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고
로고
광고
논산시계룡시백제권 뉴스사회종합교육·문화농업·단체오피니언·사람들기획·특집정치종교
로그인 회원가입 아이디/비번 찾기
전체기사보기
편집  2019.05.24 [11:07]
> 기획
트위터 페이스북 카카오톡
필자의 다른기사 보기 인쇄하기 메일로 보내기 글자 크게 글자 작게
[놀뫼 알릴레오5] 은진미륵 백호(白毫)의 진실
류제협 논산문화원 고문
기사입력  2019/03/20 [17:58]   놀뫼신문

                                                               

「은진미륵 이마의 수정알 도난」사건 

 

1961년 2월 14일자 조간신문을 받아든 국민들은 깜짝 놀랐다. “동양제일을 자랑하는 충청남도 논산군 은진면 소재 은진미륵의 이마에 박힌 시가 일천만환 짜리 수정 알을 도난당했다. 문교부는....” 하며 이어지는 기사의 내용은 조계종 총무원에서 위 은진미륵 백호의 도난에 대해 진상을 규명해 달라는 진정이 있어 당시 주무부서인 문교부가 이를 알게 되었고 비로소 진상조사에 나섰다는 것이다. 

지금부터 70여 년 전에 있었던 이 충격적인 사건의 전모는 어떤 것이었으며 은진미륵 백호와 관련된 항간의 이야기들은 얼마나 믿을 만한 것인지 알아보도록 한다.

한때 동양최대의 석불로 국민학교(현 초등학교) 교과서에도 수록됐었고, 현재는 국보323호 로 지정된 논산의 대표 적 문화재인 은진미륵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전설이 전해온다. 그 중에 은진미륵 백호(白毫)에 관해 항간에 떠도는 이야기가 몇 있다. “은진미륵 이마에는 원래 황금이 박혀 있었는데 도둑들이 은진미륵 뒤의 나뭇가지를 타고 건너와 관 위에 있던 금 불상과 함께 이마의 금덩이도 훔쳐갔다. 그래서 청동(靑銅)으로 보수를 했는데 그 녹물이 불상의 안면부로 흘러내려 1960년대 초에 수정으로 다시 보수했다.” 

또는 “일제 강점기에 일본인들이 이마의 보석을 강탈해 갔는데, 우리나라가 8·15 광복을 맞이하게 되자 자기나라로 돌아가는 일본인들이 당시에는 목숨만 살아서 가는 것도 황송한 상황이 되었고, 이런 보석을 가지고 가는 것은 오히려 신변에 위험을 초래할 수 있다고 느껴 자진해서 경찰서에 반납하였으며 그 백호가 부여 박물관에 보관되게 되었고, 이 보석을 은진미륵에서 빼낼 때 무리한 힘을 가하여 세 조각으로 쪼개져 있다.” 라는 설이 나돌고 있다. 특히 뒤의 일본인 관련설은 근년에 부여박물관에서 세 조각난 백호를 보고 온 사람들에 의하여 더욱 신빙성 있는 설로 확산되고 있는 실정이다. 

그런데 필자가 국가기록원에서 논산에 관한 자료를 찾던  중 우연히 은진미륵 백호에 관한 기록들을 접하게 되었으며 그동안 우리들이 알고 있었던 것과는 전혀 다른 사실들을 발견하게 되어 이를 소개하고자 한다.

 

부여 박물관 수장고에 보관중인 세 조각으로 파손된 은진미륵 백호

조각을 맞추어 본 모습

 

백호 분실 보도의 전말

 

은진미륵 백호와 관련하여 현재 국가기록원에 보존되어 있는 공문서는 전부 9건이 있는데 처음 시작은 당시 국립 박물관장이 문교부 장관에게 보내는 공문으로 1960년 7월 23일자로 발송한 것이다. 그 내용은 이보다 앞서 7월 14일자로 문교부 장관이 국립 박물관장에게 은진미륵 백호를 교체하겠다는 공문에 응답하는 형식의 공문이며, ‘현재 박혀 있는 청동 백호의 제거에 대하여는 철물(鐵物)이나 석물(石物) 기술자의 시방 설계를 제출받아 실시하고 유물에 손상이 가지 않도록 하면 중앙박물관으로서는 백호 교체에 동의한다.’ 는 내용이다. 이후 공사 감독관의 파견, 원래 이마에 박혀 있던 수정의 감정 등에 관한 공문이 오간다.

그럼 어찌하여 저런 충격적인 신문보도가 나게 되었으며 어떻게 없어진 백호를 되찾게 되었을까? 

1960년 12월, 당시 은진미륵 이마에 박혀 있는 청동제 백호를 제거하고 인조수정으로 백호를 교체하기로 한 당국은 원래 은진미륵 이마에 박혀 있다가 자연 탈락되어 파손된 백호를 관촉사에서 보관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새로운 백호제작에 그 모형을 참조하고자 당시 관촉사 주지에게 옛 백호를 보여 달라고 요청하였다. 관촉사 주지는 이 옛 백호를 찾아보았으나 이미 없어지고 보이지 않았다. 사찰의 물품 대장이나 인수인계 대장 등 정식 문서에 등재되지 않고 주지들이 전전(轉傳)으로 관촉사 벽장에 보관해오던 옛 백호가 없어진 것을 이때 비로소 알게 되었다. 

그런데 이때는 불교계가 비구승(比丘僧)과 대처승(帶妻僧)으로 나뉘어 극심하게 대립하며 종권(宗權) 다툼을 하던 시절로, 관촉사도 비구와 대처승 양측에서 서로 절을 차지하려고 대립하고 있었다. 이렇게 대립하는 과정에서 백호의 분실 책임을 서로 상대방에게 전가하며 다투다가 이런 사실이 외부인에 알려지고, 이것이 도하 각 신문에 대서특필되는 사건이 터진 것이다. 즉, 종권다툼 과정에서 백호의 분실 사실이 크게 보도된 것이다. 

 

은진미륵 백호는 이미 500년 전에 파손되었다

  

은진미륵 이마의 백호는 원래 은진미륵이 조성될 당시인 1,000 여 년 전 고려 초에 천연수정을 구형으로 가공하여 감입(嵌入-구멍을 파고 끼워 넣음)하였다. 이후 오랜 세월 바람에 깎이고 빗물에 씻겨(風磨雨洗풍마우세) 1521년 자연적으로 떨어져 바닥의 바위에 부딪쳐 세 조각으로 파손되었다. 당시 재정적 어려움 때문이었는지 보석으로 다시 만들지 못하고 청동 원반형의 백호로 보수했는데 1960년 12월 이 청동 백호를 교체하기 위해 제거했을 때 이 원반형 청동백호의 뒷면에 正德十六年四月(정덕16년 4월-1521년 4월)이라는 먹으로 쓴 기록이 나와 지금부터 대략 500여 년 전인 조선 중종 때  원래의 백호가 탈락 파손되어 청동으로 교체했음을 알게 되었다. 

이 파손된 백호는 관촉사 벽장에 보관되어 있었는데 당시 주지스님의 친지(親知)로 경남 울산군 온양면에 살며 부산 동아대학에 적을 둔 서 모씨가 고시 준비차 관촉사에 머물고 있었다. 이 사람이 평소 골동품수집에 취미를 가지고 있었고 군대 영장이 나와 집으로 갈 때 벽장에 있던 이 수정 백호를 가지고 갔다. 그 뒤 이백호의 분실 사실이 신문에 크게 보도 되자 겁을 먹은 서모씨는 1961년 2월 15일 백호를 직접 반환하였다. 반환된 백호는 수사를 위하여 강경경찰서에 임시 보관됐었으며 이후 문교부에서 사찰에 계속 보관할 경우 전례에 비추어 보관을 소홀히 할 것이 우려된다며 충청남도에 지시하여 국립박물관 부여분관에 보관토록 조치하여 최종적으로 부여박물관에 보관되게 되었다.

 

백호의 감정 가치

 

신문에는 시가 일천만환짜리라고 보도됐는데 실제 감정가는 얼마나 될까?  

국립박물관 부여분관장이 1961년 3월 7일 국립박물관장에게 보고한 “관촉사 미륵보살입상 미간주(백호) 감정보고서”에 따르면 

1. 금번에 도난당했다 다시 찾은 수정구는 천연 수정으로 은진미륵 미간주가 확실함.

2. 수정구의 재화적 가치(예; 안경알 등으로 가공시)는 5~6만환에 불과하지만 창건 당시의 물건이고 미륵불에 사용된 연대적 고품임을 감안하면 10만환 정도로 인정됨.

3. 이 문화재가 다시 관촉사에 보관되면 매매 또는 분실 우려가 있으므로 국가기관에 보관하는 것이 정당하다고 인정됨.

이라고 보고하고 있다. 신문보도의 일천만환과 감정가 10만환은 무려 100배의 차이가 있는데 마침 백호분실을 보도했던 1961년 2월 14일은 바로 설(음력1월1일) 하루 전날로 당시 세모의 물가를 보도한 기사가 같은 지면에 있어 이를 비교해 보기로 한다. 

쌀 1가마: 17,800환, 쇠고기 1근:800환 이었으니 1천만환은 쌀560가마 정도의 값이다.(* 1962년 6월 10일 화폐개혁으로 화폐단위가 “환”에서 “원”으로 바뀌고, 화폐가치는 10:1로 바뀐다.)

 

백호의 진실 요약

 

고려 광종19년(서기968) 조성을 시작하여 목종9년(1006) 완공된 은진미륵은 당시 천연 수정으로 백호를 만들어 감입(嵌入)하였다. 세월이 흐르며 백호를 끼운 구멍이 헐거워져 조선 중종16년(1521) 백호가 스스로 떨어져 바닥의 바위에 부디쳐 세 조각으로 깨졌다. 이때 청동으로 원반형의 백호를 제작 보수하고 부서진 백호는 관촉사 벽장에 보관하여 전해왔다. 한때 이백호가 분실되었다가 다시 찾았으며 현재는 부여박물관에 있으나 전시는 되지 않고 수장고에 보관되어 있다. 

보수한 청동백호 역시 400년 넘게 세월이 지나면서 녹이 슬고, 이 녹물이 불상의 안면으로 흘러 흉하게 되자 1960년 12월 현재의 인조 수정으로 교체 공사를 하게 되었으며 이때 제거한 청동 백호의 뒷면에 먹으로 [正德(명나라 武宗 연호)16년4월]이라고 써놓은 기록이 나와 1521년에 원래의 백호가 탈락 파손되었음을 확실히 알게 되었다. 이런 사실은 관촉사에도 전해온다고 공문에서 말하고 있다.

그런데 의아한 것은 70여 년 전에 이렇게 세상이 시끄러울 정도로 언론에 보도되어 문화재관계자와 관촉사 스님 그리고 경찰관계자 등 많은 사람들이 알게 된 사실이 사회 일반에 파급력을 갖지 못하고 어찌하여 엉뚱한 이야기들만 논산 사람들에게 널리 퍼지게 됐는지? 불가사의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이제 늦게나마 관촉사 은진미륵 백호의 진실을 알게 되어 다행이라 하겠다.

 

류제협 논산문화원 고문

 

ⓒ 놀뫼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트위터 트위터 페이스북 페이스북 카카오톡 카카오톡
 
이 기사에 대한 독자의견 의견쓰기 전체의견보기
기사 내용과 관련이 없는 글, 욕설을 사용하는 등 타인의 명예를 훼손하는 글은 관리자에 의해 예고없이 임의 삭제될 수 있으므로 주의하시기 바랍니다.
닉네임 패스워드 도배방지 숫자 입력
제 목
내 용

[미술이야기:화가와 친구들]2.
광고
광고
광고
가장 많이 읽은 기사
계룡 노성간 645지방도, 터널로 확 뚫는다 / 놀뫼신문
5천석 규모 실내체육관, 체육센터 건너편 건립추진 / 놀뫼신문
김종민, 황명선 가상 양자 대결 시 자유한국당 이인제, 박우석 모두에게 앞서 / 놀뫼신문
광석 광물전시관 靑藜館 최병남 관장 "청려장으로 사랑을 전하다 " / 놀뫼신문
논산시 꿈드림 청소년, 2019년 제1회 검정고시 37명 합격 / 놀뫼신문
연산면 환난상휼Day 12호 기부자 송진걸 쌀 500㎏ 기탁 / 놀뫼신문
[놀뫼알릴레오7] 은진미륵은 왜 대례관(大禮冠)을 쓰고 있을까? / 놀뫼신문
[인생노트] 마전3리 여성노인회장 윤석을님 "내 인생의 황혼 - 인고(忍苦) 뒤에 피어나는 고목" / 놀뫼신문
논산시 취암동, 희망의 우체통 설치 / 놀뫼신문
논산열린도서관 5월 24일 개관 / 놀뫼신문
로고
개인보호정책회사소개광고/제휴 안내청소년보호정책기사제보보도자료기사검색
충남 논산시 시민로 402 (취암동)| Tel - 041) 733-4800~1 | Fax - 041) 734-5567
상호: 놀뫼신문 | 등록번호: 충남다01238 | 등록연월: 2006.06.30 | 발행인: 전영주 | 편집인: 전영주 | 청소년보호책임자: 전영주
Copyright ⓒ 2007 놀뫼신문. All rights reserved. mail to nm4800@daum.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