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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고] 망국의 길에 핀 꽃-동학
김용수(조각가)
기사입력  2020/10/14 [23:59]   놀뫼신문

[특별기고] 동학의 대의-2

망국의 길에 핀 꽃-동학

                                          

조선의 국정이념은 사대와 성리학에 있었다. 고려 강토였던 요하 동쪽의 만주 벌판을 명나라에 그대로 바치면서, 명의 제후국임을 자처하고 들어선 나라가 조선이었다. 이는 전에 없던 민족의 굴종이었다. 성리학은 주자가 유교경전을 재해석하여 관념을 극대화한 사상이었다. 이는 당대 불교이념에 눌려있던 중국인의 자존을 세우기 위한 표현이기도 하고, 중세 중소지주층의 이익을 대변하는 사상이기도 하였다. 

성리학의 특징은 명분과 의리론에 있었다. 이는 공맹孔孟의 인의仁義를 정치논리로 왜곡하는 한계를 노정하고 있었다. 송나라는 중원을 오랑캐 여진족 금나라에 내주고 양자강 이남으로 쫓겨왔으나, 중원의 정통은 한족漢族인 자신들에게 있다는 명분을 세워 정명正名으로 삼았다. 송나라는 오랑캐 금을 극복하는 것을 명분으로 여겼으므로, 사회 전반을 개혁하지 않을 수 없었다. 노비제로 대별되는 신분제를 혁파함으로써, 사회는 활력이 넘치고 사람마다 소질을 한껏 발휘할 수 있는 역동적인 분위기가 조성되었다. 춘궁기에 농민들에게 대여하는 양곡이나 씨곡을, 추수기에 화폐로 교환하여 나라 빚을 갚도록 하는 청묘법을 시행함으로써, 시장이 활성화되자 화폐와 물류의 유통이 원활하게 되어, 당나라에 버금가는 풍족함을 누릴 수 있었다. 여기에 과거시험으로 발탁한 관료들을 군현에 직접 파견함으로써 중앙집권적 왕권을 확보할 수 있었다. 이는 중국 역사상 가장 앞선 선진적 사회구현이었다.

 

신분제 혁파 송(宋)을 역행했던 조선 성리학

 

그러나 조선 성리학은 송나라와 반대의 길을 걸었다. 몇 백 년 간극 두고 조선 땅에 접목된 성리학은 그 외에 다른 학문은 사문난적으로 몰아세웠다. 한 번도 도전받아 본 적이 없는 선비들의 사상 경직은, 그대로 망국의 길이 되고 말았다. 조선은 출발부터 신권臣權이 강한 나라였다. 무장인 이성계와 정치철학을 제공한 성리학자들의 연합적 성격이 강했기 때문이었다. 고려 말 성리학자들의 명분은 원나라 치세에 발호한 고려 권문세족 척결과 토지의 고른 분배에 따른 사회개혁에 있었다. 명분은 필요에 따라 바뀔 수 있는 여지가 다분하여, 당쟁이 격화될 때마다 명분이 달라졌다. 파당의 이익을 대변하는 논리로 바뀔 뿐 아니라, 자신들의 신분제를 영구화하기 위한 차별을 극대화하는 논리로 작용되었다. 신권이 강하다는 것은 왕의 독단을 막는 장점도 있었지만, 향촌은 사림의 양반들이 장악하고 있었으므로, 조정의 정책이 왜곡될 소지가 많을 뿐 아니라, 민초들은 그만큼 촘촘한 그물망 내에 있었으므로 삶은 팍팍해질 수밖에 없었다. 조선은 말 그대로 사대부의 나라였던 것이다. 

나는 한동안 우리 고대사에 열중하여, 고조선 문명이 지구 반 바퀴를 돌 만큼 훌륭한 역사임을 자각하고, 이렇게 위대한 민족이 왜 망했을까? 고민하던 차에, 우연히 소장 다큐멘터리 작가가 쓴 책에서 단서를 보게 되었다. 흔히 망국병으로 당쟁, 임금과 지도층의 무능, 관리의 부패 등을 말해 왔으나, 이는 어느 나라 어느 시대에도 있는 것이어서 답이 될 수 없다고 생각해 오던 터였다. 우리역사는 노론사관에 장악되어, 역사에 불문율처럼 누구도 노비세습제가 망국의 단초임을 논하지 않았다. 조선의 노비는 40%를 육박할 정도였다. 내 좁은 소견으로는 거길 피해서 원인을 찾을 수 없었다. 노비세습제가 장장 500년이다. 만약 노비제를 풀어 인재양성의 길을 택했더라면 어떤 나라가 됐을까? 생각해 보라, 영정조 시대에 이르러 천만을 넘긴 조선은 4백만이 노비로 묶여 주인 한사람을 위해 공력을 쓰는 나라였다. 절반도 안 되는 양민(상민)이 모든 과중한 세금과 수탈, 노역과 군역을 지고 겨우 버티는 형국이었다. 더구나 당시 유랑인구가 백만을 넘었으니. 버틸 수 있는 동력이 상실되자, 노비세습의 일즉일천제(一卽一賤制: 부모 어느 한 쪽이 노비면 자식도 노비가 됨)를 종모법(從母法:어미가 노비일경우만 자식을 노비로 삼음)으로 바꿔 조금이나마 양민을 늘려보자는 보조조치를 낸 것이 18세기 영정조시대의 실상이었다. 나라가 망해가는 데도 조선의 선비들은, 송나라와 같은 근본개혁을 눈감고 있었다. 다시 생각해보라, 4백만을 종으로 묶어 국가에 공여할 능력을 사장시키는 사회 하고, 4백만 각자가 창조적 역량을 발휘하게 하는 국가하고 어느 곳이 더 행복하고 발전하겠는가? 

더구나 동족을 세습제까지 만들어 노비를 양산하고, 거래하고 500년을 부린 사람들이, 다름 아닌 선비들이었다는 데 충격은 컸다. 선비는 전인격체로 배웠기 때문이었다. 더구나 선비들이 공부하는 성리학은 말 그대로 ‘사람 본성을 살피는 학문’이 아니었던가? 또 자기들 스승 공자, 맹자, 주자는 노비를 부리지 않았음에도, 사림(농촌경제를 장악한 선비무리)이 정치를 완전히 장악하는 16세기는 노비 수가 양민 수를 초과하고 있었다. 그 책임을 어떻게 피해 갈 수 있을까? 노예 상거래는 서양에만 있는 줄 알고 있었기에 며칠을 잠을 잘 수가 없었고, 슬픔이 짓눌렀다. 하루 밤에 읽을 책을 시름시름 알면서 한 달이 걸렸다.  

 

의병장 유학자들마저 노비제 당연시

 

다음을 보자.

 

1. 무엇을 명名이라 하는가? 천자, 제후, 공경대부, 사, 서인庶人이 그것이다. 무엇을 분分이라 하는가? 상하, 존비, 귀천이 그것이다.   ......   귀한사람은 천한사람을 부리고, 천한사람은 귀한사람을 따른다. 윗사람이 아랫사람을 부리는 것은 마치 눈과 머리가 손발을 움직이는 것과 같고, 아랫사람이 윗사람을 섬기는 것은 나뭇가지와 잎사귀들이 나무 밑 둥과 뿌리를 호위하는 것과 같다. = 생육신 김시습의 <매월당 문집> (15세기)

 

2. 대방大防이란 적서의 명분과 귀천의 질서를 말하는 것이다. 국가와 가정이 공고히 유지되고 비천이 감히 존귀를 능멸하지 못하는 것은  바로 이 예법이 있기 때문이다. = <명종실록>의 퇴계 이황이 한 말(16세기)

 

3. 천지의 높고 낮음과 만물의 크고 작음이 있듯이  ...... 임금과 신하, 윗사람과 아랫사람, 귀한사람과 천한사람 구분이 있으며 ...... 어찌 서로 평등하겠는가? = 조선말 의병장 유인석의 <의암집>

 

말하자면 재야의 선비나, 대성리학자나, 망국을 코앞에 두고 일어선 의병장 유학자나, 모든 선비들 세계관에는 귀천과 차별은 마치 자연법과 같이 당연한 것이었다. 그러니 노비제와 그 세습에 아무런 문제의식을 느낄 수 없었다. 말로는 공자의 사랑과 정의를 치국의 근본으로 하여 백성을 편안케(安民)한다하면서도, 실제는 백성을 옥죄고 있었다. 

한 예로 퇴계 이황은 367명의 노비를 거느렸고, 전답은 3천 마지기에 가까웠다. 그 아들의 재산분재기 내용이었으니, 헛말은 아니었을 것이다. 조선시대는 농법의 발달과 농지개간 붐이 일어남으로써, 거기 노역을 담당할 노비는 많을수록 좋았다. 우리가 여행을 많이 가는 보길도 주인 윤 씨 집안 노비는 700이었다. 어느 왕실 척족은 만 명을 거느렸고, 이름 있는 사대부들은 천 명을 웃돌았다. 이러한 양반 사대부와 사림 선비들은 각종 세금, 군역(군복무) 등에 책무는 벗어나 있었다. 양반 선비들이 특권만 누릴수록, 백성들은 도탄에 허우적거렸다. 이것이 성리학을 익힌 조선 지도층의 한계였다. 

동학은 이러한 조선의 불합리한 구조와 차별을 극복하고자 한 자각의 소산이었다. 더 도타운 것은 동학이 민초들의 밑뿌리에서 솟았다는 데 있다. ‘사람이 하늘이다’는 선언은 그냥 출현한 것이 아니었다. 갖은 병폐를 뚫고 망국의 벼랑에서 건진, 인류사에 다시없는 천기누설의 영적 선언이었다. 

 

김용수(조각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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