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꼬리뼈는 척추의 가장 끝부분에 있는 4~5개의 척추 분절로 이루어져 있으며 양측 엉덩이 사이 골반의 마지막 부분에 위치하고 있다. 꼬리뼈에는 신경이 없으며 처음 태어났을 때에는 각각의 분절들 사이가 움직여지나 맨끝 부분부터 굳어지기 시작해서 성인이 되면 엉치뼈쪽 부위까지 고정된다. 또한 꼬리뼈는 끝부분이 앞을 향해 약 50도 정도 구부러져 있는 퇴화된 구조물이다. 꼬리뼈는 체중이 부하되지는 않지만 여러 종류의 근육들이 부착되는 지점으로서 골반의 기저부를 구성하는 역할을 한다. 따라서 엉덩방아를 찧거나 넘어진 후 발생하는 관절염이나, 분만 손상, 종양 형성 등이 발생할 수 있다. 주로 딱딱한 의자나 바닥에 앉을 때 꼬리뼈 부위에 압박이 가해져 극심한 통증을 호소하나 눕거나 걷는 데에는 큰 지장이 없다.” -꼬리뼈에 대한 '서울대학병원 신체기관정보'
며칠 전 넘어져서 내 몸에 꼬리뼈 위치를 정확하게 알게 되었다. 넘어진 다음날 신경외과 진료를 받기 위해 병원을 갔을 때 의사 선생님은 아픈 내 부위를 만지며 압도적인 아픔 때문에 아무 말도 못하는 나에게 “숨을 쉬어요. 호흡에 집중하세요.”라며 나의 긴장을 풀어 주었다. 선생님 말씀대로 숨을 깊게 들이마시고 천천히 내쉬었다. 방금 전까지만 하더라도 참을 수 없던 아픔이, 참을 만하다는 상태까지 다다랐다.
우리는 늘 숨을 쉬면서 숨 쉬는 데 집중하는 경우가 거의 없다. 살기 위해 호흡을 하지만 삶과 별 관계없는 부수적인 일 때문에 호흡이 얼마나 중요한지 잊고 사는 셈이다. 그동안 나는 내 몸에 너무 무심했다. 애면글면하면서 살다 보니 내 몸의 꼬리뼈가 어디 붙어 있는지 무관심했으며, 숨을 쉬면서 한 번도 숨 쉬는 일에 집중한 적이 없었다. 여태껏 나는 숨을 들이 쉬는 데만 열중한 나머지 내쉬는 일에는 소홀했던 것이다.
의사 선생님의 입원 권유도 뿌리치며 집으로 향했다. 거실 창밖의 텃밭 풍경이 이제서야 눈에 들어온다. 봄에 야심차게 가꾸었던 텃밭의 작물들이 더위에 지치고 덩굴에 휘감겨 있다. 상추와 쑥갓을 빼먹은 자리에는 온갖 잡초들이 아우성이다. 늦여름 텃밭이 얼마나 심란한지 모르겠다. 갈아엎기에는 뭔가 아쉽고, 단장하기에는 품이 너무 아깝다. 가만 바라보고 있노라니 현재의 내 모습과 흡사하다는 느낌이 든다.
텃밭만 들어오는 게 아니다. Keep on running 오로지 앞만 바라보고 달려왔던 삶에 그 동안 끼어들 수 없었던 새소리도 입장한다. 크리스티나 로세티의 시 ‘Who Has Seen the Wind 누가 바람을 보았나요’ 계절의 미세함을 예고하는 바람의 느낌도, 하늘의 구름도 잠자고 있던 내 오감 위에 살포시다. 뭉게구름의 변화무쌍함 따라 그 동안 부대꼈던 사람들에 대한 애증도 엉켰다 풀어지기를 반복한다. 결자해지(結者解之) 수원수구(誰怨誰咎)조차 의미도 없어 보이는 하늘이다.
어느 날 운명처럼 다가왔던 논산땅 지역신문 6년여를 돌아보니 애환과 질곡과 징한 보람의 순간들이 새삼스레 이어지고 이내 파노라마처럼 뻗어간다. 차라리 잘 됐다! 이런 휴지기(休止期)를 통하여 자정(自淨)의 시간을 갖노라면 무뎌졌던 혜안이 다시 열리고 무념무상 관조(觀照)할 시력과 덩달아서 허리힘도 붙지 않을까 싶다.
인간사 부질없다고는 하지만, 인간사처럼 엑스타시한 생방송이 어디 있겠는가? 텃밭 뜨락의 잡초들처럼 얽히고설킨 난맥상은 일견 접근불허, 엄두를 못나게 한다. 그렇지만 자세를 팍 낮추고서 한 손으로는 무성한 그것들 한 웅큼 거머쥐고, 다른 손으로 밑둥에 낫을 들이댄다면 길은 새로 열리지 않겠는가?
까마득 잊혀 지었던 대학 동아리 선배 얘기가 뭉게구름 속에서 새삼 떠오른다. “이봐, 자네! 이 세상에 안 풀리는 신발 끈은 없어. 신발 끈은 다시 묶으면 돼!” 그래, 넘어진 김에 쉬어간다고.... 존재조차 거의 몰랐던 꼬리뼈 덕에 천천히 호흡하면서 느슨해졌던 신발 끈, 다시 묶어보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