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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노트] 전일갑·현춘자 부부 "한번뿐인 인생, 살판나게~ 치열하게~ 찰지고 재미지게~"
기사입력  2022/01/24 [15:00]   놀뫼신문

[기획시리즈-2] 전일갑·현춘자 부부의 인생노트 

한번뿐인 인생, 살판나게~ 치열하게~ 찰지고 재미지게~

 

▲ 전일갑(우), 현춘자 부부     ©

 

내동1리였던 내동1통은 논산 시내에서 통수가 제일 많아 1통에서 14통에 이른다. 시청과 소방서, 건양대를 포함하는데, 그 트라이앵글 한복판이 내동 1통이다. 담양전씨 집성촌인 이곳은 초대 민선시장을 배출한 동네다. 내동1리보다는 먹골로 알려져 있으며, 그래서 먹골전씨로도 불리는 곳!

동네이름처럼 시골분위기 물씬이다. 마을회관에서 남쪽을 보면 리벤하임과 자이 아파트가 버티고 서 있는데, 그 아파트와의 경계는 수도(水稻) 경작지 논이다. 위로 내동초등학교쪽으로는 복숭아와 배나무 과수원 군데군데다. 봄이면 살구나무, 탱자나무 꽃피는 전형적인 시골, 도심 속의 섬이다. 

홈플러스에서 먹골길 쪽으로 진입하면 마을회관이 나온다. 거기에 비석이 세 개 있다. 그 중 하나가 전찬규(田燦圭) 님의 공덕비다. 2005년 94세의 나이에 돌아가셨는데, 근래 이 동네에서는 최고 장수 할아버지로 손꼽힌단다. 그 할아버지의 아들이 오늘의 주인공 전일갑 옹이다. 85세 먹골의 범띠 할아버지, 그러나 별명은 참새할아버지다. 

작년, 전일갑 옹이 공덕비의 주인공인 선친 취재를 부탁한 적이 있었다. 기자가 바쁘기도 했지만, 마을 공덕비가 대개는 후손이 잘 살게 되면 세워서 부풀려지는 경우도 없잖아서 차일피일 미루었는데, 마침 임인년(壬寅年) 검은호랑이 흑호의 해가 되어서 설날 앞두고 먹골을 찾았다.

 

▲ 꽃동산에 있던 공덕비     ©

 

▲ 마을회관으로 옮겨진 공덕비     ©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공덕비를 보니 앞뒤가 빼곡하던데, 주로 어떤 내용인가요? 

 

자식 자랑 팔푼, 마누라 자랑 칠푼이라고 하죠? 그런데 요즘은 딸바보, 손자바보 자처하는 사람들이 꽤 많더라구요. 없는 걸 있다고 하면 흉이지만, 있는 거나 자랑스러운 역사까지 숨기는 것도 잘하는 미덕만은 아니라고 봐요. 자신이나 집안을 대놓고 자랑하면 모양새가 좀 그럴 때도 있지만, 나 전일갑이는 전찬규 아버님을 퍽이나 존경하며 6남매 중에서도 장남인 걸 자랑스러워한답니다. 

 

▲ 선친 어머니와 아버지(전찬규)     ©

 

공덕비 세운 때가 1991년 4월, 당시 나이 부친 나이 78세셨으니 생전에 세워진 경우네요! 공덕비를 왜 세우게 되었나요? 비문도 한글로, 구어체로 쉽게 써 있던데..... 이제부터는 말씀을 평소 하시던 대로, 논산사투리로 편하게 부탁드릴게요!

 

그려요~? 잘 됐네 그려!^ 나도 그렇고, 우리 아버지도 무게 잡고 격식 갖추는 데 익숙지 못해요. 우리 아버지 별명이 무엇였냐 하면 ‘은진까부리’요 ‘꼬마대장’이셨어. 일곱 살 때부터 한학 공부를 시작하셨으나 공부에는 성의가 없고 너무 별중맞기 때문였었나 봐. 내 별명도 웃기는 참새할아버지고.... 

공덕비는 우리 집에서 세운 게 아니라 마을에서 세워준 거여. 아버지가 이 동네에 기여한 바가 커서 주민들이 세워주신 거지. 거기 들어 있는 주요 내용은 다 사실이야. 옛날엔 이 길이 없었어. 우리집터를 내 놓으셔서 닦은 게 동네 중앙로고, 마을회관 건립, 새마을지도자로서의 업적, 문맹퇴치 야학당 운영, 꽃동산을 부락에 30% 희사, 노인회장한 일, 그리고 담양전씨 종중일, 재실 재각 건립 등등 한 일이 꽤 많아요. 

 

집안이 부자였나 봐요? 동네 위하여 기부채납도 많이 하시고요?

 

부자는 무슨 부자? 동네 위해 내놓기로 한 3천만 원은 아버지 사후 내가 땅 팔아서 냈어! 하긴 그 돈도 우리에게 과수원을 물려줬으니, 아파트 대지 보상금으로 받은 거니까 아버지 돈이 맞네 그려. 지금 저 앞의 아파트 단지는 과수원였고, 예전에는 땅금이 아주 쌌어. 여기가 시내가 되면서 비싸진 거지. 내가 장가들 때 중신에미가 우리 색시를 속였대지, 그 집은 땅 많은 부자라고. 근데 막상 시집이라고 와보니 복숭아과수원 하나뿐였다는 거 아냐? 

 

예전에, 은진복상은 유명했다면서요? 

 

조생복숭아로 ‘덴싱’이라고 있어. 이거 시어서 못 먹을 정도인데, 서울이나 도회지에서는 꽤 인기였걸랑. 내가 군청에 축산계 임시직원으로 4~5년 다닌 적이 있어요. 그때 퇴근하면 이집저집 덴싱을 수집하여 트럭에 싣고 서울이나 군산 같은 데로 갔어요. 복숭아 호송일을 야밤에 했으니 낮에 사무실 가면 졸기가 일쑤였지. ‘전일갑이는 앉으면 조는 사람’이라고 호가 났는데, 밤낮으로 열심히 살긴 한 거 같은데 막상 내 손으로 돈 같은 돈은 벌지 못했던 거 같여. 

 

지금으로 말하면 투잡, 쓰리잡 뛰신 모양인데, 평소 노는 얘기 주로 하시고 웃기기만 잘 하셔서 그토록 치열하게 산 줄 몰랐습니다. 아버지 때부터 그러셨나봐요? 

 

우리 아버지 함자는 찬/규 이신데 충원공 24세 손으로 1917년 생이세요. 어려서 하두 별중맛기 때문에 ‘은진까부리’였지만 14세 때에 은진공립보통학교(현, 초등학교) 4학년에 시험 합격하여서 들어가셨고, 17세 때 6학년을 졸업하셨다나봐. 

그때 우리 동네에서 학교 졸업한 사람은 네 사람, 국문해독자는 십여 명밖에 되지 않았대지 아마? 1933년 1월 20여 명의 동네 청소년들을 모아 야학을 열었대. 문맹퇴치운동에 앞장선 건데 개교하는 날 감개무량하셨던 모양이라. 

그해 5월은 농촌진흥운동으로 근농청년단을 조직하셨대. 아침 일찍일어나기, 집신신기, 도박말리기, 공동작업 야간작업 등등을 벌였고... 행정관청에서는 칭찬이 분분하였지만 왜경은 싫어할 밖에. 1934년 10월 ‘금전’이라는 은진주재소 주임이 위험인물이라고 지목, 야학당과 근농청년단을 해산시켰대요. 마냥 당하고 있을 수만은 없어 노력한 결과 야학당은 두 달 후 논산군수 명령으로 다시 간판을 걸게 되었으나 근농청년단은 영영 해산당하고 말았다네 그려. 

1935년 19세의 나이로 공려조합(진흥회) 부조합장이 되어 유지들 성금을 모아 우리 집터 밭에 3간겹집 부락회관을 지어놓고 일을 봤대요. 당시 전원규 이장이 “경찰서에서는 여전히 자네를 요주의 인물로 주목하고 있다”는 말을 듣고 이 땅을 뜰 결심을 해. 

그래서 1939년 6월 큰 꿈을 안고 만주로 떠나셨지만 5년간 방랑생활만 하셨나봐. 와중에도 한 일이 있다면, 고향땅 청년 17명을 불러들여서 일제의 징용을 피하게 도운 일이라지.

 

동네사람들 불러올 때 가족들은요? 

 

내가 1938년생이고 오남매 중 장남이니까, 아버지는 만주로 떠나기 전 결혼을 하셨던 모양이야요, 내 위로 누님 한 분, 그리고 나니까. 우리 형제는 일자 돌림여. 나 일갑, 동생 일숙, 일라, 일상.... 

해방 전 아버지가 만주 봉천 계실 때 어머니와 나, 일숙이는 거기로 갔는데 매우 추웠어요. 지금도 생각나는 건, 졤병이라고 하는 부침개, 목욕탕에서 일본비누 향긋한 냄새.... 2차 세계대전이 나서 봉천 시내를 미군비행기가 폭격을 하더군. 그래서 연기 자욱한 기억도 나고, 이층 계단에서 굴러떨어진 생각도 나네 그려. 그러다가 해방 전해인 1944년 12월, 아버니가 가족과 함께 귀국하셨어. 당시 나는 은진국민학교 1학년을 다니다가 1945년에 해방을 맞았지.

 

부자분이 역사의 격변기를 관통하셨는데, 귀국 후에는 어떤 일을 하셨나요?

 

29세때 귀국하신 아버지는 전씨종중대종문회 회장으로 임명돼서 3권분립제로 규약강령을 다시 제정, 질서를 바로잡으셨대. 특히 재정확립에 총력을 다 쓰셨기에 종중은 점점 부유해지고 단합이 잘 되었다나봐요. 이건 집안 일이고, 아버지는 실은 나라 일에 관심이 많았어요. 

당시 뭘 좀 아는 식자층은 대부분 좌익 공산당이었잖아? 3년형을 언도받고 서대문형무소에 복역 중 인민군이 열쇠를 따주었고, 그 길로 인민군복으로 갈아 입고서 여수까지 내려가 국방군과 싸우다가 1·4후퇴때 여기 먹골 집으로 숨어 들었다지? 사랑방 밑에 토굴을 파고 숨어 있었지만 주변 밀고로 체포되어 강경경찰서에 수감된 것을, 외삼촌이 끄집어냈어요. 당시 외삼촌은 국군 준장였거든. 

 

그 후 전향을 했나요?

 

그 속내까지는 나도 모르지만, 출옥 후 큰 일이 없는 걸로 보아 대한민국 체제에 적응을 하셨던 거 같아. 내 낙천적인 성격, 부당한 걸 못 보는 성미, 음주가무 모두 아버지한티서 물려받은 거 같여. 집식구는 노인대학에서 노래교실 다녀 배운 노래 실력이지만, 내가 더 잘 부를걸? 난 아버지에게서 배웠지. 내 18번이 ‘미쓰고’인데, 아마 설운도가 나 보면 도망갈 껄? 껄껄껄~ 6·25때 내가 6학년였던 거 같은데, 그때 아버지가 내게 기타를 가르쳐주었어요, 악보도 없이... 그러던 내가 1970년에는 ‘묵동4H노래’를 작사 작곡했단 말이시~~

 

지덕노체 그 4H 말이죠? 농촌에서 아버지와는 어떻게 협업하셨나요?

 

아버지는 1972년 59세, 당시로서는 노인인 데도 새마을지도자가 되었어요. 노력봉사뿐 아니라, 땅을 희사하여 마을회관을 짓게 하고 마을 중앙도로를 개통시키는 등 멸사봉공에 앞장 서셨는데, 당시 별명은 고집불통이었어. 고집을 피울 때 말릴 사람이 없었는데, 신념이 있더라구. “고집에는 정고집과 옹고집이 있는데, 정고집이란 불의와 싸워 굴하지 않는 것이요, 옹고집은 자기 욕심만 채우기 위해서 정의와 싸워 이기려고 부리는 고집이다. 나는 그런 옹고집쟁이는 아니다. 자고로 훌륭한 정치가나 유명한 혁명가로서 고집 없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다. 나도 그런 고집쟁이일 것이다.” 이렇게 말씀하셨거든. 

 

고집과 뚝심 없이 되는 일은 하나도 없는 것 같아요. 여기서 선친 이야기는 이 정도로 하지만, 들어보니 우리의 근대사, 현대사가 눈 앞에 아물거리는 것처럼 느껴지네요. 이제부터는 본인 이야기로만 초점을 몰아볼게요. 

 

어렸을 때 만주에서 살다가 해방 전 일정 때 은진국민학교 1학년을 다녔다고 했지요? 해방 후 국민학교 6학년 때 6·25사변이 일어났어. 그때 할머님 연세가 얼만지 기억이 잘 안 나는데 기관총을 기안총, 스파이를 섭파이, 인민군을 밈민군이라고 하셨든 기억은 생생해. 

 1951년도 전쟁중이었지만 학교는 문을 닫지 않았고, 나는 논산중학교를 국가고시로 입학하였지. 3회로 졸업해서 삼우회라는 동창회 모임을 지금까지 가지고 있어요. 1957년도에 논산농업고등학교 축산과를 졸업하였지. 16회.

 군인 영장이 나와 수용연대로 입소하였다가 능막유착이라는 이유도 있고 원스타 외삼촌이 ‘그 몸으로 어떻게 군대생활하겠느냐’며 신경도 써준 덕에 귀가조치를 했어. 그러나 아버지의 공산당 전력으로 연좌제는 면하지 못해 취직은 어려웠지. 마을에서 아버지와 함께 과수원을 만들며 농촌생활을 시작했고, 그때부터 지금까지 농촌생활로 일관됐다고나 할까?

 4H구락부를 조직하여 회장을 맡아 운영했어요. 쌀이 부족해 고구마밥으로 연명하면서도 농촌운동 한답시고 안 해본 게 없었어. 조합장을 지낸 이영선 친구 집에서 소 새끼를 반타작으로 가져다 키워서 쟁기질 질 들여 남의 논밭도 갈아보았지. 레구홍이라는 산란계를 키우는데 논산 장에 가서 쌀겨, 미강, 골분, 밀기울, 멸치가루 등등의 사료원료를 리어커에다 실어다가 양계도 해보고, 한동안 양봉도 했지. 토마토 농사도 지어보고, 흙벽돌 기계를 만들어 경운기로 돌려 흙벽돌 찍어서 팔아도 보고.... 그렇지만 농촌생활은 예나 지금이나 돈도 잘 안 되고 뚜렷한 발전은 없었던 거 같여. 

 

당시 농촌총각은, 장가 들기 괜찮았나요?

 

그때까지만 해도 결혼 주도권은 주로 남자가 가지고 있었다고 봐야겠지? 내가 결혼할 때 나는 사전조사까지 했다는 거 아냐! 중매쟁이가 알려준 이름 현춘자를 가지고 기민중학교 가서 학적부를 떼어 보았더니 수학이 올 100, 키는 좀 작지만 머리는 좋다고 보아서 결혼을 하였지. 백년해로, 지금까지 아내와 원만하게 살아왔으니까 잘 산 거지! 내 말이 참말인지 거짓말인지, 나랑 얘기 끝나고서 따로 인터뷰해 봐(멋적은 웃음^). 

그때가 1965년 12월 11일였고, 신혼때야 꿈같은 결혼생활이었지. 근데 도중에 죄를 많이 지었고, 그래서 지금은 내가 밥도 해서 받치고, 약 때 되면 물 따십게 해서 대령해드리지요~~ 내 문집에 보면 마누라에게 바친 시, 편지도 꽤 돼! 

 

남자는 바깥으로 나돈다고 하는데, 결혼 후 농촌에 쭉 살면서 농업일만 했나요?

 

나는 농촌일보다 주로 시내에 나가서 일을 했고, 논밭 일은 주로 아내가 했어요. 초창기, 전영기 씨가 얘기해 주어서 군청 축산계 임시직원으로 4~5년간 근무하다가 축산조합으로 옮겨 2년여 근무했나 보네. 대전 동서한테 가서 공사하는데, 운전면허 따서 농민차 사가지고 일을 했지. 그런데 1년 동안 일했건만 양복 딱 한 벌만 사주더라구. 

그리 헛고생만 하다가 귀향한 후 안 되겠다 싶어서 벽돌공장을 시작했지. ‘논산시멘트공장’이라는 간판을 내걸고 3년여 하였나 봐. 그러다가 1982년 벽돌공장 세 곳이 합동하여 전신전화국 앞에다가 ‘합동시멘트 공장’을 시작했지. 이일 저일 가리지 않았는데 나는 주로 공장에서 2.5톤 트럭으로 모래 자갈을 실어오고 찍어낸 벽돌 블럭을 배달하였어. 10년 전까지는 장사가 됐는데, 요즘 시멘트블록은 지진 대비 기준에 못 미쳐 허가가 잘 안 나고 그러다 보니 영업실적은 지지부진한 편! 현재 이 공장은 5인 명의로 되어 있는데, 40년째 동업하면서 얼굴 한번 안 붉혔던 거 같애. 한국에서 동업은 형제지간에도 어렵다고들 하던데, 우리 5인방처럼 서로 이해하고 양보하면 분란이 일어날까?

 

충청도 남자들은 밖에서는 참 잘하는데, 집에 들어와서는 별로라 하잖아요? 집에 와서도 재미난 얘기 잘 해요?

 

에효, 나 아픈 데를 콕 찔러오네 그려. 나는 딸 넷 아들 둘 해서 6남매인데, 걔네들 오롯이 다 키운 게 내 아내지 뭐야. 그 많은 아이들 키우면서도 3~4천 평 넘는 과수원 농사를 짓다 보니 그 고생길 오죽 했겠어? 부잣집이라고 해서 시집 와 보니 빚은 많은 데다 남의 논 선자까지 즐비하니, 여자 몸으로 고생 우쨌을고?  딸만 넷 쭈루룩 낳다가 다섯째로 장남 하나 낳았지. 근데 어느날 처갓집에서 장모와 처제가 와보니, 그 어린 것을 과수원 사과 박스 속에 앉혀놓은 채 죽어라 일만 하는 걸 보더니만 기겁하면서 친정 대전으로 데려간기라. 덕분에 그놈은 고등학교까지 대전서 나왔고ㅎ....

나도 농촌일을 안 해본 거는 아녀~ 애들과 함께 살아 보려고 탈곡기를 사서 매형은 총책임자가 되고 나는 따라다니면서 동네 벼 다 털어보고, 이것저것 죄 해봤으나 마누라가 버는 돈에 못 미치는 거 같았어. 내가 나이 먹어 벽돌공장에서 트럭 운전 그만 두고 동네창고에 있는 우성포장을 인수하여 박스공장을 시작했는데, 기사가 차 사고 내는 바람에 1억여 원 손해 보기도 했지. 

이건 결혼하고 나서 한참 후에 겪은 일이지만, 초창기부터 농촌 생활 어렵게 하다 보니 깝깝증이 느껴지더라구. 나는 아내에게 “농촌에서 살으면 고생이 많으니 도시로 나가자”고 누누히 권해봤지. 대개는 여자가 남자에게 그렇게 권하는데, 우리는 그 반대였나 봐. 그때 식구는 단호하더군. “땅 팔아 가지고 도시로 나간 사람 다 망하대요. 나 같은 도시 여자가 시골에 오드니만 남편 꼬셔서 도시로 나가면 어른들한테 욕먹어요.” 이렇게 남편 말 안 듣는 아내가 원망스럽기도 하였다. 

 

사모님 몸이 불편해 보이시는데?

 

그 고집 때문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시골에서 고생고생하다 노년에 몸 망가져 허리 수술, 양쪽 무릎 수술을 하여 이제는 3급장애인이 되었다네. 식구한테 미안한 마음뿐이지.

여기 먹골로 시집와 3천평 과수원 농사만 내리줄창 지은 보상이 지금 저 몸이야. 30년 다 돼 가는데 55세 때였어. 배나무 가지에 올라가서 일하는데, 가지가 찢어지면서 낙상하는 사고가 났어. 설상가상, 허리가 땅바닥에 있던 주전자 꼭지에 부딪히고 만 거야. 몇 년 걸려서 병상에서 털고 일어나긴 했는데, 그러구도 다시 농사를 짓더라구, 지금 주공 아파트가 들어오면서 그 곳 과수원 자리를 내줄 때까지. 

1990년도 논산에 건양대학교가 생기고 내 논, 아니다 아내가 산 논 여섯 마지기가 학교로 들어가서 보상금이 나왔어. 그 돈으로 내가 살던 구옥을 헐고 새집을 지었지. 아내는 어떻게든 잘 살아 보려고 우리 살림집뿐 아니라 자취방 지어 사글세를 받으려 조립식으로 2층집을 짓더라구. 지금 우리 집은 살림집으로 내놓는 방이 9개인데, 6개는 입주해 있고 나머지 3개는 비어 있어. 요즘 새 원룸 시설이 워낙 좋아서 우리처럼 구식집에는 싸게 내놓아도 잘 안 들어와요. 형편 어려운 사람들만 모여 사는, 한지붕 열가족이지!^

 

이제는 아등바등하지 않아도 살 만한 거 같은데, 요즘 소일은 어떻게 하세요?

 

우리 부부는 각자 운전을 하고서 공부도 하고, 놀러도 다녀요. 공부 없는 날은 혼자 혹은 둘이서 탑정리 저수지를 한 바퀴 돌고 오는 게 중요한 일과! 나는 1981년도에 운전면허를 따가지고 전국 안 가본 데 없이 다 다녀봤지. 부창부수인지 늦바람난 아내는 65세 때 운전면허를 땄어요. 몸이 성해도 그 나이에 할머니 면허증은 언감생심인데 우리 마누라는 보란 듯 따내고서 지금껏 혼자서도 저렇게 잘 쏴다니니, 대단하지 않어? 얼마 전에는 막내아들이 하이브리드 신차를 뽑아줬어요. 내가 타던 중고차는 지가 탄다고 하면서! 서울에서 초밥집 하는데, 돈 좀 벌면 자기 차 뽑기 바쁜 세상에 시골 엄마아빠 생각해주니 내 자식이지만 칭찬하고 싶고 그저 고마울 따름....

아내는 나보다 모임이 더 많고 감투 안 쓴 데가 없다. 나는 12군덴데 마나님은 18곳이나 다니더라구. 잠 시간도 거의 없던 아줌마 시절에 은진면부녀회장도 했고, 일손 놓은 지금 저 몸으로도 노인회나 봉사활동 같은 걸 많이도 하고 다녀. 나 역시 공동생활에 많이 협조하는 스타일인가벼, 각종 모임마다 임원 안 걸린 데가 없으니 말여. 초중고 동창회 총무와 회장 안 해본 게 없고, 건양대 원우회장, 향우회장, 과수계 회장, 동네경로당 노인회장, 정우회 회장, 한마음계 회장... 반야산악회 만년총무, 동갑계 재무총무 주렁주렁일세 그려~~

 

팔방미인으로 여기저기 걸쳐 있다 보면 집중하지 못해서 치밀성이 떨어지기도 하던데, 시화집은 언제 그리 준비하여 내시고, 집에는 문집들이 꽤 많네요? 

 

내가 음악 좋아하고, 그림 그린다고 가끔 그리고, 도자기도 굽고, 시 쓴다고 모이고 하다보니 동호회도 꽤 많아요. 그런 데 나가면 웬만함 내 돈 쓰려 하지. 그러다 보니 내가 욕도 잘 하고, 대충대충 사는데두 감투를 많이 씌워주더라구. 

내가 건양대학교 사회교육원에 1기로 들어간 게 1996년인데, 10년 후인 2006년 7월 원우회 회장으로 뽑아주더라구. 속으로 신났지 뭐야. 해서 그해 12월에 원우회원 글모음집 “늦깎이 제1집”을 만들고 다음해 12월에 또 ‘늦깎이 제2집’을 발간하였지. 이런 식으로 5권까지 발행했는데, 제작비는 내가 됐지만 편집을 비롯한 수고는 몽땅 내 둘째 딸 지현이가 해줬기 때문에 가능했어. 2011년 1월에는 논중 3회 졸업 ‘삼우회’ 동창문집을 100페이지 넘게 두툼 펴낸 것도 분재원 하는 사위 지원 덕이고. 

2007년 내 나이 70세에는 “야생화”라는 문집을 냈는데, 참 잘 냈다는 생각이 들어. 내가 살아온 흔적뿐 아니라 가족과 주변 지인의 발자취, 호흡, 생각을 함께 담아놓았으니까 말야. 그해 1월에는 붓글씨를 써서 표고를 17점을 하여 가족 친지들에게 나누어 주었고, 요즘은 참새 그림에 빠져서 그 그림 나눠주느라 정신 없어요.

2006년에 토지개발공사에서 개발한다고 보상금이 나왔고 노년 되니 이곳저곳에서 돈이 나와 세금 내고 애들 좀 나누어줄 수 있었지. 마음에 여유가 생기니까 선친이 마을회관 건립비로 약속한 기부금 3천만 원을 내어 유지를 받들 게 된 거고.... 

 

 

 

▲ 건양대학교 사회교육원 제1기 수료기념식수 2007-04-21     ©

 

 

 

 

 

 

 

그 동안 사시면서 할 거 못할 거 다해보신 거 같은데, 이제는 주변 사람들 평도 신경 써야 할 거 같아요. 요즘은 어떤 심정으로 사세요?

 

난 70이 넘어서 전립선 수술을 했어요. 그래도 여전히 술 잘 먹고, 담배도 피고, 욕도 해대면서 남 웃기며 즐겁게 살려고 해. 대개는 날 보고 ‘유머어가 풍부하다’고들 하더군. ‘웃긴다’ 소리는 내가 듣기도 하지만, 독백하듯이 내게 하는 말이기도 하지. 

아버지는 반듯한 성품이셨어요. 그래선지 나도 성격이 곧고, 급한 편예요. 대충대충인 면도 있고, 소리도 곧잘 질렀지요. 특히 마누라 앞에서는. 이리 흠결 많은 인간이지만, 그래도 나는 곧게, 바르게, 성실하게 살아가려 노력은 한답니다. <성실하게 최선을 다하자> 저게 내가 정한 우리집 가훈이야. 내가 사회교육원에서 배운 컴퓨터 실력으로 직접 치고 출력한 다음 안방 벽에다 걸어놓았지. 애들 오면 ‘저 가훈 봐라’하기도 하고, 그렇게 살도록 기도도 하지. 


 

 

아버지까지 합하여 한 세기 넘게 살아온 이야기를 이리 한꺼번에 듣자니 먹먹해지지고 하네요. 오늘 얘기는 여기까지로 마감할 게요. 다만 아쉬움 겸 팩트 체크로 여운의 꼬리표를 달아 보겠습니다. 마침 7순 문집에 보니까 사모님이 써놓은 수기가 있던데, 그걸로 크로스 체크를 해볼게요. 모쪼록 두 분, 더 건강하시고, 예전의 아쉬움들을 백년해로로, 오늘 인터뷰로 더 행복해지세요~~^

 

- 이진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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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산보호관찰소, 백제종합병원 방문 / 놀뫼신문
계룡시, ‘2024년 제1차 아동복지심의위원회’ 개최 / 놀뫼신문
논산시의회, 제252회 임시회 개회 / 놀뫼신문
계룡소방서, 어르신 심폐소생술 교육 실시 / 놀뫼신문
논산소방서, (유)삼각FMC웰빙랜드 장학금 전달받아 / 놀뫼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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