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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노트] 가야곡 왕암리 천종분님 "억척 일만 해왔는데, 짬짬 여유 누렸더라면~"
기사입력  2019/04/01 [22:57]   놀뫼신문

[가야곡 왕암리 천종분 할머니의 인생노트]

억척 일만 해왔는데, 짬짬 여유 누렸더라면~

남편 환갑잔치

 

천종분(千鍾湓)

  • 1931년 은진 시묘리 출생(89세)
  • 1941년 구자곡초등학교 입학(4학년 마치고 중퇴)
  • 1949년 중매로 결혼(19세) 
  • 1957~1972년 6남매 출산

 

 

내 인생, 호적보다 4살 위로 시작

 

나는 음력으로 1931년 9월 17일 은진 시묘리에서 태어났지. 실제 나이가 올해로 여든아홉이야. 그런데 호적에는 1927년생이어서, 면사무소에서는 아흔셋으로 알고 있어. 나이를 적게 신고는 많이 해도, 나처럼 많게 신고하는 경우는 드물지. 그게 어쩌다 27년생이 되었냐? 이유가 있지. 난리통에 호적이 몽땅 불타 버려서 전부 새로 신고를 하라고 했대. 내 위로 오빠가 둘이 있는데 4살 위의 오빠 이름이 ‘종문’이고, 내 이름이 ‘종분’이거든. 둘이 이름이 비슷해서 헷갈리는 바람에 4살 위의 오빠 것을 갖다가 내 것으로 올리고, 내 것을 오빠 것으로 올렸다지 뭐야. 그 덕에 호적으로 치면 내가 손위 오빠가 되어 버린 거지. 호적은 그래도, 나는 엄연히 1931년생 천종분이야.

 

친정에서는 귀한 막내였어

 

언니가 둘, 오빠가 둘 있는 집의 막내여서 친정 부모님은 나를 예뻐만 하셨지. 그때 당시에는 여자 이름은 돌림자를 따르지 않는 집이 많았지만, 우리 아버지는 달랐어. 우리 아버지는 신사였어. 그래서 여자라도 돌림자가 ‘종’자라고 ‘종’자를 넣어서 이름을 지어줬지. 결혼 전까지 나는 집에서 물 한 방울 안 묻히고 살았어. 올케가 둘이나 있기도 했고 어머니도 동네에서 일 잘한다고 소문이 난 분이라 당신이 다 하고 나더러는 뜨개질이나 하러 다니라고 했지. 그때는 시집갈 때 가지고 갈 것들을 만든다고 모여서 뜨개질을 많이 했었거든. 또 우리 집에는 논도 11마지기나 있어서 밥 먹고 사는데도 어렵지 않았어. 그래도 둘째성은 기계가마니 짜는 걸 워낙 잘해서 나하고는 다르게 일을 많이 했었지. 

그렇게 나를 이뻐했던 부모님이셨지만 아버지한테 서운한 것이 하나 있어. 다른 것들은 모두 내가 하고 싶다는 대로 해주셨는데 학교 가는 것은 허락하지 않으셨어. 학교 가는 대신 뜨개질이나 하러 다니라고 하셨지. 그래도 학교에 얼마나 가고 싶던지 억지로 일본학교에 다녔어. 일본 놈들이 있을 때라 학교에 가면 일본말만 가르쳤었거든. 그래서 그때는 일본학교라고 불렀지. 그랬어도 학교에 가보고 싶어서 구자곡국민학교에 들어갔지. 그때는 은진 사람들은 전부 구자곡국민학교로 다녔거든. 

지금이야 8살이 되면 학교에 가지만 그때는 8살짜리도 가고 9살짜리도 가고 10살짜리도 가고 했었어. 나도 11살에 학교에 처음 갔지. 학교를 몇 시까지 간다는 것도 없었어. 새벽에 일어나 밥만 먹으면 집을 나섰지. 신발도 나막신같이 생긴 것을 신고 다녔거든. 그래서 눈이라도 오는 날이면 발이 퉁퉁 부어서 집으로 돌아왔어. 그런 날은 어김없이 어머니가 방에 불을 때서 이불 덮어 놓고 나를 기다리고 계셨지. 그러다 내가 학교에서 돌아오면 내 손을 잡고 끌어다가 발을 이불 속에 넣어주시곤 했어. 그렇게 귀한 대접을 받고 살았지. 

내가 그렇게 좋아하는데도 아버지는 기어코 학교 다니는 걸 그만두게 하셨지. 4학년까지만 다니고 더는 못 갔었어. 학교에 다니면서 줄곧 일본말만 배웠는데, 지금은 그 일본말도 다 잊어버리고 하나도 생각이 안 나. 그래도 학교 다닐 때 지금 TV에 나오는 것처럼 일본 이름으로 바꾸고 그런 거는 안 해봤고 내 이름으로 다녔지. 

나는 일본 사람들 세상에서도 살아봤고 6·25 전쟁도 겪어봤지만, 특별히 피난 같은 것도 안 가보고 해코지를 당한 적도 없어. 운이 좋았지. 일본 놈들 세상이 끝난 것도 나중에야 알았어. 아버지가 강경에 다녀오시면서 “일본 놈들이 떼로 어디로 가더라” 하셨는데 그게 알고 보니 도망가는 거였더라고. 세상이 어수선하다고 했는데, 나는 그런 건 잘 모르고 그냥 잘 산 거지. 그래도 지금 생각하면 학교에 못 다닌 것이 너무 속상해. 한글이 받침이 얼마나 어려운지 지금 ‘한글대학’에서 공부하고 있지만 잘 안 돼. 그때 배웠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생각만 들어.

그래도 친정에서 편하게 살아서 평생을 그렇게 살 줄 알았지. 한 동네 수득이 엄마가 중신을 서는 바람에 가야곡 왕암1리로 시집을 와서 그때부터 생전 안 해본 고생이 시작됐지.

 

 

맏며느리로 시집와서 고추보다 매운 시집살이

 

중매로 신랑 얼굴도 모르고 성씨도 모른 채 시집을 왔어. 첫날밤도 얼마나 겁이 나던지, 앉아서 밤을 꼬박 새웠어. 잠을 한잠도 못 잔 통에 다음 날 낮 잠이 자꾸만 쏟아지는데, 결혼했다고 손님들 찾아오는 통에 신부 노릇 한다고 잠을 안 자려 억지로 버티던 생각이 지금도 나. 

남편은 나를 참 예뻐했어. 왜 예뻐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말이 없는 사람이라 그렇지 내게 정말 잘해줬어. 근데 나는 처음에는 남편이 그저 그랬어. 19살에 시집 왔지만, 연애는 전혀 모르고 살았거든. 친정 동네에도 총각들이 있었지만 아무 생각이 없었어. 그러다가 부모님이 시집 가라고 정해주시는 바람에 부모님 말씀 따라 시집 왔으니, 낯선 남편에게 처음부터 정이 갈 리가 없었던 게지.

시어머니는 정말 무서운 분이셨어. 시아버지는 자상한 분이라 그래도 내 편을 들어주곤 했지만, 시어머니가 워낙 무서워서 소용이 없었지. 친정에서 일이라고는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어서 뭘 어떻게 하는지 하나도 몰랐잖아. 시어머니가 무서우니 시어머니가 시키는 것은 ‘못 한다’는 말도 못한 채 어떻게든 했지. 시어머니가 처음에 일하는 날 보고 “쟤는 호미도 한 번 안 잡아봤나?” 하시는데, 진짜로 나는 호미질 한 번 안 해보고 시집 왔거든!

시댁은 논이 13마지기나 있었지만, 시어머니는 보리쌀만 주셨어. 거기다가 시동생들도 10명이나 되어서 밥하는 것만 해도 쉽지 않았지. 시동생이 6명이고 시누이가 4명이었는데 시누이 4명 중 2명은 내가 시집오고 나서 태어났지. 나중에 시동생 한 명이 5살 먹어서 죽는 바람에 시동생 5명에다가 시누이 4명이 되긴 했지만. 시어머니는 시누이를 낳고서 몸을 추스른 다음 바로 일하러 나가셨어. 그러면서 어린 시누이를 내가 키우게 하셨지. “쌀을 깨물어 암죽을 만들어 시누이를 먹이라” 하시는데, 앞니로 생쌀 깨물자니, 얼마나 힘이 들었는지 몰라. 내가 그렇게 시누이 2명을 키웠어. 

내가 19살이고 남편은 24살에 혼인을 했는데, 처음에는 애가 생기지를 않았어. 시어머니는 내가 밥상을 들고 들어갈 때마다 ‘자식도 못 낳는 년’이라고 구박하셨지. 그래서 나는 밥상만 방에 살짝 내려놓고는 밥도 못 먹고 뒤꼍으로 나와서 그냥 죄인처럼 가만히 서 있었어야 했어. 그러면 남편이 내 편을 들어줬지. “애 못 낳는 사람 마음이야 어떻겠냐”면서. 그때 남편이 진짜 고마웠지. 

그렇게 3년을 살다가 남편이 군대를 갔어. 지금이야 군대에 가도 금방 오지만 그때는 꼬박 3년을 군인으로 있어야 했지. 거기다 남편이 황달에 걸려서 3년을 병원에서 누워 지냈어. 군대에서 병원에 누워 있던 기간은 못 쳐준다고 하니, 6년 지나서 제대했지. 남편이 병원에 3년을 입원해 있었어도 나는 병문안 한 번도 못 가봤어. 지금 같으면 가봤을 테지. 하지만 그때는 시어머니가 가라고 허락을 해줘야 하는데, 가라고 안 하니 갈 수가 있어야지? 나는 시어머니가 무서워서 가고 싶다는 말도 못 꺼내고....

나중에 남편이 후생사업 보직을 맡은 덕으로 1주일에 한 번씩 집에 들를 수는 있었어. 지금도 내가 생각이 나는데, 남편이 있던 부대의 이름이 ‘이기자 부대’였어. 내가 그걸 어떻게 기억하고 있냐면 1주일에 한 번씩 집에 올 때마다 내가 ‘이기자 부대’라고 써진 마크를 군복에다가 새로 바느질해서 달아줬거든. 군번도 다 기억이 나. 9571504. 이게 남편 군번이야.  남편은 집에 들르면서 가끔 나 옷 해 입으라고 옷감을 가지고 오기도 했었는데 그건 죄다 시누이 차지가 되었지. 나는 옷 한 번을 못 해 입었어. 그래도 다행인 것이, 내가 27살에 첫애를 낳은 거지.

 

 

탯줄도 내 손으로 잘랐어

 

친정어머니도, 내가 애 안 생기니 애 많이 태우셨어. 내가 생각할 때는 다 때가 있는 건지 사주쟁이가 “남편 31살 때 애가 생긴다” 했는데 딱 그때 생기더라고. 그때도 남편이 군대에 있고 제대도 안 했을 때였는데 첫애가 생겼어. 그 때부터 시어머니의 애 못 낳는다는 구박은 쏙 들어갔지. 

어렵게 가진 애였지만 임신했을 때 편하게 쉬어 본 적이 없었어. 애를 낳던 날도 종일 이불 풀 먹이고 남새 뜯으러 가려고 하다가 산통이 와서 그냥 나 혼자 애를 낳았지. 산파 같은 것도 없이, 문턱 꼭 붙잡고 ‘죽으면 만다’고 힘 두 번 주었더니 애가 나왔어. 시동생들을 그렇게 많이 난 시어머니도 탯줄 자르고 하는 거는 남이 다 해줘서 그런지 아무것도 모르시더라고. 할 수 없이 내가 얘기 소리 들었던 대로 탯줄을 무르팍에다가 대고 훑어 실로 묶은 다음 가새(가위)로 끊었지. 친정에 있을 때 올케들이 그렇게 한단 소리를 들었거든. 

그렇게 애를 낳았지만 몸조리도 못 했어. 시어머니는 내가 3일을 못 누워 있게 하셨지. 시아버지는 “나와서 뭐하냐, 누워 있어라” 하셨는데, 시어머니는 밥할 사람이 없다고 누워 있지를 못하게 하셨지. 미역국은 꿈도 못 꿨어. 그래도 애 못 낳는다 소리만 듣다가 첫애를, 그것도 아들로 낳으니까 나는 좋기만 했어. 

그 뒤에 3년 터울로 다섯을 더 낳아서 모두 6남매를 두었지. 둘째부터는 남편이 집에 있을 때 낳았어. 남편은 애 보러 방에 살짝 들어왔다가도 시어머니나 다른 사람이 들어오는 소리가 들리면 후다닥 방을 나가곤 했어. 자기 자식인데도 남들 앞에서는 잘 쳐다보지도 못했어. 그래도 서운하다고 생각 안 했어. 원체 남편 성격을 잘 아니까 그냥 그럴 수 있다고 생각했지. 시어머니가 아기 기저귀도 안 끊어주셨어. 그러니 어떻게 해? 내가 신던 양말 잘라서 기저귀 대신 썼는데, 그것은 지금 생각해도 참 서운해. 그렇게 어렵게 애들 키웠지.

 

가슴에 묻은 두 아들.....

 

사실 내가 자식 얘기만 하면 맘이 아파서 미치겠어. 둘째하고 셋째가 나보다 먼저 갔거든. 둘째는 얼마나 착했는지 몰라. 내가 농사짓고 하면 꼭 와서 도와줬지. “무겁지 않냐” 물어보면 “어머니가 농사 잘 지으셨으니 무거우면 좋은 것 아니예요?”라면서, 그렇게 엄마 마음 헤아려 주는 착한 자식이었는데 그 애가 31살에 먼저 갔어. 남편이 사람은 좋았지만 62살에 파킨슨병으로 몸져 누웠지. 그 바람에 여든 살에 갈 때까지 18년 동안 내가 병수발이며 농사며 다 책임지고 있었거든. 그럴 때 우리 둘째는 틈나는 대로 나를 도왔어. 그런 애가 전기 공사 갔다가 감전이 되는 바람에, 너무 일찍 젊은 나이에 가버린 거지. 

셋째는 56살에 갔지. 병원에서는 급성스트레스로 폐가 나빠져 그렇게 되었다고 그랬는데, 그 때 속 썩는 일이 있었다 하더라고. 그것 때문에 자기가 죽을 것 같다고, 그런 말도 했었대. 남편은 그래도 덜 생각이 나는데 자식들은 생각만 하면 마음이 아파서 힘이 들어. 너무 일찍들 갔어. 그게 너무 억울해. 아무리 생각해도 억울하게 일찍들 갔어.

 

빚보증은 절대 서지 마 

 

남편은 먼저 간 자식들보다는 생각이 덜 나지만 그래도 착한 사람이었어. 동네에서 반장일 같은 걸 맡아 보고는 했는데, 사람이 착해서 그랬는지 이 사람 저 사람 보증을 많이 서줬더라구. 보증선 것이 잘못되고 남편은 아파서 자리에 눕게 되면서 그 빚을 내가 전부 떠안았어. 어쩔 수가 없었지. 내가 농협 빚을 20년 동안 갚아온 사람이야. 그래도 내가 신용이 좋아서 사람들이 전부 내 말을 믿고 기다려줬지. 나도 약속한 것은 꼭 지켰고. 

그러자니 악착같이 일해야 했지. 농사도 짓고 남의 집 모도 심어줬고.... 집에 와서도 12시까지 일해가면서 다 갚았어. 친정에서는 편하게만 살았는데 시집 와서는 하루에 보리 12가마니를 까부른 적도 있었다니까. 어떨 때는 일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몰라서 ‘우리 부모님이 나한테 일 좀 가르쳐 주셨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런 생각마저 했었지. 그래서 먼저 간 남편을 지금 다시 만나면 이 말은 꼭 하고 싶어. “아무리 사람 좋아도 빚보증은 서지 마!”

 

 

감나무 감은 내가 땄지

 

90이 다 되도록 살아온 내 삶을 돌아보면 참말 억울한 게 있어. 시어머니가, 내가 친정으로 물건 빼돌린다고 구박했던 거야. 시동생들이 쌀도 몰래 가져다가 팔고 명주도 가져다가 팔고 했지. 그걸 시어머니도 다 아시면서, 내가 친정에다 빼돌렸다고 몰아세웠지. 그게 지금 생각해도 제일 억장이 무너져. 시어머니가 나한테 그러긴 하셨지만, 나중에 치매 왔을 때 내가 옆에서 시중 다 들어서 그런지 나중에는 나한테 “고맙다”고 하셨어. 그래서 지금은 시어머니가 밉지는 않아. 

그것보다 속상한 것은 내가 일을 너무 많이 한 거야. 지금 생각해 보면 인생은 팔자대로 사는 거였어. 그렇게 악착같이 일하지 말고 적당하니 하고 살았으면 좀더 낫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 그래서 지금 내 소원은 딱 한 가지야. 앞으로 죽을 때까지 아프지 말고 살다가 딱 이틀만 꼬물꼬물 아프다가 갔으면 좋겠어. 이틀은 말미를 주어야 자손들이 다 모일 수 있지 않겠어? 지금도 내가 아프다고 하면 자식들이 금방 달려오겠지만, 그래도 죽을 때는 내 자손들 하나씩 다 보고 가고 싶어. 그것 말고는 더 바라는 게 없어. 

참말로 이상한 것이, 이렇게 지나간 것은 생각이 다 잘 나는데 지금 배우는 것은 자꾸만 까먹어. 나는 하루하루 열심히 살았어. 감나무 밑에서 입만 벌리고 감이 내 입으로 떨어지길 바라지 않고, 내가 직접 나무에서 감을 땄지. 그래서 지금의 내가 있는 것 같아. 지금의 천종분이가. 

 

- 홍미경 시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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