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노트] 은진면 방축리 이병안 어르신
앙드레김처럼 멋쟁이로 늙어갈 터
세월도 방축리에선 잠깐 멈춰 쉬어 가는 모양이다. 좁은 마을길을 따라 들어서니 아직도 남아 있는 마을 샘이 분수로 물을 뿜어내며 오후 열기를 식히고, 주변엔 하늘로 막 날아 올라가려는 학이 반긴다.
코로나로 문이 닫힌 마을 회관 옆 모정에서 기다리시는 이병안 님을 만났다. 마스크 뒤로 가득한 웃음은 78세 나이를 잊은 듯 밝고 힘이 넘쳤다. 녹슬어가는 뻑뻑한 자물통을 무거운 열쇠 꾸러미를 들고 열 듯, 지난 시간을 찾아 나섰다. 낯설고 희미한 기억들이 한낮 햇살에 눈을 뜨는 것처럼 어렵게 하나씩 다가왔다. “에고 할 얘기 없어. 다 똑같지 뭐, 다를 게 뭐 있것어?” 하면서 이야기 꼭지를 찾았다.
난 방축리에서 1942년 2녀 1남 중 큰딸로 태어났어. 한학자이신 아버지는 집에서 한문을 가르쳤는데 큰 딸인 내게도 글을 가르쳐 주셨지. 제법 영리했던 난 세 번 읽고 세 번 쓰면 거의 읽을 수 있었어.
그런데 간혹 친구들 노는 소리가 담장 너머에서 들려오면 나가 놀고 싶은 마음에 글을 읽지도, 쓸 수도 없었지. 그러면 바로 회초리로 종아리를 다섯 대를 맞아야 했어. 아버지가 무척 엄했는데 특히 한문을 공부할 때는 호랑이 선생님이셨지. 8살에 학교에 입학하고 한문 공부에서 벗어날 수 있었어. 그렇게 혹독하게 공부했어도 지금은 생각이 안 나. 다행히 그때 필체는 남아 있어 “글씨 잘 쓴다” 소리는 듣고 있지.
집안 살림은 어렵고 동생들이 학교 다니면서 난 서울로 갔어, 그때가 14살이었던 거 같어. 다행히 진명여중에 입학했는데, 2학년을 마치고는 그만 둬야 했지. 돈을 벌어야 했으니까. 그래도 중학교 친구들하고 지금도 만나고 있으니 소중한 시간이지 뭐여. 내 옷이며 머리핀으로 치장하고 내 화장품까지 바르고 다녔던 친구랑 몇은 가끔 보고 있어.
백화점여점원, 데이트는 영화관람
학교를 그만두고 미도파 백화점에 있는 약국 점원으로 들어갔다가 대우가 좀 나은 2층 양품점으로 자리를 옮겼어. 결혼 전까지 백화점에서 일했는데, 그땐 멋쟁이였지. 머리도 일류 미장원에서만 하고, 화려한 시절였어. 앙드레 김이 명동 옆 소공동에서 조그맣게 의상실을 시작했는데 자주 갔어. 보조가 친구였거든. 그렇게 유명한 사람이 될 거라고는 꿈에도 생각 못 했지.
(앙드레 김 말투가 그때도 꼬부라진 발음이었는지 궁금하다는 질문에 “아녀 평범했어.” 하신다. “연애결혼을 하셨다고 해” 백화점 멋쟁이 아가씨, 연애 이야기를 재촉했다.)
연애랄 것도 없어 어릴 때부터 알던 동네 오빠였응게. 면에서 손꼽는 부잣집 아들였지. 군대도 ‘훈련소 소장인 외삼촌 덕에 바로 제대했다’ 하니까, 고생 모르고 살았지. 그런 샌님이 시골 논밭을 팔아 서울로 와 루핑공장을 차린 거여. 그래, 자연스럽게 만났는데, 그땐 지금처럼 찻집이 있던 것도 아니고, 데이트를 내놓고 하던 시절이 아녔어. 그래도 내가 영화를 좋아해 대한극장이나 중앙극장에 자주 갔지. 그때 본 영화? 많지. <벤허>,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콰이강의 다리>, 다 생각은 안 나지만 주로 영화 보는 게 데이트였어. 매일 죽자 살자 쫓아다니는 남편이 나도 싫지는 않았지. 오래 만났지.
27살에 결혼해 답십리에 있는 부엌 달린 단칸 셋방에서 신혼살림을 시작했어. 그땐 연탄가스 사고가 하루가 멀다고 일어났는데, 우리 식구도 큰일이 한 번 있었어. 셋째 낳고 얼마 안 돼 온 식구가 한 방에 뒤엉켜 자는데 둘째가 깨서 우는 겨. 잠결에 애를 달래니 아이가 토를 해 큰일 났구나싶어 식구들 깨우고, 문 열고, 동치미 먹이고, 한바탕 소동을 치렀지. 둘째 덕에 온 식구가 무사했던 겨.
삼 남매를 낳았는데, 지금은 다들 산부인과에서 애 낳고 조리원에서 며칠씩 있지만, 그땐 엄두도 못 낼 일이지. 남편 사업이 힘들어져 집에서 애를 낳았어. 물론 태는 남편이 잘랐지만, 이삼일 있다 바로 살림을 했지. 산후조리는 생각도 못 했어. 둘째는 사돈댁이 와서 애를 받았지만, 셋째 딸도 혼자 낳았어.
방축리 젖소부인으로
남편 사업이 녹록하지 않아 힘들 때 혼자 계시던 시어머님이 돌아가셔 시골집, 고향으로 내려왔어. 큰애가 3학년이고 둘째가 1학년이었을 땐데 농사가 없는 집이라 먹고 살 일이 필요했지.
당시 중앙종축장에서 일하는 시누 남편의 권유로 집 전세금을 빼서 소 5마리 돼지 5마리를 샀는데, 소 키우는 일은 정말 힘이 들었어. 새벽부터 일어나 물을 길어다 소젖을 닦고 젖을 짜고 분뇨를 치우는 일은 끝이 없는 일 같았지만, 열심히 하다 보니 소가 11마리, 돼지가 50마리로 불었어. 소, 돼지 키우면서 제일 힘든 일은 새끼를 받는 일였어. 순산하면 고마운데 새끼가 거꾸로 있으면 큰일이지. 그러다 새끼가 죽는 일이 있으니까. 기다리며 밤샘하는 일은 다반사였지만 그래도 새끼를 낳으면 집안 살림이 늘어나 좋았지.
젖소 키우기는 더 까다로워. 유방염에 걸리면, 젖을 짜도 납품할 수 없어 버려야 혀. 새벽부터 물을 길어다 젖을 닦고 소막 청소하는 일은 정말 힘 들었지만, 그 덕에 3남매 대학 공부를 다 시켰지. 내가 한 일 중 제일 큰일은 애들 다 대학에 보낸 일여. 애들이 착하고 공부도 잘했지만, 집에 오면 학교가 멀어 오가기 힘들었을 텐데도 축사 일을 잘 도와주었어. 온 식구가 매달려도 손이 부족할 판인데 남편은 시골 살림에 취미가 없어 술로 많은 시간을 보냈어. 결국, 술 때문에 쓰러져 한 3년 병원 생활하다 가셨어.
글쎄, 11월에 서울서 이사 왔는데, 그해 12월에 부녀회장이 이사 갔다고 그 일을 하라고 해, 부녀회장이 된 겨. 우리 마을은 산으로 둘러싸여 6·25 난리도 피해 갔어. 타지 사람들이 여기로 피난을 왔으니 그만큼 편안 곳이지. 가뭄도, 큰비도 없는 살기 좋은 곳여. 그래서인지 인삼이 좋아. 은진면 회장까지 11년을 했는데, 행사가 있으면 음식 준비부터 모두 한 손처럼 했지. 시 부녀회 행사나 여름 수련회는 다들 힘든 농사일을 놓고 참석하는 일이라 즐거웠지. 음식 준비하는 일도 많았지. 홍어회, 시래깃국, 겉절이, 양도 양이지만 참 맛있었어. 솜씨꾼들이 있응게. 내 솜씨가 좋은 게 아녀. 난 준비해 주는 일만 했어. 면 부녀회장을 하다 보니 논산시 재향군인회 부인회 부회장까지 맡게 됐지. 참 바쁘게 살았어.
마음대로 가고픈 여행과 한글대학
고맙게도 큰아들이 공무원시험에 합격하고 둘째도 대학 2년 다니다 경찰시험에 붙었어. 딸은 장학금을 받고, 그러니 학비 걱정도 직장 걱정도 안 해봤어 지들이 알아서 잘 찾아갔응 게. 그보다 고마운 일이 어디 있어?
이젠 큰 바람도 없어, 그저 몸 건강하게 지내는 게 꿈여. 여행을 좋아해 애들이 전국 팔도 데리고 다니며 구경시켜줬는데 코로나 19 땜에 꼼짝 못하고 있어. 제일 좋았던 곳은 제주도도 좋지만 한계령여. 굽이굽이 산길도 좋지만, 풍경이 정말 좋지. 강원도 감자옹심이는 내가 젤 좋아하는 음식여. 딸이 속초에서 젓갈 공장을 하고 있어 강원도는 자주 갔는데 요샌 못가.
빨리 좋은 시절이 와서 한글 공부도 했으면 좋겠구, 힘 있을 때 여행도 가고 싶은데 언제나 할 수 있을지.... 에고, 내가 고생은 정말 많이 했는데, 뒤돌아보니 그래도 다 좋은 시절이구먼.
고생스러웠다는 시간이 단단한 나이테처럼 눈가의 멋진 주름을 만들고, 큰 웃음에 더 깊어져 어르신 삶이 따뜻하게 전해 온다. 시댁 배나무 밑에서 세 살 된 큰아들을 안고 있던 멋쟁이 모습이 아직 남아 풀어낸 이야기가 쑥스러운 듯 얼굴이 붉어진다.
-유환숙 시민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