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고
로고
광고
논산시계룡시백제권 뉴스사회종합교육·문화농업·단체오피니언·사람들기획·특집정치종교
로그인 회원가입 아이디/비번 찾기
전체기사보기
편집  2019.11.14 [05:06]
> 인생노트
트위터 페이스북 카카오톡
필자의 다른기사 보기 인쇄하기 메일로 보내기 글자 크게 글자 작게
[인생노트] 강경읍 정민재(鄭玟宰) 님 “100년 살아보니 가장 기쁜 때는 남에게 퍼줄 때”
기사입력  2019/08/28 [15:21]   놀뫼신문

강경읍 정민재(鄭玟宰) 님의 인생노트

“100년 살아보니 가장 기쁜 때는 남에게 퍼줄 때”

 

▲     © 놀뫼신문

 

내 나이 올해 백한 살, 징그럽게도 오래 살았다. 올해가 3·1운동 100주년인데, 내가 태어난 해가 1919년 바로 그해였다. 그 후 100년을 살았으니 한 일도 많고, 할 얘기도 많다. 그걸 다 모으자면 한권의 책으로도 모자라니, 여기서는 일제때나 6·25 격변기 때 얘기만 주로 해야 할 거 같다. 

작년에 『놀뫼신문』 기자가 찾아와 내 100세 잔치를 기념해 주었다. 나는 노인정에 가는 게 별로다. 고스톱치고 꽁술 마시고 하며 얼리는 것보다 나 혼자서라도 뭔가를 해나가는 게 좋다. 그래서 강경도서관에서 해주는 컴퓨터반을 다녔다. 나이가 드니 배우는 게 쉽지 않았지만 민폐를 무릅쓰고 굳세게 다녀서 컴퓨터 웬만한 것은 한다. 밤이면 고스톱 게임 한참 하다가 잠이 오면 잔다. 컴퓨터로 일본에서 일하는 둘째 아들과 화상전화도 한다.

 

▲ 백세에도 컴퓨터 게임을 즐김     © 놀뫼신문

 

▲ 독거노인의 효자발 사륜오토바이     © 놀뫼신문

 

100세에도 끝나지 않은 배움과 천운

 

컴퓨터 얘기를 왜 꺼냈냐 하면, 우리 정보화반에서 내 생일 정보를 알아내 내 백세생일 잔치를 해주었기 때문이다. 조촐했지만 울컥했다. 나는 3남 3녀를 두었는데, 다 잘 돼서 집에 들어올 여유가 별로 없다. 큰 아들은 환갑이 다 됐지만 고급기술자라서 헬기 타고 외국에 출장 다닐 정도로 바쁜 삶이다. 

자식들이 바쁘거나 무심해서 우리 같은 노인네들은 대개 독거노인으로 불린다. 이런 노인네를 줄기차게 찾아와 “아버지 아버지”하는 이웃이 있다. 김형근 늘봄젓갈판매장 사장이다. 자기 부모도 잘 안 챙겨보는 세상에, 매일같이 몇 십 집 돌면서 먹을 걸 놓고가는 그를 보면 호인이었던 그 아버지가 생각난다. 그의 부친은 나보다 좀 어렸지만 세상 떠난 지 오래다. 다들 떠나갔다. 나보다 8살 어린 집식구도 지난 5월에 세상을 떠났다. 덕분에 나도 쌩으로 입원을 하고 나왔다. 얼마 전 백중날 집식구 위패를 안치한 공주 신광사에 다녀왔다. 물론 나 혼자서다. 오토바이 타고 강경 버스정류장에 갔고, 거기서 버스를 탔다. 몇 번을 갈아타고, 또 그렇게 되짚어왔다. 

큰 딸이 76살이다. 요즘 사위 건강도 안 좋은 모양이다. 딸이 전화를 걸어서 “아버지 오토바이는 타지 마세요” 걱정한다. 고마운 이야기나 어디 움직이려면 방법이 없다. 인생은 선택이 많은 거 같지만 외길일 때가 더 많은 거 같다. 내가 100살 넘어 장수하지만, 죽을 고비도 몇 번 넘겼다. 30년쯤 전 내가 타고 다니는 오토바이를 트럭이 와서 받았다. 다들 죽었다고, 의사도 소생 가능성은 30%라고 진단하였다. 그때 준비해 두었던 온가족 삼베 상복들이, 아직도 보관중이다. 

사람이 살려면 천운도 있지만 인덕(人德)도 크다. 그 대형사고때 큰 딸 동창이 간호사하다가 병원 계통 요직에 있었다. 대전에 입원했지만 서울대 교수들이 내려와 주었다. 필요한 장비나 인체 특수품들은 미국에서 특수하였다. 당시 나는 누워 있을 상황도 못될 정도로 엉망진창이 되어서 보름 정도는 공중에 매달려 있어야 했다. 목이 말랐지만 가제에 묻힌 물로 입술 잠시 적시는 게 전부였다. 엄청난 수술비는 트럭운전사에게서 한 푼도 받지 못하였다. 그래도 나는 몸도, 살림도 부도나지 않은 채 그 고비를 넘겼고, 천수인 100세도 넘겼다. 

 

▲ 정민재 어르신의 부모 근영     © 놀뫼신문

 

한복 깔끔하게 차려 입으시던 아버지

 

돌아다보면 나는 태어날 때부터 엄청 유복하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가난하지도 않았던 거 같다. 태어나기는 익산 함열, 4살 때 강경으로 나왔다. 학교는 11살에 들어가 17살에 졸업하였다. 공부는 거기까지였다. 시대 상황이 그랬던 것도 있었다.

어머니는 60여 년 전 돌아가셨다. 아버지는 30년 전 돌아가겼는데, 호상이라고 해서 엄청 큰 돼지 세 마리를 잡았다. 형제없는 외동독자로서 장례를 치렀다. 아버지는 늘 말쑥한 한복 차림이셨다. 비가 와서 젖으면 집에 들어와 다시 갈아입고 외출하셨다. 사업차 관공서 출입할 때 의관정제한 사람은 얕잡아보지 않아서 더 신경 썼다고 한다. 하루에 정종 2병씩 드실 정도로 애주가여서 가끔 술병이 났다. 어떻게 치료를 받아서 차도가 있으면 또 술을 드셔서 결국 몸져 누우셨고, 그런 아버지를 13년 수발한 아내는 효부상 받는 걸로 족해야 했다.

 

은진국민학교 다니기 위하여

 

아버지는 300석지기 갑부로 강경역 근처에 ‘선병여관’ 2층집을 그 당시 200원 들여서 지었다. 강경과 연무에 집이 따로 있었고, 아버지는 말이나 인력거를 이용하여서 왕래하셨다. 당시 강경~연무 벌판을 피재뜰이라고 불렀다. 피가 뜰을 이루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인데, 벼 대신 피를 털어서 먹기도 하던 시절이다. 채운산 물탱크가 있는데, 강경 연무길 수로는 지금으로 말하면 수도관이다. 우리가 은진으로 가게 된 데에는 이유가 있다. 당시 우리집은 은진(연무)에도 150석 정도 논이 있었는데 중간에서 도지 관리하던 사람이 농간을 부려서 다 가로채고 막상 우리 손에 쥐어지는 것은 거의 없었다. 당숙이 “직접 은진 올모골(죽본리)에 가서 농사 지으세요”라는 권유도 있고 하여서 토양리 개탯골에 안채 5칸, 바깥채 3칸짜리 집을 짓고 살게 된 것이다. 

그 집에는 어머니가 형과 나를 데리고 따로 나와서 살았다. 자식들 공부를 시키기 위한 목적도 있었다. (형은 20대에 사망하였다. 병나서 죽은 것은 아니고 원인 알 수 없는 사고사였는데,  그 당시는 그런 사고사가 비일비재했었다.)  11살에 입학한 나는 17살 때 은진국민학교 15기로 졸업하였다. 그 당시 초등학교는 시험 봐서 들어가던 시절이었다. 논산에서는 은진국민학교가 최초였고, 그 다음으로 강경에 중앙국민학교가 생겼다. 반월은 소학교로 출발했는데, 3년제 소학교는 한국사람이 다녔고 6년제 국민학교는 주로 일본사람들이 입학했다. 

 

한 사람 입대에 논산군민 거의다 동원 

 

17세에 국민학교 졸업하고 동기생 박병권이 일본 군대에서 군인을 뽑는다고 같이 지원하고자 하였다. 당시는 강제징용은 아니었기에 나는 동조하지 않고 서울 친척집으로 올라가 버렸다. 그런데 은진지서에서 “박병권이 일본 군대에 가니 환영식을 한다. 내려오라”고 연락이 왔다. 9시간 기차를 타고 집으로 내려왔다. 은진 병사계 직원과 순사들이 일본군대에 보내려고 설득했지만 거부 의사를 분명히 밝혔다. 이틀 후 동창들 13명 모두 모였고 동네마다 풍물단이 다 나와서 논산역까지 도열하니 소구르마 말 구르마도 즐비한 가운데 “니뽄 만세” 외치는 환송식이 장관이었다. 그 후 그는 장군이 되었다. 

이러다가는 나도 군대 끌려가겠다 싶어서 나는 논산을 떠나 우리 국토의 최북단 함경북도 나진으로 갔다. 1년 후배인 기광욱 부모가 나진에 가서 공사판 함바집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 나는 집을 작정하고 나왔기 때문에 아버지 돈을 상당액 지참하였다. 그 돈은 객지 생활 어려울 때마다 은인처럼 타향살이의 설움을 덜어주었다. 가나야마라고, 나진 생활에서 늘 나와 동행하는 일본인이 있었는데, 나는 돈이 있어서 그 친구에게 저녁도 사고 고량주도 대접해 주었다. 내가 이렇게 잘 해주니 그와 그 친구들은 나를 해방때까지 이끌어주었다. 처음에는 시멘트공장에 있었는데 너무 힘들다니까 자리를 알아봐주었다. 산이 온통 쇠덩어리인 철산(무산)에서 돌 깨는 기계일도 하고, 힘들다고 하니까 연장관리책임자 자리도 주선해 주었다. 

 

평양에서 말 관리인 일하다 맞은 해방~ 결혼

 

그들은 자리를 옮길 때마다 나를 챙겨주었다. 대동아전쟁 때 자기네 나라 패망을 미리 알고 있던 그들은 “길 막히면 못간다”면서 나를 데리고 평양으로 나왔다. 평양에서는 경마장 일을 했다. 말 발톱소지도 해주며 1년 반 지났는데 어느날 해방이 되었다. 내 나이 27살때였다. 

당시 황해도 연백이나 개성은 38선 이남이었는데, 어느날 거기 재력가 하나가 평양으로 말을 사러 왔다. 말만 사가서는 관리가 안 되니까 말의 생리를 잘 아는 나까지 쩜매갔다. 사람도 그렇지만 말도 체한다든지 하면 미리 알 수가 있다. 그렇게 연백에서 일하다가 귀향도 해야겠고 하여 어느날 들어오는 배 타고 서울 마포로 내려왔고, 이어서 고향으로 돌아왔다. 

집에서는 죽은 줄 알았던 아들이 살아왔다고 난리가 아니었다. 징집 피하여서 집 나간 지 7~8년 지나는 동안 편지 하나 없었으니 시대 상황이 그럴 때였다. 서울에 사는 외사촌이 올라오라고 하였다. 이불 공장인데, 당시 백화점에 납품하던 천외이불, 누비이불을 남영동에서 만들고 살림도 거기서 하였다. 포목상은 종로3가에 내고 판매하였는데, 얼마 안 돼서 내가 다 맡아서 하였다.

그때 시골집에서는 혼담이 오갔다. 양조장 손녀와 혼담이 오갔는데 싫었다. 그 때 내 나이 30세, 신부감은 8살 차이가 나는 22살이었다. “재취 아니냐?”는 소리 들을 정도로 늦은 나이였을 때였다. 음력 12월 7일, 당시 포목장사였던 나는 서울에서 전주로 수금하려고 기차 탈 채비하고 있는데 그날 이른 아침 한 영감님과 고모부가 오셨다. 아버님의 엄한 가정교육을 받고 자랐던 나는 깍듯이 큰절로 인사를 드렸다. 잠시 후 아버님이 부르셔서 사주를 쓰라고 하시길래, 바쁘다는 핑계를 대고 그냥 기차 타러 나갔다. 

그러는 사이에 어른들끼리 12월 15일로 결혼날짜를 잡아버렸다. 당시에 등급우편이 있었다. 요금이 3배 비싼, 12시 이전에 보내면 다음날 12시 이전에 받아볼 수 있는 건데, 등기 속달 같은 것이었다.  그 등급우편이 계속 날라와서 처음에는 버텼지만 부모님 명을 마냥 거역할 수만은 없는 노릇이었다.  

마침내 12월 19일 집으로 내려가보니 집에선 벌써 결혼 준비를 다 해놓는 상황이었다. 말3필, 사령구3개(4인이 드는 가마), 인력거 3개 등... 하인들, 산지기들도 다 대령해 놓은 상황이었다. 

 

내가 키운 호랑이, 그러나 그 덕도 보고

 

결혼 후 신혼살림은 서울에서 차렸다. 돈을 만지던 때라 나는 대한청년단 종로구 간부직도 맡았다. 그러니 우리 집은 안전지대였다. 어느날 양화점하던 이모부가 청년 하나를 데리고 왔다. 이종 사촌인데, 고졸이니까 일 시키면 잘 할 거라고 해서 점원으로 채용하였다. 일 잘하던 그가 6·25 사변이 터지자 말도 없이 사라졌고, 전쟁통에 나도 문 닫은 채 숨죽이고 있었다. 

나흘째 되는 날 낮 10시쯤 “사장님 계세요?” 하는 소리에 문을 열어보니, 빨간 인민군 복장의 청년이 내 앞에 나타났다. 그는 대뜸 무릎을 꿇더니 말했다. “사장님, 이젠 시골로 내려가세요.” 알고보니 그는 대동청년단 단원이었고 좌익에서 큰 인물인 듯하였다. ‘무일통과’라는 통행증을 해주었고, 그 덕분에 숙식까지 해결받으면서 서울에서 속속 통과~ 고향까지 무사히 내려올 수 있었다. 서울 떠나기 전 두고 오는 재산이 너무 아까워서 남영동 집에 가 보따리 챙기려 했으나 물건들은 어쩔 수가 없었다. 그냥 묻고 가자면서 현금 30만원 정도만 챙겨가지고 왔다. 그래도 적은 액수는 아니었다. 수복 후 상경해 살펴보니 잿더미만 남아 있고, 전쟁통에 엉뚱한 사람들이 일확천금하고 자기네 땅이라 주장하던 게 당시 사회상이었다. 서울은 그렇게 묻었다.

강경 역시 처참했다. 시내에 첩첩 쌓여 있는 시체들, 실로 끔찍했다. 소방대원으로 일을 시작했지만  소방서 일은 봉사직이었다. 강경에 처음 왔을 때 3860명. 세무서, 전매소, 경찰서가 있고 법원 검찰청이 있고 검사가 1명 있었다. 읍으로 승격시키고 강경번영의 꿈을 이루고자 여러 사회 활동에 참여하였다. 

 

강경에서 빵집~미곡상~금융업

 

6·25때 강경에 내려와서는 여러 장사를 했다. 미곡상은 1960년까지 7~8년을 했다. 문화제과점은 5~6년 했다. 나는 장사든 사업이든 간에 하나 그만 두고 다른 일한다기보다 둘이 겹치면서 하나가 자연스레 하나가 정리되고 하는 그런  형태로 일을 해왔다. 

그 이후 직장 생활이라기보다 지사처럼 운영을 해왔다. 무진회사(일종의 신협)도 한 15년 운영한 거 같다. 민생무진이라고, 한 달에 1만원씩 내고 1년 후 12만원 총 납입하고 17만원 돌려주는 금융기관였는데, 잘 되었다. 서울에 있다가 대전 대흥동 오류빌딩 5층 대전사무소에서 3년간 근무하다 강경지점 내고서 강경에 정착했다. 무진회사는 박정희 정권때 정치적으로 망했다. 박정희 정권이 돈 다 뽑아가자 민 사장은 해외 도피를 해야 했다. 무진회사를 충청은행으로 넘기라 해서 넘겼는데, 그때는 다들 그렇게 하라는 대로 할 수 밖에 없었던 시절이다. 퇴직 당시 나는 15년차로 차장을 달고 있었는데, 당시 읍장 월급이 28,000원이었고 내 월급은 두 배 정도였던 시절이다. 

 

기자시절 15년과 관광업 38년

 

무진회사 차장 시절, “기자에 발 디디면 금융회사에 유리하다”고 하여 경제지 기자 생활을 시작하였다. 그것이 “매일경제” 그러니까 나는 매경 창간멤버이기도 하다. 신아일보는 창간 1년 후 합류하여 논산지역 주재기자로서 산업경제 분야에서 뛰었다. 사회부 기자도 겸하였는데, 기자 생활도 15년 정도 병행한 거 같다.

에피소드라면, 어느날 연산에서 새벽2시에 기차 전복된 사건이 있었다. 강경에서 그 전화를 받자 마자 나는 일어나서 자전거 페달을 밟고 현장에 도착해 보니 새벽 2시 반! 이곳 저곳 살펴보았다. 폭발 위험도 있었다는데 그런 건 나중서야 알게 된 사실이었다. 

맨 나중까지 한 일은 관광업이다. 돌아보니 38년은 하였나 보다. 내가 뛰어들었을 당시 관광업은 초창기였다. 대전·충남지역에 관광회사는 1호 동선관광, 2호 야호관광 그리고 3호가 내가 운영하던 강경동선관광이었다. 그 당시에는 버스 타고 나가는 수학 여행이 없던 시절이다. 버스 2대로 시작했는데, 강경동선관광이라고 하면 버스로 가는 수학여행을 가는 관광업체로서 인식되고, 그렇게 자리를 잡은 것이다. 

충남에서는 협회장 일도 맡았다. 관광협회 중앙 이사 2선을 했는데 3년 임기로 6년 재직을 하였다. 당시 전국 이사 47명 중 대전 1명, 논산 1명이었는데 그냥 명예직이 아니었고 영향력이 세었다. 관광협회는 호텔, 기념품, 식당, 사진업, 운수업 등의 굵직한 업체들이 총집결되는 협회로서 어느 식당 하나가 불친절하다는 제보가 들어오면 조사하여서 문닫게 하기도 할 정도였다. 나는 10여년 전인 87세까지도 현역으로 뛰었다.  제주도도 따라가 가이드했는데, 우리 직원이 동행하면 접대받기가 어려우니 내가 고령이지만 나에게 말하기가 편했던 모양이다. 

 

 

▲     © 놀뫼신문

 

나눔의 세월 

 

이렇게 얘기하고 보니까 사업체도 많고 돈 많이 벌었겠구나 생각하는 분들이 있을 것이다. 무진금융할 때도 남3, 여4 총 7명이 일했다. 신문사할 때도 총무 배달원 등 12명이 일했다. 직원들 월급 챙겨주는 데도 바빴고, 그걸로 기뻤다. 아이들 학교 다닐 때는 학교 이사를 맡고, 강경의 검사나 학교장 인사이동시 최대한 챙겨봤다. 그러니 집식구에게 갖다 준 돈은 별로였고, 사별하고 나니 그게 후회된다. 

관광회사 그만 둔 후 나는 텃밭으로 소일해왔다. 500~600평 밭에다 이것저것 심어서 나 혼자 먹고 남 주고 하는 재미로 살았다. 이제는 그것마저 힘들어 정리하였다. 

나는 지금 우리집 근처인 산양연립빌라에서 살았다. 지금은 여기 3층 미주아파트의 첫 입주자이다. 30년 정도 살고 있는데, 창원건설이 집 짓는 거 보니까 너무 마음에 들어 특별히 3층 내 집을 예약하고 인부들에게 짜장면도 더 사줘가면서 공을 들인 집이다. 준공 뒤 바로 입주하여 30년째 살고 있는데 이제 이사를 해야겠다. 아직은 3층까지 계단을 이용하는데 아무래도 엘리베이터가 있는 곳에 가야 할 거 같아서다. 

나는 지금까지 버리는 게 거의 없다. 아버지 상중 부의록도 가지고 있다. 고마운 분들의 이름이다. 은행카드 갱신해도 잘라버리지 않고 다 보관하고 있다. 나는 지금도 일기를 쓰고 있다. 일력에 메모하고 다시 추려서 노트에 정리한다. 일력과 노트 모두 보관 중인데, 나 죽으면 다 태워버리라고 했다. 

 


[마치며]

기자는 그 동안 정민재 할아버지를 다섯 번 정도 만나본 거 같다. 매번 세계적으로 유명한 『창문 넘어 도망친 100세 노인』이 오버랩된다. 강경의 역사가 참 많이 사라져갔다. 그래서 더 찾아뵙고자 하지만, 지방지 기자의 현실은 여유롭지가 않다. 어르신 표현대로 당신이 죽으면 모든 걸 태워버리라고 하신다. 강경의 100년이 사라지려는 순간이다. 아직도 발음과 총기가 정정한 어르신의 이야기는 들어도 들어도 끝이 없다. 오늘 여기에 담은 이야기는 다이제스트이고, 그나마 일부이다. 갈길이 멀다. 

 

- 이진영 기자

ⓒ 놀뫼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트위터 트위터 페이스북 페이스북 카카오톡 카카오톡
 
이 기사에 대한 독자의견 의견쓰기 전체의견보기
기사 내용과 관련이 없는 글, 욕설을 사용하는 등 타인의 명예를 훼손하는 글은 관리자에 의해 예고없이 임의 삭제될 수 있으므로 주의하시기 바랍니다.
닉네임 패스워드 도배방지 숫자 입력
제 목
내 용
광고

각자에게 나침반 되어줄 가족영
광고
광고
광고
가장 많이 읽은 기사
논산시-논산시의회-논산경찰서, 논산경찰서 신축 업무 협약 체결 / 놀뫼신문
놀뫼새마을금고의 자작지얼(自作之孼) / 놀뫼신문
[소통공간] 놀뫼새마을금고, 이난삼구(二難三懼) / 놀뫼신문
논산시민아카데미 김경일 교수 초청 강연 11월 11일 개최 / 놀뫼신문
논산시-문경시, 상생발전 자매결연 체결 / 놀뫼신문
충남도-논산시 ‘탑정호 복합휴양관광단지 조성’ 협약 체결 / 놀뫼신문
계룡시, 치매안심센터 신축 개소 / 놀뫼신문
계룡시 종합사회복지관 수탁기관 신청자격 변경 / 놀뫼신문
논산시, 화지중앙시장 상인대학 졸업식 개최 / 놀뫼신문
[기고] 자연품 ‘논산시민공원’에서 힐링 / 놀뫼신문
로고
개인보호정책회사소개광고/제휴 안내청소년보호정책기사제보보도자료기사검색
충남 논산시 시민로 402 (취암동)| Tel - 041) 733-4800~1 | Fax - 041) 734-5567
상호: 놀뫼신문 | 등록번호: 충남다01238 | 등록연월: 2006.06.30 | 발행인: 전영주 | 편집인: 전영주 | 청소년보호책임자: 전영주
Copyright ⓒ 2007 놀뫼신문. All rights reserved. mail to nm4800@daum.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