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노트] 성동면 개척1리 박종월, 박종남 자매
함께해 더 아름다운 삶
"난 오토바이 타는 할매"
오락가락하는 빗줄기가 너른 들을 적시고, 푸름이 점점 짙어가는 오후, 박종월(93세), 박종남(85세) 두 분을 만나러 길을 나섰다. “모정을 지나 건조장 맞은편 길로 오라”는 어르신 말씀에 좁은 마을길 가면서 좌우를 살폈는데도, 건조장을 지나쳐 개척2리 마을회관까지 갔다. 가던 길 돌아 나오니 길목에서 박종월 님 큰아드님이 손을 흔들고 있었다. 마을 안길로 조금 올라가니 제법 큰 나무가 길을 덮고 있다. 그 밑을 지나 마당에 차를 세우고 맞은편 박종남 어르신 집으로 갔다. 길을 사이에 두고 두 자매님은 석양빛처럼 고운 시간을 보내고 계셨다.
두 분 이야기를 한 글에 쓰기는 너무 긴 시간 같아 우선 형님인 박종월 님 이야기부터 듣기로 했다. 93세의 나이에도 지나온 세월을 생생하게 풀어내셨다.
부여 규암면에서 아버지 박판옥, 어머니 이순례 사이에서 1남 3녀 중 첫째로, 어려움을 모르고 자랐지.
엄격한 아버지는 “딸은 글을 배우면 시집가서 힘들 때마다 친정으로 편지를 보낸다”면서 글을 가르치지 않았어. 남녀칠세부동석이라고 남자들이 있는 곳은 절대 갈 수 없어 마을에 들어오는 유랑극단을 한 번도 보지 못했어. 파마머리를 동네 친구들이 다 해도 내 머리는 뒤로 땋아 내린 머리였으니 불만도 많았지.
한 번은 집안 언니 신랑감이 안경을 쓰고 왔는데, 인사하러 오는 사람이 “어른들 앞에서 안경을 썼다”고 혼쭐내어서 보냈지. 사진도 못 찍게 한 대단한 아버지셨어.
공부를 하고 싶었지만 언감생심이었지. 그래도 강상을 나온 집안 조카가 야학을 열어 밤에 한 시간씩 몰래 다니면서 숫자랑 한글에 눈을 떴어.
전쟁으로 작은집 대 끊겨 큰아들을 양자로
스무살 되던 해, 집안 아저씨 중매로 윗동네로 시집을 왔어. 첫아들을 낳은 다음 해 6·25전쟁이 나 어린 애를 데리고 열 식구가 세도 산막이 집으로 피난을 갔는데 다행히 산막 아주머니가 잘해주고, 준비해간 양식이 있어 불편해도 견딜 만했어.
근데 강경다리가 인민군 습격으로 무너지는 소리는 정말 무서웠지. 8일 정도 있다 집에 와보니 가축이며 살림살이가 난리였어. 더 큰 일은 시 작은어머니와 사촌 시동생 내외가 성동에서 있었던 민간인 학살 사건으로 돌아가셔서 갑자기 작은집 대가 끊긴 겨. 시아버님의 뜻으로 큰아들을 양자 보내고 혼자 있게 할 수 없어 가족이 다 합송에서 이사를 와 이곳에서 터를 잡았지.
그 사이 아이들도 태어나고 시누, 시동생까지 한집에 살아 식구는 16명이 되었어. 해마다 졸업하는 아이들이 있어도 늘 학생이 대여섯, 도시락 싸고, 차비 대주는 일은 보통 일이 아니었지.
일하는 사이사이 쑥을 베다 삶아서 팔아 차비를 주고, 막내 시동생은 김치를 15살까지 손도 대지 않아서 매일 계란에 생선 반찬을 준비해야 했어. 하루는 계란찜이 남아 둘째 아들에게 “먹으라” 했더니 삼촌 거라면서 먹지 않는 겨! 아이들 심성이 착해 나이 차이도 많지 않은 삼촌이었지만 하냥 있어도 싸움 한번 없었지. 그때 기억 때문인지 둘째는 지 댁한테 계란찜을 매일 해달라고 한다고 혀. 그 얘기 듣고 맘이 짠혔어.
막내동생 중매해 바로 옆집으로
집안 아주머니가 막냇동생을 중신하라고 매일 왔어. 조부가 큰 벼슬을 해 넉넉했던 집안이었는데, 아버지가 시골 땅을 팔아 서울에서 사진관을 차렸다 다 날리고 다시 시골에 온 가까운 친척 서방님이었어. 재산은 없지만 워낙 성품도 좋고 성실하고 인물이 좋아 막냇동생을 중신했지. 바로 우리 옆집으로 시집온 겨.
동생은 일이 많은 우리 집에 와 물독이 비면 물지게질을 해 독에 물을 채워 주곤 했어. 16식구에 일꾼이 네댓 명이 있는 살림이라 물 긷는 일은 큰일이었는데 말여. 동생이 착해 큰소리 한 번 없이 골목 하나 사이에 두고 이때까지 살았어. 고마운 일이지.
“가난도 씨가 있고 부자도 씨가 있다”고, 40년이 넘게 동네 이장을 한 제부의 성실함 덕분인지 아이들도 잘 살고 이제는 사는 데 걱정 없어. “초년고생은 꿔서라도 하라”더니, 우리 동생 두고 한 말 같어.
난 오토바이 타는 할매
남편은 손재주도 있고 앞을 내다보는 안목도 있었지. 일찍부터 발동기, 탈곡기를 사들여 논에 물을 대거나 탈곡하는 일을 맡아 하면서 삯을 받았어. 경운기도 동네에서 제일 먼저 샀지.
농기계를 가지고 있으니 일꾼이 늘 필요했는데, 한 명이라도 빠지는 날에는 내가 일을 해야 했지. 밥하랴 일 도우랴 자전거로 시간에 맞춰 오가기가 여간 힘든 게 아녔어.
둘째 아들이 중고 오토바이를 사와 학교 운동장에서 두어 시간 배우고는 강경에 젓갈을 사러 갔다가 브레이크를 못 잡아 젓갈 드럼통에 부딪히는 사고를 냈어, 첫날에 말여. 다치지 않은 게 천만다행이지. 그 후 오토바이는 농사일하는 데 큰 몫을 했어.
부지런하고 성실했던 남편이 63세에 간암으로 진단을 받고 13년 동안 투병 생활을 했는데. 그때부터 농사일은 내 일이 된 겨. 고장 난 농기계 고치는 일부터 부리는 일까지. 아침저녁 딸기하우스 논에 오가며 환기하는 일을 할 수 있었던 것도 오토바이 덕분여.
딸기 농사로 바쁠 때 큰아들이 내려와 도와주다가, 그대로 눌러앉아 농사꾼이 되었지. 조각을 하던 목공이었는데 하던 일 접고 농부가 된 겨. 젊어서인지 전문적인 농군이 돼보겠다고 대학원까지 다니면서 딸기 농사를 지었지. ‘논산시 농업대상’을 타고 2014년에는 논산시 딸기축제 추진위원장도 했으니 전문 농사꾼 꿈은 이룬 것 같여.
농업대상 시상식에 부부가 참석해야 하는데 “아침저녁 하우스 관리를 해줘 대학에 다니고, 농사를 지을 수 있었다”면서 어미인 날 데려가더군. 내가 얼마나 뿌듯하고 고마웠는지 몰러. 그 일도 오토바이 덕분이지. 평생 내 발 같던 오토바이 타는 걸 삼 년 전부터 그만두었지만, 지금도 탈 수 있을 것 같어.
우리집이 성동 천주교 공소
시아버님이 아주 아팠을 때 성당에 다니는 분이 와 기도를 해주고 갔는디, 그날 ‘많은 쥐를 동구리에 담아다 버리는 꿈’을 꾸고는 병이 씻은 듯 나아 천주교를 믿게 되었다고 혀. 그 후 온 식구가 신자가 되었고 나도 시집와 바로 세례를 받았어. 외국인 목신부가 주일마다 집으로 오셔 근동 신자들과 미사를 드렸지.
기도 덕분인지 살면서 큰 어려움을 겪지 않고 산 거 같은데, 7년 전 큰아들이 간암 수술을 받고 뒤이어 둘째가 위암, 다섯째가 폐암을 앓았어. 둘째와 다섯째를 먼저 보냈지. “자식은 가슴에 묻는다”고, 지금도 둘째가 몰던 나무 실은 대형 트럭을 보면 가슴이 철렁하고 구멍이 뚫려. 그래서 늘 기도하지.
건강한 삶도 내가 만드는 겨
평생소원이던 공부를 한글대학에서 하니 정말 행복혀. 동생하고 함께 가방 들고 나서면 부러울 게 없어. 한글도 배우고 난생 처음 볼링이라는 것도 해보고, 일주일에 두 번이지만 좋은 선생님을 만나 웃고 배우는 일이 감사하지. 이 나이에 영어를 배워 알파벳을 읽을 수 있고, 구구단을 외우니 내가 생각해도 정말 대견혀.
“심봉사 눈떴다”며 행복해하는 동생이 있어 학교길이 더 즐겁지. 빨리 코로나19가 끝나 공부할 수 있으면 좋겠는디....
93세 많다면 많은 나이지만, 아직 꼿꼿한 몸으로 삼시 세끼 내 손으로 하고 동네에서 고스톱 ‘타짜’여. 비록 따는 것보다 잃는 게 많지만. 든든하게 뒷돈 대주는 딸이 있고 함께 고스톱 치는 친구들이 있으니 좋지.
이렇게 생활할 수 있는 것은 아침, 저녁 스트레칭 덕분이여. 허리 다리가 아프지만, 나이 탓이고 그동안 힘든 일을 많이 한 탓이라 생각해서 하루에 네 번 운동을 꼭 하지. 삼천 번 정도 몸을 움직이고 나면 몸이 가벼워. 지금도 몸이 유연해 다리를 반듯하게 올릴 수 있어.
음식도 부담스럽지 않을 만큼 먹어야 혀. 세끼 밥 먹으면 간식도 잘 안 혀. 늘 감사한 마음으로 웃으며 살다 보니 주름이 이렇게 생겨도 내 나이로 안 봐. 허허
“어머니가 설거지하면 그릇에 찌꺼기가 남는 경우가 많지만 일시키는 게 효자라고, 그냥 하시게 한다”는 아드님은, 어머니 몰래 설거지를 다시 한다면서 인터뷰 내내 함께했다. 골목길 큰 나무는 뽕나무였다. 뽕나무처럼 버릴 게 없는 시간을 사신, 채운(彩雲)처럼 고운 두 분의 삶이 든든한 나무였다. 자식들의 버팀목이었다.
- 유환숙 시민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