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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노트] 벌곡면 양산리 박대화(朴大和)님 “영화같은 인생, 영화찍듯 살아가요~^”
기사입력  2019/04/10 [10:57]   놀뫼신문

 

[벌곡면 양산리 박대화(朴大和)님의 인생노트]

“영화같은 인생, 영화찍듯 살아가요~^” 

 

봄이 오는 길목을 따라 삼십 분쯤 달려가니 벌곡 양산리 마을회관, 서둘러서 와서인지 동네 마을회관은 문만 열려 있었다. 이것저것 둘러보면서 잠시 기다리니 한글대학 어르신이라고 하기에는 젊은 분이 들어오신다.

인사 나누니 올해 65세라신다. 일제강점기와 6·25전쟁을 지나면서 어려운 삶을 살아오신 어르신 만날 거라고 생각했는데, 요즘 농촌청년회 졸업반인 65세라고 하시니 이야기를 어찌 풀어갈까 은근 걱정이 되었다. 

시대가 어떠하든 삶에는 봄볕에도 녹지 않고 남아 있는 잔설(殘雪)처럼, 아픔이 있고 그 사이 불쑥불쑥 다른 얼굴을 하고 나타나는 그리움 속에서 이야기보따리가 풀려나왔다~~



1남7녀가 어머니 8순때 어머니 아들딸임을 자랑하는 티셔츠 입고(둘째딸인 박대화씨가 중앙 백옥련 여사 왼쪽)

 

박대화(朴大和) 

  • 1955년  출생
  • 1963년  연산 국민학교 입학
  • 1965년  3학년 중퇴, 상경
  • 1970년  공장 취업
  • 2004년 벌곡면으로 귀농

                                    

요즘 딸과 단둘이 떠나는 해외여행

20여 년 전 어머니 회갑잔치때 집안식구들과 함께 

 

징병에서 돌아온 아버지 재혼

 

연산에서 대를 이어 살아온 아버지와 울산이 고향인 어머니 사이에서 큰딸로 태어났다. 10남매를 둔 외할아버지는 일제강점기에 농토를 팔아 만주로 떠났고, 나라 잃은 백성은 그곳이 어디든 어려움에서 벗어나질 못해 다시 식솔들을 안고 돌아와 울산으로 가지 않고 연산 개태사 부근에 자리를 잡았다. 그 와중에 자식들을 다 잃고 딸과 아들 둘만 살아남았다. 어머니와 그 위 외삼촌이었다.

아버지는 일제강점기 말 강제 징병으로 전쟁터에 끌려갔다. 결혼한 후였다. 3~4년 소식을 알 수 없게 되자, 딸 하나를 두고 있던 큰어머니는 친정으로 가서있다 재가를 하였다. 집에 돌아온 아버지도 몇 년 후 재혼을 해 내가 첫 딸로 태어났다. 

나는 몸이 약해 지병이 있는 것처럼 자주 아팠다. 그래도 2~3년 터울로 동생들이 태어났다. 우리는 1남 7녀이다. 먹고 살기 힘든 형편에 큰딸이라는 멍에를 지고 살았다. 밭을 개간하는 엄마를 따라가 땡볕 아래서 젖먹이 동생을 뱀이나 곤충들로부터 지키는 일을 도맡아 했다. 집안 형편은 늘 어려웠다. 부처님 가운데 토막 같다는 아버지는, 어머니 말로 ‘고무신 한 짝 값도 못 받는 반장’을 하면서 동네일로 바빴다. 어머니는 밭일에 동네 품까지 팔면서도 집안이 늘 깨끗해야 했다. 그 사이에서 힘든 건 나였다.

 

국민학교 3학년 중퇴 후 상경

 

8살이 되어서 4km 밖에 있는 연산초등학교에 입학했다. 월사금을 제때 내지 못해 반 친구들 앞에서 손바닥을 맞는 일이 허다했다. 맞는 일은 크게 자존심 상하는 일이 아니었다. 대부분의 아이들 사정이 비슷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먼 통학 길에 마을 상급생들의 짓궂은 장난은 내게는 폭력이었다. 학교 가는 길이 무섭고 싫었지만 부모님께 이야기도 못 했다.

육성회비 미납으로 손바닥을 맞고 온 다음날 아침, 아버지가 이웃 마을에 꿔준 돈을 받아 오신다고 가셨다. 돈을 받아 오시다가 더 급한 사람이 있어 그 사람에게 빌려주셨다며 빈손으로 오셨다. 학교에도 못 가고 아버지를 기다리던 나는 그 핑계로 학교를 그만두었다. 

그때가 3학년이었는데, 한글을 깨치지 못했다. 학교에서 돌아오면 부모님이 숙제를 봐줄 형편이 아니었다. 동생 돌보는 일에 집안일까지 하면서 몸이 자주 아팠던 나는 제대로 공부를 할 수 없었다.

한 번은 키우던 소를 도둑맞은 적이 있었다. 몇 세대 되지 않는 마을에 낯선 사람이 동네 길을 어슬렁거리던 그 날, 소를 잃어버렸다. 도둑을 맞고 점집에 다녀온 어머니는 이웃 마을까지 며칠 동안  찾아다니면서 정신 줄을 놓으셨다. 소는 재산 1호였다. 그 소가 우리 집 소였는지 아니면 맡아서 키운 소인지는 모르지만 소를 찾지 못하고 돌아온 어머니는 통곡하셨다. “차라리 저 지지배들 중 한 명이 없어졌어도 이렇게 캄캄하지는 않았을 텐데”라며 가슴을 쳤다. 그때 그 말이 상처가 되지 않았다.

얼마 전 왜 그랬냐고 여쭈어 보았다. “내가 그랬냐?” 되물으시면서 “미안하다. 참 살기 어려울 때였다 얼마나 속상했냐?”시며 눈을 붉히셨다.

학교를 그만두고 10살 무렵 아는 분 소개로 서울 사는 할머니 댁으로 가게 되었다. 이태원 부근에 사시는 분인데 적적함을 달래려 아이를 구했고, 먹고 살기가 힘든 부모님이 입 하나라도 줄이려고 보낸 것이다. 위에 있던 언니도 일찍 남의집살이로 가 얼굴도 잘 기억하지 못했다. 

 

여공생활과 떠나버린 두 친구

 

할머니와 둘이 사는 서울 생활은 편했다. 밭에 나가지 않아도 되고, 동생 보는 일도 없고 아파도 할머니가 잘 챙겨 주었다. 자녀들이 다 출가해 사는 할머니는 밖의 일이 많아 자주 나가셨고, 나 혼자서 집을 지키는 일이 많았다. 

 15살쯤 액세서리 공장에 취직했다. 가내 수공업을 하는 소규모 공장이었다. 팔찌나 반지에 보석을 박거나 고리를 끼우는 일이었다. 제법 고가의 제품들이 있었다. 18K, 14K 도금일은 가족들이 직접하고 나머지 제품을 만들었고, 디자인실까지 있는 전문업체였다. 

처음에 월급이 삼천 원이었는데 그것도 제때 받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점심시간에도 밥 먹고 쉴 새 없이 바로 작업을 했다. 수당도 받지 못하는 연장 근무는 허다했다. 그게 당연하다고 여겼다. 젊고 똑똑한 사람들이 저항해 점심시간을 확보했다. 그 일을 한 사람들은 바로 공장에서 쫓겨났지만, 그 사람들 덕분에 점심시간에 배드민턴을 치고 급조된 탁구대를 놓고 탁구도 할 수 있었다. 

조용하고 혼자 있길 좋아하는 성격이라 친구 사귀는 일이 쉽지 않았다. 그래도 가슴에 담은 친구가 있었다. 한 친구는 할머니 외손녀였다. 5·16군사정변으로 정권을 잡은 군부에 반대했던, 이름만 대면 알 만한 장군의 딸이었다. 경기여고를 다니는 엘리트 친구는, 옆에 있어주는 것만으로도 자부심을 느끼게 했다. 그 집에 놀러 가 함께 먹고 자기도 했다. 그러나 친구 아버지가 박정희 정권에 반대하면서 가정이 풍비박산되었다. 하루아침에 먹을 것을 걱정하며 식당일을 하게 된 엄마, 감옥살이로 집을 비우는 아버지 일로 힘들어하던 친구가 급기야 자살을 했다. 장례식에서 이모(=친구엄마)가 나를 붙들고 밤새 울기만 했던 기억이 난다. 시간이 되면 친구 집안 이야기를 더 하고 싶다.

또 한 친구는 공장에서 같이 일을 했다. 갑자기 공장을 그만두고 고향으로 내려가면서 “연산 내려올 때 꼭 자기한테 들리라.”고 신신당부했다. 명절에 내려오면서 천안 인근에 있는 친구 집을 찾아갔다. 버스를 몇 번 갈아타고 찾아간 시골 마을은 몇 가구 되지 않는 조용한 마을이었다. 동생이 “왜 이제 왔느냐?”며 “누나가 많이 기다렸다”고 했다. 그 친구도 세상을 왜 떠나야 했는지 알 수가 없었다.

 

서울에서 결혼은 했지만.... 

 

이렇게 친했던 친구 둘을 모두 보내고 외톨이가 되었다. 25살 때 집안 소개로 맞선을 보고 주변의 성화에 결혼을 하였다. 남편은 경리 학원을 운영하는 형을 도와서 강의하고, 학원 운영 전반을 책임지고 있었다. 일 년 만에 딸을 낳고 남들처럼 별 탈 없는 결혼 생활이었다. 

그런데 결혼하고 13~14년쯤 되었을 때 남편이 서른 살이나 어린 아가씨와 바람이 났다. 공무원인 아가씨는 죽기 살기로 매달렸다. 강원도에서 혼자 올라와 방을 구하고 짐을 정리하는 일을 남편이 도와주면서 사달이 난 것이다. 생각해 보니 나도 그렇게 젊고 능력 있는 아가씨가 좋다고 하면 헤어 나오지 못할 것 같아 두 눈 질끈 감고서 이혼을 결심했다. 딸이라면 죽고 못 사는 남편이 “아이를 더 낳지 않고 딸만 키우겠다.”는 약속을 하고, 중학생인 딸도 아버지와 살겠다고 해서 혼자 대전으로 내려왔다. 가볍게 보여 믿음이 안 갔던 첫인상 때문인지, 이혼을 결정하면서 큰 고민을 하거나 미련은 생기지 않았다.

 

어머니8순잔치 때 전주에서 즐긴 온가족나들이

1남7녀가 어머니 8순때 어머니 아들딸임을 자랑하는 티셔츠 입고

 

9살 연상 슈퍼사장님과 재혼

 

이혼 후 어머니가 계신 대전으로 내려왔다.  30년 만에 엄마랑 한 집살이를 시작했다. 엄마도 어린 딸을 일찍 남의 집에 보낸 것이 미안하고 나 역시 혼자되어 내려와 죄송했다. 

부모 자식도 오랫동안 만나지 않으면 서먹해진다. 그런 모녀가 같이 살면서 늦게 사랑하는 것을 배웠다. 환갑인 어머니를 아버지랑 처음으로 비행기 태워드렸다. 여행기간 쉬면 월급에서 일당이 빠져 안 간다는 어머니에게 “한 달 월급을 용돈으로 드리겠으니 제발 동남아 여행 한번 다녀오세요.”라면서 강권하였다. 어머니랑 같이 살면서 제일 잘한 일인 것 같다. 

크게 하는 일은 없었지만 대전에 내려와서 성당에 열심히 다녔다. 그러다 지인의 소개로 9살 많은 지금의 남편을 만났다. 슈퍼를 운영하는 남편은 딸 둘에 아들이 하나가 있었다. 동네 슈퍼 운영은 시장의 변화로 어려웠다. 근처에 백화점이 두세 곳 생기고 대형 마트까지 있었다. 저녁 시간이면 버스가 손님들을 실어 나르고 배달 트럭이 골목집까지 배달하니, 동네 작은 슈퍼가 발붙일 곳이 없었다.  

 

시골에 내려와 재벌이 되다

 

남편 건강에 이상이 왔다. ‘지방간이니까 운동을 많이 하라’는 처방을 받았다. 밤늦게까지 매달려야 하는 슈퍼 일을 하면서 몸 챙기기는 어려웠다. 수익도 예전 같지 않아 여러 가지 고민을 하던 중에 집안에 일이 생겼다. 농사짓던 사촌 동생이 육묘를 사러 가다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난 것이다. 사촌 동생이 짓던 농사를 대신 맡아야 했다. 처음에는 대전에서 벌곡으로 출퇴근하면서 일을 했다. 일 욕심 많은 남편이 밭농사까지 시작했다. 그래서 아주 내려왔다. 

농사일은 돈이 되는 일이 아니었다. 4천 평이 넘는 농사인데 두 사람 인건비 건지기도 어려웠다. 한번은 새벽에 나와 배추 4백 포기를 뽑아 손질해 대전 도매시장에 갔다. 가면서 수지를 뽑아 보았다. 배추묘 값, 운송료, 아침, 점심 두 끼 식대에 일하면서 마신 맥주값까지 계산해 보았다. 15만 원을 받아 경비로 7만 원을 제하면 한 사람 일당이 3만 5천 원은 되겠지 싶었다. 그런데 막상 경매를 하니 배추값으로 7만 원을 받았다. 그 돈을 받고 돌아오는 데 맥이 쭉 빠졌다. 배추 한 포기에 2백 원도 안 됐으니 말이다. 상인들은 그 배추를 두 포기에 2500원 받고 있었다. 학교 다니는 아이라도 있으면 한 아이 학비도 어려울 것 같았다. 그래도 부지런한 남편은 눈에 보이는 곳이면 뭐라도 심고 가꾸었다. 그래서 지금은 전문농사꾼이 다 되었다. 

이곳에 자리 잡으면서 많은 일이 있었다. 양촌에 시설딸기 재배 붐이 일고 있을 때였다. 아는 분이 “딸기 농사를 시작했는데 농사 경험이 없어 힘들다”고 “하우스 시설이 된 자기 논을 사서 한번 해보라”는 이야기를 했다. 바로 계약을 하고 딸기 농사를 시작했다. 노지 밭작물만 키우다가 세심한 관리가 필요한 하우스 딸기 농사를 시작한 것이다. 일 욕심은 많지만 세밀한 성격이 아니라 하우스를 여닫으면서 온도 맞추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비 오는 날 지인들과 막걸리를 마시다가 갑자기 해가 떠도 바로 하우스로 달려가야 할 만큼 민감한 일이었다. 그렇게 신경을 쓰지 못하는 남편은 다리까지 아파서, 결국 딸기농사를 접고 논을 되팔았다. 

이제는 노지에 밭작물만 하고 있다. 배추, 감자, 가지, 고추 노지에 심는 작물은 거의 다 하고 있다. 하우스 옆 임시 거처에서 생활하지만 이제 우리는 부자, 아니 재벌이다. 새벽부터 늦게까지 허리 펼 새가 없는 일 재벌이다. 그래도 건강을 지킬 수 있어 행복하다.

 

 어머니 효잔치로 장윤정콘서트를 모시고 가다

요즘 딸과 단둘이 떠나는 해외여행

 

아직도 영화 만드는 꿈 꾸어요

 

아버지가 4년 전 95세에 돌아가시고 올해 어머니도 85세가 되셨다. 가까이 사는 일곱째 동생이 부모님을 잘 모셨다. 시집살이에 아이들 키우고 직장생활을 하면서 대학 공부까지 한 동생이다. 그러면서도 아픈 아버지를 살뜰하게 보살펴드려 늘 고마웠다. 그 동생과 함께 시간이 나면 엄마를 모시고 맛있는 음식 먹으러 다니고 여행도 자주 한다. 뒤돌아보면 어머니는 그 어려운 살림에 7남매를 어떻게 키울 수 있었는지, 기적만 같다.

어머니는 뒤주에 몰래 쌀을 넣고는 “아버지 모르게 하라”며 우리 입단속을 해야 했다. 이처럼 집안 식구 먹을 것조차 챙기지 않았던 아버지, 빚보증으로 남의집살이까지 한 아버지랑 평생을 살아오신 어머니가 어찌 위대하지 않은가? 동네 사람들이 “엄마가 아버지 데리고 산다.” 할 만큼 어머니는 여장부셨다.

아직도 자식들에게 힘이 되고 싶은 어머니가 4년 전 내 환갑에 큰돈을 주셨다. “나이가 들면 여행하고 싶어도 다리가 아파 다닐 수 없으니 해외여행을 다녀오라”고, 내가 어머니 환갑에 드린 돈보다 더 많은 돈을 주셨다. 그런 멋진 어머니가 가까이 건강하게 계셔서 감사할 뿐이다.

요즘은 막내딸과 해외여행을 다니는 호사를 누리고 있다. 낯선 곳이 좋아 여행을 자주 하는데, 아이가 같이 다니며 가이드 겸 보호자가 되어주고 있다. 남편은 비행기 타는 것이 싫다 하고, 큰딸과 아들은 생활에 바빠서, 이래저래 우리 둘만의 여행을 자주 하곤 한다.

꿈을 꿀 수 있는 나이는 아니지만 그래도 내가 젊고 배운 사람이라면 영화를 만들어보고 싶다. 내 머릿속에서 만들어지는 이야기가 한 컷 한 컷 장면이 되어서 한 편의 영화가 만들어진다면 정말 멋질 것 같다. 아이가 봐도 어른이 봐도 재미있는 영화 만드는 꿈을 그냥 이대로 계속하여 꾸고 있다. 

또 다른 꿈은 아파트 한 채 분양받아 단출한 살림을 했으면 좋겠다. 성격이 워낙 깔끔하여서 힘들었던 어머니 성품이 내게도 있는지, 정리를 해도 해도 정리되지 않는 시골 살림이 어렵다. 

한글 선생님의 권유로 인터뷰를 했지만 걱정이 된다. 단조로운 삶이 이야기될까 싶기도 했다. 하지만 문뜩문뜩 생각나는 일들이 정리되는 것 같다.  

 


감독이 되어 영화를 만드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없지만, 인생이라는 한 편의 영화를 완성해 가는 길에서 우리 모두는 주인공이다. 가족과 이웃 모두에게 영화 한 컷 한 컷 같은 시간을 선물하는 박대화 님이 오늘의 주인공이고 영화감독이지 않은가!

   

-  유환숙 시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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