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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노트] 광석면 천동리 이영순(李英順)님 "내 일기, 책으로 내주겠다는 자식들"
기사입력  2019/06/05 [14:59]   놀뫼신문
▲ 광석면 천동리 이영순님     © 놀뫼신문



   이영순(李英順)   

  • 1943년 성덕리 출생(77세, 호적76세)
  • 1950년 은진초등학교 입학
  • 1956년 은진초등학교 졸업
  • 1962년 20세에 중매로 결혼
  • 1964년 첫 아이 출산 후 2년 터울로 5남매 둠

 

나는 이영순(李英順). 오얏 이, 꽃부리 영, 순할 순을 쓰는 이영순인데 호적에는 1944년 3월 1일 은진면 성덕리에서 출생한 것으로 되어 있어. 그때는 그런 사람들이 많았어. 호적을 1년 늦게 신고한 거지. 실제로는 올해로 77살인데 호적으로 하면 76세가 되네. 6남매 중에서 막내로 태어났지. 우리 형제가 딸 둘에 아들이 넷이었는데 내가 막내라서 어려서부터 올케들하고 같이 살았어. 그래서 친정에서는 손에 물 묻힐 일이 없었지. 이쁨을 많이 받았어. 

 

▲ 2006년 가족여행     © 놀뫼신문

 

 

▲ 2010년 평창 가족여행     © 놀뫼신문

 

 

▲ 2013년 평창 가족여행     © 놀뫼신문

 

10리길 걸어 댕긴 은진국민핵교 

 

친정집이 지금 성덕초등학교하고 가까웠는데 그때는 성덕초등학교가 없었거든. 그래서 나는 은진국민핵교로 다녔지. 집에서 10리쯤 되는 길을 걸어서 다녔어. 지금은 길이라도 좋지만, 그때는 좋지 않았어. 그래도 걸어서 학교까지 가는 걸 당연하게 생각했지. 집안 형편이 어렵지는 않았는데 아버지가 나는 여자라고 집에서 멀리 벗어나는 것은 안 된다고 조카들은 다 중학교를 보내줬어도 나는 중학교에 보내주지 않으셨어. 초등학교를 졸업하자 대신 수놓고 바느질을 배우러 다니라고 그러셨지. 그렇게 학교하고는 멀어졌지.

오빠가 넷이나 되니까 조카들이 많았어. 나이도 내 또래들이 많았어. 그래서 나 어렸을 때는 같이 어울려서 많이 놀았지. ‘삔치기’라고 동그라미를 그려놓고 삔을 톡 쳐서 동그라미 안에 들어가는 사람이 삔을 가져가는 놀이였어. 돌을 주워다가 공기놀이도 하고 눈싸움도 하고 같이 어울려 다니며 노는 것이 재미있었지. 

 

장조카가 중매를 섰어

 

그렇게 은진에서 내내 살다가 광석으로 시집을 오게 되었어. 성덕에서 장조카가 교회를 열심히 다니면서 신앙생활을 했었는데 그 교회 목사님이 광석의 교회로 옮기셨대. 그래서 장조카가 여기 광석 교회에 목사님을 뵈러 왔는데 한 사람이 새벽기도를 한 번도 안 빠지고 열심히 나오더라네. 조카가 가만히 눈여겨보니 고모부 삼으면 좋겠다고는 생각이 들더래. 그렇게 점찍어 놓고 아버지한테 말씀을 드린 거지. 

우리 아버지는 ‘장조카가 추천하는 사람이니 믿을 만하다’고 생각하셨지. 장조카 말이라면 무조건 따르셨거든. 아버지는 내가 18살에 어머니가 돌아가셨기 때문에 당신마저 안 계시면 내가 결혼하기 어려워질까 봐 결혼을 서둘러야겠다는 마음도 있으셨던 거지. 하루는 아버지가 “신랑감을 한 번 만나고 오셨다” 하시면서 “지차(둘째)라서 너 하나는 믿고 살 수 있을 것 같으니까 올케언니에게 바느질을 배워서 시집갈 준비를 해라” 그렇게 말씀하셨지. 그 뒤에 그 사람이 약혼식을 한다고 집에 한 번 왔어. 딱 한 번! 목사님하고 지금 남편하고 가족과 교인들 몇 명이 집에 왔는데 나는 신랑 될 사람 이름도 모르고 만났지. 너무 부끄러우니까 얼굴도 못 들어서 신랑 얼굴도 제대로 못 봤어. 신랑 측이 쭉 앉고 우리 쪽이 맞은편에 쭉 앉아서 첫 만남을 했지. 그게 약혼식이었어. 

약혼식을 끝내고 사진을 찍는다고 논산까지 걸어서 나왔지. 목사님이 귀띔을 해주셨는지 몰라도 나온 김에 같이 영화도 본 기억이 나네. 근데 이상하게 무슨 영화였는지, 그때 신랑 얼굴이 어땠는지는 하나도 기억 안 나. 약혼식 사진도 찍었으니 그 사진들도 어딘가 있었을 건데 지금은 그 사진들을 하나도 못 찾겠어. 그리고 6개월 뒤 결혼을 했어. 그때가 내가 20살 무렵이었어.

 

첫날밤 안 들어온 신랑

 

결혼식은 친정집 마당에서 했지. 차양을 치고 서양의 웨딩드레스를 흉내낸다고 그랬는지 올케가 바느질해준 하얀 치마저고리를 입었지. 연지곤지도 찍고 화장도 했는데 누가 해줬는지는 생각 안 나. 동짓달에 결혼식을 했는데 가슴에 꽃다발을 든 기억이 나네. 결혼식이 동짓달이었으니까 진짜 꽃은 없었을 테고 아마 종이로 만든 꽃이었겠지. 

결혼식이 끝나고 그날은 친정집에서 잤어. 신랑은 친구들이 와서 같이 술을 먹고 어울리느라고 신방에 들어오지도 않았어. 새벽이 되니 올케들이 혼자 자는 나를 깨워서 “시댁으로 가야 하니 단장을 해야 한다”고 했지. 그래서 새벽부터 씻고 화장을 했어. 신랑이 빌려왔는지 가마가 아니라 지프차를 타고 여기로 왔지. 생전 처음 차를 타보니 멀미가 어찌나 나던지 괴롭던 기억이 지금도 나네. 그렇게 결혼을 하고 아버지는 2년 후에 돌아가셨지. 

 

시부모보다 미웠던 시누들

 

지금 사는 이 집이 내가 시집와서 살기 시작한 집이지. 한 번도 이사해 본 적이 없어. 남편은 형제가 손위로 시누가 셋이고 아들 둘 중에 막내였지만, 실제로는 맏아들 역할을 해야 하는 상황이었어. 아버지가 둘째라서 시집살이는 하지 않을 거로 생각하셨던 것이 틀린 거지. 친정어머니가 맏며느리셔서 시집살이를 엄청 하셨거든. 그래서 아버지는 내가 맏며느리로 만큼은 시집가지 않기를 바라셨던 거였어. 그래서 둘째라 괜찮겠거니 했는데 내가 시부모님을 모시고 살았지. 

시부모님보다 나는 시누들 시집살이에 힘이 들었지. 그때는 시누들이 미웠지만 “밉다”는 말도 하지 못하고 꾹꾹 참고 살았지. 지금은 시누 두 분은 돌아가시고 한 분만 살아 계시는데 가끔 전화하면 나한테 “고맙다”고 하셔. 그러니 또 옛일이 다 잊히대. 그게 가족인가 봐. 

 

▲ 2009년 에버랜드에서     © 놀뫼신문

 

 

▲ 큰아들내외와 함께 한 중국여행     © 놀뫼신문

 

 

▲ 언제봐도 예쁜 손주들     © 놀뫼신문

 

수차 돌리던 남편 따라

 

남편이 장남 노릇만 한 것이 아니라, 여기가 장손 집이라 집안의 큰일은 죄다 맡아서 해야 했어. 아무리 힘들고 친정이 가까워도 아버지 생전에는 자주 가보지를 못했어. 친정어머니도 돌아가셔서 안 계셨고 아버지가 “여자는 시집 가면 죽어도 그 집 귀신이 되어야 한다”고 엄하게 말씀하셨거든. 그래서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서야 마음이 힘들 때 더러 친정엘 갔지. 조카들하고는 워낙 친하게 지냈으니까. 시댁에 농사가 많지는 않았지만, 농사일은 모두 남편이 다 맡아서 했지. 논에 물 대려면 수차를 돌려야 했는데 하나부터 열까지 죄다 남편이 했어. 남편이 일하니 당연히 나도 따라서 일을 많이 했지. 바깥일뿐만 아니라 장손집이라 그런지 집안 어르신들이 집에 와서 오랫동안 머물 때가 많으셨는데 그 수발도 다 내가 들었지. 그때 내가 일복을 타고났다고 생각했어. 

 

훗배 배앓이에 부엌바닥 밟기?

 

결혼하고 바로 아이가 생기지를 않더라고. 나도 걱정이 되었지만, 시어머니도 마음이 쓰이셨는지 한약도 지어다 주시면서 자손을 기다리셨어. 그러다 결혼 2년 만에 첫 아이를 낳았어. 딸을 낳았지만, 그래도 다행인 것이 시부모께선 실망하진 않으셨어. 하지만 애를 낳고도 지금처럼 몸조리는 꿈도 못 꿨지. 애를 낳으면 3일만 쉬고 다시 일해야 했어. 당연히 산파를 부른 것도 아니고 그냥 집에서 애를 낳았지. 

그렇게 첫애를 낳고 2년 터울로 아이를 낳았는데 셋째딸을 낳을 때는 일꾼들이 “애 낳게 생겼다고 얼른 집에 가라”고 해서 집에 왔더니 바로 애를 낳았어. 애를 낳고 나서 훗배 아프다고 배앓이를 하곤 했었는데, 그때 시어머니는 부엌 바닥을 밟으면 배앓이가 없어진다고 부엌일을 시키셨어. 시키면 시키는 대로 일을 할 수밖에 없었지. 그렇게 모두 5남매를 뒀어. 그리고 자식들 공부시킨다고 엄청 열심히 살았어. 애들도 지금 가끔 물어. “엄마는 무슨 맘을 먹고 우리 공부를 열심히 시켰냐?”고.

 

머리에 채소 이고가 자릿세 내고

 

자식들이 다섯이니 공부시키려면 돈이 된다고 하는 것은 무조건 열심히 했지. 잠도 줄여가면서 했어. 농사만으로는 돈이 안 되니 채소장사를 했었는데 애들도 착한 것이 고등학교 때까지는 집에서 다니니깐 새벽까지 채소를 다듬어 줬어. 그러면 논산시장까지 그걸 팔러 가는데 남편은 자전거에 싣고 가고 나는 걸어서 머리에 이고 갔지. 가게가 있는 것도 아니라서 자릿세를 주고 길에다 펴고 팔았어. 지금이야 화지시장 가면 지붕도 잘 되어있고 하지만, 예전에는 그런 시설이 없을 때라서 비가 오면 할 수 없이 쉬고 그랬지. 

애들도 부모의 맘을 아는지 그때는 교대가 학비가 싸서 부모 걱정 던다고 딸들은 학교를 교대로 갔어. 남편도 자식 사랑이 유별나서 남편은 애들이 해달라고 하는 것은 다 해주고 그랬지. 딸이 셋이니까 애들이 자기 전에 벽에다 <아빠, 내일은 머리 감아요>라고 써서 쪽지를 붙여 놓으면 남편은 커다란 검은 솥에다가 더운물을 하나 끓여 놨어. 그럼 애들이 그 물을 가지고 머리를 감고 가곤 했지. 학교에 늦을라치면 남편이 자전거 태워서 버스 타는 곳까지 태워다 주고 그럴 정도로 애들을 이뻐했어. 

 

대나무로 딸기하우스 짓던 시절

 

그러다가 마을에서 딸기 농사를 다 지니까 우리도 뒤늦게 시작을 했지. 지금이야 비닐도 좋고 하지만 그때는 매년 비닐을 갈아줘야 했고 비닐하우스 뼈대도 직접 만들어야 했었어. 남편하고 나하고 둘이서 집 뒤에 있는 대밭의 대나무를 베어다가 비닐하우스를 만들어서 시작했지. 딸기 농사는 열세 달 농사라고 할 정도로 일이 많아. 처음엔 노지 딸기로 시작을 했지만, 지금은 선반 딸기로 농사를 지으니까 힘이 좀 덜 들어. 지금도 농사를 4동을 짓는데 선반 딸기로 하면서부터는 외국인 노동자와 함께 일을 하지. 둘이 하는 게 힘에 부쳐서. 돈은 좀 덜 돼도 이제는 애들이 다 커서 큰돈 들 것이 없으니까 돈 좀 덜 벌 생각하고 같이 일하고 있어. 말이 안 통하니까 손짓과 발짓으로 서로 얘기를 하는데 그래도 일할 만해.

 

▲     © 논산계룡신문



다시 공부하는 지금이 내 두번째 인생

 

그렇게 한평생 일만 하고 살다가 삼 년 전에 처음 논산시에서 하는 ‘한글대학’에 다니게 되었지. 초등학교 졸업하고는 공부하고 상관없이 살았는데 다시 공부하니까 얼마나 좋은지 몰라. 지금은 마을회관에서 ‘한글대학’ 말고도 여러 가지를 배우지만, 내가 다른 것에는 재주가 없어서 그런 것인지는 몰라도 이 한글 수업만 기다려져. 오늘 끝나고 나면 또 언제 선생님이 오시나 하는 생각이 들고. 

일기도 잘 쓰는지 못쓰는지 모르지만, 그냥 매일 쓰고 있어. 애들이 보고 계속 쓰면 지들이 책으로 내주겠다고 하지만 내가 ‘한글대학’이 아니면 이런 것을 시작이나 할 수 있었겠어. 올해로 삼 년째인데 난 지금도 너무 재미있어. 이제야 내 인생이 다시 시작된 것 같아. 내가 남편도 아직 건강하고 나도 건강해서 그것도 복이지만, 이렇게 늦은 나이에 다시 공부할 수 있는 것도 복인 것 같아. 젊었을 때는 내 인생에 일복만 있는 줄 알았는데 80이 다 되도록 살아보니 이런 복도 있는 것을 이제 안 거지. 그래서 나는 지금이 좋아.

 


 

 

내가 만난 이영순 님

 

첫 만남을 위해 예쁜 방석까지 준비해서 내어주시는 이영순 님은 시종일관 긍정적이고 밝으신 분이시다. 너무 앞만 보고 사느라 이제야 뒤돌아 다시 기억을 떠올리니 “생각이 나지 않는 것이 너무 많다”고 말씀하셨지만 그렇게 열심히 사셨기 때문에 “지금이 좋다”고 말씀하실 수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매일 쓴 일기장을 꺼내서 보여주실 때 ‘누가 이리도 성실히 할 수 있을까’ 싶은 생각이 들었고, 일기장에 쓰여 있는 단정한 글씨들이 그대로 이영순 님을 보여주는 것만 같았다. 앞으로 더 행복할 수 있게 이영순 님의 제2의 인생을 응원한다. 

 

- 홍미경 시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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