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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룡인생박물관] 이정규 계룡신성미소지음@경로당 회장
교단에서 익힌 스카우트정신, 노년의 ‘건강파수꾼’ 자양분 되다
기사입력  2020/10/15 [07:38]   놀뫼신문

[계룡인생박물관] 이정규 계룡신성미소지음@경로당 회장

교단에서 익힌 스카우트정신, 노년의 ‘건강파수꾼’ 자양분 되다

 

본지는 대한노인회 계룡시지회와 함께 [계룡 인생박물관]을 한면 이상에 걸쳐 게재하고자 합니다. "한사람의 노인이 죽으면 박물관이 불탄 거와 같다"는 아프리카 속담이 있습니다. 잔잔하면서도 때로는 격한 감동을 불러 일으키는 이웃 어르신들의 일대기를 어르신들의 손과 입이 되어 그려 나가고자 합니다.  노인 한분 한분은 이 시대의 박물관입니다. 얼핏 평범한 일생, 그렇고 그런 삶 같지만, 그 분들의 삶 속에서 온 몸으로 살아온 위대한 소시민의 철학과 이 시대의 역사가 용해되어 있습니다. 지역에 함께 살아오면서 자연스럽게 묻어나는 삶의 이야기를 주.객관적으로 서술해 나가 사라져가는 우리지역의 역사를 조금이라도 복원되기를 기대합니다. 놀뫼신문 [계룡 인생박물관]에 참여를 원하시는 어르신이나 가족, 친지 분은 본지 또는 대한노인회 계룡시지회로 연락바랍니다.   [편집자 주]


 

  

나이는 숫자에 불과한 이정규 어르신

 

매일 1만 7천 보를 걷는다는 어르신! 그래서일까, 외모와 걸음걸이에서 그 나이를 가늠하기 힘들 정도로 건강을 유지하는 분이 계룡시에 사신다. 금암동 신성1차아파트 경로당 이정규(李晶珪, 81세) 회장이 그 주인공이다. 그는 자신뿐 아니라 주변의 노인들에게 “함께 걷자” 권유한다. 노인정에 찾아오는 회원들에게는 “밖에 나가서 아파트 한바퀴 돌고 들어오라” 채근도 한다. 걷기 좋은 가을이 익어가는 어느 날, 건강 파수꾼 이정규 회장을 만나보았다.

 

서천 명문가에서 태어나 자취​​생활

 

이정규 회장의 고향은 충남 서천군 기산면이다. 그곳은 금강 하구둑이 지척인 곳으로, 전형적인 농촌마을이다. 그는 거기서 화수회(종친일을 맡아 보는 곳) 회장인 이장직(李長稙) 님의 3남 3녀 중 다섯째로 태어났다. 고향 땅에서 중학교까지 다녔다.

그의 고향은 대부분 농사를 짓고 살았지만 아버지는 농사를 짓지 않으셨다. 부친은 글을 읽고 쓸 줄 아는 소위 식자(識者)였는데, 벼슬이 많이 나온 가문의 종친을 맡아 일하자면 그 정도는 되어야 했기 때문이었다.

그런 아버지의 영향이었는지 아니면 가문의 내력이었는지, 그도 어렸을 때부터 공부라면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았다. 그는 학교에서 질문을 하도 많이 하여 담임선생님을 성가시게 하기로 유명했다. 그가 질문을 하면 선생님은 “자세한 것은 참고서에 있다”면서 대답을 피하곤 했단다.

중학교 졸업한 후 군산 사범학교로 진학을 하였다. 지금 같으면 새만금도로로 금세 갈 수 있는 거리지만, 도로사정이 좋지 않았던 당시에는 서천 화양에서 배를 타고 군산까지 가야만 했다. 학교에서 멀지않은 흥남동이란 곳에서 자취를 시작하였다. 그것은 젊어서 고생을 해보아야 세상살이를 배울 수 있다는 아버지의 뜻이었다. 그렇게 해서 그는 객지에서 혼자 밥을 해먹고 빨래를 하며 공부를 하였다.

 

장수 첫부임지에서 경찰국장에게 찍힘

 

1958년도에 사범학교를 졸업한 그는 전라북도 장수군에 위치한 번암국민학교에 교사로 첫 부임하였다. 그때가 갓 스무 살이 되던 해였다. 번암국민학교는 장수에서 남원으로 넘어가는 경계에 있는, 깡촌 시골학교였다. 하지만 그 학교는 38회의 졸업생을 낸 꽤 역사가 깊은 학교였으며 도 지정 연구학교이기도 했다. 그는 그곳에서 1학년 담임을 하였다.

막내 교사였던 그는 연구강의 등 힘들고 궂은 일을 도맡아해야만 했다. 6·25한국전쟁 때 학교 건물 일부가 폭격으로 일부 파손되어서, 그 전쟁의 상흔이 곳곳에 남아 있을 때였다. 학교 바로 앞에 큰 하천이 흘렀는데 그곳에 있던 교량이 전쟁 통에 폭파되어 유실되었다. 아이들은 그나마 얕은 물이 흐르는 곳을 골라 통학하였다. 비가 좀 많이 오는 날이면 수업을 중단하고 하천 건너편에 사는 아이들을 하교시켜야만 했다.

그때는 가정방문이라는 것이 있었다. 학생들의 형편을 파악하기 위하여 각 가정을 일일이 방문하여야 했다. 그 거리가 몹시 멀었다. 꼬불꼬불 산골이라서, 굽이굽이 고개를 넘고 또 물을 건너야 하는 곳이 많았다. 그래도 아무 군소리 없이 그 지역 구석구석 다니며 아이들 집을 모두 방문하였다.

그 학교에서 이런 일도 있었다. 1960년 3·15 부정선거 때였다. 당시 전북경찰국 국장이었던 최아무개란 자가 장수군 읍내에 지역의 모든 공직자들을 선거 전에 불어모아 놓고, 모종의 불법 지시를 한 적이 있었다. 그때 새내기 교사였던 그가 조금 늦게 그 장소에 들어갔다. 한참 이야기를 하던 경찰국장이 장내로 들어오는 그를 보고 대뜸 “넌 누구냐?”라고 물었다. “번암초등학교 교사 아무개”라고 대답을 하자 경찰국장이 수첩에 받아 적었다.

그 이듬해 그는 장수군에서도 더 오지에 위치한 강수면에 위치한 수분국민학교로 바로 전근이 되었다. 그는 경찰국장에게 밉보인 결과였으리라. 그곳은 교장 한 명과 교사 4명이 전부인 학교였다. 그는 4학년과 6학년 담임을 겸임하였다. 교장은 학교에 딸린 방 하나에 기거했고, 나머지 네 교사는 숙직실에서 함께 숙식을 했다.

 

결혼후 서천시절, 간첩 잡은 사건

 

그는 1961년 입대를 하였다. 논산훈련소에서 훈련을 마치고 강원도 양구에 있는 21사단에 배속되었다. 그곳에서 군 복무를 무사히 마치고 다시 복직한 곳은 전북 고창이었다. 그곳을 거쳐 김제 월산국민학교로 왔는데, 그곳에서 결혼을 했다. 1964년도였다.

신부는 고향 여자로 아버지와 한 고향 친구 딸이었다. 두 분이 서로 사돈을 맺기로 결정을 하고 날짜를 잡고, 그에게는 ‘고향에 와서 선을 보라’ 통보만 한 것이다. 그는 당시 교사들이 즐겨 입던 고르덴 바지와 웃옷을 입은 채로 고향에 가서 급히 선을 보았고, 일사천리로 식을 올렸다.

그리고 김제에서 신혼살림을 차렸다. 그리고 이듬해인 65년도에 첫아들이 태어났다. 현재 충남경찰청장으로 있는 큰아들 이철구다. 이후 둘 사이에서 모두 3남 1녀의 자녀를 두었다.

당시에는 북에서 남파한 간첩이나 공비가 심심치 않게 나타날 때였다. 그래서 학교에서는 학생들에게 반공교육을 정기적으로 실시하였다. “거수자(거동이 수상한 자)를 발견하면 즉시 신고하라”는 그런 교육이었다. ‘새벽에 산에서 내려오는 사람, 젖은 옷을 입고 다니는 사람, 바짓단에 흙을 묻히고 다니는 사람, 며칠씩 사라졌다가 나타나는 사람 등을 신고하라’는 등의 내용이었다.

6학년 담임이던 그의 반 학생이 집에서 하숙을 치루고 있었는데, 그 집 하숙생 세 명이 리어카 한 대를 끌고 나가더란다. “아니, 리어카 한 대에 무슨 장정 세 명이 할 일이 있을까?” 싶어 수상히 여겨져 학생이 몰래 따라가 보았다. 리어카를 도랑에 숨기고 보리밭으로 들어가더란다. 그래서 바로 경찰에 신고를 했고 간첩을 잡았다. 그래서 그 학생의 담임이던 그도 ‘반공교육을 학생들에게 잘 시켰다’고 표창을 받은 일이 있었다.

1966년 전북도에서는 시군학습지도 경연대회가 있었다. 그는 이 대회에 참가하여 좋은 성적을 거두었다. 교육청에서 그를 불러 ‘고향에 가고 싶으냐’ 물었다. 물론 그는 ‘보내주면 가겠다’고 답했다. 그해 6월 그는 교사생활 8년 만에 다시 고향으로 돌아오게 된 것이다.

 

대전에서 스카우트로 교직생활 활력

 

1966년 6월 고향 서천으로 돌아온 그는 문산초등학교를 거쳐 1967년, 고향집에 가까운 월기초등학교로 오게 된다. 이 학교는 고향집에서 아주 가까운 거리다. 그곳에서 약 7년 간 교사생활을 하며 고향 아이들을 지도하였다.

1974년, 대전에 있는 공산초등학교로 부임하게 된다. 이곳은 새마을 지정학교이기도 했다. 당시 이 학교 교장이 이용상 선생님이었는데, 그는 스카우트 활동을 적극 장려하였다. 젊은 남자 교사였던 그는 경기도 일산에 위치한 중앙연수원에서 스카우트 지도자 연수를 받게 되었다.

교육을 마치고 나온 그는 스카우트 지도자로서 대전 시내에서 보이스카우트 발대식을 갖고 스카우트 활동을 하게 되었다. 당시 심대평 도지사 부인이 걸스카우트 총재여서 여러 가지 지원과 교류도 갖게 되었다.

이 스카우트 활동은 그의 교직 생활에 큰 힘이 되었고, 힘들 때는 위안이 되었다. 그때 생활화된 스카우트 정신은 그가 살아가며 생활하는 데 근간을 이루었다고 술회한다. 지금도 노인정에 와서 방에만 앉아 있는 회원에게 “방콕만 하면 못 쓴다. 어여 나가서 아파트 한 바퀴 돌고 오라” 말하는 배경도 그의 스카우트 경력이다.

학교에서 이런 일도 있었다. 교장선생님이 학교 홍보물을 만드는 데 학교 전경을 촬영하기 힘들어 했다. 그 때 그가 나서서 당시 KBS 보도국장으로 있던 매형에게 촬영을 부탁했다. 매형은 헬기로 학교를 공중촬영해 주었는데, 이에 교장선생님이 엄청 고마워했단다.

 

박봉 속에서 만난 자녀교육 좌우명

 

그가 처음 교사생활을 했을 때는 하숙비를 내기도 힘들 정도로 박봉이었다. 그러던 것이 박정희 대통령이 되고나서 봉급이 한꺼번에 80% 인상되었다. 그래도 그 돈으로 4남매를 키우기에는 힘들었다.

큰아들은 이런 가정 형편을 감안하여 스스로 학비가 안 드는 경찰대학으로 진학했다. 아들은 84년도 입학하여 88년도에 졸업했는데, 그 마음 씀씀이가 큰아들다웠다고 말한다. 지금도 무척 고맙고 미안한 마음이란다. 현재 그는 충청남도 경찰국장이다.

그는 자녀들에게 항상 ‘자신감을 가져라’,  ‘정의로운 사람이 되어라’고 가르쳤다. 그래서인지 모든 자녀들이 잘 자라주었고 지금은 사회에서 꼭 필요한 사람으로 제 몫을 하며 산다고 자랑스러워한다. 자손들도 그 영향을 받았는지 손주들 방에 ‘할 수 있다’라고 글씨가 책상 위에 붙어 있다.

그는 자녀들에게 ‘학교는 중요하지 않다. 그보다는 전공이 더 중요하다.’고 강조하였다. 현재 인기 없는 학과라 하더라도 앞으로 전도가 있는 학과를 선택하여 전공하는 것이 더 낫다고 그는 말한다. 그래서 자녀들은 당시에는 인기가 별로 없었던 러시아어를 전공하고 또 다른 아들은 관광경영학을 전공하였다. 지금은 모두 인기 있는 분야가 되어서 좋은 직장에 취업해 사회생활을 잘하고 있다.

그의 이런 자녀교육 철학은 모두 교사생활을 하면서 얻은 것이었다. 첫 교사로 부임하던 1958년도에 전라도 정읍 산내면이라는 아주 산골마을로 봉사활동을 나갔다. 그곳 서당 훈장 집에 들어가니 <부정하게 얻은 것은 부정하게 쓰인다>라는 붓글씨가 벽에 걸려 있었다. 그것을 보고 크게 감명을 받았다.

이것은 평생 교직에 있으면서 그의 좌우명이 되었다. 과한 선물이나 촌지는 받지 않았다. 부끄러운 일은 멀리 했으며 평생 남의 것을 탐하지 않고 정직하게 살려고 노력하였다. 그래서 가족들은 남들보다 더 고생은 했겠지만 “이 또한 자손들에게 물려줄 수 있는 유산이 아니겠느냐?”고 반문한다.

 

 

 

 

 

 

 

산악회, 안전봉사단, 노인회장...진행중

 

그는 2001년도에 대전 관저초등학교를 마지막으로 44년 교직생활을 마감했다. 퇴직하는 날 학생들에게 마지막으로 한 말은 <정직하게 살아라>. 과연 그다운 일성(一聲)이었다. 그는 교사생활을 하며 셀 수도 없을 정도로 이사를 많이 했는데, 2005년도에 계룡시로 이사를 오면서 이곳에 뿌리를 내렸다.

2014년도에 신성미소지움 1차아파트의 노인회장이 되었고 지금 2회 연임 중이다. “회원은 모두 55명으로 무척 화합이 잘 되는 노인회였는데, 요즘은 코로나19 사태 때문에 노인정이 폐쇄되어 안타깝기 그지없다.”고 푸념한다.

지난 음력 대보름날 윷놀이가 올해 마지막 노인정 행사였다.  그때 수건 등 푸짐한 상품도 준비했고 쇠고기와 떡 등 먹거리도 풍부했다. 코로나 사태가 진정되면  회원들과 함께 예산에 있는 예당저수지로 나들이갈 계획이라고 희망사항도 피력한다.  

요즘 그는 샛별산악회를 조직하여 빨간색 모자를 단체로 맞춰 쓰고 인근 지역을 열심히 걷고 있다. 매일 7~8명의 회원들이 지팡이 하나씩 들고 모여 하루에 1만 7천보씩 걷는다.  건강의 비결이다. 

지난 6월에는 계룡시 안전봉사단을 발족하여 매월 두 번째, 네 번째 토요일에는 지역의 안전을 위한 봉사활동을 하고 있단다. 그의 이러한 행보는, 그의 건강은 물론 주위 노인회 회원들에게 선한 영향을 주고 있다. 그는 노인회 회원들에게 야외활동을 권하면서 밖으로 나가라 권하기 때문인데, 경로당 전체가 노년의 건강을 유지하고 있는 것이다.

 


  

신성미소지움 1차아파트 노인정에서 만난 이정규 회장은 무척 따뜻하고 배려심이 많았으며, 이야기를 참 재미있게 해주셨다. 필자는 이야기를 듣는 내내 즐거웠다. 그는 2004년도 천주교에서 베드로라는 세례명을 받고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 술은 좋아하는데 많이 마시지는 않는단다. 술이 좋은 게 아니라 같이 마시는 사람이 좋은 것이고, 그 대화가 즐겁기 때문이란다. 참 따뜻한 아버지 같은 분이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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