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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노트] 계룡시 엄사면 송수혜(宋雖惠)님 “돌이켜보니 온통 감사할 일뿐인 나의 삶”
기사입력  2019/10/02 [14:40]   놀뫼신문

계룡시 엄사면 송수혜(宋雖惠)님 인생노트

“돌이켜보니 온통 감사할 일뿐인 나의 삶”

 

▲     © 놀뫼신문

 

  송 수 혜 (宋雖惠)   

  • 1931년 12월17일 충북 진천에서 출생
  • 1947년 풍문여고 입학
  • 1954년 결혼(남편 전명석)
  • 2009년 계룡으로 이사

 

▲ 진천 이월면 국민학교 때, 1943년, 뒷줄 제일 왼쪽     © 놀뫼신문

 

부농의 딸, 유복했던 어린 시절

 

내 고향은 충청북도 진천군 이월면이에요. 당시 이월은 진천에서 무척 큰 장이 서는 곳으로 군내에서도 큰 부자들이 많이 사는 곳이었지요. ‘생거진천 사거용인(生居鎭川 死居龍仁)’이란 말도 있잖아요. 그 정도로 전답(田畓)도 많고 물산(物産)도 풍부하니 이래저래 살기 좋은 곳이었답니다. 지금은 공단이 생기고 많은 공장들이 들어섰다고 들었어요. 십 수 년 전에 한 번 지나가면서 보니 아파트들도 많이 들어섰고 여느 도시 못지않게 발전했더라고요. 그러니 내가 낳고 자라고 살던 곳이 어디쯤인지 가늠하기도 힘들게 되었답니다.

나는 그곳에서 송씨네 집안 귀한 고명딸로 태어났어요. 태어난 날은 1931년 12월17일인데 당시에는 으레 그렇듯 출생신고를 늦게 해서 주민등록상으로는 1년 정도 늦게 되어 있지요. 그러니 실제 나이는 우리 나이로 89세에요. 오래 살았지요.

옛날 얘기를 하자면 우리 아버지 이야기부터 시작해야겠군요. 우리 집안은 대대로 진천에서 몇 손가락 안에 드는 부농이었어요. 논밭도 많고, 일하며 붙여먹는 사람들이 많아 항상 집에는 객식구들로 붐볐답니다. 그런 집안의 아버지는 귀한 아들이었어요. 아버지의 함자는 송필만(宋弼晩)이고, 한학을 공부하신 분으로 인근 모든 이에게 선생님으로 불렸지요. 일찍 결혼해서 오빠를 낳고 부인이 병으로 일찍 세상을 떴지요. 그리고 십여 년 후에 나이 차가 많이 나는 나의 어머니와 재혼을 하셨답니다. 당시 아버지는 삼십이 훌쩍 넘은 나이셨고, 어머니는 이십이 안 되는 어린 처녀였지요. 그리고 나와 내 남동생을 연달아 낳았어요. 그래서 오빠와는 나이 차가 많이 났었답니다.

아버지는 저와 동생을 낳고 얼마 안 있다가 공부하러 가신다고 훌쩍 미국으로 떠나셨어요. 사실 일제 치하에서 일본놈들 보기 싫다고 떠나신 거였죠. 먹고사는 데는 걱정 없던 집이었지만, 어머니는 아버지를 무척 원망하시며 눈물로 9년이란 긴 세월을 기약 없이 기다리며 지내시던 것을 어린 시절 저는 곁에서 지켜보았답니다. 아버지는 미국 하버드대학에서 법학과 정치학을 공부하시고 박사가 되어 해방 직전에 돌아오셨어요. 아버지는 일제가 망하기 직전 극심한 탄압에도 굴하지 않고 본인은 물론 우리 식구 모두 창씨개명도 안 시키고 매일 일본놈들 욕하면서 지내시던 것이 기억에 생생합니다. 얼마나 조마조마했던지.

그리고 드디어 해방을 맞았고 아버지는 바로 독립정부의 헌법을 기초하는 분으로 들어가셨어요. 1948년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고는 바로 제헌국회의원으로 뽑히셨답니다. 야당인 민주당 국회의원이셨어요. 그리고 일제의 앞잡이인 친일파를 청산하는 반민특위로 활동하셨고요. 물론 다 아시다시피 친일파 청산은 실패했지만요. 아버지는 야당의원으로 계속 정치를 하셨고, 우리 가족은 서울 원서동으로 이사를 하게 되었답니다. 지금은 한옥이 보존되어 있는 북촌으로 더 유명해진 곳이지요.

 

▲ 서울 풍문여고 시절 뒷줄     © 놀뫼신문

  

▲ 서울 풍문여고 시절 뒷줄 제일 오른쪽     © 놀뫼신문

 

꿈 많았던 여고시절과 전쟁

 

나는 서울 제일 한복판 중앙청 바로 옆 안국동에 위치한 풍문여고를 다녔습니다. 이화여고, 숙명여고와 함께 명문여고였지요. 지금은 중앙청이 헐리고 광화문이 들어섰지만, 그때는 일본의 조선총독부였던 중앙청 건물이 바로 학교 교정에서 보일 정도로 가까운 거리였습니다. 원서동 집에서 학교까지 창경궁(당시에는 창경원이라 해서 동물원과 큰 놀이동산이 있었습니다.)과 창덕궁(당시에는 비원이라 불렀습니다.) 돌담길을 따라 매일 등하교를 하였습니다. 참 아름다운 길이었지요.

누구든 마찬가지이겠지만 내게도 이 여고시절은 참 꿈도 많은 좋은 시절이었답니다. 마음만 먹었다면 대학으로 충분히 진학도 할 수 있었고, 아니면 집에서 등만 살짝 떠밀어도 못이기는 척 갈 수 있었지만 나는 스스로 대학 진학을 하지 않기로 결정하였습니다. 딱히 공부하고 싶은 것도 없었고, 또 공부보다는 자수나 살림을 배우는 것이 더 흥미로웠습니다. 그래서 어머니로부터 바느질, 수놓기는 물론 각종 음식 만들기 등 신부수업을 착실히 쌓았답니다. 집에는 부엌일을 봐주던 아주머니도 따로 있었고, 이런저런 집안일을 돌봐주는 이도 있어서 살림만큼은 제대로 배울 수가 있었답니다.

그러던 중에 바로 6.25전쟁이 터졌지요. 저희 가족은 피난을 아니 갈 수가 없었답니다. 아버지가 국회의원이라 인민군에게 잡히면 바로 총살당한다고 해서 아버지는 바로 몸을 피했고, 우리 가족들은 나중에 친척의 도움을 받아 어렵게 부산으로 피난을 떠났습니다. 그곳에서 아버지를 다시 만났고 우리 가족은 한 친척집에 여러 식구가 함께 지냈습니다. 그 시절엔 다 그러지 않았습니까. 어려움을 모르고 살던 우리 가족도 전쟁은 어쩔 수 없었죠. 약 3년 동안의 부산에서의 피난생활은 제게도 그리고 우리 가족에게도 큰 시련이었습니다.

그러다 정전이 되고 우리는 다시 서울로 올라왔지요. 그 난리에도 다행히 집은 온전했습니다. 워낙 아버지나 어머니가 동네 사람들한테 후하게 베풀고 살았던지라 피난을 떠나지 않은 동네사람들이 우리 집을 빈 집처럼 보이지 않게 잘 돌보아준 덕분이었죠. 남에게 베푸는 온정은 반드시 돌아온다는 것을 그때 알았답니다. 잘 산다고 남을 업신여겨서도 안 되고, 잘 사는 것을 자랑해서도 안 되고, 항상 주변에 어려운 사람이 있으면 함께 나누고 이웃에게 베풀며 살아야한다는 것을 피난생활을 통해서 그리고 부모님들의 평상시 생활을 통해서 배웠습니다.

 

▲ 약혼사진 1954년     © 놀뫼신문

 

▲ 결혼사진, 뒷줄 왼쪽부터 송필만 부친, 당시 해군참모차장, 신익희 민주당 대통령 후보, 백남훈 국방부장관, 조병옥 내무부장관, 전두기 시아버지     © 놀뫼신문

 

▲ 국방대학 1기 졸업 기념패     © 놀뫼신문



결혼, 그리고 어려웠던 신혼시절

 

정전 후 서울의 모습은 대단히 부산스러웠습니다. 사람들이 속속 피난에서 돌아오고 쓰러지고 파괴된 집들과 건물들을 치우고 다시 세우느라 북새통이었습니다. 그 와중에 제게 혼삿말이 들어왔습니다. 아버지를 가끔 찾아오던 사람이었는데, 글을 짓는 시인이라고 하더군요. 고향은 함경도 함흥이고 해방 후 내려왔다가 실향민이 된 사람이었는데, 혼기를 앞둔 자신의 아들이 하나 있으니 둘을 짝으로 맺어주면 어떻겠느냐고 아버지께 넌지시 말을 건넨 겁니다.

그 청년은 6.25전쟁 중에 참전한 해군 장교였습니다. 계급이 대령이고 나보다는 네 살 위라고 라고 하더군요. 일찌감치 함흥에서 내려와 서울에서 배재고등학교를 졸업하고 해군사관학교에 들어가 2기생으로 임관하여 전쟁 중에 고속승진을 한 전도가 유능한 장교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급작스럽게 선이란 것을 보게 되었답니다. 장소는 집에서 가까운 창경원 안에 있는 수정궁이었습니다. 그곳은 아름다운 호수 위에 지은 큰 정자로, 각종 차와 음료수는 물론이고 경양식도 파는 그런 곳이었습니다.

다소 더위가 느껴지는 초여름 6월이었습니다. 카키색 해군장교 여름복장을 한 그를 나는 똑바로 쳐다볼 수가 없었죠. 어쩌다 흘끗 쳐다볼라치면 해를 등지고 있는 그의 모습은 보이지 않고 머리 뒤로 벌건 해만 비칠 뿐이었습니다. 그래서 그의 머리가 무척 크게 보였답니다. 나중에 결혼을 하고 보니 정말 머리가 컸습니다. 나는 워낙 수줍음을 타서 한마디도 못했고, 그는 본래 말이 없는 사람이라고 하더군요. 한참 동안 이리저리 나를 살펴보던 그가 내게 딱 한마디 하더군요.

“고생할 각오는 되었소?”

나는 나도 모르게 “네!”하고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을 했답니다. 그게 다였어요. 청혼치곤 참 멋대가리 없는 말이었는데, 그때는 그 말이 그렇게 멋있을 수가 없었답니다. ‘고생할 각오라’ 그날 이후 바로 결혼 준비를 하게 되었고 나는 그 집으로 시집을 가게 되었죠.

시집은 시아버지, 시어머니 모두 계시고 시아주버니와 시동생들 그리고 시누이들까지 형제가 모두 여덟, 그러니 나까지 모두 열한 명이나 되는 대가족이었어요. 당시 서울의 변두리인 자하문 밖 세검정이 시집이었는데, 그 작은 집에 그 많은 식구가 복닥거리며 살았답니다. 당연히 신방 같은 것은 없었죠. 정말 어려운 집이었고, 제대로 된 벌이라고는 남편인 해군장교의 박봉이 전부였습니다. 쪼개어 쓸 것도 없는 그 박봉을 쪼개어 시동생들 시누이들 학비까지 대었으니 살림이라는 게 오죽 했겠습니까. 부산에서의 피난생활이 오히려 그리울 정도였답니다.

우리 어머니는 가끔 사람을 보내어 양식이며 옷가지를 열심히 날라다 주었지요. 우리 친정에서 도와주지 않았으면 굶어죽을 집이었답니다. 거기다 시아버지와 시어머니의 자존심이 대단하였고 이북사람의 근성도 있어서 은근히 시집살이가 힘들었습니다. 나는 두어 달에 한 번씩 친정에 갈 때마다 엉엉 울며 시집에 돌아가지 않겠다고 애처럼 떼를 쓰기도 했지요. 정말 힘든 시기였어요. 그럴 때마다 생각나는 것이 청혼할 때 남편의 말이었답니다. ‘고생할 각오는 되었소?’ 그렇다고 대답을 했으니 참고 견딜 수밖에요.

그 와중에도 큰애를 낳았습니다. 남편을 꼭 닮은 사내 아이였어요. 그리고 얼마 후 남편이 해군사관학교 교수부장으로 발령이 나서 진해로 가게 되었습니다. 나는 드디어 시집을 벗어나 따로 살림을 차릴 수 있어서 너무 기뻤답니다. 그런데 웬걸요. 시어머니와 시동생들이 함께 간다는 겁니다. 형 따라가야 공부를 할 수 있고, 또 시어머님 당신이 좇아가야 살림을 도울 수 있다고 하면서요. 그래서 진해 해군사관학교 좁아터진 관사에서 시집 식구들과 함께 살아야 하는 또 다른 시집살이가 시작되었죠. 그 와중에 둘째가 태어났습니다. 역시 사내아이였습니다.

남편은 묵묵히 앞만 보고 가는 정말 성실하고 매사 빈틈이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또 별명이 시베리아라고 불릴 정도로 냉정하고 매서운 사람이었어요. 그 엄격함은 나는 물론이고 시집 식구들에게도 똑같이 적용되었습니다. 그래서 시집식구들이 결혼 초기처럼 제게 함부로 못했죠. 그나마 그게 제게는 다행이었습니다. 그리고 우리 아버지가 제게 하신 말씀이 있었어요. ‘네 시집 보고 그 집에 보낸 거 아니다. 네 남편 보고 그 집에 보낸 거다. 그 사람 나중에 크게 될 사람이야.’ 우리 아버지의 그 말씀이 머지않아 현실로 되었답니다.

 

▲ 첫아들 돌때 가족사진    © 놀뫼신문

 

▲ 서울 필운동 시절, 삼남매와 함께 1967년     © 놀뫼신문

 

▲ 서울 장충동 집 정원에서 남편과 함께 1974년     © 놀뫼신문

 

남편의 성공, 안정된 가정

 

남편은 대령으로 바로 예편을 했고 울산에 짓기 시작한 대한석유공사 울산공장 공장장으로 가게 되었습니다. 현재 SK의 전신이지요. 그리고 셋째가 태어났고, 딸이었습니다. 나는 아이들 교육 때문에 서울 필운동에 아담한 한옥을 구했고, 물론 친정에서 많이 도와주었죠. 그리고 남편과 떨어져 지내게 되었습니다. 남편은 가끔 서울 본사에 출장 올 때 집에 들렀고, 나는 아이들 방학 때면 짐을 모두 싸들고 울산으로 내려갔습니다. 정말 좋은 때였습니다. 전혀 힘든지 모르고 애들을 키우며 열심히 살았어요.

남편은 곧 부사장으로 진급하여 서울 본사로 올라오게 되었고, 집도 장충동에 있는 큰 2층 양옥집으로 옮겼답니다. 아래층 위층 모두 방이 일곱 개나 되었고, 2층에는 큰 온실도 있었는데 그곳에 온갖 꽃들과 희귀한 화초들을 키웠죠. 또 정원에는 조그만 비단잉어들이 사는 연못과 분수도 있었고, 품종 있는 좋은 개들은 물론 꿩, 금계, 칠면조, 장닭 등 온갖 새들도 키웠답니다. 정말 멋진 집이었어요. 우리 동네는 꽤 부촌이었는데 그 동네에서도 정원이 아름다운 집으로 유명했답니다. 그새 시아버지는 돌아가셨고 중풍으로 쓰러진 시어머니를 제가 줄곧 모셨습니다. 시댁식구들도 모두 저를 어려워하고 또 애들은 모두 공부를 잘해서 학교에서 우등생이었죠. 걱정할 것도 없고 부러울 것도 없는 그런 생활이었어요.

그 당시 서울 강남을 비롯하여 곳곳이 개발되고 드디어 아파트라는 것이 세워지기 시작할 때였습니다. 우리는 장충동에서 여의도에 새로 지은 큰 아파트로 집을 옮겼습니다. 어느덧 우리도 나이가 들기 시작했고 남편은 남들보다 일찍 은퇴를 하게 되었답니다. 일찍 승진할 때는 좋았는데 한창 일할 나이에 은퇴를 하게 되니 너무 빨리 올라가는 것도 그리 좋은 게 아닌 모양이에요.

그때 큰애는 연세대학교에, 작은애는 성균관대학교에, 딸애는 이화여대에 합격하여 모두 학교를 다니고, 또 졸업하고, 큰애는 유공에, 작은 애는 대우에, 딸애는 삼성에 취직되어 일하고, 또 제 짝을 만나 그 아파트에서 장가보내고 시집도 보내고 했지요. 뭐 하나 걱정할 게 없었는데, 딱 한 가지, 남편의 건강이 나빠지기 시작했답니다. 일을 안 하고 집에 있으면서 더 악화되기 시작했어요. 평생 마신 술이 문제였지요. 당뇨에 그 합병증으로 온 신부전증에, 그리고 고혈압까지 온갖 병을 달고 고생했답니다.

 

사별, 그리고 계룡에서의 정착

 

남편은 좀 섭섭하다 싶을 예순아홉 나이에 먼저 저 세상으로 갔답니다. 정말 모든 내 삶이 무너지는 것만 같았어요. 우리 집안뿐 아니라 주변 친척들 모두의 큰 기둥 역할을 하던 그 양반이 황망히 가자 한동안은 무얼 해야 할지 몰라 멍한 상태였답니다. 애들도 모두 가정을 이루어 독립해서 살 때이니 대부분의 시간을 집에서 혼자 쓸쓸히 보냈지요. 외롭다는 것이 무엇인지 몸으로 절절히 느꼈습니다.

그러고 보니 노후의 삶에 대해 한 번도 진지하게 고민해본 적이 없었던 것 같아요. 별 걱정 없이 모든 것을 남편에게 의지하며 편안하게 살다가 갑자기 이런 일을 맞닥뜨리니 앞날이 캄캄할 뿐이었습니다. 전혀 노후의 홀로 남은 삶에 준비가 안 되어 있었던 거죠. 또 엎친 데 덮친 격으로 큰애는 갑자기 하던 큰 사업이 실패해서 다시 시작해보겠다고 지방으로 내려갔고, 작은 애는 갑자기 신부가 되겠다고 신학원에 들어갔고, 딸애는 뉴질랜드로 이민을 떠나버렸답니다. 이래저래 외롭고 힘든 시기를 정말 꽤 오랫동안 보냈습니다. 그러다 정신을 차리고 그 많던 살림과 짐들을 없애고 정리해서 큰아들이 자리 잡은 계룡에 작은 아파트로 이사를 했어요.

근 오십년 만에 서울생활을 정리하고 지방으로 내려온 거지요. 모든 게 불편하고 낯설었습니다. 그래도 ‘아들 곁이 좋다.’라고 혼자 되뇌면서 계룡에서의 생활에 익숙해지려고 나름 무척 애를 썼지요. 화요일마다 서는 장에도 꼬박꼬박 나가고, 가끔 경로당에도 기웃거리고, 노인복지관에도 한동안 다녔습니다. 그러는 사이 작은애도 신부가 되어 근처로 오게 되고, 다시 이곳에서 가족이 모여 살게 되었답니다. 계룡이 제2의 고향이 되어버린 거지요. 그리고 카키색 해군복장을 한 멋진 장교들을 심심찮게 볼 수 있다는 것도 좋았고요. 그리고 무엇보다 남편은 고개 넘어 현충원에 있으니 보고 싶을 때마다 찾아가기 편하고요.

 

지나고 보니 모든 것이 감사한 일뿐

 

나는 여전히 계룡에서 잘 살고 있습니다. 물론 구십이 다 된 몸을 움직이자니 불편하지 않은 곳이 없지요. 그래도 아직까지는 작은 집이지만 혼자 살림을 하며 지내고 있답니다. 물론 두 아들과 두 며느리가 뻔질나게 드나들며 반찬을 해다 나르고, 병원을 실어다주고 하지만 아직까지는 혼자 살고 있습니다. 이런 건강이 언제까지 지속될지는 모르겠습니다. 나도 마음의 준비는 하고 있어요. 언젠가는 요양원으로 갈 수도 있고, 아니면 현충원에 있는 남편 곁으로 갈 수도 있겠지요.

요즘에도 제 집을 찾아주는 사람들이 많아 참 좋아요. 그게 복이지요. 감사할 뿐입니다. 내가 다니는 조그만 암자의 스님도 자주 찾아주시지요. 꼭 올 때마다 우유며 과일을 들고 오신답니다. 힘이 되는 좋은 말씀 많이 해주시고요. 복지관 선생님도 찾아주시고, 보건소 선생님도 정기적으로 오셔서 건강 체크해주시고 건강식품도 갖다 주시고요. 어디 그뿐인가요. 이웃들도 얼마나 좋은지 자주 찾아와서 이것저것 챙겨주시고 살펴주신답니다. 그 고마움을 어떻게 다 갚아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그래도 밤에 누우면 참 외롭고 사람이 그리워요. 냉장고 돌아가는 소리밖에는 들리는 것이 없지요. 적막합니다. 이렇게 눈감고 잠들어 안 깨어나면 좋겠다 싶기도 하구요. 내 마음이 바라는 것은 끝이 없는 모양입니다. 여기저기 아픈 몸을 뒤척이며 잠을 청하는 시간이 내겐 길고 지루하지만 또한 소중한 시간이기도 하답니다. 매일 밤마다 지나온 삶을 가만히 돌이켜보면 나처럼 복 많이 받은 사람도 없을 것이란 생각이 들어요. 온통 감사할 일뿐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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