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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노트] 가야곡면 강청리 이순예님 "사부곡(思夫曲) 쓴 늦깎이 시인(詩人) "
기사입력  2020/02/20 [13:30]   놀뫼신문

[인생노트] 가야곡면 강청리 이순예(李順禮, 80세) 어르신

사부곡(思夫曲) 쓴 늦깎이 시인(詩人) 

 

 

논산시 가야곡면 강청리는 저수지를 사이에 두고 아랫말 윗말로 나누어져 있는데, 두 마을을 합쳐 약 40여 가구가 옹기종기 모여 사는 전형적인 작은 농촌마을이다. 입춘(入春)이 지나 봄 날씨가 완연한 어느 날 따뜻한 오후 그 아랫말에 사는 이순예 할머니를 찾아뵈었다. 올해 팔십인 그녀는 4년 전에 남편을 여의고 혼자 살고 계셨다. 그 마을에 함께 살며 어머니를 살뜰하게 살피는 넷째 서승효(徐承孝, 52세)씨와 마을 할머니들이 자리를 함께 했다. 넷째는 이 마을의 이장이기도 하다.

 

친정아버님

19살 청춘 때-제일 왼쪽

 

마음이 넉넉했던 부모님과의 어린 시절

 

이순예 할머니는 논산시 가야곡면 산노리에서 태어나서 결혼하기 전까지 그곳에서 줄곧 살았다. 그곳이 대대로 농사를 지으며 살아온 부모님은 그리 부농은 아니었지만 마음만은 넉넉한 분들이었다. 아버지는 온화한 분이었고 어머니는 자상한 분이었다. 그들은 칠남매를 두었는데, 이순예 할머니는 그 중 보지도 않고 데려간다는 셋째 딸이었다.

이순예 할머니의 말을 직접 들어보자.

“6.25전쟁 때, 북에서 내려온 피란민들을 저희 부모님이 거둬서 먹여주고 재워주고 그랬어요. 제가 그때 집안일을 거뜬히 도울 때니 아마 열 살은 더 먹었을 때에요. 제 기억으로는 그 피란민들이 예닐곱 명은 족히 되었을 겁니다. 저희도 그 난리 통에 무척 힘들었는데, 그들을 거둬들이는 부모님을 그때는 이해할 수가 없었어요. 저희 집이 그런대로 먹고는 살았지만 그렇다고 넉넉한 집은 아니었거든요. 식구도 많았고요. 그 뿐만이 아니에요. 전쟁이 끝난 후로도 우리 집은 보따리장수들, 장돌뱅이라고 하지요? 그 사람들이 길 가다가 늦으면 들어와 하룻밤 묵고 가는 그런 곳이었어요. 싫은 내색 없이 다 받아주시는 아버지, 어머니였답니다. 지금 생각해보니 그래도 그 친정 부모님의 심성이 자손들에게 넘어와서 모두 착하게 사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이순예 할머니는 이미 오래 전에 돌아가신 아버지 어머니를 아주 따뜻하고 좋으신 분들로 기억하고 있었다. 또한 그 심성을 닮아 모든 자손들이 넉넉하지 않은 가운데서도 이웃들과 나누며 더불어 잘 살고 있다고 믿고 계셨다. 이순예 어머님의 편안하고 항상 웃는 표정도 아마 부모님의 심성을 닮아 그런 것이리라.

 

시부모님

 

결혼, 그리고 새로 생긴 식구들

 

이순예 할머니는 당시로서는 조금 늦은 나이인 24세 때 결혼하였다. 남편은 이웃마을인 지금 살고 있는 강청리에서 농사짓는 서용선(徐龍善, 4년 전 작고)이라는 잘생긴 청년이었다. 그는 6남매 중 둘째였다. 성격이 자상하거나 유한 면은 없었다. 좀 까칠한 편이었는데, 그래도 속정은 깊은 사람이었다고 한다. 

이순예 할머니의 말을 직접 들어보자.

“처음 시집을 와서 보리를 절구에 찧는데 손에 물집이 다 잡히고 터져서 무척 아팠던 기억이 나요. 보리농사는 처음이었거든요. 무척 낯설고 힘들었지만 그러려니 했어요. 다들 말 않고 억척같이 살 때였으니까요. 그래도 남편이 제게 살가운 말은 안 해도 많이 챙겨주었어요.”

이순예 할머니는 남편과 사이에 3남2녀를 두었다. 위로 딸이 둘이고, 아래로 아들이 셋이다. 큰 딸은 천안에, 둘째딸은 부천에, 그리고 큰아들과 둘째 아들은 한 동네에 살고 있으며 막내 아들은 인천에 살고 있다. 물론 모두 결혼해서 손주들이 열한 명이며, 증손녀도 둘이나 된다. 모두 넉넉하진 않더라도 부족함 없이 잘 살고 있다고 한다.

이순예 할머니는 자식들을 키우며 풍족하게 해주지 못한 것이 항상 마음에 걸린다고 한다. 그러나 그들은 모두 부모 속 한 번 썩이는 일 없이 알아서 공부하고 스스로 나가 자리를 잡고 살고 있다. 직접 얘기를 들어보자.

“모두 효자 효녀에요. 모두들 잘 살아줘서 너무 장하고 고맙지요. 자식들 공부시키랴, 독립시키랴 다들 힘든 거 뻔히 아는데, 혼자 사는 이 어미 챙긴다고 마음 쓰는 거 보면 짠해요. 4년 전인가, 그때는 넷째네 손주들이 아르바이트 해서 용돈 모은 것으로 할아버지 할머니 일본에 효도관광도 시켜주었답니다. 덕분에 남편이랑 좋은 구경하고 왔답니다. 너무 고맙지요.”

이순예 할머니는 이 이야기를 하며 돌아가신 남편 생각이 났던지 눈물을 훔쳤다.

 

 

 

남편 故 서용선님의 이야기

 

이순예 할머니의 남편 故 서용선님은 4년 전인 2016년에 돌아가셨다. 폐암 판정을 받고도 해외여행을 다녀올 정도로 그런대로 건강을 유지하며 지내왔는데, 항암치료를 받으러 병원에 들어갔다가 4일 만에 너무도 갑작스럽게 돌아가시고 말았다. 그래서 이순예 할머니는 물론 가족들의 슬픔이 컸고 또 오래 가고 있다. 넷째 아들 서승효 씨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아버님께서 아주 멀쩡하게 병원에 들어가셨다가 4일 만에 갑자기 돌아가셨으니 어디 믿을 수나 있었나요? 더구나 저는 장모 상을 당해서 장례를 치르고 삼오제 하는 날 아침에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연락을 받았으니까요. 그 충격은 너무 컸습니다. 또 공교롭게도 상을 치루었던 바로 그 병원에서 아버지가 돌아가셨으니까요. 우리 부부는 일주일에 부모상을 두 번 치룬 겁니다.”

이 이야기를 하는 그의 말끝이 흐려지며 눈가가 젖는 것을 보니 그 슬픔과 충격이 무척 컸음을 알 수 있었다.

남편이 어떤 분이었는지 말해달라는 기자의 요청에 이순예 할머니는 망설이다가 작정을 하고 말문을 열었다. 직접 들어본다.

“그 양반 다 좋은데, 한동안 놀음을 했어요. 그때는 정말 속 많이 썩었지요. 한 번은 이 동네 머슴 사는 사람의 돈을 따서 들어왔어요. 그래서 내가 말했지요. 당장 돌려주라고. 그리고 앞으로는 따지 말고 잃으라 했어요.” 

“처음에는 그 양반 놀음하는 것에 대해서 내가 별 말을 안 했어요. 그런데 논 열서넛 마지기 살 수 있는 큰돈도 잃고 오고, 그리고 그 횟수도 점점 잦아지고, 더욱이 우려가 되는 것은 우리 동네를 벗어나 다른 동네까지 가서 하더라구요. 그래서 돈을 잃으려면 우리 동네에서 잃어야지 어찌 남의 동네까지 가서 돈을 잃고 오느냐 역정을 내기도 했지요.”

“그러다 하루는 참다참다 못해 내가 그 노름하는 곳을 찾아가서 다 뒤집어엎고 드러누워 버렸어요. 화투장을 입으로 잘근잘근 씹어버리고 노름판 밖으로 집어던지니까 거기서 놀음하던 사람들이 많았는데, 모두 놀라서 입을 쫙 벌리고 어쩔 줄 몰라 했죠.”

함께 있던 넷째 아들 서승효씨도 아버지의 놀음에 대해서 한마디 거들었다.

“어렸을 때 저는 형이랑 아버지가 놀음하는 곳에 몰래 가서 돌을 던지고 도망오기도 했습니다. 어린 마음에 그랬죠. 그리고 형이 중학생이고 내가 열 살 쯤 되었을 때, 형이 놀음하는 아버지 손을 잡고 ‘도대체 언제까지 이러실 거냐?’고 말했었습니다. 그때부터 아버지가 놀음을 끊으셨지요.”

당시 이순예 할머니는 몸이 안 좋아서 무척 고생을 하고 있었는데, 남편이 놀음을 끊자 거짓말처럼 건강을 회복하였다고 한다. 아마 남편의 놀음 때문에 생긴 스트레스가 풀려서 그런 모양이었다고 말한다.

 

 

눈물로 쓴 사부곡(思夫曲)

 

남편이 갑자기 돌아가시자 이순예 할머니에게 남편의 빈자리는 너무도 컸던 모양이다. 시간이 지나면 좀 나아지겠지 했으나 오히려 그 아픔은 시간이 지날수록 더했다. 그러던 중 그 해에 그녀가 사는 강청리 마을에 한글교실이 세워졌다. 사람들은 그런 걸 뭐하느냐 했지만 이순예 할머니는 배우면 어떠냐면서 적극적이었다.

한글교실은 화요일과 목요일 주 2회 한글 선생님이 마을에 오셔서 한글을 직접 가르쳐주셨다. 학생들은 이 마을에 거주하는 10여 명의 할머니들이었다. 대부분 무학자였고 나이도 들어서 한글 배우기가 만만치 않았다. 그럴수록 이순예 할머니는 한글 익히기에 더 열성을 부렸다. 아마 먼저 간 남편 생각을 잊으려고 그랬는지도 모르겠지만, 결과는 그렇지 않았다.

한글을 배우고 이듬해가 되니 어느 정도 쓸 수 있게 되었다. 이순예 할머니는 그때부터 머릿속에 있던 생각들, 마음에 품었던 상념들을 종이에 글로 옮기기 시작했다. 특히 남편이 보고 싶을 때는 그 마음을 글로 옮겼다. 지난 달력을 뜯어 뒷면에 연필로 한 자 한 자 꼭꼭 눌러쓴 글들은 시가 되었고, 그렇게 사부곡(思夫曲)이 만들어졌다.

이순예 할머니는 한글교실에서 이 시를 발표했고, 그렇게 이 시는 세상으로 나와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울리다가 급기야 충청남도 도지사 상까지 받기에 이르렀다. 그게 2017년, 3년 전의 일이다. 그 시를 여기에 소개한다.

 

하늘나라 당신에게

 

황새 한 마리가 논에 날아왔습니다.

흰 옷 좋아하는 당신 생각나서

한나절 빨래만 했습니다.

 

까치가 콩둑에 날아 왔습니다.

모자 벗고 땀 닦는 당신 생각나서

시원한 미숫가루 회관에 돌립니다.

 

두려운 세상 나 혼자 놓고

이리저리 나타나는 당신 모습에

그리워한들 소용없어

미운 마음 가득합니다.

 

그래도 걱정하지 마요.

글을 배우니 두려운 마음 없어지고

당신 자리 채울 친구들도

하나둘 생깁니다.

 

오늘도 동고동락 친구들과

공부도 하고 그림도 그리고

행복하게 하루하루 보냅니다.

 

충청남도 도지사 상을 받는 날 그 식장의 풍경을 직접 아들에게 들어본다.

“청양군에 있는 큰 회관에서 시상식이 있었는데 장말 그 식장이 깍 찰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모였습니다. 관계자들과 충남의 모든 한글교실이 다 모인 것 같았어요. 거기서 어머님 시가 낭송되자 여기저기 눈물들을 흘리시는 분들이 많았습니다. 저도 눈물을 흘리느라 정작 시장님께 감사하다는 인사도 못 드렸습니다. 이 기회를 통해 시장님께 죄송하고 감사하다는 말씀을 올립니다.”

 

 

서로에게 하고 싶은 말

 

이순예 할머니는 자손들에게 고맙고 미안하고 사랑한다는 말 외엔 특별히 할 말이 있겠냐면서 한 마디 하셨다.

“한창 학교를 다니는 손주들도 있고, 또 졸업해서 취업준비를 하는 우리 손주들도 있고, 결혼해서 애 낳고 잘 사는 손주들도 있고, 모두 건강하고 목표하는 대로 다 이루어져서 행복하게 사는 거 밖에 뭘 더 바라겠어요.”

함께 자리를 한 이 마을 이장 넷째도 어머님께 말씀드렸다.

“자식들한테 짐 되지 않을까 그런 걱정하지 마세요. 어디 놀러가고 싶다, 뭘 드시고 싶다, 뭐든지 다 말씀하세요. 어머님이 건강하고 행복하게 오래오래 사시는 게 저희들 도와주는 거에요. 보일러 자꾸 끄지 마시고요. 뜨뜻하게 지내시라니까요.”

이 아들은 한 동네 살면서 낮에는 말할 것도 없고, 추운 밤에는 몇 차례씩 몰래 와서 화목 보일러에 장작을 넣어드리고 간단다. 그 자리에 함께 했던 마을 친구 할머니들도 이구동성으로 이순예 할머니에 대해서 한 마디씩 거들었다. 배고픈 사람 있으면 뭐든 해먹으려는 마음씨 좋은 할머니라고, 그런 사람 또 없다고. 서로를 아끼고 사랑하는 훈훈한 자리였다.

 

손지영 시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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