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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노트] 고담소설강독사 정규헌(丁奎憲) 님 “인생의 스승 둘, 착한 책과 왕성한 호기심”
기사입력  2019/08/12 [10:51]   놀뫼신문

고담소설강독사 정규헌(丁奎憲) 님의 인생노트

“인생의 스승 둘, 착한 책과 왕성한 호기심”

 

▲ 대한민국 마지막 전기수 소암 정규헌 선생(좌)와 강독을 이수중인 장남 정덕진(우:전기수보존회 전문위원/강독사 계승위원)     © 놀뫼신문

 

  정 규 헌 (丁奎憲)   

1935년 청양 출생

1955년(21세) 결혼(황봉례 여사 슬하 2남1녀) 

1956년(22세) 군대생활(3년 만기제대)

1962년(28세) 청양 떠나 제지공장에 입사 

1999년(65세) 계룡에 정착

2008년(74세) 충남무형문화재 제39호(강독사)

 

나는 책 읽어주는 사람이다. 아직도 현역이다. 명함에 적어놓은 내 직업 ‘고담소설강독사’를 사람들이 잘 모른다. 고담(古談)소설이란, 쉽게 이야기해서 옛날이야기 책이다. 심청전, 춘향전, 숙향전, 장끼전, 설인귀전 등등 한글로 나온 우리 소설들을 읽어주는 사람이다. 

변사(辯士)인지 헷갈리는 사람도 있다. 말을 잘 하고 실감나게 해준다는 점에서는 같지만, 변사는 무성영화 시절 영화 대사를 읽어주던 시대의 입담 좋은 소리꾼였다. 전기수(傳奇叟)냐고 묻는 사람도 있다. 강독사와 전기수 하는 일은 엇비슷하고, 차이도 있다. 전기수는 돈을 받아야 읽어준다. 한창 실감나게 읽어가다가 클라이막스 같은 데에서는 뚝 그친다, 방송사고처럼.  후속편은 청중이 돈 내는 걸 봐가면서 결정한다. 강독, 더구나 실감나게 읽어주다 보면 힘이 든다. 노동이다. 그러니 돈 받는 게 당연지사이기도 하겠지만 우리 조상들은 어떠했는가? 공유 지식을 돈으로 사고팔지 않았다. 

 

책읽어주러 다니던 아버지

 

우리 아버지(정백섭)가 그랬다. 나는 1935년, 그러니까 해방되기 10년 전에 태어났다. 200여명이 살던 청양 비봉면 청수리에서 자랐다. 서당은 8살에 들어갔고 국민학교는 9살에 들어가 13살에 졸업하였다. 내가 서당 들어가 한문 배울 때 아버지는 한글을 가르쳐주셨다. 한글이 뭐 대단하냐고 하겠지만, 당시 우리 동네에 한글 아는 사람이 7명뿐이었다. 

한자는 서당에서 배웠다. 국민학교는 9살에 들어가 13살에 졸업하였다. 해방은 3학년때 맞았는데, 학교에서는 일본어를 배웠다. 아버지가 밤에 은밀히 한글을 가르치셨다. 당시는 한글 교육하다 들키면 주재소로 잡혀가던 시절이었다. 배운 것도 모른 체해야 했다. 아버지를 닮아선지 언어 센스가 있었다. 어려서 배운 일본어는 평생 써먹고, 영어 같은 외국어도 필요한 대로 습득하여 사는 데 불편이 없었다.

아버지는 가끔 집을 비우셨다. 심지어는 한달 만에 돌아오기도 하셨다. 떠나는 짐은 거의 없었다. 일본군 또는 누군가가 행적을 물으면 어머니(조봉순)나 가족들은 당일 아침 나갔다거나 ‘잠시 출타중이다’라고 답했다. 전기수지만 돈을 받고 다니신 거 같지는 않다. 온가족 걷어먹이는 일은 오롯 어머니 몫였다. 6남매 중 셋째, 남자로는 둘째였던 나는 아버지 책읽는 소리와 함께 자랐다. 종종 시조도 읊으셨지만 양반다운 품격을 찾으시며 좀 엄격하셨던 거 같다. 한글 가르친 다음에 “어디 내가 한 대로 읽어봐라~” 본격적인 도제수업이라기보다, 자연스러운 교육이었다. 그런데 돌아 보니, 그게 내가 강독사로 접어든 첫 걸음마였다. 

 

책읽기와 토정비결로 인기짱였던 시절

 

동네에서 어린 것이 책도 잘 읽는다는 소문이 났다. 한창 뛰놀고 싶은 때에도 동네사랑방에 불려가 책을 읽어드렸다. 조금 읽다 말려고 해도 내가 어린 애니까 “이거 조금만 더 읽자 더 읽자” 자꾸만 권유해서 날밤 새운 적도 많다. 어렸을 적이라 청도 좋았다. 대개 이야기책 들으러 오는 사람이 40, 50대였다. 어린애가 읽으니까 깜찍하기도 하고 또랑또랑하여 인기가 좋았다. 아줌마들은 따로 모여서 불렀고, 인근 마을에 가서 또 읽어주기도 하고 그랬다. 편지를 읽고 써달라는 부탁도 해주다보니 동네 어른들로부터 사랑과 귀여움을 독차지하였다. 

11살때부터는 한 술 더 떠서 토정비결도 봐주게 되었다. 동네에서는 매년 정월 신수를 토정비결로 봐주시던 한문선생이 한분 있었다. 옆에서 가만 보니까 어떤 규칙이 보였다. 그래서 책을 구입한 다음 어느날 어머니 신수를 봐드렸더니 “그 어르신 일러준 것과 똑같다”며 놀라하셨다. 이래서 동네사람들이 또 몰렸다. 돈이 오간 것은 아니지만, 한문선생은 어르신인지라 이무롭지가 않았던 모양이다. 

6·25동란은 내가 16살 때 터졌다. 군대는 22살인 1956년에 가서 3년 복무를 마치고 제대하였다. 장가는 군대 가기 직전인 21살 때 갔다. 동갑내기 황봉례 규수를 맞았다. 그 후 자식은 2남 1녀를 두었다. 천생배필 집식구는 내조만 하는 전형적인 한국형 현모양처이다. 내 나이 지금 85세인데, 남편 삼시세때 밥을 1분이라도 늦게 챙겨준 적이 없다. 내 가족과 내 건강의 수호신에게 장가 들었던 것이다. 

 

▲     © 놀뫼신문

 

▲     © 놀뫼신문

 

▲     © 놀뫼신문



고향 떠나 제지공장 엔지니어로

 

나도 가장으로서 아이들 키우고 하느라 고향을 떠났다. 28살 때 조폐공사 부근의 대원제지에 입사하였다. 제지업계에서 55세 정년 퇴직하기까지 제지공장만 다니면서 엔지니어로 일해왔다. 돌아보니 내 인생은 제지인생다. 초년생인데도 인덕이 많아서 나를 끌어주는 사람들이 있었다. 6년 후에는 한솔제지로 이직하였다. 삼성에서 세운 제지공장인데, 삼성은 기능직도 입사시험을 치루게 해다. 이름이 새한제지->전주제지->한솔제지로 바뀌었데, 현재는 신세계재단 소유다. 

거기서 5년 정도 근무하다가 마지막 옮긴 곳이 군산의 고려제지였다. 해방 전 신의주에 있어서 북선제지라고 했고, 해방되자 군산으로 뜯어 옮기면서 미쓰비씨 기계를 들여왔다. 그 최첨단 기계를 내가 시운전한 것이다. 당시 업계에서 내가 운전 잘 한다는 평판이 있어서 스카웃되어 간 모양새다. 내가 경력자로 들어갔을 때는 고려제지가 세대제지로 이름을 바꾸었고..... 19년 근무 후 정년으로 나올 때는 세풍제지였다.  백상지 신문용지 지폭 8m짜리를 1분에 1200m 속도로 뽑아냈다.  나는 우리 나라 제지업을 한 단계 업그레이드시킨 산업주역으로 자부심을 갖는다. 

내가 11살 때부터 책을 읽어가지고 스무살 먹어서까지는 동네에서 칭찬도 많이 받고 종종 인근에 불러 다니기도 했지만, 시대가 바뀌었다. 라디오가 생기고 TV가 등장하면서 강독사라는 직업은 발 붙일 곳이 없게 되었다. 직장생활은 군대 제대하구부터니까 삼사십년 한 거 같다. 제지업계에서는 명인이라는 칭찬까지 들었다. 책 만드는 재료가 종이라서 택한 직종은 아니었지만, 이 또한 책과의 인연이라면 인연 같다. 

 

시(詩)와 특허는 한 뿌리

 

책은 직장생활하면서도 계속하여 읽었다. 간간 소리 내어 음독도 했으나, 대개는 눈으로만 읽었다. 지적 호기심이 워낙 많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인문학쪽 책만 탐독한 게 아니다. 업무 관련 서적이나 과학 분야의 쪽 챙겨서 보았다. 독서편식을 안 하다보니 일상생활도 균형이 잡히는 듯하다. 그 동안 출원한 특허품도 몇 된다. 최근에는 바늘에 실 끼우는 기계 특허를 출원해놓았다. 눈이 어두운 사람도 실을 바늘구멍에 쉽게 끼울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세상이 아무리 첨단으로 바뀌어도 집에서 실과 바늘이 사라질 수는 없다. 시(詩)도 마찬가지이다. 그래서 나는 시와 특허를 동류항으로 본다. 특허나 시는, 세상에 없던 것들을 내놓는 행위다. 긍정적인 생각을 품고 있노라면 그게 발명으로 나오기도 하고, 시로도 표출된다. 

내 아들은 우리 조상의 전통인 강독사의 진수를 이해하고, 만시지탄의 감이 없지 않지만 현재 내 밑에서 강독사 이수를 받고 있다. 부전자전인지 나처럼 시를 좋아하여 직접 쓰기도 하고 낭송도 한다. 이야기책 읽어주는 전기수는 사라져가지만, 시낭송은 전국적인 대세이다. “구멍 뚫린 철모자”는 내가 애송하는 자작시 중 하나다. 

이런 시는 책 속에 있을 때보다 누군가의 입을 통하여 랑랑하게 표출될 때 좀더 큰 흡인력과 생명력을 갖는 듯싶다. 세상에는 표현을 해야 빛나는 게 참 많다. 그래서 나는 정년 후에도 나를 계속 도전하고 노출시켜 왔다. 그 도전 중 하나가 성우(聲優)였다. 1~2차 다 합격하였지만, 최종 면접에서는 미역국을 먹었다. 나이가 너무 많다는 거다. 성우는 떨어졌지만 도전은 멈추지 않았다. 그 결과 KBS는 물론 각종 방송으로 숱하게 불려 다녔다. 

시대는 변하고 또 변한다. 정규교육, 평생학습에만 신경 쓰던 EBS 교육방송이 어느날 “책읽어주는 라디오”로 간판을 바꾸어 달았다. 고품격 시낭송이 전국에서 물결치는 시대다. 이런 트렌드는 나의 전통적인 ‘강독’과 직결되어 있지는 않지만, 상당부분 상통하니 기분이 좋아진다. 

 

▲     © 놀뫼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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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주한옥마을에서(2016어린이날 공연)     © 놀뫼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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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독사라는 불모지에서 무형문화재

 

정년퇴직 후 시간 여유가 생기면서, 어린 시절 동네에서 책읽어주던 시절이 생각났다. 공주 의당 민속극박물관 청송 심씨 심우성 씨를 만났다. 동갑내기였고 그때가 환갑 전후였던 거 같다. 교류하면서 인간문화재라는 제도가 있음을 알았다. 경기도 무형문화재로 단소를 부는 윤씨도 만나 강독회도 해보았다. 단소를 백뮤직으로 깔면서 책을 읽으니 이 또한 우리 조상의 풍류요 예술이 아닐 수 없었다. 

강독사로서 무형문화재 신청은 2007년 충남도청에 문봉식 과장이 있을 때 그의 안내를 받아서 하였다. 첫 번째 해에는 고배를 마셨지만 다음해 심사에서는 통과가 되었다. 그래서 나는 드디어 “충남 무형문화재 제39호(강독사)”라는 타이틀을 얻게 되었다. 이 호칭은 대한민국 강독분야에서는 나를 유일한 예능보유자로 인정을 하고 나 한 사람에게만 수여한 것으로서, 실로 가문의 영광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대한민국에서 강독사만 고집할 게 아니라고 보아서 전기수도 수소문해보았다. 익산 어디에 누가 하나 있다 하여 물어물어 가보니 3년 전 타계했다는 비보만 듣고 왔다. 대학로에서 『전기수』라는 연극도 올려지고 하여 얼마간이라도 좀 남아 있을 거 같지만, 현실은 이렇듯 불모지이다. 

그 동안 강독을 배우겠다고 나에게 다녀간 사람이 이십 명이 넘는다. 그런데 백날 해봐야 알아주지도 않고 밥 한 끼도 못 먹으니 그만두기 반복이다. 이런 악순환이 거듭되다가 6년 전 서울에서 경영컨설팅하던 아들이 내려와 강독사 후계 과정을 이수중이다. 3년 이상 이수 후에도 5년을 더 해야 전수조교가 되는데, 그래도 ‘강독사’는 못되고 ‘강독인’이다. 무형문화재는 나의 사후에나 승계가 되니, 그 동안 절차도 만만치 않고 생활인으로서도 매력적이지가 않다. 무형문화재가 되니까 매년 나오는 돈이 좀 있다. 엔터테인먼트가 넘쳐나는 세상에 나홀로 강독만으로는 구경꾼들이 몰려들지 않는다. 단소명인과 함께 할 때처럼, 이제는 나부터 멋들어진 한복을 빼 입고 나서주어야 하고, 주변에 찬조출연해주는 이들이 함께 어우러져야 한 무대가 된다. 

 

판소리 원조격인 강독 공연

 

“계룡시, 소암 정규헌 선생 강독회 개최”라는 제목 밑에 <대한민국 마지막 전기수 정규헌, ‘심청전’ 강독>이라는 부제가 지난달 지역 신문에 실렸다. “계룡시는 7월 4일 계룡문화예술의전당 다목적홀에서 강독사 소암 정규헌선생의 고담소설 강독회를 개최했다. 이번 행사는 충청남도 무형문화재 제36호로 지정된 소암 정규헌 선생을 통해 옛 우리문화를 널리 알리고 시민들과 공유하고자 마련된 자리로 한국무용, 국악, 시낭송 등 다양한 공연과 함께 강독회가 진행됐다. 

강독사란 한글소설이 많이 등장했던 조선후기, 글을 읽기 어려웠던 사람들에게 소설을 낭독해 주는 전기수(傳奇叟)의 일종이다. 라디오, 영화 등 매체등장으로 점차 사라졌으며, 현재는 계룡의 소암 정규헌 선생만이 그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이날 정규헌 선생은 소설 ‘심청전’을 단순히 읽어주는 것이 아니라 시를 읊듯 문장에 가락을 붙이고 섬세한 감정 묘사로 1인극을 하듯 읽어서 시민들의 호기심을 자극하고 호응을 이끌었다.”

이처럼 기사는 길지 않으나 행사 준비는 길다. 이런 정기 공연 외에 올해는 증손자뻘 초등학생 4학년을 만났다. 사계고택에서 계룡시 관내 초등생들을 만났는데, 30분 내내 장난치는 아이들 하나 없이 눈이 빤짝빤짝들 했다. 딱딱하고 고리타분하기만 한 예절 시간으로만 알았는데 고택에서 멋진 한복 할아버지 만나니 신기했던 모양이다. 이야기꾼 할아버지 입담도 괜찮았던 모양이다. 나는 이런 아이들을 계속하여서 만나고 싶다. 나누고 싶은 이야기가 샘솟는다. 

 

내가 꿈꾸는 착한세상, 책세상

 

내 나이 85, 예전이나 지금이나 상노인네다. 사람들은 이제 그만 활동을 접었으면 하는 눈치도 보인다. 그러나 나는 여전히 사람들을 만나려 한다. 이유가 있다. 책이 귀하던 시절, 우리는 책에 써 있는 대로 살았다. 고담소설의 가르침은 한결같이 사필귀정, 고진감래, 권선징악이다. 그 가르침을 사랑방 같은 공간에 한데 모여 책읽기로 공유할 때, 그때 세상은 행복했고 욕심 없는 마음은 평화로웠다. 나 역시 자랑할 거 별로 없지만, 책대로 살아보려 했다는 게 젤 큰 자랑이다. 계룡시에서 가장 가난한 사람이 나 같지만, 난 후회하지 않는다. 돈을 거머쥘 기회도 없잖았다. 그렇지만 나는 책의 가르침을 따랐다. 내가 공덕이 있는데 이승에서 복을 못 받더라도 저승 아니면 후대에 주어진다고, 그렇게 가르친다, 책은! 그렇게 믿는다, 나는!

 

[도움말]  정덕진(정규헌 선생 장남)

[구술정리] 이진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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