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노트] 벌곡면 검천리 성복례 어르신
80평생 38번 이사, 벌곡 검천리에서 꿈꾸는 캠핑카
논산 벌곡면소재지에서 갑천을 따라 남쪽으로 6㎞ 정도 내려가면 오른편으로 검천리로 들어가는 마을길이 나온다. 검천리까지 약 2㎞ 정도 되는 이 길은 환상 자체이다. 산벚꽃과 복숭아꽃, 배꽃이 형형색색 어우러졌고, 왼편으로는 갑천의 지류인 맑은 검천내가 흐른다. 마치 무릉도원을 들어가는 듯하다. 김수환 추기경 어린 시절 영화 ‘저 산 너머’ 촬영지가 바로 이곳이다. 이 풍광에 취해 가다보면 드디어 작고 예쁜 마을 검천리가 나온다. 그 길가 예쁜 집에 성복례 할머니(80세)가 사신다.
“나는 고향이 없어요”
할머니의 고향이 어디냐고 묻자, 답변은 “없다”이다. “평생 서른여덟 번을 이사했어요. 어렸을 때 기억하지 못하는 것까지 합하면 더 많을 거예요. 오죽 살기가 어려웠으면 그리 많이 이사를 했겠어요? 태어난 곳을 묻는 것이라면 부여 세도면입니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나이 차가 많이 나는데, 아버지가 상처하고 재취로 얻은 사람이 어머니였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어려운 집안이었다. 그래서 일을 찾아 이사를 많이 다닌 것이라고 한다. 하도 이사를 많이 다녀서 성복례 할머니는 학교도 못 다녔다고 한다.
“정규학교가 아닌 공민학교라고 있었어요. 한 번은 그곳에 가게 되어서 얼마나 좋았는지, 가슴에 공책과 연필을 넣고 학교 나갔지요. 나는 똑똑한 학생이었지요. 그런데 그곳에도 두 달밖에 못 다니고 또 이사를 갔어요.”
할머니의 어린 시절 이야기는 건너뛸 수밖에 없다.
“안 해본 장사가 없어요”
할머니는 대전에 사는 언니의 중매로 지금의 남편을 만나 1964년에 결혼했다. 남편은 키도 크고 아주 잘생긴 청년이었다. 할머니보다 두 살 위라고 한다. 남편은 당시 대전예식장에서 지배인으로 일하고 있었다. 모든 면에서 괜찮은 직장이었다. 그런데 결혼한 지 두 달 만에 다니던 그 예식장을 나오게 되었다. 그때부터 성복례 할머니는 팔을 걷어붙이고 장사를 시작하게 되었다.
“무언들 못할까! 나는 자신 있었어요. 하도 어렵게 살아서 그까짓 장사 정도는 자신 있었답니다.”
그래서 시작한 것이 식당이었다. 그것을 시작으로 10년 전 이곳으로 오기 전까지 할머니는 이것저것 안 해본 장사가 없다고 한다.
“식당을 제일 많이 했지요. 포장마차도 해봤고, 애견사업도 해보고, 정말 안 해본 일이 없습니다. 안영유원지에서는 물가장사라고 해서 물가에 천막을 치고 이것저것 만들어 팔기도 했지요. 대전 신안동, 유천동, 안영, 그리고 서산에서도 했습니다.”
남편의 병으로 공기 좋은 이곳으로
그러다 남편이 덜컥 병이 걸리고 말았다. 방광암, 그리고 연이어 전립선암으로 수술도 받고 항암치료를 받게 되었다. 그래서 하던 장사를 모두 정리하고 공기 좋은 곳으로 찾아 들어온 곳이 바로 이곳 벌곡면 검천리이다. 아무 연고가 없는 곳이었지만, 할머니는 항상 용감하다. 그들은 요양하며 편안하게 살기에 알맞게 그리 크지 않은 집을 예쁘게 지었다. 그리고 그곳에 정착했다.
“우리 남편은 말이 없는 사람이에요. 묵묵히 내 옆에 있어주는 한결같은 사람이지요. 그가 병에 걸렸을 때 나는 결심했어요. 이이를 한 번 살려보자. 그래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모두 다했어요. 몸에 좋다는 것을 구해서 해먹였지요. 반찬도 여러 가지를 해서 끼니때마다 골고루 먹을 수 있도록 신경 쓴답니다. 내 신세 참 안 됐다 싶기도 하지만, 지금껏 십 년째 이 일만 해오고 있어요.”
이렇게 말하는 할머니는 깊은 한숨을 내쉰다. 할머니는 남편 때문에 하루 24시간 꼼짝없이 갇혀 지내는 것이 가장 큰 스트레스란다. 그래서 하루 몇 대씩 피우는 담배연기로 그것을 날려버린다. 의사선생님도 “가슴에 맺힌 게 많으시니 폐에는 안 좋지만 조금씩은 피우시라” 허락하셨단다.
캠핑카로 두루 여행하는 게 소원
할머니의 취미는 바다낚시다. 그래서 할아버지가 건강할 때는 가끔 바다로 나가 배를 타고 낚시를 다녔다고 한다. 그러나 지금은 그렇게 좋아하던 낚시도 이제는 꿈에서나 할 수 있을 뿐이라고 한다.
“감옥에 갇힌 것은 언제 나온다는 기약이라도 있죠. 이건 기약 없이 집에만 갇혀 있으려니 가슴이 답답합니다. 그리고 100원을 벌면서 1,000원을 쓰는 것은 표가 안 나는데, 아무 벌이가 없이 야금야금 곶감 빼먹듯 쓰기만 하니 내일이 불안하지요. 요새 그게 걱정이에요.”
할머니는 속절없이 늙어가는 자신을 생각하면 가슴이 답답하고 울렁거린단다. 알 수 없는 미래에 대해 불안감도 커서 밤잠 설치기 일쑤란다. 밖으로 나가 여행하는 것을 좋아했던 할머니가 집에만 있어서 생긴 마음의 병이란다.
“다시 젊어진다면 장구도에 가서 맛조개도 캐먹고, 캠핑카를 타고 전국 여기저기 구경하며 다니고 싶어요. 텔레비전에 여행 프로그램이 나오면 나는 잠도 안 자고 본답니다. 운전이라도 배워두었으면 이럴 때 차 끌고 나가서 드라이브라도 하고 들어올 텐데, 그것도 바삐 사느라 배우지 못했어요. 자전거 타는 것도 못 배웠는데요, 뭘.”
하지만 요즘에는 한글학교에 나가는 재미가 있어 그것만 기다리게 된다고 한다. 할머니 자신은 말할 것도 없고, 밖에 나가려고 하지 않는 남편을 데리고 나갈 더할 나위없는 좋은 기회이기 때문이다. 글을 몰라 아이들을 키울 때는 동화책 한 번 읽어주지 못했는데, 지금은 글을 배워 읽어줄 수 있지만 이제는 그것을 들어줄 자식이 옆에 없다. 그래도 할머니 입에서는 “시장님! 고마워요. 이렇게 좋은 한글교실 만들어 주셔서~” 소리가 절로절로다.
성복례 할머니는 건강이 좋지 못한 남편 문성용(82세) 할아버지를 끔찍하게 보살피며 살고 있다. 할아버지는 그 덕분에 계속되는 항암치료에도 불구하고 아주 건강하다. 다만 항암치료 후유증으로 아주 가벼운 치매 증상을 가끔 보일 뿐이다. 문성용 할아버지는 깔끔하고 화끈한 할머니의 성격에 반해 청혼을 했고, 지금도 그 사랑에는 변함이 없단다. “검은 머리 파뿌리 될 때까지” 서로 마주보며 웃으시는 두 분 백년해로 모습에 딱 맞는 속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