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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노트] 부적면 부황3리 이순자(李順子)님, "내 속에 숨어 있던 소녀감성"
기사입력  2019/06/27 [10:20]   놀뫼신문
▲ 한글대학 수료식 이순자 어르신     © 놀뫼신문

 

   이순자李順子   

  • 1938년 논산 부적면 준벅거리 출생
  • 1958년 남편 이금천 씨와 결혼(2남 2녀)
  • 2018년 한글대학 입학

 

나는 아버지 성주이씨 이영태 씨와 어머니 광산김씨 김희수 씨 7남매 중 셋째로 태어났다. 위로 언니 두 명이 나고 나까지 3명째 딸인데 내 밑으로 모두 남동생들이었다. 내 밑으로 남동생들은 집안에서 귀하게 대접을 받았고, 나 역시 남동생들 덕에 복덩이로 자랐다.

 

탑정리저수지 수몰동네 준벅거리

 

나는 1938년 논산시 부적면 준벅거리에서 태어났다. 준벅거리는 지금은 탑정호수에 수몰된 마을이다. 준벅거리 우리집은 일본주택이었다. 마당에는 뽕나무가 있었고 누에를 재배하기도 했던 멋진 집으로 기억이 난다

1945년 내 나이 7살, 아버지가 하신 말씀이 아직도 기억에 쟁쟁하다. “우리 동네에 댐이 건설되어 물이 들어오니 빨리 이사해야 한다!” 우리 가족은 외가집 동네인 안천말로 이사를 갔다. 지금 신풍리 안천매운탕 옆이다. 

1951년 셋째 남동생이 태어나던 해에는 가뭄이 심하게 들어서 탑정호수가 바닥을 드러낼 정도였다. 예전 준벅거리에 살던 사람들은 떠나온 자기 집과 마을 모습을 본다고 다시 탑정호로 몰려들었다. 나도 아버지를 따라서 가뭄으로 물이 빠진 탑정호 준벅거리로 가서 우리집을 보았다. 여전히 우리 집터와 뽕나무 뿌리가 남아 있었다. 아직도 그때의 모습이 선하다.

그해 가뭄으로 먹을 것이 부족했다. 아버지는 가뭄으로 바닥이 드러난 탑정호수에 작살을 가지고 나가서 뱀장어와 물고기를 가득 잡아와 온가족 몸보신을 해주시기도 했다. 그런데 그해 태어난 셋째 남동생은 어머니 젖이 안 나와 젖도 제대로 먹지 못해 고생했다. 이 일을 두고 아버지께서는 “그때 잡아먹었던 뱀장어와 물고기 때문에 부정 타서 네 엄마와 동생이 고생했다”고 푸념하셨다.

 

징용간 아버지, 떡장사 어머니

 

아버지는 인자하고 말수 적고 얌전한 분이었다. 한 가지 흠이라면 술을 많이 드시는 것이었다. 해방 전에는 일제 징용으로 만주에 끌려가셨고, 해방 후 6·25때도 잠시 군대에 가셨다고 한다. 만주 보급대로 징용 가셨던 아버지는 해방이 되고도 한참 후에나 고향 준벅거리로 돌아오셨다. 아버지가 징용 끌려가신 후 먹고 살기조차 힘들어지자, 어머니는 홀로 떡 장사를 하시면서 우리를 키우셨다. 베피 떡이라고, 개피 떡, 혹은 바람떡이라고도 불리는데, 콩고물에 소를 넣고 반달 모양으로 빚은 떡이다. 그렇게 만든 베피 떡으로 우리를 키우셨다. 어머니가 떡장사하는 동안 첫째와 둘째 남동생은 큰언니와 둘째언니가, 셋째와 넷째 남동생은 내가 돌보게 되었다. 셋째 남동생은 14살 터울이고 막내 남동생은 19살 터울이니 마치 어머니처럼 그 애들을 키웠다.

 

결혼 첫날밤 이야기

 

1958년 음력 10월경, 내 나이 21살에 아버지가 탑정리(지금의 탑정호 입구 마을)에 나갔다 내 결혼 사주를 받아오셨다. 우리 동네 안천말에서 탑정리로 나가려면 나룻배를 타고 가야 하고, 아버지는 아침에 나가더니 저녁이 되어 술에 잔뜩 취하셔서 “우리 집 셋째 순자, 사주해왔어”고 툭 던지듯 말씀하셨다. 어머니는 “무슨 자식결혼을 그렇게 빨리 결정하냐?”고 타박하셨지만, 그것으로 그만이다.

결혼 얘기 처음 들었을 때 무덤덤했지만 잠자리에 들려고 하니 눈물이 쏟아져 나왔다. 얼굴 한번 보지도 못한 사람과 결혼하라고 하니까 서운하기도 했고, 남들 하는 맞선도 못보고 약혼사진 한번 찍어 보지 못하고 결혼을 하게 된다니 더욱 속상했다. 그런데 신랑이 나보다 세 살이 작은 18살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마음이 불편했다.

그렇게 꺼낸 혼담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어, 한 달 만인 11월 동짓달에 결혼식을 올렸다. 우리집에서 결혼식 올리고, 오후에 바로 한복에 원삼쪽도리를 하고 배 타고 친정을 떠나 탑정리 시댁으로 갔다. 가족들과 마을사람들은 “새 신부가 온다”고 시댁에 모여들었고, 신방으로 자그마한 방이 꾸며졌고, 동짓달 추운 날씨로 군불로 데워진 구들자리에 앉아서 무거운 원삼쪽도리를 쓰고 하염없이 기다렸다. 신랑은 저녁 늦게까지 친구들과 어울려 술잔치를 벌이고 돌아와 내 옷고름을 풀기만 하고, 술에 취해서 그냥 잠들었다. 그러더니 담날 아침 일찍 나가버렸다. 

 

▲ 젊은 시절 친구들과     © 놀뫼신문

 

“시댁 보리, 몰래 베어오세요”

 

시아버지는 ‘탑정1구 이옥구’ 하면 알아줄 정도로 유명한 침술가이지만, 우리에게는 호랭이 같던 분이다. 시댁에는 많은 손님들이 자고, 아침에는 명태국을 대접할 정도로 부잣집이었다. 시어머니가 2명 있었는데, 모든 집안 대소사는 작은 시어머니가 챙겼다.  나의 남편은 큰 시어머니 자식으로 4남매 중 막내였다.

남편은 키도 크고 잘 생긴 얼굴에 마음이 너무 순해서 남에게 싫은 소리 한마디 못하는 순둥이다. 남편이 중학교 2학년 때 학업을 중단한 것도, 집안에서 일하게 된 것도 모두 작은 시어머니가 시켜서 하게 된 일이었다는 것을 나중에 알게 되었다. 그때부터 신세 한탄을 하면 매일 저녁을 술로 세월을 보내다가 결혼하게 된 것이다. 신혼생활은 그렇게 시작되었지만 14명이나 되는 대가족 집안에서 남편과 나는 대가족 수발하는 일만 하였다.

큰 아들 돌이 지나고 둘째 아들 임신하고 있을 때, 남편이 충동적으로 친구 따라 군대에 자원 입대해 버렸다. ‘논산훈련소에서 훈련받았고 대전피복창으로 부대 배치를 받았다’는 소식만 전해 들었다. ‘휴가를 나왔다’는 소식도 전해듣기만 할 뿐, 집안 홀대를 받던 남편은 집에 들르지도 않았다.

둘째아들이 태어났고, 결혼 3년이 넘도록 시집살이는 힘에 부치기만 하였다. 남편이 대전에서 부산 피복창으로 옮겼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몰래 친정아버지를 찾아가서 남편 면회 갈 돈을 얻어 두 아들 데리고 무작정 부산으로 출발했다. 대전역에서 밤 11시 기차를 타고 새벽에 내려 택시를 타고 피복창으로 갔다. 부대에서 면회 신청하니 남편이 1시간 만에 나오더니, “왜 왔냐?”고 했지만 무뚝뚝한 말투 뒤에는 보고 싶은 반가움이 느껴졌다. 다행스럽게 부대에서 방을 마련해주었고, 쌀과 연탄을 보내주어 부대 인근에서 두 아들과 한 달 정도 살다가 시댁으로 돌아갔다.

시댁에서는 ‘남편 만나러 몰래 집을 나갔다’고 오해하여 우리를 미워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시댁 근처에 방을 얻어 아들 둘과 나가 살아야 했다. 그러나 생활고 때문에 매일 아침마다 일찍 두 아들을 데리고 시댁에 오가며 힘든 생활을 계속해야 했다.

1963년, 2년을 기다려 남편은 36개월 군복무를 마치고 제대를 했고, 우리는 셋째로 큰딸을 얻었다. 매일같이 시댁에서 일을 하고 오지만, 시댁에서는 끼니 때울 만큼도 도와주지 않았다. 내가 셋째딸 출산한 지 얼마 안 된 산모인데도 시댁의 지원이 없어 동네사람들이 흰죽 쑤어주어 그나마 산후조리를 했다. 이때 기억에 지금도 서운하다. 시댁에 가서 시아버지와 시숙에게 “살게 해달라” 도움을 청해보았지만, “술만 먹고 저렇게 돌아다니는 놈은 도와주어봤자 아무 소용이 없다”면서 일언지하에 거절을 당하고 말았다. 4월 춘궁기에는 먹을 게 없어 남편을 시켜 ‘몰래 시댁 보리라도 베어오라’고 해서 끼니를 채우기도 했다.

나는 독하게 마음 먹고 시댁을 나와 남편에게 “공장을 다니라” 했다. 남편은 한 직장을 오래 다니지 못하고, 성냥공장에서 대한통운으로 그렇게 직장을 바꾸며 다녔다. 그리고 여전히 술로만 살다보니, 그야말로 “술집이 내 집이요, 우리집은 하숙집” 월급 가져오는 달이 드물 정도였다. 나는 가족 생계를 위해 둘째 시누가 소개해준 ‘메리야스 보따리 도보장수’를 시작했다. 주변사람들이 걱정하고, 도와주기도 했지만 정작 장사는 시원치 않았다.

 

철도국 들어가긴 했지만 김공장 맞벌이

 

1966년 3월, 덕지동 단골집 논산역장 사모님이 나를 예쁘게 보시고 남편을 철도국에 시험 보도록 권해주었다. 남편은 철도국 선로반 실기와 필기시험을 한 번에 합격하였지만, 3개월이 지난 6개월이 되도록 발령나지 않았고, 그 동안 여전히 술로만 세월을 보내었다.

남편의 모습을 보고만 있을 수 없어서 친정아버지에게 가서 울고불고 매달렸다. 친정아버지는 “얼마가 필요하냐?” 물어보셨고 장날 저녁 돈 보따리를 주셨다. 친정집에서 키우던 “새끼밴 소 한 마리를 팔았고 나머지는 꾼 돈을 보탰다”고 하셨다. 눈물나게 고마웠다.

이후 남편이 철도국에서 발령을 받았는데, 첫 발령지가 문경새재에 있는 마성역이었다. 탄광촌으로 유명한 문경새재의 마성역은 새로 생긴 역이어서 남편을 따라가야 했다. 두 아들은 친정에 맡기고 큰딸만 데리고 가서 남편의 직장생활을 도왔다. 그렇게 대전 철도국 관할에서 선로반과 점검반 생활을 하며 이제 안정된 생활로 접어드는 듯했다. 그러나 남편은 내성적이고 순종적인 성격으로 인해 철도국 생활 내내 일 마치면 술 마시는 생활을 반복했다.

철도국에서 일할 때는 힘도 좋고 성실하고 맡은 바 일을 잘처리해가는 직원였지만, 남편 자신에게는 너무 힘든 일상이었다. 일이 끝나면 바로 술을 먹어야 했고, 그래도 마음 속의 짐을 털어내지 못한 채 우울증으로 쓰러지고 말았다. 회사 지정병원인 서대전 삼성병원을 거쳐 충남대학병원에 입원을 하게 되었다. 

그때부터 나는 매일 아침 집 근처 부황역에서 기차를 타고 대전역에서 다시 충남대학병원까지 걸어가 남편 병수발을 온종일 하였다. 저녁이 되면 다시 집에 돌아와 아이들을 챙겼다. 남편의 우울증이 심해지다보니 병원에서는 “가족이 와서 병간호해야 한다”고 하였다. 6개월 동안 힘든 병원 생활을 같이 할 수밖에 없었다. 낮에 일당 주는 일이 있으면 남편의 병간호보다도 일당벌이가 더 우선이었다.

남편의 입원이 길어지자 철도국에서 ‘퇴사를 해야 한다’는 통지가 날아왔다. 다시 철도국에 찾아가서 “남편이 회사를 그만두면 가족의 생계가 어렵다”고 통사정하였다. 6개월이 되는 3월 5일까지 치료 기간을 연장할 수 있게 되어 남편은 우여곡절 끝에 완치 판정을 받고 철도국에 복직했다. 그래도 부족한 생활비를 마련하기 위해 나는 집근처 김 공장을 다녀야 했다. 

퇴원을 했지만 남편의 지속적인 병치료가 중요했다. 나는 시어머니와 시숙, 친척 들에게 “남편의 병치료에 좋다는 약이 있으니, 찾아서 구해다 주세요”라면서 부탁하고 때로는 단호하게 요구했다. 매일 남편의 건강을 위해서 우유와 계란을 따로 챙겨서 주었다. 남편이 철도국으로 복직을 했어도 나는 계속 김 공장을 다녔다. 그때 이후 김 공장에서 계속 일하다보니 안 아픈 곳이 없을 지경으로 나는 종합병원이었다.

 

▲남편회갑연 가족사진     © 놀뫼신문

 

▲     © 놀뫼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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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놀뫼신문

 

▲     © 놀뫼신문

 

든든한 4남매와 한글대학 동창생 남편

 

1995년, 남편은 그렇게 20년을 다니고 29년 만에 철도국을 명예 퇴직하게 되었다. 아들이 아버지를 업고 명예퇴직식장에 들어갔을 정도로 다시 몸이 안 좋아졌기 때문이다. 남편이 퇴직할 때 퇴직금을 일시금으로 받았는데, 지금도 연금으로 받지 않은 것이 후회가 되기는 하다. 퇴직금을 받아서 집을 지을 때 받았던 융자금을 제일 먼저 갚았다. 그리고 앞으로 생활을 위해서 논 7마지기를 샀다. 퇴직금 중 상당 부분은 둘째아들 가수원 아파트 사주는 데 들어갔다.

남편은 퇴직 후에도 ‘집안 생활비에 조금이라도 보탬을 준다’고 논산과 부영아파트 경비를 10년 동안 해주었다. 첫째아들은 대전상고를 기차 통학하면서 다닐 정도로 공부도 잘했고, 회사생활도 잘해서 인정을 받고 지내다가 지금은 일산에서 부족함 없이 잘살고 있어 걱정이 없다. 둘째 아들은 집을 찾아와서 인테리어도 해주고 농사일도 도와주고 살아가고 있어서 마음의 안도를 하며 지내고 있다. 두 딸과는 전화 통화도 자주 하고 명절이나 생일에 찾아와 집에 필요한 살림이나 물건을 사서 보내준다. 공부 잘하고 재주도 많은 큰딸은 직장생활과 사회생활에서 인정을 받다 보니 아직 결혼을 안 하고 혼자 사는 게 마음이 걸리지만, 씩씩하게 살아가는 것을 보면 마음만큼은 든든하다.

 

▲ 한글대학 수료식에서 남편 이금천 어르신     © 놀뫼신문

 

▲인터뷰 마친 부부사진     © 놀뫼신문

 

▲한글대학에서 만든 바구니     © 놀뫼신문

 

▲한글대학에서 그린 그림들     © 놀뫼신문



거칠어진 심성 가다듬는 소녀적 감성

 

이렇게 마음 좋고 순하고 싫은 소리 못해서 실속도 없는 남편과 아이 4남매 키우면서 열심히 살아왔지만 내 마음 한켠에는 늘 배우지 못한 아쉬움이 많았다. 2018년, 마을회관에 면장님이 찾아왔다. “논산시청에서 한글대학을 열어서 공부를 시켜준다”는 것이다. “책상과 공부할 재료들을 모두 무상으로 제공해주고 한글 읽기, 쓰기, 셈하기 등 그 동안 못배웠던 늦깎이 공부를 할 수 있다.”고 했다. 나는 망설임 없이 남편에게 “한글대학에서 함께 공부하자”고 했다.

남편이 우울증 병력이 있어 치매증세가 올까 걱정하던 차에 ‘한글대학 공부는 치매 예방에도 효과가 있다’고 해서 같이 하기를 권했던 것이다. 처음 남편과 함께 마을 경로당에서 공부를 시작한 사람은 14명 정도였다. 처음에는 한글 쓰기가 어렵고 힘들었지만 글을 쓸 때마다 새로운 세상을 살아가는 듯했다. 지금은 자식들에게 문자 보내고 카톡 문자로 소식을 전하고 있다. 자식들은 지금의 나를 보면서 빨리 공부를 해드리지 못한 걸 아쉬워하기 하지만, 이렇게 좋은 환경과 기회가 되어서 한글과 숫자 셈하기를 배우고 이제 2년차가 되니 배움이 참으로 즐겁고 기쁘기만 하다.

글을 배우며 처음으로 시도 쓰고, 시에 맞추어 그림도 그리는 시화작품을 만들어 보기까지 했다. 지금까지 나의 삶이 ‘무색의 바다, 풍랑 속’이었다면 요즘의 나의 일상은 ‘바다 위 무지개 속’이다. 평온하다. 그동안 남편과 자식만을 위해 남모를 고생 속에서 살다보니 삶의 여정이 거칠어졌다. 그런데 내 마음 깊은 곳에는 문학과 자연을 그리고자 하는 열정이 남아 있었나 보다. 문학 소녀의 감성으로 살고픈 뜨거운 감성이 용광로처럼 타오르는 듯하다. 이런 나의 마음을 담아 시 한 편 써본다.

 

 

들꽃과 이것

 

너의 존재가 무엇이길래 

보이지도 잡히지도 않는 것이

나의 잠과 향기를 다 가져가니 

나는 춥게도 하고 따뜻하게도 할 수 있어 

 

너의 존재가 무엇이니  

나는 존재가 아니고 

나도 예쁜 이름이 있어

내 이름은 바람이야

 

 

- 성수용 시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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