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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같이돌자 동네한바퀴] 채운면 야화2리 "민 주도로 전설꽃 피워가는 들꽃마을, 야화리"
기사입력  2021/04/07 [12:31]   놀뫼신문

|다같이돌자~동네한바퀴| 채운면 야화2리

민 주도로 전설꽃 피워가는 들꽃마을, 야화리

 

 

채운면 야화리는 3리까지 있다. 1리는 해바라기축제로 잘 알려진 명소로서, 채운초등학교는 동쪽 용화리와 함께 걸쳐 있다. 서쪽, 철길 넘어 2리는 원목다리로 유명하다. 원목다리는 인근 강경에 있는 미내다리와 흡사하다. 기능은 물론 모양까지 닮은꼴이어서 한때 이 동네에서는 원목다리도 미내다리와 똑같은 이름으로 불렸단다. 

강경천 미내다리와 방축천 원목다리는 전라도에서 충청도로 넘어오는 길목이다. 춘향전의 이도령은 미내다리, 원목다리를 건너 돌고지(야화1리)~은진관아(향교)~풋개다리~ 이 삼남로는 한양 상경길이다. 이곳에 주막이 어찌 없었겠는가? 현재 이 뚝방길은 허허벌판이며, 어쩌다 원목다리 명성을 듣고 찾아오는 사람들 반기는 것은 바람개비와 공다리꽃뿐이다. 

 

▲ 민 주도로 전설꽃 피워가는 들꽃마을, 논산시 채운면 야화2리 전경     ©

 

 

 

동네일·사업은 민간자본으로

 

방축천에서, 유채꽃 비슷한 공다리꽃길은 올해 500미터 정도이다. 이 꽃길이 반응이 좋으면 ‘영창교’까지 확대, 1km를 확장 조성할 계획이다. 그런데 이런 사업은 시청의 지원을 받아서 하는 게 아니다. 동네 자체로 해결해 나가는 전통은 오래전부터 이어져 왔다. 원목다리 건설할 때도 그랬다. 비석에 보면 당시 돈을 냈던 사람들 명단이 빼곡하다. 

논산~강경 23번 국도에 안내판이 보이는 원목다리는 채운2리 남단이다. 차로 진입할 경우 뚝방길로 가능은 하지만 돌려나오기 편한 곳은 아니다. 호남선 철로에 가로막혀서다. 동네 초입은 채운면사무소쪽, 채운면노인회분회쪽이다. 동네에 들어서면 너른 마당이 나오고, 그 왼쪽에 간이 건물이 하나 서 있다. 기자가 송범석 이장과 마을분들을 만난, 열린 공간이다. 비가림 비닐하우스가 20여 평에 사랑채 5평 남짓인 마을회관 별채다. 통풍이 잘 되어 특히 여름에 동네사람들이 자주 들낙날락하는 이 시설도 마을 돈으로 지었다. 

그렇다고 해서 정부돈을 아주 안 받는 것은 아니다. 2019년 9월 26일, 시는 논산시 500여개 마을자치회 활성화를 위해 “마을자치박람회”를 열었다. 이때 야화2리는 우수상으로 100만원 상금을 받았다. 그 해 봄에는 “야화2리 뜰꽃마을 한마음축제”를 열어 노래자랑 등 흥겨운 동네잔치를 벌였다. 흥겨움은 이어졌다. 이때 행사 경비 300만원을 제하고도 일정액의 돈이 적립되었다. 

이 돈을 종자돈으로 해서 6천만원의 수익 사업을 벌였다. 태양광 사업이다. 마을회관과 그 옆의 창고까지 합 70평에 시설한 결과 매달 38kW 전기를 판매, 100만원 이상씩 벌어들이고 있다. 초두비용 6천을 맞추기 위해 송범식 이장의 사비는 물론 태양광업자도 동참했는데, 급한 부채는 상환한 상황이다. 3년 전부터 동네일을 보게 된 송범식 이장은 소탈한 꿈 하나를 밝힌다. “코로나에서 해방될 내년쯤, 동네어르신들 모시고 제주도 2박3일 다녀올 생각입니다.”

채운면은 동네 이름에 꽃을 뜻하는 화(花)자 안 들어가는 동네가 없다. 오화지지(五花之地) 전설은 화산리, 야화리, 용화리, 화정리, 연무 신화리가 그 무대이다. 땅으로 내려가 사람의 씨앗을 퍼뜨리라는 명을 받은 들꽃 선녀는 야화리로 걸음을 옮겼다. 놀기만 하던 용꽃선녀와 들꽃선녀에게는 사내가 나타나지 않았다. 어느 날 옥황상제가 꿈에 나타나 “사내 만나는 것도 중요하지만 부지런히 일을 해야 하느니라”고 일러주었다. 

야화리(野花里)는 ‘들꽃마을’이다. 다른 꽃들과는 달리 야생화는 야생마처럼, 철마처럼 강인하고 거침이 없다. 올해 동네 초입에 2천만원 예산의 벽화사업이 계획되어 있다. 거기에는 유채꽃과 흡사한 노란 공다리 밭에 철마가 지나가는 그림을 그려넣을 예정이다. 채화역이 있던 호남선은 채운면 일대에서 구부러져 있었다.  그 철로 공사를 다시하여 현재는 다소 완만하게 펴진 상황이다. 야화2리에서 서편, 강경쪽으로 야화3리와 삼거1리 경계선철길에서 새로운 철도가 갈라친다. 연무대역이 종점인 연무선이다. 

호남선, 연무선을 끼고 일어난 이야기도 많다. 채화역은 반세기 전 논산딸기의 대부들이 딸기를 서울로 올려보내던 거점으로서 논산딸기의 명성이 서울로 확산되는 시발점이 돼주었다. 새마을사업 훨씬 이전, 채운2리는 마을공동사업을 실행했던 곳이다. 마을정미소, 벽돌공장의 역사는 전설로 남아 있다. 

 

▲ (왼쪽부터)송범식이장신태근노인회장신군균전이장최기영옹(90세)     ©

 

▲ 올해 원목다리에 조성한 공다리 꽃길 500m     ©

 

 

 

▲ 마을공동체 사업인 태양광 발전     ©

 

 

미장 대부 ‘박태종’ 전설과 부촌

 

야화2리는 부자동네다. 예전부터 그랬다. 50가구 200여 명이 살던 동네가 지금은 40가구 100명이 채 못 되지만, 부촌으로서의 자부심이 성성한 곳이다. 이유가 있다. 우리나라 아파트 미장의 역사를 써온 주인공이 있고, 그 맥을 이어오면서 논산시 전체로 확산시켜왔기 때문이다. 

지금부터 100년쯤 전, 일제 강점기때 박태종이라는 사람이 살았다. 채운국민학교를 다녔는데 수재였음에도 상급학교 진학을 못하자 일본인 교사가 농사를 지으라고 땅을 주었다. 현재 풋살장 있는 곳 300평에서 농사짓던 박태종은 어느 날 지게를 뽀개 버린 다음, 서울행 기차에 무임승차한다. 서울역에서 청소하며 걸인생활하던 그를 왜경이 자기 하숙집에 데리고 간다. 하숙집 주인 역시 일본사람이었는데 하는 일이 건설청부업이었다. 사람이 똘망하니까 수양아들로 삼고, 미장기술을 가르쳤다. 

그는 논산에 내려와서 자기가 배운 신공법을 보급하였다. 그 맥은 김덕수로 해서 쭉 이어졌다. 동네사람 8할은 미장 기술자가 되었다. 아이가 태어나면 “야화리에 기술자 한 명 또 생겼네” 할 정도였다. 야화리는 농사만 짓는 인근 동네에 비하여 부촌이 되어갔다. 이 동네는 농촌총각이니 하는 말이 딴 나라 얘기 같다. 서울 아가씨들도 시집오는 동네가 되어서다. 미장기술 신공법은 인근 동네는 물론 논산읍내로도 퍼져나갔다. 미장은 물론 조적, 인테리어 등 아파트 건설의 주역이요 진원지가 되었다. 

이 마을 남인숙 부녀회장은 우기리 ‘놀뫼닥트’ 사장이다. 부녀회 일뿐 아니라 동네에 건설 관련 일에도 조력한다. 토목업체 운영했던 송범식 이장도 ‘한건설’과 협업중, 67세에도 여전히 현역이다. 그러나 박태종에게서 발원한 미장기술을 배우려는 후계자가 동네에서는 더 이상 나서지 않아 그 맥이 끊어질 위기란다. 미장의 대부 박태종이 전설 속으로 묻히려는 즈음이다. 

 

 

▲ 100년 전 신참봉댁 자리     ©

  

 

600마지기 신참봉댁과 ‘고지’ 먹던 시절

 

이 동네는 전설적 실화가 즐비하다. 동네한복판에 남아 있는 대지주 신참봉의 집은 주인이 바뀌면서 현대식 주택으로 변모했지만 그때 그시절 이야기가 전설로 전해온다. 신참봉은 신태근 노인회장 부친이다. 당시 농사채가 600여 마지기였던 신참봉은 재산 못지않게 자식복도 많았다. 66세때 서른살 아래인 부인을 통하여 낳은 아들이 신 노인회장이고, 70세 돼서도 막내딸을 보았으니 말이다. 

부자답게 호방하였다. 그는 덕유정 사백도 하였다. 강경장날이면 덕유정에 나가서 활을 낸다. 화살을 챙겨주던 시동이 과녁에 화살 몇 개를 더 꽂고는 명중 점수를 과장한다. 그러면 기분이 좋다며 명중 기념으로 동네잔치를 벌인다. 배고픈 동네사람들 멕이기 위한 배려였다. 농기계가 없던 시절, 600마지기 농사채는 동네사람들 다 동원해도 해결이 되지 않았다. 강경노동조합사람들이 대거 투입되고, 인근 화산리에서도 일하러 와야 했다. 은행도 없었고 현금, 현물(쌀)도 궁핍하던 당시, 옆 동네 사오십 명은 신참봉댁에서 고지를 먹었다. <고지>란, 임금을 미리 당겨서 받는, 지금식으로 얘기하면 가불이다. 이처럼 미리 받은 쌀로 춘궁기, 추궁기를 넘긴 것이다. 고지를 주던 신참봉 댁 후손들은, 부자집 자제들이 그러하듯 가세를 지키려 분발하지 않았던 모양이다. 그래도 장손 신태권만은 국회의원을 지냈다(제4대). 

신씨 집안인 신준균 전 이장은, 서울에서 삼성 다니다 귀촌한 경우이다. 그는 기자를 신참봉댁 창고였던 자리로 안내한다. 한때 창고였다가 집이 세워졌지만 이제는 허물어지기 직전인 폐가다. 이 허름한 집에 시대를 풍미하던 정치가 한 명이 살았더랜다. 그가 입을 열기만 하면 그에게 빠지지 않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정치적 역량이 뛰어난 분였지만, 운신하자면 경제력도 받쳐주어야 하는 게 현실! 결국 정계 진출에는 실패하고 연무로 건너가 초야에 묻혔더란다. 연무에서 기자생활을 한 그의 이름은 손병국, 그의 사돈인 서동문과 함께 이 동네에 정미소, 벽돌공장이 탄생되고....마을공동체 사업이 여의치 않자, 서동문 씨는 강경으로 나가 아이스케키 공장을 차렸다. 논산, 강경 최초의 얼음과자 공장....

 

▲ 복개된 동네우물을 설명해주는 신준균 전이장     ©

 

 

모악산 수맥이 공동샘 생명수로

 

이러저런 식으로 야화리 전설은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데, 모든 이야기 한복판에 우물이 있다. 야화리 한가운데 큰 우물이 있(었)다. 큰 정자나무가 서 있던 자리인데, 어느날 스님이 택일을 주문하였다. 정자나무를 베어내면 큰 인물이 못 나고, 베어내면 그 자리에 우물이 생기니 동네 물이 좋아지고. 

동네 사람들은 우물을 택하였다. 2백여 명이 먹어도 모자람이 없는 물이었다. 우물청소는 최기영 어르신의 몫이었다. 올해 90세 단신인 그는 1년에 두 번 밧줄을 타고 우물속으로 들어갔다. 칠석날 제를 올린 다음 서너질 되는 우물에 내려가 배꼽까지 잠긴 물을 두어 시간 물을 퍼올리는 그에게 어른들은 예언을 했다. “자네 집안과 자식 잘 될거야!” 우물 청소 잘 한 사람치고 아들 안 낳는 사람도 없다 했는데, 최 씨 집안 아들은 네 명 효자들이다. 

그 영험한 생명수는 상수도가 들어오면서 그 위에 슬라브를 쳐서, 마치도 복개천처럼 숨겨져 있다. 신준균 전이장에 따르면, 야화리 원목다리 인근은 모악산 수맥의 종점이다. 모악산에서 발원한 정기는 견훤 이야기가 전해오는 가야곡 쌍계사를 거쳐 이윽고 야화리 평야와 만나면서 마침표를 찍는다. 수맥 끝자락에서 솜아나는 지하수는 동네한복판 공동샘이 되었고, 인근 동네 물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맑은 정수(淨水)는 동네사람들의 생명수로 퍼져나갔다. 야화리는 장수마을이다. 송 이장 어머니는 작년에 100세 잔치를 벌였고 ‘백세주’를 권하면서 백세수를 누렸다. 올해는 기형서 어르신 100세 잔치가 예정되어 있다. 이 동네에 90세 넘은 노인만 해도 6~7명이다. 

물이 좋아설까, 지금까지 이 동네에는 장애인이 한 명도 태어나지 않음을 신기해한다. 장수는 타고나기도 하지만 건강 관리도 병행해야 가능하다. 올해 74세인 신 전이장은 고졸로서 대기업 삼성에 합격한다. 개천에서 용났다고 했지만 연고대 나온 친구들과 함께 하자니 버거웠다. 40대 때 결국 그는  스트레스를 못 이겨 사표를 내고 귀향을 한다. 6년간 머물면서 채운면에서 최연소 이장도 하지만 다시 상경, 서울살이로 복귀한다. 그러다 10년 전 이제는 가족과 함께 귀농하고 동네일도 새로 맡게 되었는데, 이런 과정에서 몸과 맘이 많이 힘들었다. 그래서 선택한 것이 달리기, 강변에서의 조깅이다. 

 

6·25 인공때 무사 평온은 오늘도 여전~

 

송이장은 장래가 촉망되는 젊은이였다, 전국 칼잡이들을 평정한 이리파 조석기 눈에는. 조석기 앞에서 목포파, 부산파, 논산 지택이 등이 설설 길 때 그에게 파격적인 제안이 들어왔지만, 그는 발걸음을 고향으로 돌렸다. 서른 살때 전일순 시장으로부터 표창을 받았고, 현재는 4남매로부터 좋은아빠상을 받는 중이다. 자녀들이 아빠표 계란을 맛본 후 다른 계란은 먹을 수 없다고 하니, 지인에게 청계 왕병아리를 주문해 놓았다. 송 이장은 인터뷰 도중 “청계 가질러 심암리로 가얀다”며 자리를 뜬다. 그 옛날 그가 OK만 하면 자기것이 되었을 10만수의 양계경영권은, 청계 30마리의 행복으로 부화한 것이다. 

싸움은 싸움을, 칼은 칼을 부른다. 6·25 인공때 야화리에 인민군 선발대가 도착하였다. 그들은 쌀을 내놓으며 “밥을 지어달라”고 부탁하였다. 그 고마움에선지 “밤에는 집밖으로 나오지 말라”고 당부하였다. 강경경찰서 야습하기로 한 날 상황이다. 이런 전시 상황 속에서도 이 동네는 평온하였다. 당시 마을마다 좌/우가 눈에 핏발을 세우며 같은 동네사람끼리 살상하는 사태가 빈발했지만 이 동네는 그런 불상사가 단 한 건도 생기지 않았다. 인민군도 인민을 존중하였거니와, 평소 소작농과 지주가 서로 미워하지 않았던 평온이 전시에도 그대로 깨지지 않은 산 역사다. 

이런 사례는 전국적으로도 찾아보기 힘들 거 같다. 그렇다고 해서 이 동네가 행복 지천인 것만은 아니다. 철로 주변에서 크고 작은 사고도 있었고, 지금도 폐가로 동네가 흉해보이지만 방치만 하는 등등..... 한편은 이러면서, 다른 한편은 역동적이다. 노성항공학교 다니는 아들(최병용)은 휴가날이면 엄마를 도와 땀을 흘린다. 그 현장에서 신 전이장은 “저 텃밭에 심겨진 머위가 건강에 엄청 좋다”고 귀띔해 준다. 쓴맛으로 기피음식였던 머위가 피를 맑게 해주는 특효제로 다가온다. 철로쪽 비닐하우스 속을 살펴보니 머위 군락이다. 반대편 코너 주택가 옆에 비닐하우스 한 동이 겅중하다. 농대출신인 유재청 씨가 가야곡에서 버섯 등을 재배했는데 별 재미 못 보다가, 이 동네에 와서는 하우스건설업자로 변신, 성공한 사업가라고 들려준다. 일반, 혹은 돔 어떤 형태로 주문해도 신공법과 외국인 노동자 동원으로 주인 맘에 쏙 들도록 지어준다는 전언이다. 

동네에서는 미장의 맥이 끊길 거라고 걱정하는데, 건축 신공법이나 전문기술은 다른 양태로 태어나는 듯싶다. 야화리의 전설은 현재진행형, 오늘도 기록중이다. 

 

- 이진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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