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약사대불을 모시면서 심은 낙락장송 아홉 그루가 장맛비에 그 푸름을 자랑한다. 한국 소나무는 한 때 망국지목으로 평가될 만큼 우리 산을 황폐화 내지는 경제수림으로서의 가치가 땅바닥이었던 때가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최고의 조경수로, 그리고 가장 아름다운 나무로 평가를 받으니 세상살이는 정말 모를 일이다. 어쨌거나 절마당 앞의 소나무는 그 푸름을 자랑하면서 우뚝 솟아 있다.
당나라 때 조주지방의 관음사라는 절에 선승인 종심(778~897)이라는 스님이 살았다. 선가에서는 아주 유명한 조주(趙州)스님이라고 불린 분이다. 그 분께
어느 승려가 물었다. “조사가 서쪽에서 온 뜻이 무엇입니까.”
조주스님이 답하셨다. “뜰 앞의 잣나무.”니라.
이렇게 해서 정전백수자(庭前柏樹子), 즉 ‘뜰 앞의 잣나무’라는 유명한 화두가 생기게 되었다. 불교수행방법 가운데 화두(話頭)라고도 하고, 공안(公案)이라고도 하는 것이 있는데, 선원에서 참선 수행을 위한 실마리를 이르는 말, 조사(祖師)들의 말에서 이루어진 공안(公案)의 1절이나 고칙(古則)의 1칙이다. 즉 선문답을 하였던 당나라 시대부터 송나라 시대까지 유행하던 문답수행법이라고 생각하면 될 것이다. 현재에도 유용하게 쓰이고 있기도 하다.
진리에 대한 문답을 하는 한 형식인데, 선종(禪宗)이라는 불교의 한 종파가 중국에서 뿌리 내리게 된 동기는 바로 이 선문답처럼 생활 속의 불교였고, 노동 불교였기 때문에 생활 속에서 진리에 대한 문답을 하다 보니 가장 가까이에 있는 것을 예를 들었던 것이 아닐까 사료된다.
어쨌거나, 화두란 말로 표현되기 이전의 상태를 말로 표현한 것이며, 생활 속에서 불교를 실천하던 방법이기 때문에 시대를 초월하여 쓰일 수밖에 없다. 뜰 앞의 잣나무라는 것은 어떤 뜻이 있을까? 물론 우주와 인생에 대하여 깨달은 분들의 대화이기 때문에 그 경지에 이르러야 알 수 있겠지만 그렇더라도 어렴풋이 눈치 챌 수도 있지 않을까?
진리라는 것도 수연불변(隨緣不變)이요 불변수연(不變隨緣)이기 때문이다. 진리 그 자체-즉 본체의 세계-는 시공을 초월하여 있기에 변하지 않지만, 사람들의 마음은 때에 따라 변하기 때문에 변하지 않는 속에 인연을 따르기도 하고, 변하는 속에 변하지 않는 것도 찾아야 하지 않을까?
미국의 석유왕인 록펠러는 세계최고의 부자였고, 나이도 97세까지 살았던 인물이다. 그가 말년에 지병으로 고생을 할 때, 누구든지 자신의 생명을 6개월만 연장해주면 자신의 전재산의 반을 주겠다는 광고비가 200만달러였다고 한다. 그 때가 1930년대 말이니 거금 중에 거금이 아닐 수 없다. 세상의 모든 부를 누리고, 수명도 100세를 거의 다 산 사람의 소원이 6개월만 더 살 수 있다면 어떤 댓가도 지불하겠다는 것이었단다.
그러므로 ‘인생은 무엇인가?’ ‘나는 누구인가?’를 끊임없이 물어야 할 이유가 있는 것이다. 진정한 인생의 의미를 생각하고, 늘 죽음을 생각하면서 살라고 말씀하시는 석가세존의 인류에 대한 멧시지이다. 전세계를 덮을 부귀도, 남들은 60도 못사는 세상에 100세를 살아도 모자란 것이 인생이 아니던가?
수행승들 뿐 아니라 일반인들도 늘 자신에게 물어야 한다. ‘나는 누가인가?’를. 늘 자신에게 되묻는 말이 바로 “조사가 서쪽에서 온 뜻이 무엇입니까?” 이다. 여기에서 조사는 잘 알다시피 달마(達磨)조사를 가리킨다. 서역 즉 인도에서 온 달마대사는 불교도가 아닌 일반인들에게도 아주 친숙한 분이시다. 선(禪)의 전설에 의하면 염화시중(拈花示衆)을 통해 가섭존자에게 은밀하게 전해진 선의 비밀을 전해 받은 지 28대째, 그 푸른 눈의 납자가 문득 갈대를 타고 북위의 수도 낙양에 나타난 이유가 대체 무엇일까? “여하시조사서래의(如何是祖師西來意)!” 이 말은 대체 선이 전하고자 하는 궁극의 비밀은 무엇이냐는 물음이다. 즉 인생이란 무엇인가를 생각해보자는 것이다. 취생몽사하면서 살기에는 너무 짧으면서 억울한 세월이 아니겠는가?
굳이 달마가 동쪽으로 온 까닭을 묻지 않더라도 우리는 왜 사는가?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를 늘 고민하지 않으면 안 된다. 진정으로 달마조사가 서역에서 동쪽으로 온 까닭은 무엇인가를 통하여 오늘 우리는 우리 자신의 삶을 반조하여 보는 것이다. 무엇을 위하여 살 것이며, 무엇이 진정한 가치인가를 자신에게 늘 물어야 한다. 그 물음에는 해답이 있을 수도 있고, 해답을 찾기가 어려울 수도 있다. 그러나 진정으로 자신에게 물어야 한다. 그래야 만경창파 넓은 고해(苦海)에서 자신의 본래면목을 지킬 수 있기 때문이다. 시류에 영합되어 떠밀려 가는 존재가 아닌 거센 물길을 박차고 올라가는 연어처럼 말이다.
인생의 가치가 뒤집혀지고, 착각과 오류, 혼탁으로 뒤범벅이 되어있더라도, 세상이 혼란 그 자체인 것은 인류가 존재하면서부터일지라도 깨어 있는 삶이 바로 ‘뜰 앞의 잣나무’이다. 그 뒤집혀진 속에서 제대로 된 가치를 찾는 것이 바로 ‘뜰 앞의 잣나무’가 던져주는 의미이다. 늘 푸른 잣나무, 그러면서도 단 한 순간도 머물음 없이 변하여 가는 잣나무가 아니던가?
인생은 바로
뜰 앞의 잣나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