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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노트] 양촌면 신기1리 노종우 님 "늘그막 한글학교 다니는 재미에 푹 빠지다"
기사입력  2020/06/17 [09:46]   놀뫼신문

[인생노트] 양촌면 신기1리 노종우 님

늘그막 한글학교 다니는 재미에 푹 빠지다

 

5년 전 남편을 여의고 고향집을 지키며 ‘뭉키와 복순이’ 반려견 두 마리를 친구 삼아 키우면서 씩씩하게 사시는 양촌면 신기리의 노종우 할머니(74세). 폭염주의보가 내린 6월 무더운 어느 날 댁으로 할머니를 찾아뵈었다. 고생하며 살았던 옛날이야기를 얼마나 재미있게 하시는지, 마치 드라마를 한 편 보는 듯하다.


 

 

 

 

“양촌으로 시집오던 날이 엊그제 같은데”

 

“비가 억수로 오는 날이었어요. 나를 시집에 내려주고 차는 가버리고, 낯선 곳에 홀로 버려진 기분이었답니다. 날은 이미 어두워졌고 비는 왜 그리 쏟아지는지, 눈물이 다 나더라고요. 그렇게 시집을 왔어요.”

1967년도 고향인 전주 시내 한복판 경원동에서 논산 양촌면 신기리 시골마을로 시집온 노종우 할머니는, 시집오던 그날이 엊그제 일인 양 생생하게 기억난다고 한다. 벌써 50년도 훨씬 지났는데도 말이다.

도시에서 살았던 할머니는 농사일이라고는 전혀 할 줄 몰랐다. 그래서 한 마을의 또래 친구들이 몇 있었는데, 그 친구들이 할머니를 보고 “어떻게 콩밭도 멜 줄 모르느냐?”며 오히려 할머니를 신기해하며 놀려댔다고 한다. 

할머니의 남편은 팔방미인이었다. 그러나 ‘실속은 없었다’고 할머니는 말한다.

“예비군 중대장도 하고, 마을 이장도 하고, 80년대에는 새마을지도자도 하고 여기저기 안 끼는 데 없이 돌아다녔던 양반이에요. 그럼 뭐합니까? 집안은 때거리가 없어서 굶게 생겼는데.... 하여간 실속 없이 그러고 돌아다녔어요.”

남편은 혈액암으로 오랜 투병생활 끝에 5년 전 돌아가셨다. 파월참전용사이기도 한 그는 경기도 이천 호국원에 안장되었다.

 

 

 

 

 

 

“못 먹이고 공부 못 시킨 게 한이야”

 

농촌에서 땅 조금 가지고 농사를 지으며 1남 5녀를 키우고 공부시킨다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이다. 할머니에게 그 어려웠던 지난날은 가슴에 한으로 남아 있다.

“모를 심을 때이니 아마 이맘 때였을 거예요. 우리 큰딸이 아주 어렸을 때였고, 내가 한 30살쯤 되었을 때였지요. 뒷집에서 모를 심는 날 일꾼들 밥해 먹인다고 쌀밥을 지어서는 우리집에도 한 그릇 담아 주었어요. 그것을 받아 남편과 딸과 셋이서 부엌에 앉아 나눠먹던 기억이 생생해요.”

‘이런 이야기를 하면 아이들이 싫어하는데’ 하시면서, ‘이왕 말이 나왔으니 맺힌 게 많아 가슴이 답답했는데 그거라도 뚫어져서 시원해지게 다 말해야겠다’시며 할머니는 말을 잇는다.

“둘째딸을 얻고서도 집안 형편이 나아지질 않았어요. 그 아이를 윤사월에 낳았는데, 그러니까 한창 보리 타작할 때지요. 집에 곡식이 똑 떨어졌지 뭡니까! 어른들은 굶더라도 애는 젖을 물리려야 하잖아요. 그러니 뭐래도 먹어야 하는데 막막하더라고요. 그래서 사촌형님 댁에 찾아가서 ‘보리타작하면 갚겠다’ 하고서 ‘두 말만 꿔달라’ 해서 얻어온 적도 있어요. 그것으로 며칠을 버텼지요”

어려웠던 이야기를 하자면 끝도 없단다. 한 해는 벼가 병으로 다 죽어버렸다. 면사무소에서 나와 조사를 한 후에 유신벼 몇 푸대씩 나누어 주어 그것으로 연명한 적도 있었다고 한다.

할머니는 ‘그렇게 없이 산 것이 가슴에 한으로 남는다’고 하신다. 힘든 것도 힘든 것이지만 “무엇보다 내 자식들 제대로 먹이지 못하고 공부 못 시킨 게 더 미안하고 한이 된다”시며 눈시울을 붉히신다.

 

 

 

 

“자식들 잘 사는 게 가장 큰 보람이지”

 

큰 딸이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양촌농협에 시험을 봐서 당당히 취업을 하게 되었을 때 너무너무도 기뻤다. 딸은 7년 동안 그곳에서 일하다가 결혼을 하였는데, 그때는 기쁘다기보다는 꼭 딸을 빼앗기는 기분이 들었다고 하신다.

“아마 큰딸을 많이 의지하며 살아서 그랬나 봐요. 큰딸이 외손주를 낳고 제가 줄곧 키워주었지요. 그 손주가 이제는 다 자라서 청년이 되었답니다. 오늘도 승용차로 나를 병원에 데려다주고 또 집으로 바래다주고 했어요. 이제는 그런 섭섭한 생각 안 들어요. 사실 딸을 빼앗긴 게 아니라, 든든한 아들 하나 얻은 거였는데 말이죠.”

하나 있는 아들은 일찌감치 상경하여 온갖 고생을 하며 금 세공하는 일을 배워 성실하게 일을 한 덕분에 이제는 자리를 잡고 단란한 가정을 이루어 잘 살고 있다. ‘아들이 빈손으로 서울에서 자리를 잡기까지 고생한 걸 생각하면 모두 어미 잘못 만나 그런 것 같아 미안할 뿐’이라고. 그러나 이제는 마을사람들이 모두 “그만한 효자가 어디 있느냐?” 칭찬하는 소리를 들으면 할머니의 어깨가 으쓱 올라간다. 1남 5녀 자식들은 모두 가정을 이루어 서울, 천안, 대전, 논산 등지에서 잘 살고 있으며 아홉 명의 손자와 한 명의 손녀를 둔 대가족을 이루고 있다.

 

 

 

 

“요즘은 한글대학 재미가 쏠쏠하지”

 

할아버지가 저 세상으로 떠나고 할머니는 우울증 약을 한동안 먹어야 할 정도로 깊은 상실감에 빠져서 지내셨다. 그러던 작년 여름 어느 날, 친구 할머니가 찾아와 “집에서 그러고만 있지 말고 한글공부 하러 같이 가자” 해서 들른 한글대학이 그렇게 재미있을 줄 모르셨단다.

“나야 한글은 이미 다 알지요. 한자도 많이 잊어버려 쓰기는 어려워도 읽을 수 있고요. 그래도 재미있어요. 우리 선생님 성함이 김임덕 선생님이신데, 얼마나 재미있게 잘 가르치시는지 시간가는 줄도 모른답니다. 이제는 한글 공부하는 시간만 기다린다우.”

‘어떤 공부가 제일 재미있느냐’는 질문에 색칠하며 그리기와 만들기 시간이라고 답하신다. 뿐만 아니라 선생님께 질문하고 답하며 보내는 공부시간 전체가 가장 행복한 시간이라고 말씀하시며 살짝 소원을 귀띔하신다. “더 열심히 공부해서 하고 싶은 모든 이야기를 직접 내가 써서 내 책을 한 권 펴내는 것이 앞으로 내 바람이랍니다.”

 


할머니는 오래 전에 허리수술을 하셨고, 4년 전에는 고관절수술을 하셔서 거동이 그리 자유롭지 못한 편이다. 그래서 딸기농사도 막내딸 대학졸업 후에는 그만 두고 이제는 밭농사만 조금 지으신다. “몸만 안 아프면 조그만 밥집 하나 해보고 싶은 마음도 있다우. 우리 손자가 하는 말이 ‘할머니가 식당 내면 끝내주지’ 하면서 엄지척 손가락을 치켜세우더라고요.” 할머니가 건강해지셔서 그 소원들이 모두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손지영 시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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