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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찰서위치 결정기준은 역사성과 민(民)입장
-강경의 역사는 계속되어야 한다-
기사입력  2018/10/09 [17:13]   놀뫼신문

 

논산경찰서 앞 '경찰 6·25 격전지' 비석

 

논산경찰서 이전 문제로 난리가 아니다. 작년에는 강경읍내가 온통 현수막으로 뒤덮이더니, 올해는 부적면에 펄럭이며 삭발소식이 들려온다.  


68년전 동족상잔의 전쟁 6·25가 터졌다. 그 당시 “강경을 사수하라”는 상부의 명령 한마디에 정성봉 서장 외 82위 경찰관들은 강경경찰서 전투에서 장렬하게 산화하였다.

우국충정의 마음으로 목숨을 초개 같이 버린 83위 순국경찰관의 넋을 기리기 위해 세워진 「경찰 6·25 격전지」 비석 앞에서 지금 우리 논산은 분열하고 있다.  

한쪽은 머리를 삭발하고, 한쪽은 피켓을 들고 있다. 한쪽은 행정상 기능집단화를 위하여, 한쪽은 출퇴근의 편의를 위하여 목청을 높이고 있다.

지역이기주의가 정면으로 충돌하는 분위기다. 이런 상황에서 ‘답’은 어디에 있는가? 항상 답은 현장에 있다.

‘논산경찰서 신축부지 선정 TF팀’의 검토 보고서를 중심으로 논산경찰서 이전 현황에 대하여 사실 관계를 꼼꼼히 검토해 본다.

 

◾지역정치권 및 논산·계룡시 입장

지역 정치권 및 논산시와 계룡시는 논산경찰서 강경 존치에 무게감을 두고 있는 실정이다.

이는 향후 KTX논산훈련소역이 신설될 경우 훈련소 면회객 등의 강경지역 방문이 증가하여 자연적으로 강경지역 치안수요 증가가 예상되고 있으며, 무엇보다도 강경주민들의 경찰서 존치 욕구가 강하고 완고하다.

강경주민들은 3개 청사(경찰서, 법원, 검찰청) 존치가 지역상권 유지 등 생계에 직결되어 있다. 이런 연계성은 강경근대문화역사성까지로 연결되어 있어 경찰서 청사를 타지역 이전 시 지속적인 분쟁이 예상된다.

이에 대한 논산시와 계룡시의 입장 또한 첨예하다. 논산시는 강경읍 산양리 일대에 경찰서 부지가 확정되면, 인근 2만여평을 추가 매입하여 법원과 검찰청도 유치하겠다는 입장이다. 한편 최홍묵 계룡시장은 2020년 이케아가 입점하면서 계룡시 인구가 6만이 넘을 것으로 예상되어 충남도 및 국회의원과 협력하여 계룡경찰서 신설을 추진하고자 한다. (계룡시청 옆 경찰서 부지, 현재 임시 축구장으로 활용 중)

 

논산경찰서직원 입장 vs. 시민 반응

경찰서 신축부지 관련 의견 수렴 결과, 총 대상자 263명 중 180명(68%)이 응답하였다.

응답자 180명 중 '강경 이전을 찬성한다'에 응답이 19.4%(35명)이며, '부적 이전을 찬성한다'에 응답이 70%(126명)로 나타났으며, 기타 의견이 10.5%(19명)으로 조사되었다.

한편, 충남지방경찰청은 논산경찰서 신축 부지로 논의 중인 부적면과 강경읍 두 곳 부지에 대하여 종합검토 결과 두 후보지 모두 사업추진에 결정적인 제약사항이 없는 것으로 판단하고 있다.

시민들의 여론은 어떠한가? 두 지역과 무관한 시민의 입장에서는, 무엇보다 조기 부지 선정으로 쾌적한 시설의 근무환경 개선이 필요하다는 의견이 다수였다.  일반시민이 평생 한두 번 갈까말까 하는 경찰서의 위치가 뭐 그리 중요한가 하는 반응도 적지않다. 관공서는 공무원의 편의보다는 주민들이 원하는 곳에 위치해야 한다는 의견이 지배적이었는데, “관(官)이 민(民)을 이길 수 없다”는 것이다.

 

신축 부지 선정에 따른 비교 현황

 

[강경경찰서의 묻혀진 비극사]

신토불이 강경역사는 그 자리 남아 있어야

 

1951년 7월 10일 오전 11시 부슬비가 내리는 가운데 강경 공설운동장에서는 1년 전인 1950년 7월 17일~18일 양일간에 걸쳐 강경지구에서 북한군과 전투중 장열하게 산화한 강경경찰서장 정성봉 경무관 외 82주(柱)에 대한 합동위령제가 거행되었다.

이날 합동위령제에서는 강경경찰서장 이세환 총경의 제문낭독에 이어 도지사, 경찰국장, 국회의원을 비롯한 각 사회단체 대표의 조사가 있은 후 각계 인사의 분향과 천지를 진동하는 조포성이 장내를 엄숙하게 하였다.

1951년 7월 15일자 대전일보 기사,

 

 강경전투

1950년 7월 15일 미군으로부터 후퇴명령을 받은 강경경찰서장 정성봉 총경 이하 경찰관 220명은 화물차 여러 대에 무전기, 무기, 탄약 및 식량과 보급품을 나눠 실었다. 망성, 전주를 거쳐 임실까지 후퇴하며 작전 지시를 기다리다가 16일 전주로 이동하여 전주초등학교 교정에서 1박을 하였다.

당시 육군본부는 호남지역 방어를 위해 7월 17일 서해안지구 전투사령부(사령관 신태영 소장)를 편성하였으나 병력과 장비가 유명무실하여 방어계획을 수립하지 못하였다. 다만 새로 편성된 제7사단 예하의 독립대대(대대장 김병화 소령) 300여명과 경찰 700여 명이 강경 방면으로 진출하였다.

이와는 별도로 강경경찰서 병력 정성봉 총경 이하 220명은 전주에 주둔중인 육군지휘부로부터 ‘강경을 사수해야 한다’는 작전지시를 받고 3개 중대로 나누어 7월 16일 17:00시 강경으로 진격하여 강행군 5시간 만에 전북과 도계인 강경읍 채운리에 도착하였다.

도착 즉시 적정을 탐색하여 주력부대 없이 지방 좌익분자들에 의해 점거되어 있는 강경경찰서를 탈환하였다.

이어 제1중대는 경찰서 자체경비를 제2중대는 강경 채운산을 중심으로 외곽경비를 제3중대는 강경읍내 경비를 각각 분담하고 수색하여 배회 중인 지방공비 5명을 검거하였다.

7월 17일 13:00시에 강경읍 홍교리 성동교에서 정체불명의 무장괴한 10명을 발견하였다. 이들은 아군(대한유격대원)을 가장한 북한군 정찰대원이었고, 이들의 유인전술에 말려 대대 규모 이상의 북한군 주력부대 천여 명에게 포위되고 말았다.

북한군은 17일 18:00시 강경읍사무소 옥상에 거치한 중기관총으로 경찰서에 집중사격을 가하는 것을 신호로 강경 외곽 병력과 더불어 사방에서 일제히 공격했다.

특히 소화교를 사이에 두고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고 실탄이 바닥날 때까지 전투가 이어졌다.

경찰서에서 마지막까지 전투를 벌이며 퇴로를 뚫기 위한 육박전까지 감행하였다. 그러나 18일 11:30 혈전 18시간 만에 경찰서장 정성봉 총경 외 82명이 장렬하게 전사하였다. 이로써 강경은 북한군 제6사단에 의해 점령되었다.

강경경찰서 전투로 인하여 북한군 주력부대의 전남북 침공이 5일 이상 지연되었으며, 적군의 이리 황등 작전과 낙동강 도하 작전도 차질을 빚게 되었다.

(호국충남경찰사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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