁명가, 정치가, 의사, 교육자, 군사학전문가, 독립운동가, 사업가, 시인, 문필가, 언론인, 박사위의 박사.... 이리도 유명한 서재필이지만, 후세들은 그 이름 석자 정도만 기억할 뿐이다. 한때 3천 명 모였던 연무대 서재필 기념사업회 열기를 봐도 온도차가 느껴진다. 서재필 기념관 짓는다고 해서 논산시에 내놓은 땅 3천평은 오늘도 바람만 오간다....”
이상은, 지난 호 기자가 [3·1운동100주년기념 기획시리즈(9)] “논산사람 서재필 다시 만나는 날”의 기사 끝부분이다. ‘제15회 애국지사 송재 서재필 박사 기념식’은 지난 10일 연무체육공원 실내체육관에서 열렸다. 서재필 박사 증종손녀인 서동숙 유족과 기관단체장, 시민, 학생 등 200여 명이 참석하였다.
문학박사인 홍선표 나라역사연구소장이 ‘3·1운동과 서재필의 독립운동’이란 주제로 특강을 하였다(별첨 참조).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책임연구위원이기도 한 홍선표(洪善杓) 박사의 논문 저서는 3·1운동100주년을 기념하는 올해 권장도서 노미네이터 1위이다. '서재필 개화 독립 민주의 삶'을 필두로 '3·1운동 직후 무장투쟁과 외교운동', '윤봉길의거에 대한 국내외 언론의 반응' 등이 그러하다.
미국 펜실베이니아대학교 연구교수이기도 한 홍 박사의 저서와 논문은 대한민국 독립에 대한 미국의 역할이 돋보인다. 「재미한인 독립운동의 표상 김호」, 「재미한인의 꿈과 도전」, 「한국독립운동을 도운 미국인」, 「관동대지진 때 한인 학살에 대한 구미 한인세력의 대응」, 「1930년대 재미한인사회의 진보적 변화와 대응」, 「헐버트(Homer B. Hulbert)의 재미 한국독립운동」, 「1900∼1930년대 하와이 한인사회의 선전·외교활동」, 「뉴욕 소약국민동맹회의와 재미 한인의 독립운동」 등등이 그것이다.
“논산사람들 뭐하시나요?”
이리 상세하게 열거하는 것은, 서재필 박사 기념관이 논산에 세워지는 것을 반대하는 측의 논리가 과연 타당한가 따져보기 위함이다. ‘서재필은 친일파’라는 주장은 과연 사실인가? 이 논쟁은 별도의 장을 마련해야겠지만, 확실한 것은 그가 시대 흐름상 친미파라는 사실이다.
보성군청에서는 서재필 선생이 태어난 문덕면 생가 앞에 1991년 기념공원 조성사업을 시작해 2003년 완공했다. 기념공원에는 선생의 정신이 살아 있는 독립문을 재현하고 유품 800여 점을 전시하고 있다. https://blog.naver.com/nonger10/221357279245 송재 서재필선생 기념공원을 소개한 블로거 ‘맛이멜로우’의 포스팅이 좀 유별나다.
[미스터 션샤인 유진 모델. 우리나라 최초의 의학박사 송재 서재필기념관]
보성과 논산에 모두 적(본적)을 둔 송재 서재필 선생. 보성은 외가이고 논산은 친가이다.(논산에는 유적지가 없음...ㅜㅜ) 송재 서재필. 갑신정변, 독립신문 등 역사의 굵직한 무대에 등장하는 이 분. 요즘 인기리에 방송되는 미스터 션샤인의 유진의 모델로도 불리는 서재필 박사에 대하여 알아보도록 하겠다.(.....중략....) 1919년 삼일운동이 일어나자 필라델피아에서도 시위를 하여 일제의 만행을 알리려 노력했다. (해방 후) 김규식은 우파의 대표, 여운형은 좌파의 대표. 그 사이에서 중립 성향을 띄었던 서재필 박사! 김대중 대통령도, 이승만보다는 서재필이 대통령이 되길 바랐다.
서재필 박사의 유해는 미국 샌프란시스코에 묻혔으나 1994년 정부의 요청으로 고국으로 돌아와서 생가가 있는 전남 보성에 묻혔다. 참고로 서재필 박사의 본가는 논산시 연무대에 있다. 이곳은 서재필 박사의 친가이고, 보성은 박사의 외가가 있다. 박사님은 외가에서 태어나 5살까지 보성에서 살다가 5살 때 논산 친가로 왔다. 그러나 어려서부터 너무 영특하여 5개월 만에 서울로 올라가 공부하고 18살의 어린나이에 과거에 합격한다. 보성은 서재필 박사의 유적을 잘 관리했는데 논산에는 집 한 채 달랑 있다고 한다. 논산도 문화재 관리 좀 잘 하시길...
Dr. 서재필은 ‘박사’ 아닌 ‘의사’
타지 사람이 가하는 따끔한 일침이다. 부끄러우면서도 고마운 일이다. 여기서 한 블로거 글을 대폭 인용한 데는 이유가 있다. 서재필이 시대의 흐름상 친미파였음을 부각시키고자 함이다. 연무대 선샤인랜드 스튜디오에서 촬영된 “미스터션샤인(미·션)”은 상당한 호평에도 불구하고 친미(親美) 시비가 일었다. 한술 더 떠서, 이병헌으로 분한 주인공 유진초이 모델이 서재필였다는 이야기도 나오는 모양이다.
미·션의 시대적 배경은 구한말이다. 서재필이 왕성하게 활동하던 시기와 일치한다. 김은숙 작가가 이름없는 의병들을 끌어낸 점은 비록 픽션을 가미했지만, 한국 근대사의 위대한 발굴 작업이다. 그 무명의병들과 견주어 볼 때 서재필은 지나치게 드러난 일개인이다. 미·션에서 유진초이와 교집합이 있어도 보이지만, 둘의 시대극 배역은 출생 신분부터 달리한다.
직업도 달랐다. 서재필의 생업은 의사였다. 의사를 뜻하는 영어 닥터(doctor)가 우리말로 번역되는 과정에서 대부분의 저서가 ‘박사’로 오역하였다. 서재필전도사인 윤석일 목사는 그를 ‘박사 위의 박사’로 격상하면서도, 다만 박사학위를 딴 적은 없다고 못 박는다. 오늘 2부로 연재하는 장근세 씨도, 편집실에서 가필한 “의학박사가 되어 귀국길”이란 중간제목에 정정보도를 요청하였다.
그럼에도 ‘제15회 애국지사 송재 서재필 박사 기념식’에서 보다시피, 박사라는 호칭이 사라지는 데는 시간이 걸릴지도 모르겠다. 이 기념식을 후원한 논산문화원의 권선옥 원장은 전남 보성을 들고나왔다. 보성에는 송재서재필기념공원이 있고, 거대한 독립문과 서재필 동상, 서재필기념관과 사당, 생가를 잘 복원해 놓았다. 권 원장은 서재필 선생의 사상과 업적을 교육프로그램화하자면서 서재필 백일장, 말하기대회 등을 제안하였다.
보성 송재문화제에서는 기독교 추모기도도
보성은 하드웨어에서 끝나지 않고, 송재문화제와 같은 소프트웨어를 동시 구동하고 있다. 애국지사 송재 서재필선생 탄생 155주년 기념 및 서거 68주기 추모하는 제6회 송재문화제가 4월 8일 보성 서재필기념공원에서 열렸다. (사)송재서재필기념사업회(이사장 김중채) 주관으로 열린 기념식은 김경탁 전남동부보훈지청장을 비롯하여 각계인사, 회원, 시민 등 500여명이 참석하였다.
유청 광주전남발전협의회 사무처장이 진행을 맡은 이날 행사에서 제례의 초헌관은 서대석 광주광역시 서구청장, 아헌관은 이남섭 성주이씨하은공파종회회장, 종헌관은 손동선 다실종합건설대표, 독축은 김중채 이사장, 집례는 이현호 광주향교 의전수석장의가 맡았다.
전통국악으로 김태례 김승호 김준영 유세윤 명인이 산조합주를 들려주고, 김찬미 명창이 ‘쑥대머리’를 열창하였다. 정상희 명창이 ‘제석 굿’을 선보인 다음 헌화와 분향이 이뤄졌다. 추모헌시는 최명숙 보향차인회 회장이 낭송하였다. 독경은 보성불교사암연합회 스님들이 올렸다. 이채로운 것은 광주기독교교단협의회 고문인 송정용 목사가 추모기도를 한 점이다. 미국에서 서재필은 크리스찬으로 활동하였기 때문이다.
나라와 시대를 넘나들었던 그의 파란만장 일대기를, 지난 호에 이어 은진면 토양리 주민인 장근세 씨에게서 들어본다.
- 이진영 기자
(별첨)
서재필과 재미 한인의 3・1운동
-필라델피아 ‘제1차 한인회의’ 등 선전활동을 중심으로 -
홍선표(나라역사연구소 소장)
1. 머리말
3・1운동은 더 이상 일제강점의 식민통치를 받아들이지 않겠다는 강고한 신념과 의지를 갖고 전 세계 만방에 한국 독립을 선언한 거족적인 독립운동이다. 그래서 3・1운동은 우리 민족 최대의 독립운동이자 한국독립운동의 분수령이라 한다. 이를 계기로 한국독립운동은 이전 소수 엘리트 지식인층이나 특정 집단 중심으로 이루어지던 민족운동이 거족적인 운동으로 확산되었다. 독립운동의 이념도 특정한 한 가지의 이념에 매몰되지 않고 다양화 되었고 방략 또한 다변화 되는 발전을 이루었다.
3・1운동의 양상은 대체로 ‘만세시위’로 대변되어 나타났지만 간혹 의열 및 무장 투쟁의 방식으로도 표출되었다. 때문에 일제의 강력한 무장진압 앞에서 식민지 민족의 독립 염원의 뜻을 관철시키기는 어려웠다. 이것은 3・1운동을 폄하하는 세력들에게 독립무망론으로 이어져 친일과 부일, 또는 자치와 타협의 길로 걸어가게 만들었다. 독립 선언 이후 아무것도 변하지 않은 현실 때문에 패배주의에 빠진 독립무망론자들이 선택할 수 있는 길이란 그러한 길 외에 선택할 방법이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독립 선언의 기운과 기백을 이어받은 민족 세력들에게 3・1운동은 절대 포기할 수 없는 독립의 가치를 되새기고 발전시키는 원동력이 되었다. 현실에 안주하기보다 절대 독립이라는 고난의 길을 자발로 뛰어든 것이다. 3・1운동이 한국독립운동의 분수령이 된 것은 현실론자들의 입장에서 볼 때 매우 이상론자들 처럼 보인 민족 세력들이 스스로 자주독립의 짊을 지고 헌신했던 까닭이었다.
3・1운동으로 한국독립운동은 활기를 되찾아 더욱 다양화 되고 다변화 되었다.국내에서는 소위 일제의 문화통치를 계기로 언론・출판・결사가 부분 허용되어 다양한 사회・경제활동이 전개되었고 사회주의 사상의 유입으로 사상단체의 활동이 두드러졌다. 국내외에서 이루어진 임시정부가 상해를 중심으로 통합되면서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독립운동의 중추기관으로서 국내외 독립운동을 주도하였다. 만주에서는 독립군단을 편성하고 본격적인 독립전쟁에 돌입하였다. 이처럼 3・1운동으로 인해 국내는 국외에서 본격적인 독립운동이 전개되었다.
본 발표는 미주에서 일어난 3・1운동, 즉 서재필이 주관한 필라델피아 ‘제1차 한인회의’를 비롯해 한국통신부, 한국친우회를 중심으로 이루어진 선전활동을 살핀 글이다. 이를 통해 ‘제1차 한인회의’ 100주년을 기리고 서재필의 독립운동을 조명하고자 한다.
2. ‘제1차 한인회의’ 개최
1) 개최 배경과 추진
미주 한인사회에서 국내 3·1운동 소식을 처음 접한 것은 현순(玄楯)의 전보가 1919년 3월 9일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장 안창호에게 전달되면서다. 당시 국민회를 중심으로 한 미주 한인사회는 미국이 주도하는 파리강화회의를 한국 독립의 호기로 판단, 이승만과 정한경을 한인대표로 선정하고 이들을 파견하는데 온 힘을 모으고 있었다. 그런데 미국 정부가 한국문제를 일본의 국내문제로 간주하여 한인대표에게 여권 발급을 불허해 모처럼 일어난 독립운동의 열기는 다소 침체되고 있었다. 이런 가운데 국내 3·1운동의 소식이 전파되자 미주 한인사회는 독립운동의 새로운 활기를 되찾아 주었다. 신한민보는 이 소식을 받은 충격을 “장쾌하여도 이렇게 장쾌하고 신기하여도 이렇게 신기한 일은 진실로 무엇에 비할 데 없으니 기쁨에 겨운 우리는 눈물을 뿌렸노라” 라고 표현할 정도였다. (신한민보, 1919년 3월 13일자 호외, 「대한독립을 선언하고」. )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장 안창호는 우선 3·1운동 소식을 즉시 서재필을 비롯해 파리강화회의 한인 대표 이승만과 정한경 등 주요 한인들에게 알리고 향후 협조를 부탁하였다. 그리고 San Francisco Examiner지와 San Francisco Chronicle 등 미국 언론에 알려 3·1운동 소식이 전 세계에 확산되도록 하였다.
3·1운동을 계기로 재미한인들은 독립운동의 방략을 그동안 추진한 파리강화회의 대표파견을 통한 청원외교활동에서 선전외교활동으로 전환했다. 그리고 재정을 통한 독립운동 후원활동을 미주한인들의 중요 사명이 되도록 했다. 안창호는 1919년 3월 13일 중앙총회 위원 모임에서 3·1운동 이후 재미한인이 취해야 할 세 가지를 제시했다. 첫째, 개개인이 독립의 각오와 일치된 행동을 가질 것, 둘째, 미국 각 언론·잡지나 종교계에 3·1운동의 소식과 기독교 박해사실 등 한국의 사정을 미국 국민에게 널리 알려 동정을 얻고 한인의 활동에 많은 도움을 얻도록 할 것, 셋째, 이러한 일을 감당하기 위해 북미 · 하와이 · 멕시코 재류동포들이 재정공급의 책임을 져야 할 것이라 했다.( 신한민보, 1919년 3월 20일자 논설 「중앙총회장 안창호의 주견」.) 이것은 3·1운동을 계기로 선전외교활동과 재정공급이 미주한인들의 주요 활동이 되어야 함을 제시한 것이었다.
3·1운동 직후 미주한인사회에 처음으로 대규모 선전외교활동을 전개한 것은 필라델피아에서 개최한 ‘제1차 한인회의’(First Korean Congress, 일명 ‘한인자유대회’)이다. 대한인국민회 파리강화회의 한인 대표였던 이승만·정한경이 필라델피아에서 사업활동을 하고 있던 서재필과 협력해 미주지역 처음으로 3·1운동에 대한 공식 입장을 표명한 것이다. 1919년 4월 14일부터 16일까지 필라델피아시내 리틀극장에서 개최한 ‘제1차 한인회의’의 개최 목적은 일제의 불법적인 식민통치와 식민지 한국의 실상을 알리고 3·1운동으로 나타난 한국의 독립과 새로운 독립국가 건설의 열망을 전 미국사회에 전파하기 위함이었다.
서재필은 이승만·정한경과 연명해 1919년 3월 24일자로 ’대한인국민회 총대표회 위원’ 명의의 청첩장을 중앙총회와 각 지방 재류동포들에게 보냈다. 특별히 이승만과 정한경은 대한인국민회에 보낸 3월 28일자 전보에서 안창호와 윤병구의 참석을 요청했다. (신한민보, 1919년 3월 29일, 「우리 대표자의 급한 전보」.) 이에 대한인국민회는 윤병구와 민찬호를 대표로 파견했다.
‘제1차 한인회의’는 급하게 준비되었고 특별히 한인들이 적은 미국 동부지역에 개최되는 지리적 요건 때문에 많은 한인들이 참석할 수 없는 형편이었으나 매우 성공적인 대회였다. 3일 동안 연 참가자 수가 약 150명 정도인 것은 당시 하와이 한인 6,500여명을 제외한 북미 한인의 숫자가 약 1,600여 명에 불과했음을 감안할 때 적지 않은 사람이 참가했다고 볼 수 있다. 참가자들 대부분이 미국 중·동부지역 한인유학생들이었는데, 여기에는 북미대한인유학생회의 적극적인 협조가 있었기 때문이다. (신한민보, 1919년 4월 8일, 「광고」. 북미대한인유학생회는 오하이오주 학생들이 중심이 되어 1919년 1월경 조직된 것으로 임원은 회장 李春浩, 사무원 安鐘淳, 재무 옥종경, 서기 李炳斗·林炳稷, 기자, 金鉉九·박줄리언이다. )
필라델피아에서 대회를 개최하게 된 배경 중 하나는 다른 어떤 한인보다 미국사회에서 사회·경제적인 기반을 충분히 갖추고 있었던 서재필의 역할 때문이었다. 서재필은 실질적인 대회 준비나 운영을 총괄하며 추진했다. 즉, 대회를 성공적으로 진행시키기 위해 필요한 연사의 초청이나 장소 선정, 독립관으로의 시가행진에 필요한 필라델피아시측의 협조 등을 준비했다. 이와 함께 서재필은 이번 대회 의장으로 처음부터 끝까지 모든 활동을 주도했다. 그동안 개인적인 사업활동에 주력했던 그는 ‘제1차 한인회의’를 통해 한국독립운동의 전면에 나서는 첫 번째 무대가 되었다. 대회 운영은 서재필· 이승만 · 정한경 외에 임병직·김현구·‘장기한’(장택상으로 보기도 함)이 간사로, 천세헌이 서기로 활동하였고, 영어속기를 위해 미국인 리글씨가 고용되었다. 대회에 참석한 주요 인사들을 보면 윤병구 · 민찬호 · 김현구 · 임병직 · 장택상 · 조병옥 · 유일한 · 김노디 · 민규식 · 천세헌· 임초 등이다.
2) ‘제1차 한인회의’의 내용과 성격
‘제1차 한인회의’는 오전에는 주로 초청 연사의 강연을 듣는 것으로 하고 오후에는 주제별로 작성한 결의문 및 호소문을 발표하고 토의하는 순서를 가졌다. 각 주제별 결의문 및 호소문의 작성 · 발표는 미리 선정된 기초위원을 통해 하도록 했는데 이 일은 대회의 핵심 활동이었다. 작성한 6개의 결의문과 호소문은 ① 「대한민국임시정부에 보내는 결의문」, ② 「워싱턴의 미국 적십자본부에 보내는 호소문」, ③ 「미국 국민에게 보내는 호소문」, ④ 「한국인의 목표와 열망」, ⑤ 「일본의 지각 있는 국민들에게 보내는 결의문」, ⑥ 「미국 대통령과 파리강화회의에 보내는 청원서」 등이다.
각 결의문과 호소문의 일관된 관점은 한국의 독립과 독립된 한국을 민주주의와 기독교 정신을 구현하는 새로운 국가인 기독교 민주주의의 국가건설과 미국식 공화제 정부를 건설하는 것이었다. 예컨대 「대한민국임시정부에 보내는 결의문」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가 고매한 기독교인들이며 고등교육을 받은 자로 구성되어 있고 민주정부의 원칙을 신봉하고 있는 사람들이 세운 정부이기 때문에 재미한인들은 도의적, 물질적, 육체적 모든 지원을 아끼지 않아야 한다고 밝혔다. 그 때까지 실체가 분명하지 않았던 임시정부를 이번 대회를 통해 미주 한인들은 처음으로 임시정부의 존재를 공식 인정한 것은 매우 선구적인 자세이자 혜안 있는 결단이었다.
「미국 국민에게 보내는 호소문」에는 우리의 투쟁 목표는 아시아 민주주의의 실현이고 희망은 기독교 신앙을 널리 전파하는 것이므로 이 호소가 미국민의 지지를 얻을 것이라고 보았다. 그리고 「일본의 지각있는 국민들에게 보내는 결의문」에서는 일본 국민들이 지성있고 현명하다면 일본정부에게 국제 정의의 원칙과 진정한 민주주의의 정신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했다. 「미국 대통령과 파리 강화회의에 보내는 청원서」에는 “우리의 유일한 목표는 우리 민족을 위한 자결이라는 양도할 수 없는 권리를 다시 얻어 기독교 민주주의라는 기본이념 아래 자유 국민으로써 성장하는 것이다”라고 했다.
‘제1차 한인회의’는 몇 가지 점에서 특징을 갖고 있었다. 첫째, 한국 독립의 목표와 새로운 국가건설의 열망이 미국의 이상과 동일한 것으로 간주하면서, 미국을 과신(過信)하였다. 「미국 국민에게 보내는 호소문」 가운데 한국인이 주장하는 ‘자유’, ‘아시아 민주주의 실현’, ‘기독교 신앙의 전파’등은 “진정한 자유와 국제 정의의 실현을 위한 선구자적 사도”인 미국이 기꺼이 지지할 만한 것들이라고 했다. 또한 이승만은 “한국 국민의 목표와 열망이 우리의 동맹국들과 함께 국제연맹을 구성하고자 하는 미국 대통령의 목적이나 열망과 일치한다”라고 했다. 이러한 입장은 대회를 주도한 서재필을 비롯한 모든 한인 참석자들에게도 예외가 아니었다.
둘째, 한국문제를 국제 여론화하기 위해 한국인 최초로 한·미 연합의 국제대회로 개최되었다. 미국 국가를 부르며 대회를 시작하고 간간이 한국어를 사용 하였으나 대부분 회의진행을 영어로 진행하였다. 그리고 참가한 인사들은 한국인들 외에 각계의 저명 미국인들도 참석했다. 종교계 인사로는 필라델피아 성삼위교회의 톰킨스(F. W. Tomkins) 목사, 카톨릭계 빌라노바 대학 총장인 딘( J. J. Dean) 신부, 필라델피아에서 가장 큰 유대교당 랍비인 버코윗츠(H. Berkowitz) 박사, 펜실베니아주 랜스다운시의 세인트 존교회의 맥비(C. McBee) 목사, 필라델피아 기독교계 지도자 맥카트니(C. E. McCartney) 목사가 참석했다. 교육계로는 오벌린대학의 사회학과 교수 겸 ‘중유럽연합 의장’인 밀러( H. A. Miller) 교수, 스와스모어 대학의 레이머(Reimer) 박사, 러시아의 세인트 페테르부르크에서 다년간 연구활동을 한 샤드트(A. J. G. Schadt) 교수가 참석했다. 그 외에 재한선교사로 활동하다 미국으로 귀환한 데밍(Demming) 선교사와 쿡(Mrs. E. L. Cook) 여사, Evening Ledger지의 베네딕트(G. G. Benedict) 기자가 참석했다. 이들 모두 서재필과 친분있는 인사들이었다. 이들은 성경봉독, 기도, 축사, 강연, 증언 등의 순서를 맡음으로써 국제대회로서의 면모를 보여주었다.
셋째, 기독교 집회를 연상시킬 정도로 기독교적인 색채를 띠었다. 대회에서 줄곧 표현된 ‘기독교 정신’의 강조는 기독교적인 대회 분위기의 성격을 잘 반영해 주었다.
‘제1차 한인회의’가 끝난 후 참석자들은 필라델피아시 당국에서 제공한 악대부의 협조를 받아 한국과 미국의 국기를 양손에 들고 리틀극장에서 독립기념관까지 시가행진을 했다. 필라델피아 독립기념관 안에 들어간 참석자들은 대회 직전 임시정부의 ‘국무경’으로 선임된 이승만의 3·1독립선언문 낭독과 만세삼창, 그리고 기념촬영을 끝으로 모든 일정을 마무리했다. ‘제1차 한인회의’의 영향은 미주 한인사회에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을 축하하는 독립경축일(4월 15일)로 이어졌다. 대회 결과물은 제1차 한인회의(First Korean Congress)란 제목의 영문 책자로 만들어 미국사회에 널리 홍보했다.
3) ‘제1차 한인회의’의 역사적 의의
1919년 미주지역 독립운동의 원천이 3・1운동 직후 필라델피아에서 거행한 ‘제1차 한인회의’에서 나왔다는 사실은 역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제1차 한인회의’가 가진 역사적 의의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국내 3・1운동의 영향으로 미국에서 처음으로 한국 독립을 대외로 선언한 제2의 3・1운동이다.
둘째,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수립 사실을 처음으로 미국사회에 알림으로서 이후 임시정부 중심의 독립운동 방향을 제시하였다.
셋째, 국내외 독립운동가들에게 광복 이후 수립될 자주 독립 국가의 기본틀을 제시함으로써 독립 후 국가건설의 대강을 처음으로 설계하고 제시했다.
넷째, 한국 독립을 위해 선전‧외교활동의 중요성을 각인시키고 본격화하는데 첫 단초를 열었다.
3. 필라델피아 한국통신부의 설립과 활동
1) 설립
서재필은 ‘제1차 한인회의’ 이튿날인 4월 15일에 미국 국민을 상대로 한 전문적인 선전과 홍보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이를 위한 활동 기구 설립을 제안했다. (원성옥역, First Korean Congress: 최초의 한국의회(범한서적, 1986), 169∼170쪽. ) 그의 생각은 세 가지로 요약 된다. 첫째, 일본은 제1차 세계대전 이전부터 미국에 막강한 통신사를 두고 한국의 실상에 관해 왜곡된 선전을 계속해 왔다. 둘째, 조직적인 정부의 후원이나 재력 및 적당한 후원기관도 갖지 못한 한인들이 일본과 대항할 수 있는 길은 한인만이 갖고 있는 진실되고 정당한 대의명분을 주장하는 것이다. 셋째, 이 일의 성과를 거두기 위해서는 소수에 의한 추진 보다 모든 한인들이 참여한 조직적이고 항구적인 기구 설립을 통해 운영되어야 한다.
일본의 왜곡된 선전활동은 1905년 ‘을사늑약’ 이후 한국 지배에 대한 국제여론을 유리하게 만들기 위할 필요성 때문에 시작되었다. 국내 The Seoul Press지의 발간과 워싱턴DC에 ‘동양선전국’(Oriental Information Bureau)의 설치는 대표적인 예이다. 1919년 3월 30일자 New York Times 「이집트와 한국」이라는 논설에서 한국은 자치능력이 없기 때문에 독립은 시기상조라는 논리를 폈는데 이것은 The Seoul Press 1919년 3월 7일자 논설을 그대로 반영한 것이었다.
그리고 일본은 친일 미국인을 이용하여 한국의 식민지배를 합리화 시키는데 노력했다. 그 중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한 친일론자는 예일대학교 철학과 교수인 조지 래드(George T. Ladd), 미국 언론인 조지 케난(George Kennan), 미국 북장로교회 선교부 총무 아드 브라운(Arther J. Brown) 등이었다. 특히 래드는 일본의 사주를 받아 The New York Times Sunday Magazine 1919년 5월 11일자에 3·1운동에 대한 논평에서, 한국 민족을 중국의 저속한 풍습의 영향을 받아온 자치능력이 없는 민족이라고 혹평하였다. 또 일본의 한국 통치는 한국인에게 매우 유익하며 대다수 한인들은 일본의 통치를 만족하고 있으며, 3·1운동은 다수의 한인 중 소수 불평자의 소행으로 과소평가 했다. 이 글이 게재되자 이승만 · 정한경 · 윤병구는 맹렬하게 비판했다. (Korea Review, 1919년 6월호, 6-10쪽 참조.)
일본은 한국에 통감부를 설치한 후 조선 개혁에 관한 연례보고서(The Annual on Reform and Progress in Chosen)라는 영문판 연감(年鑑)을 매년 발간하여, 미·영을 비롯한 세계 각국에 왜곡된 식민통치를 선전했다. 이 연감의 주요 논리는 식민지 한국 민족이 일본 정치인의 지도로 현대 문명의 혜택을 받게 되었으며, 모두가 행복해 하며 일본통치 하에서 번영을 누리고 있다는 것이었다.
서재필은 일본의 왜곡된 선전활동의 폐해를 알고 조직적으로 대응할 것을 제안했다. 1918년 12월 19일자로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장 안창호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는 제1차 세계대전 종결 이후 국제정세가 한국 독립문제를 선전하기 위한 좋은 기회이니 영문잡지를 발간할 것을 제의했다. 그러나 대한인국민회는 1919년 1월 4일과 2월 24일 회의에서 그의 제안을 부결시켰다. 부결의 주된 요인은 당시 이승만·정한경의 파리행을 시도하고 있던 마당에 막대한 재정이 소요되는 출판사업을 추진할 경제력이 없다는 것이었다.
1919년 1월 오하이오주 콜럼버스에서 새로 결성한 북미대한인학생연맹(The Korean Student`s League of America)은 (임원은 회장 李春浩, 사무원 安鐘淳, 재무 옥종경, 윤영선, 서기 李炳斗, 林炳稷, 기자 金鉉九, 박줄리언이다.) 월 300달러의 저예산으로 파리강화회의 기간(1919.1∼6.)동안 영문 잡지 발간을 추진했다. 그 결과 Freedom and Peace with Korea under Japan? 라는 제목으로 신한민보의 후원을 받아 1919년 3월부터 제1호를 발간했다. 이것은 3·1운동 발발과 함께 미주 한인사회에서 맨 처음 발행되는 영문잡지로 국제회의 기간 동안 한국의 독립문제를 전 세계에 알리기 위한 한인유학생들의 노력의 결실이었다.
일본의 왜곡된 선전활동에 대한 폐해와 3·1운동 이후 선전활동의 중요성이 크게 대두되자 대한인국민회는 서재필의 통신부 설립안을 받아들였다. 4월 19일 중앙총회 제20차 위원회의에서 그를 외교고문으로 임명하고 필라델피아에 통신부 설립과 재정지원을 약속했다.
필라델피아 한국통신부(The Bureau of Information for The Republic of Korea)는 서재필의 사업장과 바로 인접한 필라델피아 시내에 사무실을 두고 개소되었다. 설립 시기는 필라델피아 한국통신부의 재정장부의 기록이 1919년 4월 22일부터 시작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이 때부터 활동을 개시한 것으로 보인다. (독립기념관 소장자료 서320, 재정장부.) 이로써 필라델피아 한국통신부는 미국 국민들에게 3·1운동으로 나타난 한국 독립의 열망과 일제의 식민통치의 진상을 널리 알려 반일여론과 친한여론을 일으키는데 주력하게 되었다. 필라델피아 한국통신부는 부장 1인(서재필), 서기 1인 (박영로), (서기는 1920년 9월부터 레딩시에 거주하는 김장호로 바뀌어 졌다. ) 외교 협찬원 3인(정한경, G. Benedict, Miss. Guthaphel), 사무원 1인 (Miss. Chester)으로 구성했다.
2) 주요 활동
필라델피아 한국통신부의 활동방향은 서재필이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장 대리 백일규에게 보낸 1919년 4월 29일자 서신에서 밝혔다. 첫째, 책자 발간을 통한 출판선전활동, 둘째, 대중집회를 통한 강연활동, 셋째, 미국인들에 의한 친한 단체, 예컨대 한국친우회의 조직과 활동을 지원하는데 두었다. (신한민보, 1919년 5월 16일자, 「서재필씨의 편지」 참조.)
서재필이 언급한 것 중 주목할 점은 선전활동의 대상을 주로 미국 국민에 둔 점이다. 이것은 미국 정부의 대한(對韓) 태도가 3·1운동 이후에도 근본적인 변화가 없었다는 점을 고려한 것이다. 예컨대 미국 정부의 입장을 대변할 수 있는 미 국무성의 한 고위관리는 1919년 4월 20일 The Christian Science Monitor지와의 기자회견에서 “미국 정부는 한국문제에 대하여 영국과 이집트 사이의 문제를 다루는 것과 동일한 태도를 취할 것이다. 한국문제는 전적으로 일본의 내정문제로 우리 필리핀에 폭동이 일어났을 경우와 다를 바 없다”고 언급하고 있었다. (朝鮮總督府警務局, 米國 ニ於ケル朝鮮獨立運動ニ關スル調査報告書,1921, 124쪽.) 따라서 한국 독립문제가 일본의 내정문제라는 인식을 가진 미국 정부를 대상으로 삼기보다 미국 국민에게 집중하여 친한 동정여론을 일으키는 것이 더욱 효과적이라고 생각했다. 이를 통해 미국 언론과 의회에 반영시켜 궁극적으로 미국 정부로 하여금 한국에 유리한 대한정책을 수립하도록 하겠다는 것이었다.
서재필이 선전활동을 위해 가장 먼저 착수한 것은 오래전부터 구상해 온 영문잡지를 발간하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그는 북미대한인학생연맹이 1919년 3월부터 발간하던 영문잡지를 인수해 1919년 6월부터 Korea Review(한국평론)라는 새 이름으로 발행했다. 새로 발간한 Korea Review는 1권당 16쪽 분량에 책값은 20센트이며 1년 구독료는 2달러였다. 편집 및 발간의 모든 운영은 서재필이 주관했으나 기사의 취재나 집필, 세부 편집활동 등은 북미대한인학생연맹의 편집진이 맡았다.
그 외 필라델피아 한국통신부가 발간했거나 선전용으로 활용한 책자들은 다음 표와 같다.
선전용으로 활용한 영문 책자
이들 선전용 책자들은 대부분 선전대상이 주로 미국인에 국한되어 그 논조가 비슷한 특징을 가지고 있다. 첫째, 일본의 한국 식민지화는 불법적으로 이루어졌고, 그들은 한국의 기독교를 말살하려 하고 있다. 둘째, 한국에서 일본의 개혁정책은 순전히 허구일 뿐 아니라 기만적이다. 셋째, 한국은 오랜 기간 독립국가로서의 지위를 누려왔고 현재 충분히 그러한 자치능력과 민족정신을 가지고 있는 민족이다. 넷째, 미국은 과거 한국과 맺은 한미수호조약에 의해 한국을 도울 의무가 있으며, 세계 자유민주주의를 수호하는 입장에서 약소민족의 정당한 생존권을 보호해야 한다, 다섯째, 국제 정치적인 측면에서 한국은 동아시아의 요충지인데 일본이 한국을 발판으로 삼아 동아시아의 패권을 차지하려 하고 있으며 이것은 미국의 국익과 상충된다. 여섯째, 미일 양국의 무력 충돌이 불가피하게 될 경우 한국을 우선 독립시켜야 동아시아의 평화는 물론 미국의 국익에도 크게 도움이 될 것이다.
서재필은 한국통신부를 중심으로 강연활동에 주력하였다. 그는 이승만 · 정한경을 비롯해 한국에서 오랜 동안 선교활동을 한 벡(S.A. Beck)목사, 한국친우회장 톰킨스 목사 등과 함께 대중 강연활동에 전념하였다. 서재필은 한국통신부에서 활동한 3년 동안 미국 각지에 300회 이상의 연설을 통해 약 10만여 명의 미국인들에게 한국 선전활동을 전개하였다.(Korea Review, 1922년 4월호, 15-16쪽 참조.)
이 밖에 서재필은 미국의 언론이나 단체에 대한 기고활동을 통해 한국 독립문제와 주장하고 일본의 불법적인 식민통치를 집중 성토하였다. 예컨대 Philadelphia Public Ledger지에 「한국은 실질적인 독립을 원한다」 (1919. 8.22), 「일본은 세계 국가들과 협력을 바란다면 약속을 지켜야 한다」(1919.11.23), 「한국민족은 열등민족이 아니다」(1920.1) (신한민보, 1920년, 1월 15일자 및 17일자, 「서재필기고문」 참조.) 라는 글을 썼다. New York Commercial Journal에 「동양에서 일본의 특별한 권리」(1919.7.21), World Trade Review에 「한국에서의 일본」(1919년 10월호)등을 게재하였고 1920년 7월 30일자로 필라델피아상공회의소에 「한국에서 일본의 무역독점」의 제목으로 편지를 보내 미국의 대일간섭을 유도하였다. 그리고 친일선교사 쉐릴(Charles. H. Sherril)이 일본의 한국지배를 합리화하고 한국 민족을 가장 지겨운 민족이라는 내용의 글을 Scribner`s Magaine 1920년 3월호에 싣자 서재필은 그가 소속되어 있는 뉴욕의 장로교선교위원회에 항의문(1920.3.8.)을 보내 사과를 받아 냈다.( Korea Review, 1920년 4월호, 1∼2쪽.) 또 새로운 미국 대통령으로 당선된 하딩(Warren G. Harding)에게 공개 서한(1920.11.22)을 보내 한미조약의 준수와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승인을 요구하였다.(Korea Review, 1920년 12월호, 1∼6쪽.)
3) 활동의 성과
필라델피아 한국통신부는 1921년 6월부터 구미위원부의 재정지원을 받지 못해 1922년 7월 Korea Review 발간이 중단될 때까지 서재필의 자구노력과 자비에 의해 유지되었다. 주요 원인은 재정지원을 전담한 구미위원부가 자체 유지도 어려울 정도로 위축되었기 때문이다. 당시 구미위원부는 재정권 관할문제로 기존의 대한인국민회와 마찰을 일으켜 미주 한인사회를 분열시키고 있었다.
재정권 관할문제는 대한인국민회가 1919년 6월경 상해 임시정부의 승인을 받아 애국금 수합활동을 전개하자, 이승만은 새로 설립한 구미위원부를 내세워 1919년 9월 4일자로 애국금 수합을 전면 중단하고 공채금 모집을 강행함으로써 발생하였다. 이러한 갈등은 1920년 2월 상해 임정이 독립공채로 재정을 통일하기로 하면서 구미위원부로 모든 재정권이 넘어갔으나 두 기관의 위신추락은 물론 미주한인사회를 분열시키는 주요 요인이 되었다. 또 구미위원부 초대 위원장인 김규식이 이승만의 독단 행위에 불만을 가지고 1920년 8월 7일 사임서를 제출한데다, (강화회의 참석을 위해 파리에 있던 김규식은 미국에서의 외교활동을 전개하기 위해 1919년 8월 22일 미국에 온 이후 구미위원부의 초대위원장으로 활동하였다. 그러나 그의 역할이 단순히 이승만을 보좌하는데 그칠 뿐 위원장으로서의 실질적인 권한을 부여하지 않자 그는 1920년 10월 3일 워싱턴DC를 떠남으로써 이승만과 결별하였다. ) 이후 김규식의 뒤를 이은 현순이 1921년 4월 무리한 대사관 설립을 추진하면서 많은 재정을 소모하였고 여기에 반발해 구미위원부 내부에서 내홍이 발생했다.
이런 일련의 사건들로 구미위원부는 미주한인사회에서 신용을 추락해 자체 유지도 어려운 형편이 되었다. 여기에다 활발한 재정모금과 지원에 비해 가시적인 독립운동의 성과가 나타나지 않은 것에 대한 미주한인들의 실망과 미국 경기의 침체, 캘리포니아주 한인 벼농사 사업의 실패의 예에서 드러난 한인 경제의 불황 등으로 전반적인 독립운동의 열기가 침체된 것도 주요 요인으로 작용했다.
서재필은 워싱턴회의(1921.11∼1922.2)에 대한 외교활동을 마친 직후 미주한인들에게 보낸 서신에서 앞으로 한국통신부와 한국친우회의 활동을 중단하겠다고 발표했다. (신한민보, 1922년 2월 23일, 「서재필 서신」.) 그는 1922년 7월호를 마지막으로 Korea Review 발간을 중단하면서 사실상 한국통신부의 활동을 접었다.
서재필이 한국통신부의 활동을 중단하게 된 데는 첫째, 장기적으로 독립운동을 추진할 만큼 개인 사업을 방치할 수 없는 상태까지 이르렀다는 점이다. 사업상의 어려움에는 독립운동 헌신에 따른 서재필의 개인적인 요인뿐만 아니라 당시 1921년 전후부터 불어 닥친 전반적인 미국 경기의 침체도 큰 몫을 차지했다. 둘째, 필라델피아 한국통신부를 구미위원부로부터 독립해 영구적인 기관으로 유지하려는 계획이 미주한인들의 어려운 경제사정과 독립운동 열기의 침체 등으로 인해 성사되기 어려운 사정도 한 요인으로 작용했다.
필라델피아 한국통신부의 선전활동은 3년여의 짧은 활동에도 불구하고 3·1운동으로 나타난 한국문제를 미국 의회 · 언론 · 교회 · 선교단체 등에 효과적으로 반영시켜 국제여론화 시키는 성과를 거두었다. 서재필은 미주 한인들에게 보낸 1921년 4월 18일자 「통고문」에서 첫째, 한국문제를 국제적인 문제로 만든 것, 둘째, 한국인이 일본에 항거하는 이유를 알린 것, 셋째, 미국뿐만 아니라 유럽에까지 한국을 동정하는 수천명의 사람을 얻은 것, 넷째, 일본에게 한인의 인권을 존중토록 한 것, 다섯째, 재미한인사회에 단합된 행동을 일으키게 한 것, 여섯째, 구미위원부의 활동을 도운 것 등을 나름의 성과로 보았다.
4. 한국친우회의 결성과 활동
1) 결성
한국친우회(League of The Friends of Korea)는 ‘제1차 한인회의’ 이튿날(1919.4.15) 서재필이 선전기관의 필요성을 주장하는 자리에서 미국 내 친한 미국인을 많이 확보해야 될 당위성을 강조함으로써 처음 제기되었다. 그리고 서재필이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장 대리 백일규에게 보낸 1919년 4월 29일자 서신에서 미국인 단체를 조직해 친한여론을 일으킨다면 한국의 독립과 자유를 회복할 방편으로 삼을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신한민보, 1919년 5월 16일자, 「서재필씨의 편지」.)
서재필의 구상에 대해 ‘제1차 한인회의’에 연사로 참한 톰킨스(F.W. Tomkins)목사, 톰킨스 목사에 대해 서재필은 “자유와 독립을 위해 잘 무장된 군대의 몇 개 연대와 맞먹을 수 있는” 사람으로 보고 그의 인물됨을 높이 평가하였다.
오버린 대학 사회학과의 밀러(H. A. Miller) 교수, I.N.S(International News Service)베네딕트(G. Benedict) 기자 등은 적극 지지하였다. 이 가운데 톰킨스 목사는 한국이 주장하는 독립과 자유를 위해 기꺼히 도울 것을 약속함으로써 한국친우회의 조직에 앞장섰다. 이에 따라 서재필·톰킨스·베네틱트는 1919년 5월 2일 필라델피아 시내 시티클럽에서 종교계 · 교육계 · 실업계의 각 분야별 저명인사 22명을 초청하여 한국친우회 발기모임을 가졌다. (신한민보, 1919년 5월 13일자, 「대한자유친구회조직」.) 여기서 서재필은 미국 국민이 한국에 기독교를 전파하여 자유와 독립을 한인들에게 가르쳤는데, 지금 한인들이 이를 위해 싸우는 마당에 미국 국민이 이를 모른 체 한다면 크게 모순되는 일이요 도리가 아니라는 내용으로 한국친우회의 설립 필요성을 역설했다.
한국친우회는 1919년 5월 15일 레딩(Reading)시 라자(Rajah)극장에서 성대한 집회를 개최한 후 5월 16일에 필라델피아에서 정식으로 결성되었다. 설립 목적은 첫째, 기독교와 자유 독립 국가를 위해 고통당하고 있는 한국민족들에게 미국인의 동정과 도덕적인 지원을 보낼 것, 둘째, 한국 민족이 지금까지 받아온 일제의 학정과 부당한 대우를 가능한 더 이상 재발되지 않도록 미국민의 도덕적 영향력과 호의적인 조정을 사용할 것, 셋째, 한국에 관한 진실한 정보를 미 국민들에게 알릴 것, 넷째, 세계 모든 민족과의 우정과 사랑 그리고 영원한 평화를 증진시키며 하나님의 법이 온 세계에 수립되도록 돕는 것으로 하였다. 그렇지만 서재필은 한국친우회가 성공하여 일백만 이상의 회원을 얻는다면 우리가 원하는 무슨 일도 할 수 있다고 전망하고 다분히 한국 독립을 위한 정치적인 운동까지 계산하였다. (신한민보, 1919년 5월 27일자 「대한친구회의 조직과 의결안」 참조.)
한국친우회는 필라델피아 한국통신부와 처음부터 상호 협조체제 속에서 운영되었다. 대체로 한국친우회는 한국통신부나 구미위원부의 지시나 재정을 지원받지 않고 자체의 회비 수입과 의연에 의해 운영되었다. 때문에 나름대로 독립된 자치활동을 전개했다.
2) 각 지역별 조직
한국친우회는 필라델피아를 비롯해 미국 각지에 21개의 조직으로 확대되었고 런던과 파리에도 각각 설립되었다. 스스로 전체 회원수를 25,000여명인 것으로 밝히고 있으나 확실하지 않고 약 1만명 내외인 것으로 보인다. (Korea Review, 1921년 8월호, 13쪽 및 1922년 1월호, 11쪽. 그런데 朝鮮總督府警務局, 米國 ニ於ケル朝鮮獨立運動ニ關スル調査報告書(1921), 117∼118쪽의 일본측 조사에 따르면 전체 회원수를 약 3,000명으로 잡고 있다.)
한국친우회는 1923년 말 폐지될 때까지 3·1운동으로 나타난 한국의 실상을 효과적으로 선전함으로써 국제적으로 한국의 독립을 지지하고 친한 여론을 조성하는데 크게 기여했다. 잊혀진 나라 한국 민족을 위해 외국인들로 구성된 한국친우회의 조직과 활동상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한국친우회 조직 상황
3) 한국친우회의 성격
한국친우회의 결성과 활동에서 나타난 특징을 보면 첫째, 기독교적인 입장에서 인도적이고 비정치적인 시민단체로 출발했으나 한국친우회가 한국문제를 위한 정치적인 압력단체로 행사하고 있다. 이것은 각 지역 친우회가 조직될 때 발표되고 있는 결의문을 통해서 잘 나타난다. 한국친우회를 결성할 때 발표한 결의문을 보면 미국 정부가 1882년 한미조약을 준수하여 부당한 일본지배를 막고 한국의 독립을 승인해줄 것을 요구한 뒤 이 결의문을 미국 정부와 의회, 그리고 해당지역 의원들에게 보내 한국문제의 해결을 요구하고 있다. 그리고 필라델피아 한국친우회와 레딩 한국친우회의 경우처럼 워싱턴회의 미국대표단 단장 휴즈에게 워싱턴회의에서 한국문제의 해결을 요구하였는데 이같은 행동은 한국친우회가 정치적으로 행사하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둘째, 한국친우회의 조직은 미국의 중·동부에 집중되어 있다. 이것은 선전활동이 주로 이들 지역을 중심으로 행해졌음을 의미한다. 주된 요인으로는 지리적으로 한국통신부와 한국친우회가 처음 결성된 필라델피아를 중심으로 차차 인근의 워싱턴DC와 뉴욕 등지로 확산된 데다 미국 중·동부지역에 있는 한인유학생들의 적극적인 참여가 그러한 성과로 나타날 수 있었다.
셋째, 친우회 결성은 주로 대중집회를 통해 이루어지고 있다.
그러면 이러한 한국친우회의 조직 활동이 미국 전역에 걸쳐 가능하게 된 요인은 무엇인가. 먼저, 미국인 정서에 부합하면서 효과적으로 강연활동을 전개한 유능한 인재들의 활약을 들 수 있다. 먼저 서재필은 필라델피아 한국통신부를 통해 처음부터 한국친우회 결성에 앞장섰고 여기에 이승만이 합류함으로써 그 성과를 배가시켰다. 아울러 정한경을 비롯해 톰킨스 · 헐버트 · 벡 (벡 목사는 한국의 성서공회에서 20여 년간 재직한 바 있는 친한선교사이고, 한국친우회뿐만 아니라 한인구제회의 활동에도 많은 활동을 하여 1919년 5월 1일부터 1920년 9월 20일까지 200여 곳에 30여 만명의 사람들에게 강연활동을 할 정도로 한국 독립에 헌신한 인물이다. ) · 그리피스 (그리피스는 한국에서 선교사로서 활동한 바 있으며 Korea, The Hermit Nation(은둔의 나라 한국)을 쓴 저자다.) · 가터필 (가터필여사의 활동은 신한민보, 1920년 4월 2일자, 「가터필여사의 활동」 참조.) · 화이팅 ( 화이팅(H. C. Whiting) 선교사는 친우회 조직활동의 전면에 나타나 있지 않으나, 한국의 독립을 위해 266회의 강연활동과, 각 처에 친우회를 조직하고 공채표를 발매하였다.) 등 친한 미국인들의 적극적인 활동을 들 수 있다.
다음으로 미주 한인유학생들이 한국친우회를 조직하기 위한 계획과 준비 그리고 진행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한 점이다. 이들에 의해 친우회가 결성된 곳을 보면 오하이오주 지역을 비롯하여 미조리주, 매사추세츠주, 미시간주, 뉴욕주, 등 13곳이나 되는데 이것은 미국 전체 친우회조직 가운데 60%를 넘고 있었다. 친우회 조직 때에 대학을 중심으로 한 교육계 인사들이 활발히 참여했는데 이는 그만큼 이들 한인 유학생들의 노력이 컸음을 의미한다.
마지막으로 미국 내에서 팽배한 반일여론을 적극 이용한 점이다. 당시 미국에서 일어난 반일여론의 논거는 일본의 침략적 팽창주의정책과 ‘황화론(黃禍論)’이다. (여기서 ‘黃禍論’이란 인종론에 바탕을 갖고 동양인 특히 일본의 시베리아및 중국으로의 대륙팽창정책이 미국의 안보와 이익에 심각한 영향을 미친다고 주장하는 미국 허스트계 신문의 反日 선전논리다. ) 여기에 3·1운동 후 한국에 대한 일본의 비인도적인 탄압 행위가 덧붙여져 일본이라는 나라는 식민지를 통치할 민족이 못 된다는 여론이 일게 되었고 아울러 캘리포니아주에서 일본인 배척문제가 제기되면서 반일여론은 격화되었다. 파리강화회의에서 산동(山東)의 이권이 일본에게 넘겨지자 미국 의회와 언론은 인류의 해방을 위해 세계대전에 참가한 미국의 정신과 정면 배치된다는 논리로 반일여론을 선도하였고 이를 강화조약의 비준과 국제연맹의 결성에 반대하는 구실로 삼았다. 이처럼 미국 내 반일 분위기는 한국친우회 조직시 미국 국민의 자발적인 참여를 유도하는데 유리한 배경을 만들었다.
한국친우회는 미국뿐만 아니라 영국과 프랑스에도 조직되어 광범위한 국제적인 조직을 갖춤에 따라 3·1운동으로 나타난 한국의 실상을 전파하고 친한여론을 형성하는데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한국친우회는 서재필이 워싱턴회의 종결 이후 모든 활동을 중지하기로 하면서 사실상 침체에 빠졌다. 한국친우회는 관동대지진으로 한인 학살문제가 국제사회에 널리 알려질 때 필라델피아 한국친우회 회장 톰킨스가 1923년 11월 20일자로 미국무장관 휴즈에게 항의문을 보내 시정을 촉구하고 있는 것을 보아 1923년 말까지 계속 활동한 것으로 보인다. (독립기념관 소장자료 3861-226, 「톰킨스의 조선인학살항의문에 관한 건」.)
5. 맺음말
3・1운동 이후 한국독립운동을 고찰할 때 그동안 주로 국내나 만주 그리고 중국 관내지역을 중심으로 고찰되고 언급되는 경향이었다. 그런데 미주 한인들의 독립운동 실상이 하나씩 밝혀지고 미주지역 독립운동이 한국독립운동사에 미친 영향과 효과를 재검토하게 되면서 다시금 주목받는 자리가 되었다. 그런 전환점의 시기가 바로 3・1운동 직후 요원의 불길처럼 확산된 미주 한인들의 강렬한 독립운동이었다.
국내 3・1운동이 미주 한인사회에 미친 파급력은 매우 컸다. 3・1운동을 계기로 미주 한인사회는 필라델피아의 서재필을 중심으로 냉각된 독립운동의 열기를 되살려 한국 독립을 위해 하나로 결집하였고 그 힘으로 대대적인 독립운동이 전개되었다.
3・1운동 이후 미주 한인사회에서 전개된 독립운동은 국내나 만주, 그리고 중국 관내와 견주어도 뒤처지지 않을 만큼 다양하고 적극적이었다. 국내에서 소위 문화통치로 전환된 뒤 새로운 단체와 언론 잡지가 발간되어 민족운동의 영역이 활발히 전개되었고 만주에서는 독립군단들이 편성되어 항일무장투쟁의 기치를 올리고 독립전쟁을 개시하였다. 중국 관내에는 상하이로 집결한 독립운동가들이 통합된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수립하여 독립운동의 중추기관으로 만들었다. 이런 가운데 필라델피아의 서재필은 주요 한인들과 친한 미국인들과 함께 미국사회와 미국인을 상대로 활발한 선전활동을 전개하였다.
3·1운동 직후 서재필이 중심이 되어 추진한 선전활동은 독립운동의 양적인 면이나 질적 수준에서 다른 어떤 지역과 견줄지라도 결코 뒤쳐지거나 모자라지 않는다. 이같은 선전활동은 미주지역으로만 국한되지 않고 사방으로 그 열기를 확산시켜 상해 임시정부를 강하게 뒷받침 해 주었다. 그리고 국내외 한인들에게 독립운동을 격려하고 용기를 북돋아 주었다.
3・1운동 이후 한국독립운동의 역사에서 미주 한인의 존재감을 제대로 각인시켜 준 인물은 서재필이었다. 그의 활약으로 이승만・정한경은 물론 톰킨스・밀러・헐버트 등 친한 미국인들을 움직였다. 그리하여 미국과 전 세계를 향해 한국 독립문제를 국제여론화 하여 국제적인 동정과 지원을 얻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