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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춘자가 써내린 ‘여자의 일생’, "내 인생은 내가 살고, 내가 쓴다"
기사입력  2022/01/24 [15:15]   놀뫼신문

[기획시리즈-3] 현춘자가 써내린 ‘여자의 일생’ 

내 인생은 내가 살고, 내가 쓴다

 

 

 

기자가, 현춘자 논산 노인대학교 학생회장을 만난 때가 2017년 연말이었다. 당시 학생회장을 10년째 맡고 있었다고 하였는데, 현재는 몸이 불편하여 60대에게 물려주고 그냥 학생으로만 다닌다고 하신다. 

당시 현춘자 회장은 키도 작은 데다가 허리가 다쳐서 더 작아 보였다. 55세때 배나무 위에 올라가 일하다가 낙상한 이후에도 일을 계속했지만, 주공아파트가 들어서면서 과수원 자리를 내주며 보상을 받은 이후 불철주야 일손을 놓게 되었다. 

시간이 좀 한가해지자, 그간 못 배웠던 학구열을 불태웠다. 동화구연, 한지공예 과정 등을 수료한 다음에는 65세 나이가 되어 노인대학에 들어왔다. 2~3년 후에는 곧바로 노인대학 학생회장을 맡는 등, 15년간 장기근속학생회장이다~~

논산노인대학은 수업 시작할 때마다 수업 격식을 제대로 갖추기 위해 국민 의식을 거행한다. 당시 현 회장은 그 작은 키에 강단에 올라가서 노인강령은 물론 애국가 지휘도 멋들어지게 뽑아냈다. “예전에 음악 공부를 하신 적이 있는지?” 물어보니, 전혀란다. 학생회장을 맡은 다음에 지휘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집에 돌아와 공부를 시작했다. 음감이 빼어난 남편 전일갑 씨 지도를 받아가며 엄청 연습을 많이 했다고 술회한다. 

노인대학에는 여러 프로그램이 있다. 한문, 노래교실, 독서반.... 놀뫼신문 2017-12-13일자는 “여고생 감성으로 노년삶 써내려가는 독서반 이야기”가 실려 있다. (https://nmn.ff.or.kr/16/?idx=513692&bmode=view 참조)

공부 중에서 한문은 꾸준하게 써야 는다. 젊어서 줄기차게 속을 썩혔던 남편 전일갑 씨가 요즘 줄기차게 긋는 줄이 있다. 달력 뒷면이나 이면지 같은 걸 보면 다 모아 정리한 다음, 그 뒤에 볼펜으로 줄을 긋는다. 가로 세로 모눈칸이 만들어지면 영락없이 원고지나 한자 노트가 된다. 거기에다가 수도 없이 쓰는 한자는, 이제는 연습을 넘어 일필휘지의 경지다. 그 옆에서는 시시때때로 참새를 그리는 전일갑 노화백이 백년해로 부창부수다. “나, 이제 경지에 도달한 거 같여! 이 액자는 이 앞 다이소에서 3천원씩 팔대. 여기 낙관까지 찍었으니 이 참새는 이 기자 선물여, 올 설 선물!” 

한편, 안살림 주인장 현춘자 여사는 일가친척, 가족에게 퍼주는 삶의 연속이었다. 내 자식 6남매 키우기에 버거웠던 시절, 새벽에 일어나 온 가족 아침밥 챙겨주고는 부리나케 과수원에 나가 하루 종일 흙구덩이 속에서 일벌레가 된다. 어둑해지면 집에 돌아와서 저녁밥이며 집안 빨래며 내일 먹을 거 준비하느라 살아온 불철주야 수십 년.... 와중에 속 징그럽게 썩히는 남편을 미워하거나 질투하여 바가지 긁을 시간도, 여력도 거의 없었단다. 

시집 올 때 열세 살이던 막내 시동생 장가갈 때는 2층집을 지어서 제금 내주었다. 시집 간 딸 중 하나가 눈에 밟혀 집까지 사주고 온갖 정성 들여왔지만 나아지는 맛 없이 여전한 진행형 같아 엄마 맘은 애리고 쓰리단다. 3~4년 전까지만 해도 김장을 엄청 했다. 6남매에게 나누어줄, 그러나 이제는 자녀들이 챙겨주는 김치를 먹는다. 밥상은 남편이 차려다 준다. 이제 남편은 가훈 그대로 성실(誠實)을 실천하니 고마울 뿐이다. “요즘 돌아보니, 내가 잘못 살지는 않은 거 같아요.”

<여자의 일생>, 세계적인 작가만 쓰는 글이 아니다. 남편 고희 때 썼던 그녀의 수기를 엿본다. 남편은 맞선 후 18일 만에 결혼하였다고 술회하는데, 그녀는 19일 만이라고 정정한다. 특히 숫자에 정확한 현춘자, 그녀의 또박또박 육필(肉筆) 속으로 들어가 보자.

 

- 이진영 기자 

 

 

 


[육필 수기]

 

‘송산 전일갑의 반쪽’ 아내의 삶을 돌아보며...

 

나 현춘자는 11세 때 친정아버님께서 돌아가셨다. 친정아버지께선 1년이 넘게 병석에 누워계시다 돌아가셨기 때문에 집안형편이 어려웠다. 그때부터 나는 “딸 다섯 중에 셋째딸이 똑똑하다”고 하여 할머니와 함께 집에서 콩나물을 키워 팔기도 하고, 나물을 뜯어 팔기도 했다. 

국민학교 5~6학년때 100m달리기 선수로 부창, 동성, 반월학교 달리기에서 1등 하고, 과외공부도 못하였지만 논산여중에 합격을 하였다. 그렇지만 집안형편상 돈이 없어 입학도 못하고 장학금을 주는 기민중학교에 들어가게 되었다. 수학을 너무 잘해서 학교에서 ‘수학박사’ 소리를 들었지만, 학교를 다니면서 장사를 하는 어려움이 있었다. 선생님께서는 역경을 이겨내서 김활란 여사처럼 되라고 격려를 해주셨다. 서울야간동성여고에 입학하였지만 서울생활이 춥고 너무 고생스러워 졸업을 하지 못했다. 동대문 왕자고무 특약점에 있다가 9년 만에 집에 와서 19일 만에 전일갑 씨와 결혼~

“전일갑 씨 집이 부자”라고 하여 시집을 와보니 등잔불에 종중 빚과 쌀계 2번 빚이 있었다. 재산은 과수원뿐~ 식구는 시할머니, 시부모, 시누 둘, 국민학교 6학년인 시동생. 과수가 떨어지면 그 때부터 종중 빚으로 생활을 하였다. 그리하여 종중 빚에 마살미 밭까지 내놓았다. 그때부터 아버님께 사정하여 쌀계 30가마 시작하였다. 그때 어머님께 너무 많이 혼났으나 나는 친정동기간과 쌀계를 시작하였고, 그때부터 살림을 아버님께서 나한테 맡기셨다. 

죽기 아니면 살기로 일을 밤낮으로 하였다. 밤 1시 안에 방에 들어가지도 못하였고, 딸 넷을 낳고 아들 낳을 때 친정어머님이 오셔서 일하는 것 보고 집에 가시지 못하고 4년 동안 집안일을 도와주셨다. 어머님께서 집안일을 돌봐주셔서 조금 여유가 되어 종중 논이며 선자 논을 짓기 시작하였다. 인부 품삯 아껴보려고 남자일꾼 몫까지 논두덕 풀깎기, 벼베기, 지게질, 통일벼 도구통에 넣고 두들기기 등 일만 정신없이 하다가 시어머님 생신 잊어버려 쫓겨날 뻔도 하였다.

남편이 벼 탈곡기 들여와서 품삯 줄이기 위해 말질을 하다가 쇠날에 머리를 다쳐 피가 많이 흘러도 일하느라 모르고 땀인 줄만 알고 계속일 하다 담배, 쑥으로 막고 머리를 동여매고도 그날 일을 끝내려고 또 말질을 계속.......

과수원 소독을 점심도 못 먹고 하다가 약해를 입기도 하였다. 남자일꾼들과 거름 주며 일을 많이 하기 위해 삽질 시합도 해가며 일을 닥치는 대로 쉬지 않고 했다. 과수원 일이라는 게 겨울에도 끝이 없어 나무치기, 전지를 섣달 그믐까지 밥 광우리를 이고 나가면 동네사람들은 길가에 앉아서 “억대 거지가 일만 한다”고 말하여 부끄럽기도 하였다.

시어머님께 일만 한다고 꾸중도 많이 듣고, 그때 그시절 냉장고가 없어 익은 김치 안 드셔서 학독에다 등잔 불 켜고 고추 갈아 매일 김치 담가야 했다. 작두샘에 쌀겨로 만든 빨래비누로 과수원에서 일하고 와서는 밤1시까지 빨래를 해야 했고, 그 이튿날 먹을 음식하고 너무 고달파 성에 맛도 모르고.... 임신은 언제 하는지도 모르게 아이는 들어섰고, 일에 치여 입덧 할 새도 없이 고추장 퍼먹으며 빚에서 벗어가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그토록 힘들게 살았는데 55세 잊혀지지도 않는 6월 13일이 닥쳐왔다. 배봉지 싸는데, 남들이 높은 곳 못 싸서 내가 싸다 떨어졌다. 척추를 주전자에 다쳐 119로 병원으로 옮겨졌고, 그때부터 병원생활을 계속되어 젊어서 모질게 부린 몸 고장이 나서 다리, 목, 허리디스크 온몸에 장애가 와서 3급 장애자가 되었다. 몸이 성치 않으니 운전이 절실히 필요했고 65세에 운전면허를 땄다.

딸 4명 아들 2명, 6남매 가르치고 결혼시키고, 참 빚은 벗어나기가 힘들었다. 쌀계 100가마 시작할 때마다 2개를 하고 보니 쌀계 3번을 하여 논도 사고 집도 짓고, 농가목돈 빚을 이어가면서도 방을 11개 세놨다. 한 때는 하숙도 하였다. 그렇게 힘들게 생활을 하였는데 내 삶에 서광이 비취기 시작했다. 2006년 12월에 과수원이 택지개발에 들어가게 되어 2007년 1월 돈이 나왔다. 억대 재산 가진 시골 갑부라는 말을 들었지만 “농촌 갑부 일구데기 속”이라고, 평생 과수원 일속에서 빚 속에서 헤어날 줄 모르고 힘들게 살았는데 그 땅이 팔리니 비로소 억대 재산가가 되었고 일 속에서도 벗어날 수 있었다. 

내가 남편과 결혼한 지가 올해로 42년째다. 남편이 칠순이라 책을 만든다고 해서 부부는 일심동체니 한 편을 써야 한다기에, 남편처럼 시를 지을 줄도 모르고 지나온 삶을 생각해 보는 계기가 될 것 같고 하늘보다 높으신 남편 뜻 거역할 수 없어 한편 보태 본다. 남편 책에 누가 되지는 않을까 걱정이 되고, 남편이 자랑스럽기도 하다.

장애 3급 부모지만 자식한테는 장한 어머니라 생각하며 6남매를 바라보며 살 수 있다는 것이 행복하다. 6남매 성실하고 앞으로 남은 생, 지금보다 값지고 재밌게 살아야지! 그래야 자식들이 좋아하겠지. 엄마 재밌게 건강하게 잘 살 거고. 우리 6남매 파이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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