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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뫼알릴레오3] 근대역사문화거리 3층집의 추억
기사입력  2019/01/23 [17:38]   놀뫼신문

논산8경은 겉보기만이 아니다. 들여다 볼수록 논산 산하의 깊이가 느껴진다. 등재되지 않은 논산8경들도 즐비하다. 장소 외관으로서도 그러하지만, 그곳에 거하는 삼라만상이 오늘도 각자의 역에 충실하고 있다. 놀뫼 스토리는 누에보다 더 길다란 비단결이다. 기실, 숨겨져 있거나 기록되지 않은 스토리가 대부분이다. 그 설레는 발굴 작업에『놀뫼신문』이 첫삽을 뜬다. “놀뫼알릴레오”에는 학자가 아니더라도 참여할 수 있다. 내 고향땅 이야기를 구술(口述)할 수 있는 시민모두가 진짜 홍보대사이다. 타지 사람들에게 어필할 수 있는 진국 논산 이야기는, 진골 논산사람들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그 첫 선을 보이며, nm4800@daum.net에서 논산시민의 육필 기록들을 기다린다. - 편집자주  

 

 

2018년 논산시SNS서포터즈 기자단에서 강경 근대역사문화거리 팸투어를 하였다. 전략적인 관광설명회도 겸하는 자리여서 황명선 시장도 동행하였다.  그곳이 상전벽해(桑田碧海), 내가 45년 전 강경여고시절 3년 동안 산 집이라는 걸, 처음에는 너무나 달라져서 몰라 봤다. 막내 외삼촌이 쓰던 가게 달린 방이 응당 있어야 하는데, 지금은 없어져 있는 상황이라서 더 몰랐었던 거 같다.

 

아동복 특수로 흥청대던 중앙백화점

 

중앙백화점(잡화점)을 하신 막내외삼촌이 결혼을 하고 신혼집으로 그곳에 둥지를 틀었다. 안채는 할아버지 할머니께서 사시고 부엌방에는 내 방이었으며, 삼촌과 외숙모는 가게에 달려 있는 방을 썼던 상황이다. 그때는 장사가 얼마나 잘 됐는지, 하루 종일 장사해 돈 통을 열면 “누가 몽땅 돈을 가져다 놓은 것 같다”고 좋아하던 시절이었다.

옷, 특히 아동복이 얼마나 잘 팔렸는지 모른다. 집집마다 아이들이 7~8명 많은 집은 12명까지 있었으니까 어디 옷뿐이겠는가? 각종 가방도 구비해놓았는데, 신학기 때가 되면 책가방은 없어서 못 팔 정도였다. 베이비 부머로 불리는 당시, 한해에 60~70만 명이 태어났다. 그렇게 인구가 급증한 요즘, 그러나 아이들은 20~ 30만 명도 못 태어난다고 한다. 인구문제가 이렇게 양극의 양상으로 고민하게 되었으니, 격세지감이 아닐 수 없다.

그렇게 어렵고 힘든 시절에 아이들은 왜 그렇게도 많이들 낳았을까? 하느님만이 아실 것 같다. 국민학교 시절에는 한 반에 60명 이상 공부했으며 도시학교에서는 2부제 수업으로 오전반과 오후반 수업이 있었다. 학교 운동회가 있는 날이면 온 동네 잔치였다. 한집에 아이가 기본이 둘씩 셋씩 운동회에 참석했는데, 뭐니뭐니해도 운동회의 꽃은 달리기였다. 1, 2, 3등 하면 귀한 공책과 연필이 상품으로 주어졌기 때문이다. 학생들 모두는 젓먹던 힘까지 다해서 죽어라 달리고 또 달렸다. 체력단련은 모르겠고, 종이가 귀했고 연필이 귀해서였다. 몽당연필도 볼펜껍데기에 끼어 쓰던 시절이었으니까. 지금은 교실바닥에 굴러 다녀도 찾거나 줍지 않는 연필이지만, 그때는 아주 귀하신 몸이었다. 운동회 때과 소풍가는 날이면 엄마가 싸 준 김밥은 최고의 만찬이었다.

 

 

연탄가스가 앗아간 외삼촌 부부의 행복

 

내가 3층 집에 살면서 학교 가지 않는 장날이면 가게 지킴이였다. 고1때 겨울이었다. 그때는 아궁이마다 연탄불 땔 때인데, 아침 내가 학교에 갈 시간이 됐는데도 외삼촌 내외가 일어나질 않았다. 첫번째 외숙모는 시골에서 시집온 참한 규수였다. 키가 작고 말수도 없었으며 얌전하고 착하기가 그지없던 분으로, 조카딸인 내게 싫은 내색 한번 하지 않던 분이다. 외숙모를 흔들어 깨웠으나 도무지 움직이질 않았다. 밤새 문틈 사이로 연탄가스가 스며든 모양이다. 얼마나 몸부림을 치셨는지 잠든 모습에서 읽을 수가 있었다.

다행히도 막내외삼촌은 숨은 쉬고 있었다. 119가 없던 시절, 경찰에 신고를 했지만, 만삭 외숙모는 이미 이승사람이 아니었다. 아이가 뱃속에서 엄마 숨통을 막아 빨리 가신 것 같다고들 수근거렸다. 그 시절에는 교통사고보다 연탄가스 사망률이 높았다. 병원에 옮겨간 삼촌 때문에 엄마는 통탄을 하였다. 외할아버지가 인공 때 면장하다 돌아가시고 엄마가 소녀가장으로 아들처럼 키운 동생이어서 그 정이 남달랐다. 무엇이든 우리들보다 막내삼촌이 먼저였다. 그런 동생이 사고가 난 것이다.

엄마는 하던 대로 매일 새벽기도 다니면서 기도하고 울부짖었을 것이다. “하나님, 우리 동생 살려주세요!”라고... 엄마의 정성과 기도 덕분이었는지 일주일 후 막내외삼촌은 정신이 들었었다. 겨우 깨어난 삼촌은 처음에는 바보처럼 말도 잘 못하고 더듬거리고 기억도 잘 안 난다고 하셨다. 조금씩 조금씩 나아졌지만 삼촌은 지금도 약간 말을 더듬거리신다.

삼촌이 웬만큼 정상 회복되는 데는 일 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새 외숙모 맞아 두 번째 결혼을 하셨는데, 거기에서 살 수가 없다고 태평동으로 이사를 해버렸다. 이런 우여곡절이 있어서 딸려있던 방이 없어진 것이다. 그러니 오랜 세월 후 찾은 그곳을 내가 잘 기억할 수가 없었던 것 같다. 그곳은 우리 가족, 특히 막내외삼촌에게는 돈 버는 기쁨을 안겨 준 곳이지만, 아픔과 상처가 더 커진 곳이다.

 

사관생도 주산쌤, 부자집오빠, 성당오빠...

 

이층에서는 강경상고 졸업한 김윤홍 선생님이 주산교습소를 하셨다. 나도 그때 주산을 배웠다. 주산 8단이었던 사촌 오빠의 어깨 너머로 배우던 주산을, 그때 정식으로 배울 수가 있었다. 그래서 난 주산을 더 빨리 배우니까, “잘 한다”고 선생님께서 엄청 예뻐해 주셨다. 그때 나의 주산실력은 2단 정도였다. 2년 정도 가르치고 사관학교로 가신 김윤홍 선생님! 키가 작고 얼굴을 누구 봐도 선한 티 많이 났다. 기억에 남는 것은 웃을 때 여자처럼 입을 가리고 웃는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선생님의 마음 속에는 내가 예쁘장했던 여학생었나 보다^ 사관학교 시절에 편지가 계속 왔다. 소위 임관식에 오라는 편지도 받았지만 안 갔다. 선생님은 소심한 성격이었는지, 글씨도 깨알 같이 예쁘게 썼다. 이런 게 내 마음에 안 들고 싫었던지 답장을 해 주지 못했는데, 지금 생각해도 미안한 생각이다. 지금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계실까? 부적에 사셨던 것으로 기억이 난다. 별은 달기 어려웠을 거 같고, 무궁화를 단 채 전역하셨겠지?ㅎ

3층은 가방과 옷 창고로 썼다. 그곳에는 없는 것이 없을 정도로 많은 물건이 쌓아져 있었고, 어린 내 눈에 그곳은 보물창고였다. 옆집은 솜 공장으로 억 소리 나는, 강경에서 내로라하는 부자집이었다. 그 집 오빠는 서울에서 대학에 다닌다고 했다. 아쉽게도 그 오빠 얼굴은 보지 못했다.

강경 근대역사 문화의 거리로 멋지게 변해버린 3층집! 앞 사거리에는 한성백화점이 있었다. 초입 강경 중앙초등학교는 강경 최초의 교육기관이었다. 우리 막내 삼촌이 입원하셨던 홍인병원, 대성상회, 화신양복점, 전원사진관..... 내 친구 은숙이는 강경침례교회에 다녔다. 강경성결교회 신사참배거부에 동참해서 한국 최초로 신사참배거부선도기념비를 건립한 곳이 있다. 우리친구 원숙이 오빠가 신성일, 엄앵란 사진을 진짜처럼 예쁘게 잘 그려 붙여 놓았던 강경극장도 있고, 내가 고등학교 때 다니던 강경천주교회도 있다.

그때 학생회장이었던 오빠는 신부가 되었다. 그 오빠동생인 우리친구는 강경상고를 졸업하고 은행에 들어갔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 친구들, 오빠들, 지금은 어디서 무엇을 하고 사는지.....

 

 

옥황상제가 되돌려준 외삼촌 자식복

 

근대역사거리를 지나 옥녀봉은 강경여고생의 사진 찍는 장소로도 유명하다. 빼어난 경치 덕분에 옥황상제의 딸인 옥녀 씨는 아빠를 조르고 졸라 이곳에 내려 왔다가 경치에 반해 미처 하늘로 올라가지 못했다. 노한 옥황상제는 문을 닫아 버렸고 결국 옥녀는 죽을 때까지 이곳에서 살아 옥녀봉이 되었다는 전설, 우리 친구들하고 이곳에 놀러와 흑백사진 찍었던 기억이 새록새록 난다.

두 번째 외숙모와 막내삼촌 사이에 3남매 동생들이 태어났다. 첫째딸은 대기업 다니는 남편을 만나 서울에서 살고 있다. 둘째딸은 서울 큰 교회 목사 사모가 되어 봉사하며 산다. 막내아들은 부부교사로 대전에서 잘 살고 있다. 얼마전 삼촌이 자가용 바꾸는 데 천씩 내서 세단을 샀노라고 입에 침이 마르고 닳도록이다.

강경근대역사문화의 거리! 우리가족에게는 아픔과 상처가 있는 곳이지만 우리 인생사에서 애환 없는 곳이 어디 있으랴! 멋진 모습으로 영원히 기억되고, 예전처럼 무수한 발걸음이 그곳을 밟으며 아름다운 추억의 발자욱을 남기는 곳이면 좋겠다, 옥녀봉의 낙조, 강경 새우젓과 더불어서~~~

 

- 서영숙(논산시sns서포터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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