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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노트] 봉동 2리 김영욱님, 구사일생 김하사 "가족만 바라보고 뛴 구보일생"
기사입력  2019/06/12 [17:26]   놀뫼신문

 

삶은 한낱 꿈이요 기적이 아닐까. 어느덧 망구의 나이가 되었지만 그간의 삶이 꿈이요, 일상의 삶은 기적이라고 생각해 본다. 그 옛날 훈련 마치자마자 이백여 명 함께 투입된 중부전선 금화고지에서 3년 넘게 싸우면서 끝내는 여덟 명만 살아왔으니 틀림없이 기적이다. 오늘 현충일, 국군묘지의 추모행사를 보며 그 시절의 동료 생각에 잠시나마 가슴이 메인다. 죽을 수도 있었던 전쟁터, 살아서 지금 이런 호사를 누리는 게 때때로 꿈만 같다.

 

▲     © 놀뫼신문

 

 김영욱(金永彧) 

  • 1932년 4.15 봉동2리 출생
  • 1946년 황화초등학교 졸업
  • 1950년 6.25까지 서울에서 생활
  • 1952년 5.21 군 영장 제주 훈련소 입소
  • 1955년 하사 (보병) 제 2사단 17연대 제대
  • 1959년 이용례 님과 결혼, 2남 2녀 출산
  • 2003년 봉동 2리 노인회장 역임

 

띠플 베던 식민지 학동

나는 1932년 4월 15일 아버지 광산 김씨 김구현씨와 어머니 서병민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지금 살고 있는 집 이웃이었다. 위로 형님 네 분에 누님이 한 분 계시고 내 아래로 여동생이 하나 있다. 아버지가 일곱 살 때 돌아가신 뒤 생활이 더욱 어려워졌지만 아홉 살에 황화 초등학교에 입학했다. 칠십 년이 흘렀지만 당시의 배고픔은 잊을 수 없다. 특히 보릿고개 때는 먹고 사는 게 기적 같았다. 우리는 소나무 송기까지는 안 먹었지만 먹을 수 있는 건 다 먹었다. 학교에서는 일제 치하라 공부는 두 시간 정도 하고 내내 작업을 했다. 일본은  태평양전쟁 중이라 물자가 모자랐고 특히 기름이 모자라 소나무에서 송진을 따면 거기서 기름을 추출해 냈다. 기마(騎馬)를 위해 건초로 쓸 띠풀을 베는 작업도 했다.

 

서울에서는 장작상회 점원

해방 뒤, 다음 해인 15세에 황화초등학교를 졸업하고 바로 서울로 올라갔다. 성동구 신당동(현재 중구)에서  회사를 운영하면서 장작 상회를 하는 집에 점원으로 들어갔다. 당시의 땔감은 전부 나무이던 시절이었다. 신흥 부자 주택 단지인 신당동에 자리한 그곳의 장작더미는 어마어마했다. 사들이고 판매하는 양은 상상 초월이었다. 나는 주로 장작을 마차로 날라다 주는 일을 하였다. 때로는 통나무로 장작을 패는 일도 거들었다. 거기서 4년 일하면 회사에 넣어 주기로 한 조건으로 급료 없이 일을 배워 나갔다.

그것도 복이라고 다 된 밥을 먹지 못했다.(?) 회사에 입사하기 직전, 6.25 한국 전쟁이 발발한 것이다. 할 수 없이 서울에서 남의 집 가사를 도맡았던 여동생과 걸어서 고향에 내려왔다. 사흘 만에 도착하니 이미 인민군이 강경을 점령하고 있었다. 사흘간 굶었는지 무언가 얻어먹었는지 전혀 생각이 안 난다. 공포에 떨던 시간이었다. 낮에는 공습이 많았으므로 밤길을 걸을 때가 많았다.

 

▲ 4286년(1953년)5월6일 소총본부원화기소대     © 놀뫼신문

 

저격능선(狙擊稜線) 전투의 생존자 8명

다음 해 1951 년 스무 살에 군대 영장을 받고 제주 훈련소로 가는 배를 탔다. 그러나 쫓겨 왔다. 그건 어려서 그랬다기보다는 워낙 체구가 작아서 그랬을 것이다. 나보다 나이 어린 소년도 키만 크면 거리에서 붙잡혀 가던 판국이었다. 

다시 1952년 스물한 살, 모 심을 준비로 한창 바쁘던 때 영장이 나와 다시 제주 1훈련소에 당도했다. 그해 논산훈련소가 창설되어 나는 그곳 군번을 받았으나 막사 부족으로 제주 훈련소에서 훈련을 받아야 했다. 훈련을 받는 둥 마는 둥 바로 중부전선 금화지구에 배치되었다. 그곳은 중부전선의 심장부였다. 배치 받자마자 보병으로 맨 앞에서 싸웠다. 워낙 잽싸고 눈치가 빨라 바로 연락병으로 선발 되었다. 무전기와 깃발을 가지고 다니며 미 공군 비행기가 뜨면 깃발로 아군임을 알렸다. 적이 일개 군단을 이끌고 침투하는 정보를 미리 입수했다.

그해 시월 철의 삼각지 중의 하나인 금화지구 저격(狙擊)능선은 그곳을 확보하지 못하면 중부전선이 무너지므로 쟁탈과 공방의 대상이 되던 곳이었다. 우리 2사단 17연대는 중공군 제15사단과 맞붙었다. 이름하여 저격(狙擊)능선 전투-빼앗느냐, 뺏기느냐,  그 전투에서 동료가 앞에서 죽고 뒤에서 쓰러지고 옆에서 피를 흘렸다. 죽고 사는 것, 순간의 운명이었다. 밤이면 조명탄이나 써치라이트 아래서 전투, 낮에는 도치카라 부르던 참호 속에서 지냈다.  

내가 속한 중대 200명 중 단 8명이 살아남았다. 중대장도 죽었고 소대장도 죽었다. 다 죽은 셈이다. 살아 있다는 것은 기적이었다. 살아남은 게 비정상일 수도 있는 판이었다. 우스갯소리가 나왔다. 산 사람은 조상의 묘를 잘 쓴 탓에 살았을 거라고. 밥도 문제가 아니었다. 항고도 없이 탄피 밀 박스에 밥 한덩이와 국물 조금이 다였지만 그 전투에서 승리하여 살아남았다는 사실이 감개무량할 따름이었다. 적이 보이면 무조건 먼저 쏘아야 내가 살 수 있었다. 소총도 쏘고 기관총도 쏘았다. 제대할 때까지 금화지구가 내 전투 무대였다.

휴전으로 1955 년 7월 10일 하사로 제대하였다. 스물네 살이었다.

고향으로 돌아와도 실감이 나지 않았다. 하도 죽음을 많이 목격한 탓에 한동안 피흘리고 죽는 동료들이 눈앞에 아물거렸다. 눈의 살기가 풀어지는데 한참 걸렸다. 차차 시간이 지나면서 가업(家業)이던 농사를 지으며 남의 일이건 내 집 일이건 닥치는 대로 일을 하였다. 전쟁으로 물자가 귀하고 경제 활동이 없어 몹시 곤궁하던 때였다. 남의 집 모를 심어주어도 그저 세끼 밥이나 얻어먹는 게 고작이었다. 아니면 서로 일을 품앗이로 하였다. 무슨 일거리가 있고 놀이가 있고 꿈이 있었겠는가. 밤이면 짚신을 삼아 낮에 신었고 먼 산에 나무를 하러 나다니는 것도 싫지 않았다.

 

▲ 젊은 시절 친구들과     © 놀뫼신문

 

트럭타고 결혼, 목수가 되다.

혼인이 늦어졌다. 스물여덟에 익산 왕궁의 어여쁜 처녀 이용례를 신부로 맞아들였다. 신부는 스물네 살이었다. 이종 사촌이 신부가 살던 이웃에 살았으므로 중신을 선 것이다. 전후(戰後) 온 나라가 다 가난하던 때라 약혼사진도 못 찍고 구식 혼례 사진도 못 찍었다. 어쩜 사진과 나와는 인연이 없는지도 모른다. 군대 시절 사진도 딱 한 장뿐이다. 

처가에서 장가들고 새색시를 트럭에 태워 신혼집으로 데려왔다. 혹시 거리가 가까웠으면 새색시가 가마라도 탔을지 모르나 왕궁면과 이곳 봉동리와는 산을 몇 개나 넘어야 했다.     어머니와 함께 넷째 형님 내외가 사는 집으로 들어갔다. 그곳에서 오 년을 살면서 애들 남매를 낳았다. 끝내 같이 살 수는 없는 일, 이웃 동내에 집을 얻어 나가 3년을 살았다. 다시  재종형의 부탁으로 형의 집을 돌보아 주며 그 집 농사까지 지었다. 남의 논밭도 갈고 남의 탈곡도 해주고 서울 공사판으로 돈벌이를 가기도 했다. 재종형이 들어오면서 그 집을 3년 만에 내주고 또 남의 집 살이를 하였다.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새끼로 가마니를 짰다. 여름  밤엔 11시까지 새끼줄을 꼬았다. 

타고난 손재주에 눈썰미가 있어 작은 목수 일을 시작하게 되었다. 언제 누구를 따라 다니며 배운 것도 아니었다. 농사는 주로 아내가 지으며 나는 동네사람 집을 지어주었다. 차차 대목(大木)이 되어 십 여 채 넘게 한옥을 지었나 보다. 아직도 그 집들이 동네 여기 저기 남아 있어 옛말을 하게 된다.

 

▲ 부인 수연(환갑) 가족사진     © 놀뫼신문

 

자식 넷 학비 대면서 휜 허리

그 사이 둘을 더 낳아 2남 2녀가 되었다. 나도 쉰 살이 넘었다. 큰 아들이 대전고등학교를 나와 충남대 기계공학과를 다니게 되었다. 실은 의과대학을 희망했지만 부모와 동생들 생각을 하여 마음을 접었다. 당시 우리나라는 산업화가 숨 가쁘게 이루어지던 때였다. 공과대학 졸업자는 일순위로 취업이 보장되던 때였다.

 아이들 학비 생각만 하면 잠이 오지 않았다. 우리 내외는 딸기 농사를 시작했다. 비닐이 보급되지 않았던 때라 노지 딸기 농사를 지었다. 오 년 후 하우스 딸기 농사를 지으며 안팎이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그렇게 일해도 아이들 학비에 허리가 휘었다. 아이들 넷이 대학서부터 중학생까지 눈뜨면 돈 쓸 일뿐이었다. 아내는 나보다 더 열심히 일했다. 논농사, 밭농사, 딸기농사를 겸하며 나는 나대로 목수 일 틈틈이 아내를 도왔다.

큰 아들은 산업 현장과는 거리가 먼 교직을 택했다. 천상 선비 체질인 걸 알게 되었다. 교직 과목을 이수한 덕에 수학과목 선생이 되어 서울서 학생들에게 수학을 가르치게 되었다. 작은 아들은 아주대 경영학과를 나와 삼성생명에 취업하여 현재 쉰둘의 부장이다. 딸 둘은 고등학교 졸업 후 결혼하여 대전에서 잘 살고 있다. 아이들은 무탈하게 장성하였고 결혼 때문에 우리 내외에게 섭섭하거나 괴로움을 준 일이 없다. 순조롭게 결혼을 마치고 아들딸 낳고 잘 산다. 우리 내외 역시 서로 간에 큰소리 한 번 안 내고 여기까지 왔다.

 

▲ 참전용사모임 계룡대 방문     © 놀뫼신문

 

게이트볼로 여유 챙기며

숨 가쁘게 살아낸 인생이었다. 숨 좀 돌릴 만 하니까 병마가 찾아 왔다. 간에 병변이 생겼다. 이곳저곳 병원을 거쳐 전주 예수 병원에서 간 수술을 받았다. 혈관을 통해 기생충 알이 들어갔단다. 좀 지나 허리 디스크 수술을 받았다. 보행에 불편이 왔다. 얼마 지나자 뇌일혈로 쓰러졌다. 서울 삼성병원에서 경동맥에 스탠스 시술과 한쪽은 확장 수술도 받았다. 담배를 너무 늦게 끊은 탓인가, 술은 과음한 일도 없다. 그저 오로지 일만하다 여기까지 왔는데…….

잠시 허무가 찾아왔다. 

마음과 몸에 숨을 돌리기 위해 일흔 직전에 게이트볼을 시작했다. 그리고 강산이 두 번 바뀌는 세월이 흘렀다. 점심 들고 게이트볼 장에 도착하면 네 시에 집에 들어온다. 오토바이로 칠팔 분 거리이다. 이제 후배들만 남았다. 내가 제일 연장자가 된 것이다. 몇 차례 지방 대회에 출전하기도 했다.

그저 게이트볼 장에 가면 세상만사 잊고 오로지 운동에만 전념하다 돌아온다. 즐겁다. 물론 내기 시합도 하고 친목 회식 자리도 있어 사람 만나는 재미가 나이와 비례하나보다.

그 시절 농협노인대학을 수료하면서 노인의 삶에 대해 많은 강의를 들었고 견학도 다녔다. 비로소 세상에 한발짝 나온 셈이었다. 밖으로 나오는 시간만큼 노동이 줄었고 따라서 내 인생이 그만큼 풍요로워지기 시작했다. 

그 무렵 국민 소득이 3 만 불에 육박하면서 마을 사람들도 시설재배 덕택으로 잘 살게 되었다. 그럼에도 게이트볼이라도 치는 이는 드물었다. 일밖에 몰랐다. 그때 노인회장을 2 년 맡으면서 같이 늙어가는 동내 사람들과 관광도 함께하고 잔치도 벌리며, 마을 노인들의 삶에 적극 동참했다. 노인의 날 행사에도 참여하고 병문안도 앞장섰다.

 

 

부자가 합심하여 지은 아들네집

내가 병이 나면 아내가 밤낮으로 수발하여 주었지만 아내가 병이 나면 내가 도와줄 게 별반 없었다. 삼거리 병원까지야 오토바이에 태워 다녀올 수 있지만 큰 병이 나면 속수무책이었다. 아내가 무리하게 남의 일을 해 주더니 무릎에 통증이 심해 갔다. 허리는 점차 꼬부라져 갔다. 또 위장장애로 읍내 병원 내시경 검사 결과 초기 위암 판정을 받았다. 

큰 아들이 서울서 내려와 서울 큰 병원을 함께 다녔다. 며느리도 자신의 일이 있으므로 병원을 함께할 수 없는 처지였다. 휴가를 내는 것도 한 두 번이지 학생들 수업때문에 더 이상은 힘들었을 것이다. 정년 앞두고 명예 퇴직했다. 아내가 수술받고 퇴원할 때까지 큰 아들이 수발했다. 퇴원 후 아들네 집에서 얼마 머물렀다. 이곳 집에 내려 온 뒤도 한 달에 한 번 검사를 받아야 했기 때문에 아예 함께 내려 왔다. 아들은 우리들 끼니까지 해결해 줄 결심으로 내려 온 모양이다.

설상가상 아내는 서울서 무릎 수술을 받느라 또 병원 신세를 오래졌다. 아들은 병상을 지켜 주었다. 퇴원 후 아내는 아무 일도 할 수 없었다.

어느 날, 아들은 우리 집 빈터에 자기가 와서 거처할 집을 짓겠다고 했다. 자신도 노후에 고향 집에서 지내고 싶단다. 이 십 여 평 집을 조립식으로 지었다. 물론 우리 부자가 합심해서 지었다. 그 안에 화장실도 싱크대도 설치했다. 그사이 아내 위장도 나아가고 무릎도 아물었다. 아내는 예전보다 통증이 좀 덜 하지만 여전히 통증의학과를 다니긴 한다. 

그 사이 아들은 며느리와 유럽 여행을 마치고  봄이 오자, 잘 조성해 놓은 마당에 장미며 나무며 꽃모종을 사다 심었다. 아울러 봄 농사 준비를 해 주고 제 집으로 돌아갔다.

 

▲ 2019년4월7일 생일 제주도 방문     © 놀뫼신문

 

오토바이 뒤에 아내 태우는 행복 

아내도 건강이 차차 좋아져서 올 봄 유채꽃이 한창일 무렵 제주에서 내 생일 잔치를 했다. 아들 딸 손주 모두 모여 펜션에서 이틀 호사를 누렸다. 아직은 내가 오토바이 뒷자리에 아내를 태우고 삼거리를 넘나든다. 나는 지금껏 아내를 뒤에 태우고 조심스럽게 오토바이를 탈 때가 제일 행복하다. 이 호사로 늙어서의 삶이 젊던 시절보다 훨씬 행복하다. 

 내 인생에서 몸은 아픈 적이 있었지만 굴곡은 적은 편이었다. 전쟁터에서 죽을 고비를 수도 없이 겪었지만 지금 전쟁 유공자로 대접을 받으니 그 또한 호사이다. 그 대신 나는 한 눈 한 번 팔지 않고 가족을 위해 있는 힘 다해서 살았다.

이 누구의 덕일까, 아마 아내와 아이들 덕일 것이다.

 

안정혜 시민기자


 

한군 안 팔고 곧바르되 유연한 삶의 귀감

88세 노익장 저희 아버님께서는 아직도 녹슬지 않은 기억력과 젊은 세대를 이해하시는 유연한 사고를 가지고 사십니다. 기성세대의 완고함보다는 열린 마음을 지니고 사시며 변화에 적응하고 대처하십니다. 

 또한 매우 가정적으로 화목한 가정과 소박한 행복을 추구하며 가장으로서 조금의 일탈도 없이 열심히 살아 오셨습니다. 계획적인 삶을 사시면서 소박하게 사셨습니다.

 아무 것도 가진 것 없이 시작했던 신혼시절부터 지금껏 부모의 책임감에 충실하셨습니다.  일을 한 모든 것을 자식 교육에 썼습니다. 어깨너머로 배운 지식으로 집을 짓는 목수 일도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지금껏 자식 며느리 사위 손주들에게 아낌없는 사랑을 퍼 주십니다. 아버지 존경합니다. 사랑합니다.

2019년 6월 아들 성수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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