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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처구니없는 일
좋은 시를 써서 후배들에게 한때 본이 되었던 선배 시인을 만났다. 근황을 물으니 비디오 심의위원과 티브이 방송 심의위원을 하고 있다고 했다. 띨띨한 나는, 그의 과거 경력으로 보아 그런 일을 맡아 할 만하다고 생각했다. 그 말씀의 진실은 집에서 비디오를 빌려 보고(그때는 비디오 가게가 성업 중이었다), 또 티브이 앞에서 하루를 보낸다는 것이었다. 그렇게 의욕적이고 총기가 넘치던 선배가 시간을 보내는 방법이 이해할 수 없었다. 지금 생각하니 대학에서 정년하고 난 노인으로서는 그런 생활 방식이 나름의 최선이었을 것이다. 그 선배의 위치가 된 나도 티브이 앞에서 넋을 잃고 많은 시간을 보낸다. 나는 특별히 좋아하는 프로를 보기도 하지만 대개는 무작정 시청하는 충성도 높은 시청자이다. 그 가운데는 참 어처구니없는 프로그램들도 있다. 퀴즈를 내면서 보기를 제시하는데 황당하다. 가령, 우리나라 사람들이 즐겨 먹는 장이 아닌 것이 무엇이냐는 문제의 답지로 신발장을 제시하는 식이다. 그럴 때마다 저 피디는 자기 프로를 아주 형편없는 사람들이 시청한다고 생각하고 있으니 일할 때 얼마나 맥이 빠질까 싶어 딱한 생각이 든다. 채널을 찾다 보면 노래하는 프로가 여럿이다. 어떤 때는 희망과 기쁨을 노래하여야 할 어린아이가 나와서 청승맞게 사랑의 고통과 이별의 아픔을 노래하기도 한다. 예전에는 아이가 유행가를 부르면 무슨 잘못을 저지르는 것처럼 부끄러워했다. 그러나 요즘은 아이들에게 노래를 시켜 인기를 끌고, 그럼으로써 부모는 돈방석에 앉고자 하는 것 같다. 또 어떤 노래하는 프로는 시청자들이 지지하는 전화를 건 숫자를 점수에 반영한다. 여기에 나오는 가수들은 유복한 가정에서 부모의 사랑을 받고 자란 사람은 드물다. 그런 사람은 시청자의 동정을 얻지 못하여 좋은 성적을 받을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이 출연자들은 자기가 얼마나 불행했는가를 힘써 말한다. 조실부모하여 가난한 할머니 손에 자랐다는 것은 아무 감동도 주지 못한다. 아버지는 지독한 주정꾼이었고, 엄마는 그런 남편과 자식들을 버리고 가출했다는 가족사를 속속들이 까발린다. 동정심으로 좋은 점수를 받기 위해 전국의 수많은 시청자 앞에서 부모의 만행을 고발하기도 한다. 참 어처구니없는 일이다. 어느 사이에 우리 사회에서 체면이니 체통이니 하는 일은 전설이 되어 버렸다. 양반이 체통을 지키지 못하는 일은 매우 큰 수치였고, 보통 사람들도 체면을 차리고, 그렇지 못하면 체면치레를 할 줄도 알았다. 이런 것을 어찌 허세라 할 것이며, 오늘의 파렴치를 어떻게 실용이라 하겠는가. 사람이 짐승과 다른 것은 수치심이 있기 때문이다. 짐승은 옳고 그름에 대한 분별이 없어 잘못을 저지르고도 그를 깨닫지 못한다. 그러므로 부끄러워할 줄 모른다. 부끄러움을 알면 사람이요, 그렇지 못하면 사람이 아니다. 부끄러움을 모르니 거듭하여 잘못을 저지른다. 오히려 그 잘못의 정도가 높아지고, 잘못의 형태는 더 다양해진다. 이런 사람들은 끼리끼리 모여 잘못을 서로 은폐하고, 두둔하여 정당화한다. 여기서 그치지 않고 정의를 핍박하며 불의를 만연하게 한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새삼스러워 놀라는 일
여기저기 벚꽃이 피어 세상을 온통 흔들었다. 그러더니 며칠이 지나자 자취도 없이 떨어져 버렸다. 간혹 나무에서 떨어지지 못한 꽃잎이 가지에 붙어 시들고 썩어 간다. 떨어질 때 뚝뚝 떨어지는 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그러나 세상에도 그렇게 붙어 썩는 사람도 있다. 그 모습은 참으로 처량하다. 한 달 남짓 남은 선거에 나선 사람이 여럿이다. 지역을 위하여 무슨 일을 하겠다는 뜻은 참으로 가상하다. 그것은 표면상의 이유이고 그 본심은 자신의 영달을 위해서가 아니기를 바란다. 출마를 밝힌 사람들을 보며 저 사람이 언제부터 저렇게 훌륭한 뜻을 품고 있었는가 놀라기도 한다. 전에는 그렇지 않았는데 이제부터 그러기로 했다면 그것은 동의하기 어렵다. 사람의 마음은 이리저리 쉽게 변하지만, 큰 일을 하는 데는 하루이틀에 그 마음이 다져지는 게 아니다. 사람을 놀라게 하지 말기 바란다. 자네가 그런 뜻을 품었다니 참, 놀랍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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