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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노트] 교촌3리(이북촌) 최재홍(崔在洪) 님 “우리 복상밭에는 울타리가 없어요”
기사입력  2019/09/25 [17:56]   놀뫼신문

[교촌3리(이북촌) 최재홍(崔在洪) 님 인생노트]

“우리 복상밭에는 울타리가 없어요”

 

▲     © 놀뫼신문


  

  최재홍(崔在洪)   

  • 1949년 4월 19일 안심리에서 출생(장남)
  • 1958년 은진국민학교 입학(10세)
  • 1968년 대건중~논산공고 기계과졸업(20세)
  • 1977년 결혼(29세)
  • 2019년 현재 교촌3리 반장(71세)

 

나는 연무읍 안심리에서 3남 3녀 중 둘째 장남으로 태어났다. 나이가 9살 차이 나는 아버지 최양석, 어머니 김진순 사이에서 장녀 다음 장남으로 태어난 것이다. 여덟 살이 되는 해에 은진면 교촌리로 이사했고, 지금까지 논산을 한 번도 떠나 본 적 없이 살고 있다. 

내가 사는 동네는 교촌3구이다. 이제는 건양대 옆 번화가인데, 6·25때는 피난민들이 몰려와서 살던 마을로서 ‘이북촌’이라고도 불린다. 미군들이 준 옷으로 10년 입고도 살았는데, 이북촌에 대한 이야기는 따로 떼어내서 이야기해야 할 거 같다. 

 

이북촌에서 지낸 어린 시절

 

당시 대다수 사람들이 그렇게 살았듯, 어린 시절 집안이 너무 가난해 못 입고 못 먹고 살았다. 그래서였는지 세 살 때 심하게 아파서 죽을 고비가 왔었단다. 어려운 살림에도 우리 부모님은 지극 정성으로 보살펴 나를 살게 하셨다고 한다.  우리네 삶이 그러하듯, 나 또한 어린 나이에도 부모님을 도와 웬만한 어른들이 할 법한 농사일과 집안일을 도맡아 하며 유년시절을 보냈다. 위로 누나가 있었지만 여자였기에 힘 쓰는 일들은 할 수 없어, 부모님의 힘든 농사일을 거드는 것은 오롯이 나의 몫이었다.

은진국민학교 다니던 시절이다. 다른 친구들은 학교에 갈 때 나는 부모님을 도와 쌀가마니를 어깨에 메고 소 먹일 풀을 뜯으러 동네 야산을 오르내려야 했다. 그 일이 너무 고되어서 집에 돌아오면 온 몸이 녹초가 되어 쓰러질 정도로 일을 많이 했었다. 그러다보니 자연스럽게 학교 결석하는 일이 잦아졌다. 심지어 친구들에게서 “너는 학교에 안 다니냐?”는 소리도 듣곤 했다. 그런 이야기 들을 때면 어린 나이에 속상하기도 하고 너무 힘든 일을 많이 시키시는 부모님이 야속하고 원망스럽기도 했다.

 

엄격했지만 홍시도 챙겨주시던 아버지 

 

나의 아버지(최양석)는 한 마을에서 40년이 넘게 마을 반장일을 도맡아 하실 만큼 사람들에게 인정도 많고 책임감도 강하셨다. 마을의 궂은 일 마다하지 않고 그 누구보다도 열심히 일하시던 분이었고 법 없이도 살 그런 분이었다.

아버지는 경상도 사람이라 그런지 참으로 무뚝뚝하셨는데 집안에서는 더욱더 말 수 없는 근엄한 분이셨다. 그런 분이 국민학교 운동회때 나에게 홍시감을 세 개를 사다주셔서 너무 맛있게 먹었던 기억이 아주 오래오래 내 머리 속에 아련한  추억으로 남아 있다.

나의 부모님은 자식사랑이 참으로 크신 분이셨지만, 공부 잘하는 동생들을 더 예뻐라 하셨던 것이 어린 마음에도 많이 서운했다. 대학은 다섯째 동생만 보냈다. 부모님의 정성인지 현재 공학박사가 되어서 공부한 몫을 톡톡히 해내고 있다. 

부모님 살아 생전, 자식들에게 잔소리처럼 당부하셨다. 

“밭에 있는 잡풀이 자라지 않게 늘 부지런히 일하여 밭을 깔끔하게 하라.” 

“밥을 적당히 먹어 건강을 유지하고 남들보다 일찍 일어나라.” 

“열심히 공부하고, 맡은 일에 항상 최선을 다하고 바르고 정직하게 살아야 하며 정도(正道)를 걸어가야 한다.”

“형제자매간 우애가 깊어야 한다는 말씀과 더불어 식전 기도하는 일을 게을리 하지 말라.”

주로 이런 말씀이었다. 

그 말씀 하나하나를 되새겨 나를 비롯한 우리 6남매 유년시절과 학창시절 열심히 살았다. 성인이 되어서도 각자의 위치에서 부녀회장, 이장, 그리고 초선시의원, 공학박사 등등... 다들 열심히 살아왔고 지금도 그 열심은 여전하다. 나 또한 25년 넘게 교촌2리 반장을 맡아 오늘도 열심히 살고 있으니, 우리 부모님은 ‘이런 6남매가 얼마나 자랑스러우실까?’ 하는 생각을 하니 가슴이 뜨거워지려 한다. 

 

네 목숨, 네가 결정하라던 단호한 아버지 

 

아버지는 평상시 나를 향해 “너는 법 없이도 살 사람”이라며 칭찬해 주셨다. 아버지 자신이 그러한 분이셨고 세상을 양심적으로 살다 가신 분이셨다. 내가 20세가 되던 해에 몸이 너무 고되고, 집안이 너무 가난하여 심신이 지쳤을 때 심한 우울증이 찾아와서 자살하려 한 적이 있었다. 그 때 나의 아버지는 말리는 게 아니라 “그래, 죽거라!” 하셨다. 나는 그 말을 듣고 반대 마음이 들었다. 더 독하게 마음 먹고 “다시 한 번 살아보리라” 쓴 울음을 삼켰다. 아마 그 때 아버지가 “죽지 말고 어떻게든 살아 보아라”고 하셨다면, 당시 정상이 아니었던 나는 죽어버렸을지도 모른다.

우리 아버지는 막내이셨지만 부모님을 모셨고 당신의 형제자매를 평생 도와주며 사셨다. 그런 아버지의 뜻을 받들어 어머니 또한 평생 시부모님을 지극 정성으로 모셨다. 나 또한 6남매 중 내가 제일 아버지를 닮았다고 생각한다. 우리 아내 친구들이 나를 놓고 하는 말이 있다. “나 같은 사람만 있다면 전 세계에 전쟁이 없을 것이다.” 나를 모르는 사람들조차도 처음 나를 봤는데도 “어쩌면 그리 선하게 생겼냐?”고 좋게 봐준다. 그런 인상을 만들어 주신 부모님에게 감사할 일이다. 

 

▲     © 놀뫼신문

 

▲     © 놀뫼신문



장가 들려고 교회까지 나감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군대갈 때가 되었다. 그러나 당시 나는 키 156cm에 몸무게 54kg였다. 당시에 군대 가려면 160cm에 60kg이상이 되어야 했다. 독자도 면제될 만큼 군대갈 사람이 넘쳐났던 시절이다. 그래서 나는 대한민국의 자랑스러운 향토예비군이 되었다. 

군대도 면제되고 평상시처럼 집안 농사일 돕다보니 뚜렷한 내 일이라 하는 직장생활을 해보지는 못했다. 이런 저런 일들을 하며 바쁘게 살다보니 여자 만날 기회가 없었다. 여동생이 “교회에 나가면 신앙생활도 할 수 있고 또 자연스럽게 여자들을 만나 어울릴 수 있는 기회가 많아진다”고 말하면서 나에게 함께 교회를 다니자고 하였다. 나 또한 순수 신앙심이 아닌, 약간 불손한 마음으로 교회를 다니기 시작했다.

하지만, 지금의 아내는 교회에서 만난 게 아니다. 28살 조금은 늦은 나이에 중매로 만난 나의 사랑스런 아내 순이~ 처음에는 내 맘보다도 어머니 맘에 쏘~옥 들어서 어머님이 결혼을 서둘러 성사시켰다.

어머니(김진순)가 며느리 감을 미리 살짝 보기 위해 나의 아내가 사는 집을 한번 찾아갔단다. 그 때 지금의 나의 아내가 어른을 대하는 태도와 행동에 크게 감동을 받아 첫눈에 어머님 맘을 사로잡은 모양이다. 집으로 돌아와 나에게 결혼하기를 적극 권했다. 나의 눈에 마음도 예쁘고 얼굴도 예뻤다. 특히나 어른 섬길 줄 아는 고운 품성이 내 맘에도 들기 시작해서 결혼을 하였다. 장가 든 후 슬하에 1남 2녀를 두고 알콩달콩 옆에 딱 붙어살고 있다. 

몸이 아픈 첫아이를 낳고 난 후 맘 고생도 많이 한 나의 아내... 평소 건강이 좋지 않은 상태에서도 막내아들을 건강하게 낳아준 아내가 너무너무 고마워서, 나는 평생 아내에게 마음을 다해 잘 하려 노력하고 있다.

지금도 이러저런 집안일도 아내를 도와서 함께 하고 있다. 아내가 저녁 반찬거리로 콩나물을 사오면 난 콩나물을 함께 다듬어주고, 아내가 빨래를 하면 난 그걸 널어주고, 청소기를 돌려주고, 마늘을 함께 까주는 등등 아내가 하는 모든 일들을 함께 해주려고 하면서 살고 있다.

특히, 둘째딸이 어린 나이에 결혼하여 세 쌍둥이를 낳았을 때에도 아내와 나 그리고 큰딸과 함께 6년간 정성을 다해서 키워줬으며, 시부모 모시기와 자식돌보는 일에 일생 헌신을 다하는 나의 고운 아내를 위하는 일은 나에게 커다란 기쁨이다.

옛말에 “마누라가 예쁘면 처갓집 말뚝에 대고 절을 한다”고 하지 않던가! 바로 내가 그렇다. 처음 처갓집에 갔을 때 처갓집 뒷동산 위에서 처할머님께서 하신 말씀이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난다. “처가에 일이 많으니 처가 일을 많이 도와줬으면 고맙겠네!” 그 말씀을 들은 이후로 처갓집의 온갖 궂은 일을 내 일처럼 하면서 살았다. 그래서 그런지 장인 장모가 나를 정말 믿음직스럽고 고맙게 생각하셨고 나 하는 일은 “다 옳다”고 해주셨던 게 나 또한 감사할 따름이다. 

 

▲     © 놀뫼신문

 

▲ 막내아들(최성식) 졸업식장에서     © 놀뫼신문

 

▲ 23년 전 아버지가 물려주신 땅에 지은 원룸     © 놀뫼신문

 

임대료 안 내다 야간도주하는 사람들

 

나는 어렸을 때부터 부모님을 도와 농사일을 해왔기 때문에 농사일이 어렵지 않고 그냥 천직으로 알고 살았다. 과수원 농사를 짓는 아버지를 도와서 농사일을 하면서도 밖에 나가서 노동일을 하였다. 아파트 직영하는 회사에 가서 잡일을 하였는데, 동신아파트 지을 때도 일하였다. 건양대에 일용직으로 나가기도 하였다. 그러면서도 주업은 여전히 농업이었다. 

집안이 넉넉하지 않아 없이는 살았지만 ‘나만 배불리 먹고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해보지 않고 살아왔던 거 같다. 나도 그렇지만 내 아내 또한 사람이 선하여 남에게 무엇인가를 베풀고 나눠먹고 하는 것을 낙으로 알고 살아왔다. 지금도 역시 그러하다. 우리는 집 앞에 있는 과수원을 가꾸어왔는데, 어떤 때는 복숭아를 새로 심어서 관리를 한다. 동네 사람들이 “과수원에 울타리 쳐야 남들이 복숭아를 못 따간다”면서 “얼른 울타리를 치라”고 하지만 나는 울타리 칠 생각이 전혀 없다. 왜냐하면 지나가는 사람이 목 마르면 하나 따먹을 수도 있고, 없는 사람들도 하나씩 따서 먹을 수도 있는 거 아니겠는가? ‘같이 나눠먹자’는 생각이기 우선이기 때문에, 앞으로도 내 과수원에는 울타리 보는 일은 없을 것이다. 

가끔은 손해 보고 산다고 주변에서 “그렇게 살면 안 된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지금 살고 있는 원룸도 세입자들이 몇 달씩 임대료를 안 내고 그냥 도망치기도 하는 일이 일어난다. 그렇지만 ‘그 사람들도 오죽하면 돈을 못 내고 밤에 몰래 도망을 가겠는가!’ 하는 생각이 앞서 들기도 한다. 물론 나도 사람인지라 못 받은 돈이 아깝고, 쫓아가서라도 받아올 생각이 날 때도 없잖다. 세상이 각박하다 보니 어려운 사람에게 너무 매몰차게 하면 궁지에 몰린 사람이 자칫 나쁜 생각을 행동으로 옮기는 경우도 주변에서 보아왔다. 이래저래 속상해하다가, 이내 포기하고 그들이 잘 살기를 바랄 뿐이다. 내 생각에, 착한 사람은 손해를 보는 게 아니라 남은 삶을 행복하게 만드는 것이라고 본다. 

 

“고졸이 무슨 한글대학?” 했지만...

 

은진국민학교, 대건중학교를 거쳐 68년도 논산공고 기계과를 졸업하고 난 후 “배움의 길은 여기서 끝이구나”고 생각하며 살아왔다. 그런데 논산시에서는 마을회관에 한글대학을 열고 마을 주민들을 위한 각양각색의 교육과 배움의 길을 열어주었다. 부녀회장인 누님이 “배움터에 함께 참여해보는 것이 어떻겠냐?”고 권유할 때만 해도 별 관심이 없었다. 그러나 누님 극성 때문에 등 떠밀려 나왔다. 막상 들어와 보니, 한글대학이지만 나와서 공부하길 정말 잘했다고 생각되는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특히, 치매예방에 많은 도움을 주는 곳이라는 생각이 든다.

한글대학은 한글을 몰라 글 깨우치려고 하는 사람만 다니는 곳으로 인식되어 있는 것 같다. 한글뿐만 아니라 다양한 교육을 통해 지식을 전달해주는 곳이다. 나는 하루 일과를 다 끝내고 저녁을 먹고 난 후 한글대학에 간다. 그 날은 어떤 약속도 하지 않고 결석하지 않으려 노력한다. 도희수 담당선생님이 ‘문해한마당 골든벨 대회’에 나가는 대표로 나를  뽑아주시고 예상문제도 만들어 주셔서 요즘은 그 공부에 열중하고 있다.

매일 아침 일찍 일어나 골든벨 예상문제를 풀어보고 틀린 문제는 다시 읽고 또 읽고 해서 외운다. 낮에 한가할 때에는 위층에 사는 세입자에게 문제를 내달라고 해서 공부해간다. 뭐랄까 ‘내가 무엇인가 큰일을 하고 있다’는 그런 느낌에 가슴이 벅차오를 때도 있다. 열심히 해서 좋은 성적을 내고 싶은 욕심이 생긴다. 학창시절로 되돌아간 듯한 즐거운 경험이다. 나는 이제 어엿한 대학생이다! 내가 만약 다음 생에 다시 태어난다면 학창시절 열심히 공부에 몰두하여 공무원으로 살고 싶다. 

이 세상에 한번 태어나 한번 죽는 것은 정한 이치이다. 모든 살아 움직이는 것에는 출생이 있고 사망이 있는 건 당연지사이다. 나도 언제가 될지 모르겠지만 저세상으로 가는 날이 나에게 올 것이다.

내가 생을 마감했을 때 나의 자식들이 “우리 아버지는 착하고 부지런하고 법 없이도 살 분이셨다”고 자랑스럽게 기억해 주길 바라는 마음이다. 나는 오늘도 새벽에 일어나 문해한마당 골든벨 대회 준비를 위해 공부한다. 잠깐 TV를 본 후 동네 한 바퀴 돌면서 폐지와 재활용품을 수집하고 돌아와 아내와 함께 아침밥을 먹은 후 과수원으로 향한다.

 


교촌리 5성스타 ‘최재홍’

 

어른신을 처음 만나 보던 날!  어르신의 외모에서 왠지 ‘세상에 이런 일이’라는 TV프로그램에서 볼 수 있는 어르신 같았다. 이러저런 사연이 많을 것 같은 예감에 스멀스멀 호기심이 발동하기 시작했다. 

양쪽 귀에 알록달록 화려히 달려 있는 여러 개의 귀걸이와 손톱에 예사롭지 않게 칠해 있는 매니큐어가 너무 궁금했다.  궁금증을 누른 채 어른신의 일상 이야기를 다 들어본 후 한참 지나서 자연스럽게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12년 전 어르신이 운영하는 원룸 세입자가 손톱에 매니큐어를 예쁘게 칠하고 있었다. “참 예쁘다”고 한 마디 던지자 “한번 칠해보시겠어요?” 이렇게 칠해 준 것이 발동 걸렸다. 그 뒤부터는 직접 더 다양한 색상의 매니큐어를 구입하여 칠하고 있단다.  “내 매니큐어 실력이 장난이 아니다”고 호헌하면서 “내 감각이 뛰어나다”고 자화자찬치고는 진지하게 말씀하신다. 그 모습을 곁에서 지켜보시는 사모님 표정과 너무 상반된 최재홍 어르신의 얼굴 표정! 한참을 같이 웃었다.

귀걸이를 차기 시작한 사연도 털어놓았다. 귀걸이는 13년 전 홈플러스에 가서다. 우연히 젊은 여자 분이 하고 있는 귀걸이를 보고 “예쁘다” 했더니 “귀걸이하면 멋스럽고 건강에도 도움이 된다”고 들려주었다. 그 자리에서 귀를 뚫었다. 예쁘고 멋진 귀걸이를 구입하다보니 귀를 자꾸 더 뚫게 되었다. “이제는 다섯 개나 뚫게 되었다”며, “내가 귀를 다섯 개를 뚫었으니 나는 ‘5성급 스타’”라며 해맑게 웃으신다. “처갓집에서도 장모님이나 처남은 이런 모습이 보기 좋다고 해주셨어!” 이런 말을 옆에서 듣고 있던 사모님이 가만 있을 리 있겠는가^ “정말 보기 좋아서 그러는 게 아닌데요ㅜㅜ 우리 가족은 말리다 말리다가 이제는 포기했어요.” 다소 격앙된 목소리로 한숨을 내뱉기는 하셨지만, 그래도 그 모습 그대로 인정하시는 듯 했다.

이야기가 끝나갈 즈음 어르신의 돌발행동이 벌어졌다. “내가 아주 아끼는, 논산에서는 구할 수 없어 서울 귀걸이 전문점에서 구입한 귀걸이가 있다”면서 “그걸 하고 나가면 예뻐서 다들 뿅~가는 귀걸이가 3쌍이 있는데, 그걸 특별히 선물해 주고 싶다”는 것이다. 안방에서 한참 만에 꺼내 오신 귀걸이 한쌍~ 처음에는 손사래쳤지만, ‘내가 어딜 가서 이런 소중한 선물을 받아볼까’ 싶어 감사한 마음에 귀걸이 선물을 받았다. 

어르신은 덧붙인다. “사람들이 나를 연예인이라 말해요! 나는 그런 말이 참 좋아. 한쪽에 5개씩 귀걸이 하고 다니는 나를 별이 다섯 개인 스타라 하니 나, 5성급 스타 맞죠!” 나이가 들면 어린애가 된다고 했던가, 많은 사람들에게 관심받는 것을 즐기는 삶! 자신의 즐거움과 행복 만끽하는 행위에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거나 불편하게 생각하지 않는 태도! 영혼이 참 맑고 자유로운 분이다. 

인터뷰를 마치자 어르신은 연신 고마움을 표한다. “내 이야기 들어줘서 고맙다”고 “특별하게 이룬 것 없이 살아온 삶, 별 자랑거리도 없는 내 얘기를 신문에 실어준다니 『놀뫼신문』에 고마움을 전해주세요.” “내가 다음 생에 다시 태어난다면 나는 공무원으로 살아보고 싶다”고 말하는 어르신 모습을 보니, 아직도 청운의 꿈을 꾸는 만년 소년이다.

 

- 우상옥(충남행복나눔협의회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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